내 가게, 하고 싶다!
김성현.김지현 지음 / 나무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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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참 전에, 카페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커피와 고즈넉한 공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흥미도 없고 스트레스만 왕창 쌓일 것 같은 다른 일보다는 카페의 오너가 되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한 동네에도 엄청나게 들어서 있는 각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들을 보면,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이 가게를 내고 그것을 지속해 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어쩌면 그 생각을 잠정적으로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 지나며 여러가지로 약해지고 겁도 많아진 나는 내 삶에 대해 뭔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과, 그것이 스트레스를 좀 덜 받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딱 두 가지밖에 바라지 않게 되어 버렸다. 물론 카페의 오너가 된다고 해서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영 실패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카페를 하고 싶다는 그 꿈은, 아직도 내게 있어서 일종의 로망으로 존재하고 있다.  

얼마 전에 출간된 김성현, 김지현의 <내 가게, 하고 싶다>는 실제로 자기 가게를 갖고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창업에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책에 소개된 가게들의 업종도 품목도 형태도 참 다양하다. 오너의 관심사나 특기에 따라 컵푸드, 드립커피, 오니기리, 고양이 인형, 직접 새긴 도장, 단팥죽, 타코, 수작업한 다이어리, 칵테일, 가구 등의 다양한 아이템들을 다루고 있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노점, 트럭, 심지어는 자전거로 영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지나가다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삼청동의 고양이 인형 가게나 명동 한복판에서 레깅스를 파는 노점도 있었다. 이 책의 좋은 점이, 이러한 가게들을 소개하면서 창업을 하기까지의 준비 기간, 창업하는데 들었던 비용, 그 자금을 조달한 방법, 하루 평균 손님 수 등을 앞부분에 적어두고 있다는 점이다. 직접 창업을 해보거나, 이미 창업한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것들인데 이런 식으로 업종, 형태에 따라 대략의 필요한 시간과 자금 등을 알 수 있게 한 점은 앞으로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듯 하다.  

