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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교고쿠 나츠히코(이하 교고쿠도)의 열렬한 팬으로, 그의 번역 출간된 모든 작품을 갖고 있으며 원서로도 몇 권을 소장하고 있다. 작년쯤 서점에서 그의 새로운 작품인 <死ねばいいのに>가 나온 것을 보고,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저 제목이 절망 혹은 낙담한 표정과 말투로 '아아, 그냥 죽어버리면 좋을텐데...'라고 독백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그 당시 나는 울증이 꽤 심했기 때문에 제목 자체에 크게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원서를 구입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의 제목은 사뭇 다르다. <죽지그래>라니, 그렇다. 저 '死ねばいいのに'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타인에게 하는 말이다. 만약 원서의 제목을 문자 그대로 <죽으면 좋을텐데>로 번역했다면, 저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하는 말인지 제목만 보고는 혼동될지도 모른다. 내용을 보면 후자인 것이 명확하지만 말이다.
<죽지그래>는, 지금까지의 교고쿠도의 작품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 동안에 일명 '교고쿠도 시리즈'로 작가의 분신인 추젠지 아키히코가 주인공인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철서의 우리> 등과 외전격으로 민폐쟁이 에노키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백기도연대 우>, <백기도연대 풍>, 그리고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마타이치와 그 일행이 등장하는 일종의 괴담인 <항설백물어>, <속 항설백물어> 등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민속학과 종교학을 바탕으로 한, 요괴와 같은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죽지그래>는 시대적 배경도 현대인데다가 민속학이나 요괴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꽤 깊은 일종의 철학적 성찰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야기는 아사미라는 순진무구한 이미지의 여성이 살해당하고, 우연한 기회에 그녀와 만났던 청년 와타라이 겐야는 생전의 아사미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아사미가 계약직으로 일했던 직장의 상사는 단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아사미와 성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녀가 죽자 그 사실이 묻혀질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사미의 옆집에 사는 여성은, 나는 이렇게 항상 성실하게 일해도 계약 따내기가 힘든데, 저 여자는 남자관계도 복잡한 것 같고 분명히 성상납을 통해서 계약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익명으로 온갖 욕설 문자를 그녀에게 보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사미를 낳은 그녀의 생모는, 불행한 삶에 지쳐서 그녀를 정서적으로 학대했고 단지 이십만 엔의 빚 때문에 딸을 야쿠자에게 넘겨 버렸다. 아사미를 빚 대신 데려온 야쿠자는 일년 정도 그녀를 갖고 놀다가, 싫증이 나자 십만 엔을 받고 부하에게 넘겨 버렸고 그는 아사미의 애인 행세를 하며 그녀가 직장에서 번 돈까지 착취한다. 어쩌면 주변에 이렇게 쓰레기같은 인종들만 득실거리는 걸까,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그는 살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와,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정체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을 만난다. 이 겐야라는 인물도 보통은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잘려 버려서 그냥 놀고 있고, 말버릇도 참 고약하다. 겁도 없는지 야쿠자 앞에서도 그 고약한 말버릇을 보여서 얻어맞기까지 한다. 속된 말로 더럽게 싸가지 없고 불쾌한 인간이다(읽으면서 나조차도 꽤 불쾌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사미의 남자친구였던 것도 아니고, 그냥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들어준 정도인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 그러면서 그는 아사미 얘기는 하지도 않고 자신의 신세타령이나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보통이라면 꺼내기 힘든 말들까지 꺼내고,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들이, 나도 이따위로 살고 싶지 않았고 내가 얼마나 사는게 힘든 줄 아냐고,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일종의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그럼 죽지 그래."라는, 아주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그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하다면 죽으면 되지 않냐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는 말투도 바뀐다. 말버릇이 고약할 망정 처음에는 그래도 평범한 경어라도 사용했다면, 저 "죽지 그래." 다음에는 상대의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거친 반말로 몰아붙인다.
우리는 여기서 겐야가 등장 인물들에게 "그럼 죽지 그래."라고 하면 모두들 그건 싫다고 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게 보통이고 모두 삶에 대해 많은 미련을 갖고 있다고, 사람이란 모두 찌질이고 쓰레기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거고 죽고 싶지 않을 거라고 겐야는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마지막 한 사람에게 말한다. 어쩌면 이것이 <죽지그래>의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깊고 어두운 심연을 안고 있고, 그것이 극도에 달해 차라리 죽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은 속된 말로 쓰레기같은 인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한편 겐야가 아사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아사미가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꽤 의미심장하다. 친모가 자신을 돈 때문에 야쿠자의 정부로 팔아넘겼고, 물건 취급을 받고 다른 야쿠자에게 넘겨졌으며, 직장 상사는 자신을 성적으로 농락했고, 옆집 여자의 전 남자친구에게 강간과 스토킹까지 당했으며, 옆집 여자에게는 집요한 괴롭힘을 당했고, 살면서 행복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 어둡고 괴로운 이야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했다. 그러면서도 아사미는 그런 인생이지만 자신은 행복하다고, 그러니까 이대로 줄곧 행복하게 있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행복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누구보다도 어둡고 깊은, 극도의 괴로움과 절망이 반대로 표출된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이다. 또한 상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겐야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XXX(이것은 굳이 밝히지 않겠다)야."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딱 집어서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역시 교고쿠도답다.
이 책을 읽으며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생과 사'를 주제로 한 교고쿠도의 철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교고쿠도 시리즈'에서의 추젠지 아키히코의 장광설과는 또 다른 느낌이며, 주인공 겐야 자체가 꽤 독특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인간이 내 주변에 있다면 골치아파지겠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의 뒤쪽에는 교고쿠 나츠히코와의 서면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 꽤 인상깊은 구절이 있다. 편집자가 '이제 교고쿠 선생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죽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는지요?'라고 묻자, 교고쿠도는 단 한마디,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그는 굉장히 강한 것이다. 꽤 자주 '死ねばいいのに...'라고 생각하는, 울증이 심한 나로써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번역 출간되면서 바뀐 표지의 디자인이다. 번역본은 반양장본으로 겉 커버가 있는데, 중간에 창문같이 도려내진 부분이 있어서 책을 꽂고 빼는 과정에서 그 부분이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대형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몇 권의 <죽지그래>가, 모두 그 부분이(주로 윗부분이다) 찢어져 있었다. 원서는 양장본인데 겉 커버에 도려내진 부분은 없어서 그럴 염려는 없는 것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다. 책이 손상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 나로써는, 고민끝에 세번째 사진처럼 그 부분을 투명 테이프로 미리 보수해 버렸다. 아무래도 이렇게 해 두면, 약간이나마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