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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심장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권도희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오래 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심장질환으로 투병하다가 다행히 뇌사자의 심장을 기증받고 새 삶을 살게 되었는데, 전에는 잘 먹지 않던 종류의 음식이 먹고 싶어지고 심지어는 취미까지도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러한 음식에 대한 기호나 취미가 심장의 기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것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심장이식 케이스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몸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은 뇌라는 것이 정설인데, 어쩌면 심장에도 평소의 습관이나 취향 등이 기억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의 <두 번째 심장(원제 Second hand heart)>는 심장이식 대기 환자 1번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열아홉살 소녀 비다(vida : 삶, 생명을 의미하는 스페인어)가 심장을 이식받은 후, 기증자의 기억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선천적인 심장 기형으로 인해 길지 않은 삶 내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심장이식만 기다리며 살아왔던 비다는 거의 집 안에서만 살았고 세상살이를 겪을 기회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열아홉 살이 되었고, 심장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바로 심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그때 기적같이 뇌사자의 심장을 이식받을 수 있었다. 한편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로리를 잃은 리처드는 압도적인 슬픔에 휩싸인 채, 아내의 심장을 이식받은 비다와 만나게 된다. 순수하고 어린아이같은 비다의 모습에서 열정적이던 아내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슬픔과 혼란에 짓눌린다. 반면 비다는 리처드를 처음 만난 순간, 아주 강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비다의 몸 속에 자리잡은, 리처드를 사랑했던 로리의 심장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비다에게 끌리는 감정을 부인하며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대할 뿐이다. 비다에게는 심장이식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리처드에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 슬픈 일이었다.
한편 비다의 어머니 에비게일은 굉장히 비다에게 집착하는 타입이다. 항상 비다의 심장에만 신경을 썼고, 비다를 살려내는 것이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에 결국 남편과도 이혼하고 홀로 비다를 돌봐 온 것이다. 비다의 아빠가 오토바이에 비다를 태워서 드라이브를 한 후 엄마에게, 누군가는 그 애의 심장 말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 써주어야 한다고, 단지 건강상의 문제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말이 옳다. 비다의 어머니는 결국 비다를 '아픈 아이'라고 집에 가둬두기만 하고, 그 어떤 즐거움도 없는 산송장과도 같은 삶을 강요했다. 비다가 심장을 이식받아서 건강해진 후에도 그 집착은 여전해서, 여전히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온갖 비상식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비다는 항상 자신을 이해해주는 에스더 할머니와 빅터와 함께 여행길에 나서고, 심장이 갖고 있는 어떤 기억의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그 기억의 단편을 쫓아서 그녀는 빅터와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도중에 사막에서 차가 고장나기도 하고, 돈이 떨어져서 휘발유 값을 구걸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한다. 심장의 기억은,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랜드캐니언의 어떤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소, 노스 림의 테라스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진다. 리처드와 로리가 처음으로 만나서 알게 되고 또 가자고 약속했지만 끝내 가지 못한 그 곳에서, 비다와 리처드는 극적으로 재회한다.
또한 이 소설은, 세상을 겪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소녀가 세상을 알아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시작하는 성장담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 남자의 새로운 삶을 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다는 그랜드캐니언을 떠나며 엄마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엽서를 쓴다. 비다의 엄마는 자신이 딸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해 왔다는 것을 자각하고 치료를 받기로 한다. 리처드는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비다 뿐만이 아닌, 그들 모두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한편 심장이식과 기억에 대한 이론의 일부는 작가가 창작해낸 것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을 약간 받았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은 시간에 엄청나게 넓은 그랜드 캐니언의 바로 그 장소에 올 수 있었는지 너무 우연에 의지한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뻔한 사랑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해서, 이 책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심장의 기억 자체가 아직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인 것을 감안하면 마법과도 같은 둘의 재회 역시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기이식에 대해 예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참 전, 만일 내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고 깨어날 가망이 없다면 나의 장기들을 기증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알몸이 되어 차가운 부검대 위에 눕는 일은 비록 의식이 없다 해도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겠지만,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받고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할 수 있다면 용기를 내고 싶다.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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