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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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20대들은 참 불행하다. 기껏 힘들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던 공부나 활동을 하기보다는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에 열중하지 않으면 안되고, 막대한 돈을 들여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되지 않는다. 투표를 해봤자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명문대가 아니면 '지잡대'라는 열등감 속에서 살게 된다. 운좋게 취업을 한다고 해도 비정규직과 같은 불안정한 조건에서 긴 노동시간과 적은 급여에 시달리며, 연애조차 순수한 것이 아닌, 계산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20대들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스스로를 '잉여', '밥버러지'로 칭하는 자학적인 호칭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정도다. 왠지 억울하지 않은가?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이러한 20대의 성장과 고군분투에 대해 연세대 원주캠퍼스, 덕성여대의 학생들과 함께 쓰고 토론하고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기록이다.  

지금까지 20대들을 어느 누구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368세대도 지금의 20대들을 비난한다. 우파들은 청년들이 높은 보수만 바라고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한다고, 눈높이를 낮추라고 한다. 반면 좌파들은, 지금의 청년들이 소비주의에 물들어 물질적인 풍요에만 신경을 쓸 뿐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반응하지도 않고 사회에 관심이 없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20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비싼 돈 들여 대학까지 나왔는데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고 자기 시간도 없는 3D업종에서 평생을 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착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사회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8년의 촛불집회도 주로 2~30대의 젊은 층이 주도하고 참여했으며, 선거 때 누구를 뽑아도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나마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그들은 투표에 참여한다.  

또한, 7~80년대에는 고교 졸업생의 30% 정도만 대학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의 수가 적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의식을 갖게 되었고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고 적극적으로 시국에 참여할 명분이 생겼다. 하지만 고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이 시대에는 대학생이 더 이상 지식인으로서의 특권과 사명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나 역시 다카노 에쓰코의 <20세의 원점>이라는 책을 읽으며, 불의에 저항하고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사색했던 전공투 시대의 대학생들을 부러워했다. 그 당시에 불의에 항거하며 수업과 시험을 보이콧했던 학생들이 있었다면 지금의 학생들은 토익책과 각종 수험서를 들고 도서관에 틀어박힌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20대들의 잘못일까. 지금의 학생들과 3~40년 전의 학생들을 비교해보면, 분명 지금의 학생들이 과거의 학생들보다 공부를 안하거나 무능하거나 게으르지는 않을 것이다. 점점 갈수록 경쟁은 심화되고 여기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세상의 불의에 대항할 용기와 힘은 이미 고갈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저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매스컴 등에서 보여지는 '이상적인 가족'의 허상을 지적한다. 정말이지 그런 것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소통이 활발하고 사랑이 넘치는, 모범적인 중산층 핵가족은 의외로 흔하지 않다. 하지만 저런 이상적인 가족상을 접하면서 우리 집은 대화가 없으니까, 편부(모) 가정이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그 외에 많은 이유로 그렇지 못한 자신들의 가정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가족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는 한 학생의 말이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나의 가족들 역시 모두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싸울 때는 싸우고 때로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90년대부터인가 폭압적인 교육에 반기를 들고 생겨난 '열린 교육'에 대해서도 저자와 학생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역시 크게 동감한 부분으로, 열린 교육은 가만히 있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무조건 손을 들고 발표를 해야 했고, 조용히 있을 자유나 혼자 생각할 자유를 박탈했다. 폭압적인 교육이 학생들에게 입 닫고 가만히 있을 의무를 강요했다면, 열린 교육은 무조건 말해야 하는 의무를 강요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절실하게 느낀 것은 초중고교 시절보다도 오히려 대학교 때로, 당시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는 프리젠테이션 같은 것을 해야 하는 발표나 스피치 같은 것이 참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영어로)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심적 부담으로 다가왔고, 사람 많은 데서 말 못하는 사람은 학교도 못 다니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과 일종의 분노가 몰려왔었다. 확실히 나는 말을 잘 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껴봤을 다이어트나 외모관리, 패션에 대한 일종의 암묵적 압박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참 반가웠던 것이, 사람들은 왜 다이어트를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의식하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고도비만으로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된다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맞지만, 그저 약간 통통할 뿐인데 매스컴 등에서는 자꾸 마른 체형을 찬양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이 뚱뚱해 보이게 되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하다. 