또한 어떤 계기로 그 가게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어떤 점이 힘들었고, 앞으로의 꿈은 무엇이며, 창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이 있는지 등에 대한 오너들의 솔직한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그리고 디스플레이나 위치 선정, 인테리어 등에 대한 그들의 팁은 저절로 고개가 끄덕이게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템을 택하는 것이 즐겁게 장사할 수 있는 비결이며,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오래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맞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가득찬 가게들 역시 그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를 경탄하게 한다. 개조한 트럭으로 영업하며 집 앞까지 찾아가는 놀라운 핸드메이드 가구점 '트럭퍼니쳐', 대부분의 커피전문점 등에서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파는데, 우유가 안 섞인 보다 깔끔한 맛의 드립커피를 찾는 고객들을 겨냥한 트럭 카페 '김약국', 파스타 같은 이탈리아 요리는 레스토랑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깬 이탈리아 요리 전문 포장마차 '소년상회', 작가인 오너가 책을 쓰는 동안은 무인 카페로 운영하는 부암동 카페 '유쾌한 황당', 칵테일도 테이크아웃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봉지 칵테일을 파는 가게 '비닐' 등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여기 실린 가게들을 전부 탐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또 다른 것은, 자기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오히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마냥 즐겁고 좋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너들의 스케줄 표를 보니, 전혀 자기 시간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잠도 매일 3시간 정도밖에 못 자는 경우가 허다하고 하루에 12시간 혹은 그 이상을 가게에 붙어 있어야 하고 그 외의 시간에도 개점 준비나 재료 구입, 도매상에서 물건 떼어오는 일, 수제 아이템인 경우 직접 공방에서 제작하는 등 실제로 고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시간 외에도 할 일이 많다. 쉬는 날도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노점 같은 경우에는 추위와 더위 등의 외부적 요인 역시 감안해야 한다. 이래저래 강철같은 체력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일매일 장사하러 나오는 끈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에 대한 일종의 열정도 중요하지만, 체력이나 끈기 등의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체력이 바닥인데다가 툭하면 울증에 빠져버리는 나로써는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아이템들과 다양한 가게, 노점들, 그리고 창의력과 열정이 넘치는 오너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실제로 창업에 관련된 조언들을 들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카페의 오너가 된다는 것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고있던 내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고 자본금도 자본금이겠지만(이 책에 등장하는 가게들은 엄청나게 많은 자본금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의외로 소자본으로도 창업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튼튼한 체력과 끈기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준 점이 나로서는 가장 고맙게 느껴진다. 내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생각이나 그 어떤 몽상보다도, 체력과 끈기를 기르는 일이 아닐까. 꼭 창업을 하지 않더라도, 공부를 하거나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두 가지는 참 중요하니 말이다. 또한 이 책에 실린 가게들을 하나씩 탐방하면서 향 좋은 커피를 마시고, 레어한 아이템들을 구경하고, 트럭을 개조한 노점에서 단팥죽이나 타코 등을 먹으며, 삶의 어떤 즐거움을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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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아줌마 약한 대한민국 - 대한민국 아줌마 리얼 생존 분투기
김현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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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나, 여성노동자>라는 꽤 두꺼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피복업체, 공장, 마트 등에서 일하는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의 '자기 이야기'를 실은 책인데 그것을 보고 '아줌마'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동안 '아줌마' 하면 촌스러운 뽀글뽀글 파마에, 우악스럽고 거칠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공공장소에서 질서도 안 지키는 등,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여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더라도 저렇게 추한 꼴 따위는 절대 안 보일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다분히 경멸적인 생각을 갖곤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아내이고 어머니임이 분명한 주부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접하면서, 항상 가장 작은 자의 입장에서 연대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한 나로서는 점점 갈수록 그녀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부드러워지게 되었다.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김현미의 <강한 아줌마, 약한 대한민국>은, 그러한 '아줌마'들의 고단한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지역구에서 시민들과 여러 가지 경로로 만나는 중, 주부 노동자들과 만나게 되었고 얘기를 하다 보니 또래 여성으로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마트 캐셔, 식당 종업원,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방문판매 사원, 택시기사 등 여러 직종의 아줌마들을 만나며, 같이 등산도 하고 매운탕도 먹고, 그러면서 그녀들의 신산(辛酸)하고 팍팍한 노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 12시간 혹은 그 이상의 힘겨운 노동을 해도 한 달 수입 100만원을 넘기기가 힘든 혹독한 현실을 토로하는 이야기들은 읽으면서도 참 마음이 아파진다.  

