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열걸 1
미야기 아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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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걸 1

 

2016년 하반기에 일본 니혼 TV에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地味にスゴイ! 校閲ガール・河野悦子)'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드라마가 방영되면 한 번씩은 보면서 그중 재미있는 것을 골라 계속 돌려 보고는 하는데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도 그중 하나이다. 일본에서 방영되던 때에도 시청률이 잘 나왔던 걸로 알고 있다.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라는 긴 제목의 드라마의 원작의 제목은 의외로 짧았다. 그냥 '교열걸'. 원작이 있는지 모르고 그냥 드라마만 봤었는데 원작 소설이 있었다니!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으니 원작 소설도 꼭 읽고 싶어졌다.

 

드라마는 총 11부작(스페셜 포함)이지만 원작 소설은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열이라는 것은 '문서나 원고 등의 내용 가운데 잘못되거나 불충분한 점을 조사하고 검토하여 정정하거나 교정(p.12)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여자라는 뜻으로 교열이라는 단어 뒤에 girl을 붙여 만든 단어가 책 제목인 '교열걸'.

 

 

글의 분위기와 맞게 표지들도 너무 예쁘다!! 상큼~상큼! 화려~화려!

드라마에서도 극중 역할에 맞게 코노 에츠코 역을 맡았던 이시하라 사토미의 화려한 패션을 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표지들도 그 점을 잘 나타낸 듯했다.

원작 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하면서 내용이 살짝 달라졌지만 둘 다 충분히 재미있었다.

 

교열걸 1

표지의 주인공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노 에쓰코 또는 코노 에츠코! (발음상의 차이일 뿐 동일인물이다.)

그녀는 패션잡지 광팬! 오직 패션잡지만을 탐독한다! 패션에 살고 패션에 죽는다!

다른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only 패션잡지와 함께 해온 그녀다!

패션 잡지를 줄곧 좋아해 왔지만 대학교 2학년 때 경범사에서 출간한 한 잡지에 실린 '에디터스 백'을 보고 한눈에 반한 그때부터 에쓰코의 목표는 단 하나! 패션 잡지의 편집자!

"삶이란 언제나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그런 그녀가 어째서 교열걸이 된 것일까? 그것도 패션 잡지 교열부도 아닌 문예부의 교열부에서??

여러 잡지사 중 그녀의 목표는 '경범사'의 패션 잡지 부서에 취직하는 것. 거기서 경험을 쌓아 최종적으로는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읽은 잡지 내용이라면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경범사에서 발행한 한 잡지의 전속 모델 이름을 15개를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 돌발 질문에도 그녀는 "제가 보기 시작한 연도부터 헤아리면 《C.C》에는 전속 모델이 열일곱 명, 전속으로 보이지만 다른 일도 병행하는 프리랜서 모델이 열 명 있는데, 어느 쪽으로 할까요?"라고 오히려 되물을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다. 패션에 관한 것이 아니라도 패션잡지에 실린 내용이라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패션 잡지계의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경범사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패션 잡지 부서가 아니라 문예부의 교열부라니! 그녀는 열심히 일하면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부서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패션 잡지부로 이동을 하겠다는 목표만을 가지고 교열일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패션일 외에는 전혀 관심 없는 그녀가 관심 없는 교열부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누구나 그렇듯이 실수도 하고, 그녀가 그녀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인간적으로도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과정을 읽으며 상상하며 흐뭇했다.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교열에 관한 내용이 새롭기도 하고 내용도 재미있게 쓰여 잘 읽혔다. 그리고 각 화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에쓰코의 연수 메모'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에쓰코의 연수 메모 2

[초교] 교정지 제1탄. 이것을 교열한다.

[재교] 초교에서 교열한 부분이 반영된 교정지. 이것도 교열한다.

 

(중략)

 

[마감] 수정과 확인이 전부 끝나고 인쇄소에 전달! 출판사의 손을 떠나는 것.

[마감일] 편집자가 집에 못 가는 날.