외모관리나 성형 역시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취업이나 연애 등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관리'가 안되는 사람으로 매도당한다. '자기관리'라는 것도 결국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남들이 많이 입는 브랜드를 갖고 있지 않으면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일까봐 얼마 지나지 않아 유행이 지나게 될, 그래서 입지 않게 될 옷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비지향적인 풍조는 최근에 들어 더욱 심화된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몇십년 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데도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는 것 역시 소비를 부추기는 풍조에서 비롯된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부모님 등골 안 빼먹으려고 아르바이트에 매진하더라도 대부분 시간당 4천원 남짓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공부할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돈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돈이 없다면 자유마저 빼앗겨 버린다. 여기서 '자유'의 개념은 내가 소비자로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정치적 자유가 아닌 경제적 자유의 의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하는 청년들의 불꽃과도 같은 열정은 그것이 교환가치가 없으면 '잉여들의 삽질'로 치부되고, 교환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산업 구조에 의한 착취를 당하고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일종의 노예로 전락한다. 자본이 착취하거나 교환할 수 없는 것은 '순수한 유희'뿐이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속이 시원하고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제목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부터가, 이것도 엄연한 청춘의 모습이라는 일종의 반란과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그동안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했던 많은 것들이 이렇게 공론화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차마 못 하던 말을 대신 해준 것만으로도 아주 후련할 지경인데, 너희 탓이 아니라고, 너희는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이 참 고마웠다. 등장하는 화두들 모두 그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뭔가 상당히 불합리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판을 뒤집어 엎을' 힘이 없으니 많은 20대들이 그저 마음속에 묻어놓고 있었던 것들을 저자는 밖으로 꺼내서 공론화시키고 함께한 수많은 학생들과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함께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대학 서열화, 취업중심의 대학교육, 20대의 탈정치화, 열린 교육, 가족 해체, 강요된 자기관리, 소비지상주의 등 지금의 20대들이 직면한 현실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하여 학생들과 함께하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담론들이 활발히 형성되고 많은 사람들의 자각이 따라야만 더 나은 방향으로 세상이 바뀐다. 그렇게 시작하여 판을 뒤집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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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진짜 읽고 싶네요. 글 속 내용들이 너무 공감이 갑니다.
교고쿠도님의 감정처럼 이 책 읽고 속 시원한 느낌 한 번 받았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교고쿠도 2010-11-21 16:51   좋아요 0 | URL
분명 옳지 못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20대들에게는 판을 뒤집을 힘이 없기 때문에 그저 다들 마음속에 묻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으면서 그런 그들의 탓을 하지 않고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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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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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초에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그 책에서 오웰은 직접 경험한 실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당시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굉장히 사회참여적인 작가라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동안에 오웰의 에세이는 대부분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판본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겨레출판사에서 <나는 왜 쓰는가>라는 이름으로 수백 편에 달하는 에세이와 칼럼 중에서 가장 뛰어나면서도 중요한 29편을 묶어서 출간함으로써 한국어로 그의 여러 에세이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웰이 글을 써서 발표한 시기에 맞춰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자전적인 소설처럼 읽히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시대상을 반영하는 논평과 같은 글들도 있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스파이크 The Spike'는 오웰의 부랑자 생활 경험을 묘사한 글이다. 부랑자 임시 숙소를 스파이크(Spike)라 하는데, 더러운데다가 난방도 제대로 안 되어 춥고 식사는 아주 형편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서로 나누는 일종의 정이 살아 있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인 평론보다 이러한 자전적인 경험담들을 더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더 잘 읽히고, 또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인듯 하다. 사실 오웰은 이튼 스쿨을 졸업하고 식민지에서 경찰 생활을 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보통 이튼 스쿨을 나오면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는데,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식민지의 현실을 알기 위해서 경찰에 지원해서 버마에서 생활하면서 제국의 식민 통치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을 맛보는 체험을 한다. 이는 에세이 '교수형 A Hanging'과 '코끼리를 쏘다 Shooting an Elephant'에서 잘 드러나 있다. 압제의 일원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경찰직을 그만두고 나서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빈민가에서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다. 이는 위에 언급한 에세이 '스파이크'와 그의 첫 책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바탕이 된다. 충분히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버리고, 부랑자나 빈민과 같은 생활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것을 누려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극심한 빈곤에 직면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나의 청빈은 말뿐인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된 부분이다.