그녀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계기는 각양각색이다. 사기를 당하고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서 시름시름 앓는 남편을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요양보호사와 마트 일을 병행하다가 끝내 뇌경색으로 쓰러진 영숙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억척같이 돈을 벌기 위해서 새벽에는 농사를 짓고, 낮에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다가 지금은 트럭을 가지고 다니며 고물 수거 일을 하는 찬숙씨, 집세를 충당하기 위해 마트 캐셔가 되어 하루 종일 꼬박 서서 바코드를 찍는 미화씨, 남자 기사들도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장시간의 택시 운전을 거뜬히 해내는 국희씨, 남편은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자신은 암에 걸리고 재발하기를 반복하면서도 대형마트에서 죽어라 일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송반장, 정수기가 고장났는데 못 고쳤으니 엔지니어 올 때까지 무릎꿇고 벌을 서라는 고객까지 만나야 했던 정수기 판매사원 수미씨, 자녀들의 등록금 때문에 급식 조리원으로 일하면서 찜통이며 솥단지를 번쩍번쩍 들어 나르던 종숙언니 등,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혹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렇게 골병들게 일해도, 주부 노동자들이 벌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간신히 최저임금 수준으로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은 항상 빠듯하고, 아끼고 또 아껴도 살기가 어렵다. 그나마 그곳에서 계속 일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정규직 전환을 막기 위하여 1년 혹은 2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주는 곳이 대부분이라 만년 비정규직으로 있을 수밖에 없고, 계약 만료가 다가오면 여기서 앞으로도 계속 일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된다. 정규직 사원들에게 주어지는 복지 혜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또한 대부분이 12시간 혹은 그 이상의 장시간 노동이기 때문에, 가사나 육아까지 병행해야 하는 주부 노동자들로써는 항상 피로에 절어 있고, 대부분 만성적인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일하다 다치거나 병이 들어도 병원 다녀오기도 쉽지 않다. 내가 그녀들이 하는 일을 단 하루라도 해본다면, 아마 지쳐 나가떨어질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에게조차 체력적으로 힘든 그러한 일들을, 주부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이 배우지 못해서, 혹은 능력이 없어서 그런 장시간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대학을 나와 결혼 전에는 제법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로 인해 생긴 사회적 경력의 공백 때문에 전에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건, 어떤 일을 했건,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다. 장관 부인이라도 계급장 떼고 돈 벌러 나가면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남편이 버는 돈만 갖고도 먹고 살만 한데 용돈 벌러 나오는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 역시 주부 노동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 책에 등장한 그녀들은 사업 실패, 사고 배상금, 가족의 병원비, 나날이 늘어가는 자녀들의 교육비, 감당하기 힘든 집세나 대출 이자, 배우자의 사망 등으로 인해 자신이 가족 전체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입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몸이 아파도, 힘들어도, 심지어는 성희롱과 갖은 인격적 모욕을 당해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정규직 아줌마들의 저임금으로 한국 경제가 굴러가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가 굴러가게 하는 힘은 아줌마와 알바생, 비정규직이 제공하고 있는데, 그 과실은 소수의 자산가와 대기업들이 다 차지하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저렇게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부 노동자들이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얼마를 받으면 행복할 것 같은지 물어보면, 한 달에 이것저것 세금 같은 것 떼고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딱 100만원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하룻밤 술값으로도 부족할 돈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끝내 넘기 힘든 벽인 것이다. 그 돈을 가지고 주부 노동자들은 몸져누운 남편의 병원비를, 아이의 참고서 값을, 한 가족의 식비를 충당할 것이다. 한때는 꿈 많은 소녀였을, 예쁜 처녀였을 '아줌마'들은, 이 혹독한 삶에 짓눌려 점점 억척스럽고 강해진 것이다. 또한 이들은 멀리 있지 않은, 우리가 아침저녁 식당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만나는 우리의 이웃이고 또한 우리의 어머니, 언니, 누나인 것이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노동자의 삶, 그 중에서도 중년 여성 노동자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마음 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은 화두는 그들의 삶의 고단함이었다. 그녀들이 딱히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도 않는, 매일매일의 고단한 삶을 버텨내고 있는 힘은 아마 가족일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그녀들은 내일도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새벽같이 일터에 나갈 것이다. 다시 국회에 들어가면 말로만 민생과 서민을 챙기는 게 아니라 몸과 의지로 챙기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는 저자의 말처럼, 가장 작은 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난한 자들을 짓밟으며 대기업과 부자들에게만 유리한 정책만 밀어붙이는 정치인들은 분노와 환멸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작은 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게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 마지 않는다. 한겨레에서 특집으로 연재했고 책으로도 나온 <4천원 인생>에서, 이러한 가혹하기 짝이 없는 노동 현실에 대한 대안은 '식당 아줌마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공장의 불안정 노동자가 식당의 불안정 노동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시선이 곧 연대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참여했던 기자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연대로 인해 세상은 느리게라도 조금씩 좋은 쪽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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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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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나츠히코(이하 교고쿠도)의 열렬한 팬으로, 그의 번역 출간된 모든 작품을 갖고 있으며 원서로도 몇 권을 소장하고 있다. 작년쯤 서점에서 그의 새로운 작품인 <死ねばいいのに>가 나온 것을 보고,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저 제목이 절망 혹은 낙담한 표정과 말투로 '아아, 그냥 죽어버리면 좋을텐데...'라고 독백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그 당시 나는 울증이 꽤 심했기 때문에 제목 자체에 크게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원서를 구입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의 제목은 사뭇 다르다. <죽지그래>라니, 그렇다. 저 '死ねばいいのに'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타인에게 하는 말이다. 만약 원서의 제목을 문자 그대로 <죽으면 좋을텐데>로 번역했다면, 저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하는 말인지 제목만 보고는 혼동될지도 모른다. 내용을 보면 후자인 것이 명확하지만 말이다.  