 

'마감일=편집자가 집에 못 가는 날'이라고 메모해둔 에쓰코.

 

 에쓰코의 연수 메모 5

【발행처】'OO의 발행처'라는 식으로 쓴다. 그 책을 낸 출판사를 가리킴. 발행의 실권을 쥔 아내(?)같은 느낌인가? 그렇다면 작가는 대부분 공처가겠네? 나중에 알아보자.

 

'출판사=실권을 쥔 아내, 작가=공처가'라는 에쓰코.

요런 센스가 있는 에쓰코의 교열부 직장생활이 너무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런 일본 소설들은 잘 읽히기도 하고, 머릿속에 그림들도 너무 잘 그려져 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이미 드라마를 봐서 장면들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야기가 잘 그려진다.

 

비록 일본 출판사의 교열 업무이기는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교열부의 일에 대해 알게 되어 책을 읽을 때 한 번씩은 그들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할 것 같다. 간간이 등장인물들이 교열하는 작품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도 재미를 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까지 에쓰코는 평범하게 마무리 짓지 않았다! 에쓰코, 괜찮은 거니???

이어지는 2권, 3권에서는 계속되는 에쓰코의 성장과 연애 이야기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에쓰코는 과연 아프로 헤어와 잘 이어질 수 있을까?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패션 잡지 《라시》로 이동할 수 있을까?

 

소소한 에쓰코의 일상 속 애틋한 연애, 현실과 판타지, 코메디가 공존하는 직장생활, 그녀의 성장기가 궁금하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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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당록
이이담 지음 / 청어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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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당록」

 

 

「조선반당록」

 

조선시대의 반당의 기록/문서? 반당?? 생소한 단어였다. 반당이 뭐지?

 

반당: 조선시대 종친·공신·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호위병.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439&cid=46622&categoryId=46622)

 

조선반당록이란 조선시대의 반당이라고 불리는 호위병에 대한 기록 또는 문서를 뜻하는 말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표지부터가 너무 예쁜 조선반당록. 어떤 내용이 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평소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역사 로맨스인데 신간이 나올 때면 한 번씩 궁금해지고는 한다.
왠지 더 안타깝고, 왠지 더 애틋하고, 애잔한 느낌이랄까.
지금이야 연락하고 싶으면 언제든 어디에 있든 휴대폰도 있고, 이메일도 있으니 연락하기가 너무 편하고 쉽지만 옛날에는 안부라도 물으려고 하면 근처에 살지 않는 한 몇 날 며칠을 혹은 그 이상이 걸려 기다리다 애가 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근처에 산다 할지라도 바로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이니 아니었으니 그것도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애타게 가족들의 안부, 상대방의 안부를 기다렸을까.
지금보다 여러 가지 제약이 훨씬 많았던 시대의 사람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참 짠하다는 생각이 든다.

날도 점점 쌀쌀해지니 가을 타는 느낌도 살짝 느끼고 싶고 해서 오랜만에 역사 로맨스 소설을 손에 들었다.

 

 

송화영.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하며 자랐다. 어머니의 지기였던 어리니가 젖을 물려 목숨만은 살렸다. 생전 화영의 어머니가 허드렛일을 했던 영월관이라는 주루에서 화영을 들이려 했지만 그동안 관심도 없었던 아버지 송학수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화영이 열셋이 되던 해 화영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해버리고 떠나버린다.

 "계집으로 살지 말거라. 네가 계집이라는 사실을 잊어. 그게 너를 위한 길이니라."

 

정 율. 수려한 외모와 함께 출중한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는 율. 그와 형조참판인 그의 아버지 정충경에게는 오래된 비밀이 있다. 율은 그 비밀이 결코 달갑지 않다. 그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는 비밀이다.  

 

 어둠이 스며야 떠오르는 달. 태양처럼 찬란할 순 없어도, 칠흑 같은 밤중을 밝히는 달처럼 살아가리라.


