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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오 정원
채현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몽환적인 느낌의 책들을 좋아한다. 책을 덮고 나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꿈꾸는 듯한 이야기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가능하다면 매일 밤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다. 아무래도 나는 반쯤은 안개 속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닐까. 만약 문학 작품이 지극히 사실적이기만 한다면, 문학과 현실의 차이를 그다지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내게 있어서는 이쪽도 저쪽도 똑같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지독한 우울을 버텨낼 수 있는 일종의 마취제의 역할을 할,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항상 원하고 있다. 얼마 전 읽게 된 채현선의 단편집 <마리 오 정원>은, 따뜻하고 신비로운 위로로 내게 다가왔다.
<마리 오 정원>에는 신춘문예 등단작인 '아칸소스테가'와 표제작 '마리 오 정원', 그 외 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각 작품들은 어떤 정형화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구체화되지 않은 현실의 그 어딘가의 시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마리, 마누, 얀, 아킴테라, 라파엘, 소피아, 푸엘라 등의 등장 인물들의 이름 역시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배수아의 단편집 <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 사건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지극히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도우며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소피아 할머니('숨은 빛'), 실연의 아픔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주술사의 힘을 빌려 복수를 하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마리 오 정원'), 누군가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누 할아버지('마누 다락방'), 죽은 아들의 무덤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아들이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날마다 트는 부부('모퉁이를 돌면'),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찾아가 죽은 아들의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잼을 나눠주는,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던 할아버지('아코디언, 아코디언'),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는, 안구 종양으로 두 눈을 적출하여 완전히 시력을 잃은 사람과 사랑하는 남자를 사고로 잃은 여자('켄세라'), 시한부 인생임에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아내와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처연한 심정('아칸소스테가'), 사랑도 취업도 실패하고 절망한 남자와 우연히 함께 살게 된 골드스패니얼 의 이야기('나의 글루미 선데이')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은 데서 기인한 슬픔과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다독이거나 서로를 위로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서서히 치유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강했던 것은 표제작인 '마리 오 정원'이었다. 식물의 힘을 빌려 복수의 주술적 의식을 행하는, 그리고 여자의 마음속 응어리들을 풀어 내서 치유되도록 도와주는 주술사 마리와 그녀의 이국종 식물이 무성한 정원의 이미지가 감각적이고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울증과 괴로움을, 이러한 주술과 위로를 통하여 치유받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또한 어떤 쪽이 더 괴로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다독이는 내용의 '켄세라'에서는, 어설픈 위로의 말이나 뻔한 인사치레도 하지 않지만, 괴로운 누군가에게 전화를 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는 마음과 행동이 아마 가장 큰 위로였을 것이다. 그 따뜻함이 나의 마음에도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아련한 기억 또는 꿈 속의 어떤 풍경을 여유로이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환상적인 식물들의 정원이 있고 주술사의 집이 있으며, 추억이 살아 숨쉬는 다락방이 있고 마술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편안한 안식의 꿈을 꾸는 듯 하다. 내게도 따스한 위로와 어떤 치유의 주술이 어느 정도 작용한 느낌이다. 그렇다. 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내게 또 얼마간을 버텨낼 힘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