<죽지그래>는, 지금까지의 교고쿠도의 작품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 동안에 일명 '교고쿠도 시리즈'로 작가의 분신인 추젠지 아키히코가 주인공인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철서의 우리> 등과 외전격으로 민폐쟁이 에노키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백기도연대 우>, <백기도연대 풍>, 그리고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마타이치와 그 일행이 등장하는 일종의 괴담인 <항설백물어>, <속 항설백물어> 등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민속학과 종교학을 바탕으로 한, 요괴와 같은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죽지그래>는 시대적 배경도 현대인데다가 민속학이나 요괴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꽤 깊은 일종의 철학적 성찰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야기는 아사미라는 순진무구한 이미지의 여성이 살해당하고, 우연한 기회에 그녀와 만났던 청년 와타라이 겐야는 생전의 아사미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아사미가 계약직으로 일했던 직장의 상사는 단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아사미와 성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녀가 죽자 그 사실이 묻혀질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사미의 옆집에 사는 여성은, 나는 이렇게 항상 성실하게 일해도 계약 따내기가 힘든데, 저 여자는 남자관계도 복잡한 것 같고 분명히 성상납을 통해서 계약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익명으로 온갖 욕설 문자를 그녀에게 보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사미를 낳은 그녀의 생모는, 불행한 삶에 지쳐서 그녀를 정서적으로 학대했고 단지 이십만 엔의 빚 때문에 딸을 야쿠자에게 넘겨 버렸다. 아사미를 빚 대신 데려온 야쿠자는 일년 정도 그녀를 갖고 놀다가, 싫증이 나자 십만 엔을 받고 부하에게 넘겨 버렸고 그는 아사미의 애인 행세를 하며 그녀가 직장에서 번 돈까지 착취한다. 어쩌면 주변에 이렇게 쓰레기같은 인종들만 득실거리는 걸까,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그는 살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와,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정체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을 만난다. 이 겐야라는 인물도 보통은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잘려 버려서 그냥 놀고 있고, 말버릇도 참 고약하다. 겁도 없는지 야쿠자 앞에서도 그 고약한 말버릇을 보여서 얻어맞기까지 한다. 속된 말로 더럽게 싸가지 없고 불쾌한 인간이다(읽으면서 나조차도 꽤 불쾌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사미의 남자친구였던 것도 아니고, 그냥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들어준 정도인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 그러면서 그는 아사미 얘기는 하지도 않고 자신의 신세타령이나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보통이라면 꺼내기 힘든 말들까지 꺼내고,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들이, 나도 이따위로 살고 싶지 않았고 내가 얼마나 사는게 힘든 줄 아냐고,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일종의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그럼 죽지 그래."라는, 아주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하다면 죽으면 되지 않냐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는 말투도 바뀐다. 말버릇이 고약할 망정 처음에는 그래도 평범한 경어라도 사용했다면, 저 "죽지 그래." 다음에는 상대의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거친 반말로 몰아붙인다.  