그 뒤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정기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진보단체 '레프트 북클럽'에서 의뢰를 받아 탄광지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조사하고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쓴다. 그리고 나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 전장으로 달려간다.(극우적인 파시즘에 저항한 것에 굉장히 그에게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오웰은 보다 정치적인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1936년 이후로 자신이 쓴 모든 글들은 직간접적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정치적인 평론들을 쓰기 시작하여,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Spilling the Spanish Beans',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Why I Joined the Independent Labour Party', '좌든 우든 나의 조국 My country Right or Left', '영국, 당신의 영국 England Your England' 등의 글들을 남긴다. 이러한 평론들은 아무래도 그 당시의 역사와 시대상을 잘 모르면 이해하기가 힘든 듯 하다. 읽으면서 꽤나 진도가 안 나갔던 부분으로, 자료도 찾아보고 공부해가면서 읽어야 될 것같은 느낌이다. 이때 오웰은 스페인 내전의 체험을 그린 <카탈로니아 찬가>를 집필하였다. 

1939년에 2차대전이 발발하자 오웰은 건강상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하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동물농장>의 집필에도 착수한다. 이때 쓰여진 에세이들 중 인상깊은 것이 '시와 마이크 Poetry and the Microphone'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시 낭송을 삽입했던 이야기를 통하여 시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전체주의가 라디오 방송까지 장악하여 예술 작품까지도 관료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지식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오웰은 말한다. 독재 혹은 식민지 통치에 있어서 3S(영화, 스포츠, 성)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함으로써 지배자가 조작하기 쉽게 만드는 정책이 이미 그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문학 예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웰은 전체주의 옹호자들과 관료 지배 체계에 의해 지적인 자유가 공격받고 있는 시대의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는 작가들의 자기검열로 귀결되며 이러한 자유의 상실은 모든 형태의 문학에 해가 된다.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하고, 자발성을 갖지 않는 한 문학 창작은 불가능하게 된다. 글쟁이 지망생으로서, 읽으면서 아주 속이 시원할 정도였다.  

또한 기억에 꽤 남았던 에세이 중 하나인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는, 그 당시 영어에서의 상투적인 어구들, 복잡한 전치사와 접속사, 고상한 척 하는 단어들, 별로 의미가 없는 단어들의 남용, 수동태의 남발 등을 꼬집고 그러한 어구와 단어들을 정치적인 말과 글에 이용함으로써 전체주의를 그럴싸해보이게 포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이다. 제대로 된 영국 영어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글의 특성상 원문들의 일부도 함께 병기되어서 꽤 좋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 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은 읽으면서 굉장히 크게 공감한 글로, 나 역시 수많은 서평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뭐든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취미일 경우에는 부담이 덜하나, 그것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미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든다.이 책의 제목이 되었던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에서는, 이러한 시대에 정치적인 주제를 피해서 글을 쓸 수는 없다는 오웰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정치적이면서 문학적이고, 그 둘중 한 쪽을 빼고는 그를 이야기할 수 없다.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된 오웰은 스코틀랜드의 쥬라 섬에 틀어박혀 지내며 예비학교 시절의 경험담을 그려낸 에세이 '정말, 정말 좋았지 Such, Such Where the Joys'를 쓴다. 이는 반어적인 제목으로, 그 당시 어린 학생들이 다니던 세인트 시프리언스 기숙학교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글이다. 귀족 작위가 있거나 학교에 큰 돈을 낸 학생들과 학비를 지원받아서 온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했고 먹을 것은 아주 형편없었으며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일종의 지위나 재산 등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체벌도 잦았으며 환경도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기숙학교라면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곳인데 그렇게 환경이 비참하다니, 빈민층의 학생들이 다니는 곳은 어땠을지 안 봐도 뻔하다. 오웰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이튼스쿨에 진학해 시나 소설 등을 쓰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지냈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예비학교 시절의 좋지 못한 추억들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그런 학교들이 없어졌을 것이라 믿고 싶다. 