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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전생 체험 프로그램이 인기였을 때다.
텔레비전에서 코요태의 '신지'라는 여자가 전생 체험 하는 걸 우연히 보게 됐었다.
전생에서의 신지는 남자였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엄마에게 버림받고 거지로 성장하게 된다. 어느날, 신분이 높은 부잣집 잔치에 갔다가 그 집 딸을 보고 이루어 지지 못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도 울어서 검은 마스카라가 번진 그녀에게, 전생 최면술사가 물었다.
그 부잣집 딸은 누굴 닮았느냐고. 놀랍게도 '신지'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때 그냥 한참을 따라 울고 말았었는데, 이 책 <신과 함께-저승 편>과 맞물려...묻어두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전생에 누굴 사무치게 사랑하여 내가 되었을까?
우리 모두가 전생에서 사랑했던 그 누구라 생각한다면, 삶은 정말로 신비로운 게 아닐까?
과거의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염려하여, 지금의 나로 알맞게 실현된다고 생각하면...
나와 내 주변을 조금 더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동안의 난 전생이나 이승, 저승 따위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정신적으로 성숙치 못해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여서,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할까봐 접촉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
보조국사 지눌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기가 약한 사람이 자기가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을 하면 오히려 기가 죽어 정신 건강이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이런 사람은 자기 밖의 부처를 믿고 이승을 떠난 서방정토를 믿고 염불이나 외워야 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이승에서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마냥 불안불안한 내겐 좀 겁나고 못마땅한 내용들이지만, 그래도 수양을 제대로 하면 그 업보의 방향이 달라지고 누그러진다고 하니, '휴우~'다행이다.
마음 한구석을 쓸어내리며...수양에 힘써야겠다.
이 책의 주인공 김자홍은, 평생 남에게 서운한 소리 한번 못한 무골호인으로 직장에서 얻은 과로와 술병으로 서른아홉의 나이로 죽는다.
이렇게 죽게 되면 49일동안 저승에서 심판을 받고 갈 곳을 정하게 된다.
여기엔 억울한 사연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원귀도 있다.
“우선 전 자홍씨가 살아 온 얘기를 들을겁니다.”
염라국 국선 변호사 진기한의 이같은 주문에, 김자홍은 어디 살았고 어느 학교 무슨과를 나왔고 어느 회사를 다녔는지 이력서를 쓰듯 써내려간다.
하지만 이런 이력은 이승에서나 관심이 있을까...저승에서는 ‘뭘 잘했고 뭘 잘못했는지’만 본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심판 가운데 가장 뜨끔하였던 건,
“느닷없이 찔려서 받는 고통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비수...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것. 그것은 함부로 내뱉은 말입니다.”
“거짓을 전하여 오해를 불러일으켜 서로 다투게 하는 말.
전해서는 안 될 말을 전해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말.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다른 사람을 욕보이는 말.
이런 말들은 비수가 되어 다른 이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지요.”(중,101쪽)
입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대단하면, ‘혀를 뽑는다’는 뜻의 발설지옥에선 ‘입으로 지은 죄만 따로 심판할까?
발설지옥의 염라대왕은 컴퓨터를 배우는 데, 혀만 아니라 손가락도 뽑아야 하나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다,ㅋ~.
얼마든지 무겁고 심각할 수 있는 주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내서 좋았다.
웃음과 따뜻함으로 버무려내서 거부감 없이 찬찬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한빙지옥은 효도를 본다고 하셨죠? 그럼 전 안 될 거예요, 아마...”
“아예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이 말이죠.”
“돈으로 안 받습니다. 손과 발을 잘라가지요. 대부분의 죄는 손과 발로 짓는 것이기에...”
“하지만 이곳이 寒氷지옥인 이유는...타인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 자를 심판하기 때문이다.”(상,186,230쪽)
“박힌 못을 빼낼 수는 있지만...구멍은 남는단다.”(상,235쪽)
“다만 불행히도 피고인은 표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피고인은 그야말로...전형적인 한국 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을 하지 못할 뿐 마음속엔 늘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 있죠.”(중,12쪽)
“착하게 살 걸 그랬네요.”“저승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겁니다.”(중,56쪽)
“너는 좋은 가족과 친구들을 두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네 자신이 후에 그들에게 공덕이 되겠구나. 네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는 말에는 그들은 너로 인해 많은 가산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먼저 간 네 생각을 하겠지. 착하게 살아줘서 고맙다고...”(하,88쪽)
저승이라는 곳이, 이 만화에서처럼 깨끗한 영혼이 등장하는 살만한 곳은 아닐 것이다.
죽으면 그걸로 모든 게 끝나버려서 누군가의 꿈 속에 들어가서라도 “미안하다. 고맙다.”라고 말을 하기도 힘들 것이고, 49일간의 심판에서 깨끗한 영혼으로 판명되어 거듭 태어난다는 건 더 더욱 힘들지도 모른다.
저승을 믿어서 좋은 점은, 이승에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되는 정도가 아닐까?
오랫만에 영혼의 굳은 살을 떼어내는 것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