우리는 여기서 겐야가 등장 인물들에게 "그럼 죽지 그래."라고 하면 모두들 그건 싫다고 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게 보통이고 모두 삶에 대해 많은 미련을 갖고 있다고, 사람이란 모두 찌질이고 쓰레기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거고 죽고 싶지 않을 거라고 겐야는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마지막 한 사람에게 말한다. 어쩌면 이것이 <죽지그래>의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깊고 어두운 심연을 안고 있고, 그것이 극도에 달해 차라리 죽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은 속된 말로 쓰레기같은 인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한편 겐야가 아사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아사미가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꽤 의미심장하다. 친모가 자신을 돈 때문에 야쿠자의 정부로 팔아넘겼고, 물건 취급을 받고 다른 야쿠자에게 넘겨졌으며, 직장 상사는 자신을 성적으로 농락했고, 옆집 여자의 전 남자친구에게 강간과 스토킹까지 당했으며, 옆집 여자에게는 집요한 괴롭힘을 당했고, 살면서 행복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 어둡고 괴로운 이야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했다. 그러면서도 아사미는 그런 인생이지만 자신은 행복하다고, 그러니까 이대로 줄곧 행복하게 있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행복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누구보다도 어둡고 깊은, 극도의 괴로움과 절망이 반대로 표출된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이다. 또한 상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겐야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XXX(이것은 굳이 밝히지 않겠다)야."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딱 집어서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역시 교고쿠도답다.  

이 책을 읽으며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생과 사'를 주제로 한 교고쿠도의 철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교고쿠도 시리즈'에서의 추젠지 아키히코의 장광설과는 또 다른 느낌이며, 주인공 겐야 자체가 꽤 독특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인간이 내 주변에 있다면 골치아파지겠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의 뒤쪽에는 교고쿠 나츠히코와의 서면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 꽤 인상깊은 구절이 있다. 편집자가 '이제 교고쿠 선생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죽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는지요?'라고 묻자, 교고쿠도는 단 한마디,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그는 굉장히 강한 것이다. 꽤 자주 '死ねばいいのに...'라고 생각하는, 울증이 심한 나로써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번역 출간되면서 바뀐 표지의 디자인이다. 번역본은 반양장본으로 겉 커버가 있는데, 중간에 창문같이 도려내진 부분이 있어서 책을 꽂고 빼는 과정에서 그 부분이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대형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몇 권의 <죽지그래>가, 모두 그 부분이(주로 윗부분이다) 찢어져 있었다. 원서는 양장본인데 겉 커버에 도려내진 부분은 없어서 그럴 염려는 없는 것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다. 책이 손상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 나로써는, 고민끝에 세번째 사진처럼 그 부분을 투명 테이프로 미리 보수해 버렸다. 아무래도 이렇게 해 두면, 약간이나마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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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9-3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음습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그리고 더욱 처절하게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작가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 강하게 죽음과 싸우려는 사람 같습니다. ^^ 쿄고구 선생도 그런 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왠지 저 깊은 어둠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부메의 여름>을 끝내지 못한 나약한 독자로서 교코구 선생의 장광설을 듣지 않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근데 책 보니 사고 싶다는 생각을 ㅋㅋㅋ
근데 울증이 심하다는 교코쿠도님의 문장이 왠지 가슴에 남네요.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신을 믿고 요괴를 좋아하는 교코쿠도님에게도 어울리지 않다고 여기구요. 사실 울증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누구나 그런 정신적 상처는 지니고 있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구요. 너무 깊이 파고 들지 마시고 되도록이면 즐겁게 낙관적으로 사셨으면 해요. ^^ 이렇게 걱정해 드리는 1인도 있으니 말이죠. ^^

교고쿠도 2011-10-01 00:52   좋아요 0 | URL
루쉰님 안녕하세요 '_'

추젠지 아키히코의 입을 빌린 교고쿠도의 장광설, 꽤나 멋집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교고쿠 소설에 대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할 수 있어요. <죽지그래>에서는 배경도 현대고, 추젠지 아키히코는 등장하지 않지만...이번에는 겐야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듯 합니다.