얼마 뒤 병이 몹시 악화된 오웰은 <1984>를 완성하고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을 통해 오웰의 정치적, 문학적 사유와 그가 지향하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는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포기한 채 부랑자가 되거나 밑바닥 삶을 경험하고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편안히 살수 있었는데도 교사직을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자들의 애환을 느끼기를 원했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몬느 베이유의 모습과 어느 정도 공통적인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론만이 아닌, 행동이 따르는 사상이야말로 참된 것이다. 오웰은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자였고, 그것을 그의 삶과 글로써 보여주었다. 역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이어 이번 에세이집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글쟁이 지망생인 내게, 작가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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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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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영국의 작가로써 <1984>,<동물농장> 등의 디스토피아적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르포에 해당된다. 이 책이 쓰여진 계기는 1936년 '레프트 북클럽'이라는 단체에서 오웰에게 영국 북부 탄광지대의 실업 문제에 대한 르포를 청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웰은 탄광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이용하는 하숙집에서 생활을 하고 석탄을 캐는 막장 지대까지 내려가 본다. 그리고 나서 완성된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탄광 지대 노동자들의 실상과 탄광의 실태에 대한 묘사가 아주 뛰어난 르포다. 1부의 제일 첫 부분에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의 하숙집 이야기가 나올때 필자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19세기도 아닌 20세기에 이렇게 더럽고 과밀한 주거환경이 있었다니 놀랍기도 했고, 보통 생각하는 1~2인이 한 방을 쓰며 독립된 생활공간으로 구성된 하숙집이 아닌, 하숙생을 받기에 그다지 적절해보이지 않는 작은 집에 침대만 여러개 들여다놓고 거기서 꽤 많은 사람이 하숙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주거환경이 몇십년 전에 비해 굉장히 좋아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석탄을 캐는 막장의 이야기 역시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흥미진진했다. 오웰은 실제로 땅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갱도의 막장까지 들어가봤는데, 광부들이 실제로 석탄을 캐는 곳까지 들어가려면 허리도 제대로 펼수 없고 심지어는 기어서 통과해야 하는 땅속 통로를 통해 적어도 1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강도의 노동인데다가, 쉬는 시간도 없이 7시간 반 동안 석탄을 캐야 한다. 작업환경도 위험하기 짝이 없어서 폭발, 붕괴 등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오웰은 그들이 없다면, 지상의 세계도 없다고 말한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것, 빵 굽는 것에서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것이 석탄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 깊은 땅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광부들이 있기에, 상류층들의 우아한 생활도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도 문명의 안락을 누리는 계층이 있으면 누군가 좋지 못한 환경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착취를 당해야만 하는게 아닌가.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영세 자영업자 등등...

하지만 이러한 광부들의 생활은 꽤나 열악하다. 하루의 힘든 작업을 마치고 몸에 묻은 탄진을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는 목욕 시설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설비가 좋은 대형 탄광 중에는 목욕탕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탄광에는 목욕탕이 없다. 또한 그 당시 노동자들의 집에는 제대로 된 목욕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받는 급여도 간신히 생활을 할수 있을정도의 적은 돈이고, 작업 중에 부상을 당해 영구적인 장애를 입는다고 해도 연금을 타는데에 온갖 불편과 냉대를 감수해야 한다. 그들이 사는 주거환경도 굉장히 열악해서, 낡고 좁으며 벌레가 우글거리거나 비가 새는 집에서 사는 경우가 태반이다. 과밀 문제도 심각해서, 작은 방 둘에 여덟이나 열 명이 되는 식구가 자야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집에서 깔끔한 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동네 자체가 악취가 진동하고 쓰레기가 널려있으며 더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며 이것은 굳이 1930년대의 영국 슬럼가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인 지금도 서울의 빈민가나 쪽방촌에 있는 집들은 오웰이 언급한 주거환경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웬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계속 일을 할수 있어서 적은 급여라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일자리를 잃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에 실업 수당에 관련된 이야기를 오웰은 하고 있다. 이러한 실업 수당을 받고 사는 독신자 혹은 가족들의 삶 역시 비참하다. 1인당 매주 평균 6~7실링으로 먹는 것과 입는 것, 난방과 그 외의 것들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할 수도 없고, 기껏해야 빵과 약간의 차와 채소 등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신체적인 퇴보로 나타나서, 노동계급의 체격이나 치아 등은 상류층과 차이가 난다. 어릴 때부터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로 자라기 때문에 이도 금방 빠져버리고 체격도 크게 자랄 수 없는 것이다. 