 

'조선반당록'은 비운의 홍위 (단종), 수양대군 (세조), 한명회, 신숙주, 정충경 등 많은 역사 속 인물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위(단종)과 수양대군(세조),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남겨진 이들의 삶.

수양대군과 단종.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이 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건들은 얽혀든다.

어린 왕 단종과 조카의 자리를 차지한 수양대군의 이야기에는 그 과정에서 아마도 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희생된 사람들의 가슴 아픈 가족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화영과 율.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그 안타까운 역사 속에서 아마 있었을 법도 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 그들의 안타깝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알려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지 않은 부분들은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빈 공간을 메꾸듯 채워 넣어 '조선반당록'이라는 그녀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역사적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팩션 사극이라는 장르의 소설들은 '역사가 스포'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끝을 알기에 더 안타깝기도, 애틋하기도 하다. 팩션 사극을 읽는 이유가 역사적 사실들을 파악하려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이야기들에서 재미를 느끼고자 함일 것이라 생각한다.

 

로맨스라는 장르를 읽는 것은 오랜만이었지만 한창 TV에서 인기를 끌었던 '구르미 그린 달빛'은 엄마와 함께 즐겨 보았다. 박보검보다는 김유정을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예쁘게 커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구나 생각했다. 소설 특히나 이렇게 그림이 잘 그려지는 소설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장면들을 그리면서 읽게 되는데 '조선반당록'을 읽다 보니 최근에 시청했던 '구르미 그린 달빛'이 생각나기도 했다.

 

'꼭 정통 사극이어야만 한다!'라는 정통 사극파 아니라면, 

'당시 역사 속 인물들이 이런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이런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라는 

열린 마음으로 읽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 서평은 출판사 청어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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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문학동네)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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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소설로도 인기를 끌었고 영화로 제작되어 더 관심을 끌었던 밀레니엄 시리즈.

 

밀레니엄 시리즈가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포스터와 예고편에서 본 영화 속 여주인공인 리스베트의 상당히 강한 스타일에 살짝 거부감이 들어 선뜻 볼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원작 소설을 읽고 나니 그런 여주인공의 스타일이 꽤 설득이 되었다. 러닝타임이 약 3시간이나 되었지만 시간을 내어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보다는 원작 소설에 점수를 훨씬 더 주고 싶다.

 

 

 

 책의 제목이자 소설 속의 '밀레니엄'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회고발 잡지의 이름을 말한다.

687페이지라는 결코 적은 수의 페이지가 아님에도 몰입도가 상당했다. 저자 스티그 라르손이 생전 기자 생활도 하고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생전 추구했던 기자정신이 글 속에 녹아들었을까? '밀레니엄' 속 등장인물이며 기자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추구하는 기자 정신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p.82

그는 동료 기자들을 경멸했고, 그 경멸은 인간의 기본적 윤리만큼이나 명백한 진실들에 기반했다. 그가 보기에 등식은 간단했다. 터무니없는 투기로 수백만 크로나를 날린 은행 이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사욕을 채우려고 유령회사를 만든 CEO는 감옥에 가야 한다. 마당에 공용 화장실을 놓고 비좁은 원룸을 학생들에게 임대하면서 세금까지 떼먹으려고 월세 영수증을 발행해주지 않는 악덕 집주인은 죄인 공시대에 매달아놔야 한다.

 

어느 나라나 비리, 부정부패 없는 나라가 없겠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았다. 

 ​p.36

"~ 정부가 수조에 이르는 혈세를 퍼주었고, 거기다 보너스로 외교부를 동원해 동유럽의 문까지 열어주었다. 기업들은 돈을 받아 '현지 합작 벤처회사' 따위를 만들어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비즈니스 판에선 흔히 있는 일 아냐? 어떤 사람들이 죽어라 세금을 내면 다른 놈들이 그 돈으로 호주머니를 두둑이 불리는 것,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지!"


처음에는 스웨덴 어의 낯선 발음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지명 등이 익숙지 않았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페이지 터너였다. 예쁘게 정돈된 목가적 마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은 마을의 예쁜 풍경과는 대조적인 면 때문에 더욱 사건을 잔인하게 보이게 만든다.