보면 교고쿠도의 친구이자 '교고쿠도 시리즈'의 화자인 세키구치도 울증이 꽤나 심하지요. 그런 세키구치를 항상 그 울증에서 빠져나올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역시나 교고쿠도입니다. 보잘것 없는 저를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

아, 저 기대도 거의 안 했는데 10기 신간평가단 소설분야에 뽑혔어요. ^^ 아무래도 항상 평가단을 모집할때마다 소설분야 경쟁률이 가장 높아서 이번엔 아마 안될거라고 생각하고 지원한건데...문학 전공자여서 유리했던 것일까요? 게다가 저는 알라딘 서재 내에서 유명인사도 아니고, 아는 분도 거의 없고, 친목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데...그저 담당자분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루쉰P 2011-10-02 19:43   좋아요 0 | URL
전 항상 어떤 작가에 몰입해 있는 독자를 보면 흐뭇합니다. 어둠의 심연과 맞닿아 있는 제 스토커성 기질과 흡사한 것 같아 동지 의식을 느끼거든요. ^^ 그런 의미에서 교고쿠도님이 무지 반갑습니다. 게다가 저 검은색 완전 좋아해요. ㅋㅋㅋ <죽지그래>는 사서 봐야 겠어요. 교고쿠도님이 아주 디테일 하게 빠져 있는 이 사람 저도 빠져 들고 싶네요. 흐흐흐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떤 부모님의 자식이고 어떤 사람들의 동지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교고쿠도님은 교고쿠도님 밖에는 증명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수는 없어요. ^^

천주교인이시기는 하지만 석존의 말 중에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를 다 가득채운 보물보다도 무겁고 소중하다고 하는데 전 그 말에는 공감합니다. 교고쿠도님이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누군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확실합니다! 믿어주세요. 전 그런 걸 간파하는 제3의 눈이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갓파와 제가 흡사하다고 느끼는데 (생긴 것은 닮지 않았다고 확신있게 말씀드립니다) 전 개인적으로 접골술은 가르치지 않고 머리 위에 접시는 없습니다. -.-

암튼 관리사무소의 갓파로서 교고쿠도님의 건승을 머리 위에 접시 올려 놓고 빌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교고쿠도님 아파트에 제가 변신해서 가 있을 수도 ㅋㅋㅋ

그리고 10기 신간평가단 축하드립니다. ^^ 뽑힌 사정이야 모르지만 뽑혔다는게 중요하죠. 헤헤 아는 분도 거의 없었도 서재를 돌다보면 교고쿠도님의 댓글이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사실 서재에서 친목을 쌓는 것은 힘들어요. ㅋ

암튼 리뷰 올려주세요. 열심히 읽을께요. 갓파 올림

교고쿠도 2011-10-03 00:15   좋아요 0 | URL
루쉰님의 말씀이, 제게 크나큰 위안이 되었어요... 사실 저는, 거의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물론 실행에 옮길 용기 따위도 없으니 죽지도 못하고, 그냥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고 해야 할거에요, 음. 괴로움 없이 단번에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안락사 주사 같은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고 보니 일본 요괴담들을 정리해 놓은 야나기타 구니오의 <도노 모노가타리>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1-10-01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실제 커버가 저렇게 되어있군요. 저는 도서관에서 소장된 책을 읽었는데
검은색 커버가 없거든요. 왠만한 공공도서관은 책표지를 싸고 있는 종이커버를
제거하는데, 저희 학교 도서관은 종이커버 그래도 온전한 책 상태로 보관하거든요.
그래서 나름 진짜 새 책 읽는 맛이 나긴 하는데,, 교고쿠도님 말씀대로
서재에 막 꽂게 되면 종이커버가 손상되어서 새 책인데도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아요 ^^;;

그리고 경쟁률이 높다던 소설 분야에 활동되어서 축하드립니다. ^^
방금 한사람님 서재에 남기신 댓글 보면서 알았어요 ㅎㅎ

교고쿠도 2011-10-01 12:15   좋아요 0 | URL
예, 아무래도 원서처럼 양장본+창문 없는 표지가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그 커버를 벗겨내면 아름다운 그림이 있어서, 그건 마음에 들어요. ^^