2부는 오웰 자신의 성장 배경과 영국의 계급 문제, 그리고 정치적 견해를 담은 주장 강한 에세이의 성격이 강하다. 오웰은 사회주의를 대담하게 비판하는데,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만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갔던 말이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나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같은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라는 문장이었다. 사실 정말로 그렇다. 몇몇 집단에서 서로 '동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위화감이 들 뿐더러,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어떻든 그냥 별로 동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또한 중산층 사회주의자들 상당수가 속으로는 계급적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속물이며 별난 취미를 뽐내고, 어려운 말을 쓰기를 좋아하며, 이론적 독선에 차 인간다움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계급뿐만 아니라 많은 중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고 오웰은 개탄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필자 자신도 뜨끔했다. 항상 약자를 탄압하는 자는 절대로 좋게 생각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 청빈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필자가, 실제로는 스스로 그들과 다르다는 그러한 우월감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읽으며 많은 반성을 하였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조지 오웰의 냉철한 현실 인식과 그의 문학의 토대가 된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1930년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상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는 현재에도 노동자들의 삶이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것을 느끼고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분노 혹은 안타까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이 세상을 정말로 달라지게 하려면 우리들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리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면 누가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러한 책이 번역 출판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에서 약간은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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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인 광기와 미친 천재성 - 정신질환과 천재성 사이의 교차점
자오신산 지음, 이예원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나는 천재가 되고 싶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대천재까지는 아니라도 영재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래서 멘사 같은, 높은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도 일종의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멘사의 테스트를 보고 가입한 일을 지금도 생각하면 참 기쁘다. 하지만 천재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극소수의 타고난 사람들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지금은 알게 된 듯 하다. (자신이 일부러 획득한 것이 아닌, 천부적인 재능을 뜻하는 gifted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다.)그렇지만 아직도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뛰곤 한다. 자오신산의 책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 역시 제목에서부터 굉장히 끌렸고, 그 내용 역시 궁금해져서 결국은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정신질환과 천재성 사이의 연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확실히 천재들은 괴짜의 경향이 강하다. 범인(凡人)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현실에서 동떨어진 세상에 있는 듯 하고 생각이나 행동도 상식에서 어긋나며 괴팍하다. 반면 광인은 저런 면들을 갖고 있지만 천재와 같은 찬사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되곤 한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천재와 같이 세상을 압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심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넘쳐나기 때문에 에너지를 분출할 곳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세상을 창조하고 건설하는 것이다. 모짜르트, 바흐, 다빈치, 아인슈타인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인류 역사상에 남은 천재들이 이 분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세상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예로 들 수 있다. 세번째는 미쳐버리거나 자살하는 것으로, 수많은 광인들이 이에 속한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천재가 광인이 되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재와 광인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천재에게는 광인에게 없는 창조력과 직감이 있다. 물론 광인도 기묘한 그림을 그리고 알아볼 수 없는 글을 쓰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본질적인 내용도 없다. 적어도 타인과 공감대를 가질 수 없는 것들로, 광인 자신만 의미를 알 뿐이다. 하지만 천재의 창조력과 직감은 현실세계로 회귀할 수 있다. 꼬리를 물고 있는 뱀들을 꿈에서 보고 벤젠의 1.5중결합 구조를 밝혀낸 화학자 케쿨레의 일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저자는 천재들이 갖고 있는 우울증이나 고뇌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이 과학, 예술과 철학의 창조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사명감이 강박증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을 창조하는 '건강한' 강박증은 주로 작가들의 충동적인 창작 욕구로 표현된다. <장한가>를 쓴 백거이는 자신의 고질병이 장구(章句), 곧 문장과 구절에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일종의 정신적 안식처를 찾는 활동이 바로 철학이다. 이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강박증이라고 한다. 반면 병리적인 강박증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객관적 효과도 없어서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외에 기억장애와 추상적 사고장애, 우울증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많은 천재들이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흥미로웠다. 이는 창조력과도 연결되어, 우울함을 일종의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산하면 훌륭한 시와 그림이 나오고 스스로의 '감옥'을 벗어나게 된다. 천재는 필사적으로 싸우지만 미치광이는 가혹한 현실에 절망한다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다.