 

밀레니엄의 사회 고발 잡지라는 특성상 처음엔 주로 기업 간 비리에 초점을 맞추는 듯했다. 대기업 간 비리, 혹은 기업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리들을 파헤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밀레니엄의 일 외에 많은 양의 페이지를 할애해 말하고 싶은 것은 더 있었다.

 

 ​p.16

스웨덴 여성의 18퍼센트는 살면서 한 번 이상 남성에게 위협을 당한 적이 있다.

 

 ​p.156

스웨덴 여성의 46퍼센트는 남성의 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다.

 

 ​p.318

스웨덴 여성의 13퍼센트가 심각한 성폭행을 당하 경험이 있다.

 

 ​p.520

스웨덴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 중 92퍼센트는 고소하지 않았다.

 

 ​p.521

" ~ 여자들은 끊임없이 실종되고 있지만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든. 예를 들어 이민자들 말이야. 러시아 출신 매춘부랄지.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스웨덴으로 들어오고 있잖아."

 

여성들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여성이어서, 사회적 약자여서, 자신보다 힘이 약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범죄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너무나 화가 난다.

 

잠시 밀레니엄과 떨어져 헨리크의 일을 맡게 된 미카엘. 전혀 진전이 없던 사건은 끔찍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드러나는 끔찍한 일들에 충격적이었다가 희생자들을 생각하니 감정이입이 되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그 희생자들의 고통을, 맺힌 한을, 남은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슬펐고, 화가 났다.

 

예전에 나는 오히려 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땐 나 스스로 겁이 많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내가 겁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금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라는 말에 너무나 공감이 간다.

 

여성 혐오, 남성 혐오. 혐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 절대로 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누군가를 그토록 혐오하면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제대로 된 생각,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진지한 생각도 없이, 지식도 없이 순간적으로 내뱉는 말에 현혹되어 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예쁜 것만 보아도 부족할 시간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도 마지막 순간에는 후회가 가득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너무 자주 뉴스에서 보도되는 범죄 소식을 들을 때면 무서운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범죄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약자를 가려낼 뿐이다. 하지만 성범죄에서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높은 건 사실이기도 하다. 잠재적 피해자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이 될 수도 있다. 이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아마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것이고, 사람들의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밀레니엄 시리즈1부'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는 헨리크 방에르가 원하던 진실도 밝혀졌고,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원하던 진실도 밝혀졌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밝혀낸 벤네르스트룀의 각종 비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살짝 감정 이입을 해보았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진실. 전 정권들의 비리도 깨끗하게 밝혀졌으면 얼마나 통쾌하고 속이 시원할까.

헨리크와 미카엘은 각자가 당시 가장 원했던 것을 찾았지만 1부 전체에서 어찌 보면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도 할 수 있는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도 없고,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2부로 이어져 다뤄지지 않을까. 영화 포스터 때문에 살짝 호감도가 떨어져 있었던 리스베트에대한 이미지는 책장을 넘길수록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그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편견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다니. 나도 아직 멀었나 보다. 그녀의 과거가 어떤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다음 시리즈에서는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위한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스티그 라르손이 남긴 작품이 밀레니엄 시리즈 단 3권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그의 글은 상당히 흡인력이 있었다. 스티그 라르손이 남긴 밀레니엄 시리즈는 3권이지만 또 다른 스웨덴의 작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이 그 뒤를 이어받아 밀레니엄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을 출간했다. 그가 스티그 라르손이 남긴 앞의 시리즈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만의 개성을 살려 이어갔을지 궁금해진다. 

 

 

* 이 서평은 출판사 문학동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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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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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그녀의 첫 장편소설 '아몬드'로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 손원평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서른의 반격」.

무거운 내용이었지만 가독성이 좋아 잘 읽혔다.