교보문고에 갔을 때, 진열대에 나와 있던 약 다섯권 정도의 <죽지그래>가, 전부 참혹한 꼴이 된 것을 보고 아, 이 디자인은 에러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cyrus님도 10기 활동하시나요? 저는 항상 경쟁률이 높은 소설분야라서 거의 기대도 하지 않고 지원했는데, 뽑혀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번째 심장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권도희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오래 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심장질환으로 투병하다가 다행히 뇌사자의 심장을 기증받고 새 삶을 살게 되었는데, 전에는 잘 먹지 않던 종류의 음식이 먹고 싶어지고 심지어는 취미까지도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러한 음식에 대한 기호나 취미가 심장의 기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것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심장이식 케이스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몸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은 뇌라는 것이 정설인데, 어쩌면 심장에도 평소의 습관이나 취향 등이 기억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의 <두 번째 심장(원제 Second hand heart)>는 심장이식 대기 환자 1번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열아홉살 소녀 비다(vida : 삶, 생명을 의미하는 스페인어)가 심장을 이식받은 후, 기증자의 기억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선천적인 심장 기형으로 인해 길지 않은 삶 내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심장이식만 기다리며 살아왔던 비다는 거의 집 안에서만 살았고 세상살이를 겪을 기회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열아홉 살이 되었고, 심장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바로 심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그때 기적같이 뇌사자의 심장을 이식받을 수 있었다. 한편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로리를 잃은 리처드는 압도적인 슬픔에 휩싸인 채, 아내의 심장을 이식받은 비다와 만나게 된다. 순수하고 어린아이같은 비다의 모습에서 열정적이던 아내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슬픔과 혼란에 짓눌린다. 반면 비다는 리처드를 처음 만난 순간, 아주 강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비다의 몸 속에 자리잡은, 리처드를 사랑했던 로리의 심장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비다에게 끌리는 감정을 부인하며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대할 뿐이다. 비다에게는 심장이식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리처드에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 슬픈 일이었다.  

한편 비다의 어머니 에비게일은 굉장히 비다에게 집착하는 타입이다. 항상 비다의 심장에만 신경을 썼고, 비다를 살려내는 것이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에 결국 남편과도 이혼하고 홀로 비다를 돌봐 온 것이다. 비다의 아빠가 오토바이에 비다를 태워서 드라이브를 한 후 엄마에게, 누군가는 그 애의 심장 말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 써주어야 한다고, 단지 건강상의 문제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말이 옳다. 비다의 어머니는 결국 비다를 '아픈 아이'라고 집에 가둬두기만 하고, 그 어떤 즐거움도 없는 산송장과도 같은 삶을 강요했다. 비다가 심장을 이식받아서 건강해진 후에도 그 집착은 여전해서, 여전히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온갖 비상식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비다는 항상 자신을 이해해주는 에스더 할머니와 빅터와 함께 여행길에 나서고, 심장이 갖고 있는 어떤 기억의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그 기억의 단편을 쫓아서 그녀는 빅터와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도중에 사막에서 차가 고장나기도 하고, 돈이 떨어져서 휘발유 값을 구걸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한다. 심장의 기억은,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랜드캐니언의 어떤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소, 노스 림의 테라스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진다. 리처드와 로리가 처음으로 만나서 알게 되고 또 가자고 약속했지만 끝내 가지 못한 그 곳에서, 비다와 리처드는 극적으로 재회한다.  