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은 일본 작가들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나쓰메 소세키도 피해망상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하고,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역시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 역시 극우적 사상에 경도되어 자위대의 궐기를 촉구하며 할복자살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아쉬웠던 것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저자의 주관적인 면이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academic한 느낌보다는 일종의 개인적인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랄까.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들도 꽤 되는 것이, 송대의 대나무 그림 전문 화가인 문동(文同)의 "대나무는 나와 같고, 나는 대나무와 같다."라는 말을, 대나무로 변하는 망상으로 해석한 것은 너무 앞서갔다는 생각이 든다. 초현실적 몽롱시들을 정신병 환자의 '신조어', 곧 의미 없는 말로 매도하는 것도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느낌이 들고, 다다이즘(Dadaism)을 일컬어 '비록 이 사조는 정신병원 밖에 있지만 정신병원 안의 '신조어'보다 더 사악하고 미쳐있으며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다이즘 역시 예술의 한 사조로서 허무적인 경향을 가지고 기존 체제와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한 문화 운동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혹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악하고 미쳐있다고 매도하는 것이 꽤 거슬린다. 그 외에도 읽으면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느낌이 들기보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읽는 듯한 부분이 많아서 기대치에 한참 못 미쳤던 느낌이 든다. 원문이 원래 그런지 번역상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간결하게 딱딱 떨어지지가 못하고 어색한 느낌이 드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천재와 광인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칭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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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1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글이 좋아서 괜찮은 책인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다디이즘에 대한 언급에서 급실망했네요^^;;
학술적인 내용이 읽는데 어려운 감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학술적이지 않고 너무 주관적으로 치우쳐져 있으면 좀 문제가 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교고쿠도 2010-11-12 11:06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대략 낚인(?)느낌이었어요. 이건 비문학이 아니라 완전 에세이잖아!!!! 하고...
제가 천재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해서 기대했다가 김빠진 책입니다. ㅋ
 
7기 인문 B조 마지막 도서 :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역사
앤서니 루이스 지음, 박지웅.이지은 옮김 / 간장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몇몇 독재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성립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불과 50년 전, 100년 전만 해도 그러한 자유는 지금보다 많이 억압되어 있었다. 앤서니 루이스의 이 책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원제 Freedom for the Thought That We Hate)>은 미국의 수정헌법 1조의 역사를 다루며 어떻게 해서 미국이 세계에서 의사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가장 폭넓게 보장하는 나라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수정헌법 1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회는 국교를 설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실천을 금지하는, 그리고 의사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또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회동할 수 있는 권리와 불만사항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그 어떤 법도 만들 수 없다."

저자는 연방헌법 제정 이후 권리장전이라고도 불리는 수정헌법 1조가 명시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미국 사회가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791년에 제정된 수정헌법 1조가 처음부터 잘 적용되어 왔던 것은 아니다. 불과 몇 년 후에 대통령을 조롱한 사람들이 투옥되고, 그 한참 후 윌슨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비판한 사람들이 무려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1960년경에는 뉴욕타임즈 신문사 역시 명예훼손과 관련된 문제로 피소되어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고,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적 인물의 사생활 침해 사건들 역시 표현의 자유와 개인 사생활 보호 중 어떤 쪽을 더 중시해야 할지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표현과 언론이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대중들의 여론과 판사나 대법관들의 판결문들이 수정헌법 1조 제정 초기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만 봐도 점점 더 표현의 자유 쪽에 손을 들어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면 네오나치즘이나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즘 등 공공의 복리를 해친다고 여겨지는 사상이나 주장과 같은,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들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까지 보장되고 또 제한되어야 할까. 이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다. 또한 공익을 위한 언론의 면책 특권을 어느 정도까지 보장해야 하는지,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와 충돌할 경우에는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역시 의문으로 남는다. 전체적으로 법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결코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 시각으로 진보와 보수 어떤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서술하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주목할 점은 미국에서 수정헌법 1조가 지금과 같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주기까지는, 민주주의나 자유와 같은 기본적 가치들이 지켜지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한국과도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2~30년 전 군부독재 시절만 해도 야간통행금지가 있고 머리 길이나 치마 길이까지 단속할 정도로 국민들은 자유가 없는 삶을 살아왔다. 언론사에서 목소리를 내기라도 하면 곧 보복을 당하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은 비교적 나아진 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네티즌이 기소를 당하고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사찰도 종종 있으며 노조 활동을 하면 좌파라고 탄압을 당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번역자 중 한 사람은 군법무관으로 있으면서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가 강제로 군복을 벗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불온서적 따위가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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