또한 이 소설은, 세상을 겪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소녀가 세상을 알아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시작하는 성장담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 남자의 새로운 삶을 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다는 그랜드캐니언을 떠나며 엄마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엽서를 쓴다. 비다의 엄마는 자신이 딸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해 왔다는 것을 자각하고 치료를 받기로 한다. 리처드는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비다 뿐만이 아닌, 그들 모두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한편 심장이식과 기억에 대한 이론의 일부는 작가가 창작해낸 것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을 약간 받았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은 시간에 엄청나게 넓은 그랜드 캐니언의 바로 그 장소에 올 수 있었는지 너무 우연에 의지한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뻔한 사랑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해서, 이 책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심장의 기억 자체가 아직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인 것을 감안하면 마법과도 같은 둘의 재회 역시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기이식에 대해 예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참 전, 만일 내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고 깨어날 가망이 없다면 나의 장기들을 기증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알몸이 되어 차가운 부검대 위에 눕는 일은 비록 의식이 없다 해도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겠지만,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받고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할 수 있다면 용기를 내고 싶다.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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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오 정원
채현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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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느낌의 책들을 좋아한다. 책을 덮고 나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꿈꾸는 듯한 이야기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가능하다면 매일 밤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다. 아무래도 나는 반쯤은 안개 속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닐까. 만약 문학 작품이 지극히 사실적이기만 한다면, 문학과 현실의 차이를 그다지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내게 있어서는 이쪽도 저쪽도 똑같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지독한 우울을 버텨낼 수 있는 일종의 마취제의 역할을 할,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항상 원하고 있다. 얼마 전 읽게 된 채현선의 단편집 <마리 오 정원>은, 따뜻하고 신비로운 위로로 내게 다가왔다.  

<마리 오 정원>에는 신춘문예 등단작인 '아칸소스테가'와 표제작 '마리 오 정원', 그 외 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각 작품들은 어떤 정형화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구체화되지 않은 현실의 그 어딘가의 시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마리, 마누, 얀, 아킴테라, 라파엘, 소피아, 푸엘라 등의 등장 인물들의 이름 역시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배수아의 단편집 <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 사건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지극히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도우며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소피아 할머니('숨은 빛'), 실연의 아픔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주술사의 힘을 빌려 복수를 하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마리 오 정원'), 누군가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누 할아버지('마누 다락방'), 죽은 아들의 무덤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아들이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날마다 트는 부부('모퉁이를 돌면'),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찾아가 죽은 아들의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잼을 나눠주는,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던 할아버지('아코디언, 아코디언'),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는, 안구 종양으로 두 눈을 적출하여 완전히 시력을 잃은 사람과 사랑하는 남자를 사고로 잃은 여자('켄세라'), 시한부 인생임에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아내와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처연한 심정('아칸소스테가'), 사랑도 취업도 실패하고 절망한 남자와 우연히 함께 살게 된 골드스패니얼 의 이야기('나의 글루미 선데이')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은 데서 기인한 슬픔과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다독이거나 서로를 위로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서서히 치유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강했던 것은 표제작인 '마리 오 정원'이었다. 식물의 힘을 빌려 복수의 주술적 의식을 행하는, 그리고 여자의 마음속 응어리들을 풀어 내서 치유되도록 도와주는 주술사 마리와 그녀의 이국종 식물이 무성한 정원의 이미지가 감각적이고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울증과 괴로움을, 이러한 주술과 위로를 통하여 치유받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또한 어떤 쪽이 더 괴로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다독이는 내용의 '켄세라'에서는, 어설픈 위로의 말이나 뻔한 인사치레도 하지 않지만, 괴로운 누군가에게 전화를 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는 마음과 행동이 아마 가장 큰 위로였을 것이다. 그 따뜻함이 나의 마음에도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아련한 기억 또는 꿈 속의 어떤 풍경을 여유로이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환상적인 식물들의 정원이 있고 주술사의 집이 있으며, 추억이 살아 숨쉬는 다락방이 있고 마술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편안한 안식의 꿈을 꾸는 듯 하다. 내게도 따스한 위로와 어떤 치유의 주술이 어느 정도 작용한 느낌이다. 그렇다. 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내게 또 얼마간을 버텨낼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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