 

「서른의 반격」은 그녀의 흔한 이름만큼이나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이 주인공이다. 지금 이 시대의 보통 사람의 이야기이다. 보통 사람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가고 싶지만 세상은 그 보통 사람에게는 그렇게 살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공감 가는 내용도 많고, 생각해 볼 것들도 많은 이야기. 너무나 현실적이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짓게 되는 이야기이다.

점점 각박해져가고, 영악해져가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끼여 살아보려 발버둥 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가 자꾸만 작아지고, 숨고 싶고, 그러다 결국 세상에서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린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이런 비슷한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소외되어 버린 작은 존재들. 정규직 취업에 실패하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고 있는 비정규직 직원. 애써 쓴 대본을 대기업에 빼앗겨 버린 무명작가. 몸을 망쳐가며 레시피를 개발했지만 사기당해 빼앗겨 버린 전직 떡볶이 가게 사장. 자신이 거의 쓰다시피 한 책이 그대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판되어 억울한 사람. 이들이 모여 이룬 작은 반란! 사소하게 하지만 용기 있게 지속되는 그들의 존재에 대한 외침.

 

 p.8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다. 그전에 벌어진 피, 광장, 투쟁의 흔적은 사진과 다큐에서나 본 겪지 못한 옛날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몇 발자국쯤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몇 벌자국이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부당함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당연히 보통 사람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대세에 머리를 조아려 수긍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나는 몹시 특별난 사람이라고,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주목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야 하는 세상이 왔다. 나는 하필이면 이 시대에 청춘의 끝자락을 맞이한 숱한 여럿 중 하나이다.


'보통'의 기준은 무엇일까? 여기서 '보통'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의 '보통'이다.
'보통'이라는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예전에 보통이었던 것이 지금은 더 이상 보통이 아닐 수도 있듯이 지금 보통이라는 것도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보통'의 기준이 다를지라도 보통 사람이 원하는 것은 시대에 상관없이 같지 않을까.

 

 ​p.9

나는 추봉(秋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운명이었다.

 

추봉이라니! 추봉으로 살게 되면서 앞으로 겪을지 모르는 일들에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읽어내려가던 중. 역시 엄마는 위대했다. 출산이 임박해 통증이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각서를 결국 받아내었다. 추봉이 될 뻔한 주인공은 대신 김지혜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첫 번째 수단을 갖는 셈이다. 이름은 '나'라는 존재에 속한 일부인데 간혹 그 일부에 의해 존재가 이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개명을 하기도 한다.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아무튼 추봉은 할아버지의 유언처럼 남겨진 이름이라 개명도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기우였다. 주인공에게는 참 다행한 일이다.

 

주인공 김지혜는 그 당시 흔했던 이름만큼이나 튀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녀는 현재 서른 살의 나이로 DM 아카데미의 말단 인턴으로 일해오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는 정직원이 되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본사에서 일할 기회를 갖겠다는 꿈을 가지고서.
 

 ​p.32

그 자리는 팔짱을 낄 수 있는 자리였다. 다리를 꼴 수도 있고 갑자기 울린 핸드폰에도 여유 있게, 잠시만요,라며 전화를 받아도 되는 자리.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권력자라고 생각할 거다. 설사 그게 별 볼 일 없는  작은 아카데미의 인턴 자리 면접일지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결정권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일정 수준의 경험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앉을 수 있는 다리.

 

'그래, 그 자리에 있으면 그런 태도가 당연한 거야.'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싫다. 하지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더 싫다.

interviewee의 태도가 중요한 만큼 interviewer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해 해 온 노력은 충분히 인정받을만하다. 또한 면접관들은 면접자들에게 자신의 회사에 대한 이미지를 실제적으로, 직접적으로 제일 먼저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험하고 듣는 말들에 의하면 마치 회사의 이미지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권위의식에 취해 무례하기까지 한 경우도 종종 있다. 면접자들도 어찌 보면 일단은 회사를 찾은 손님들인데도 말이다. 서로 기본적인 예는 갖추었으면 좋겠다.

 p.34

정진 씨에겐 그런 수고나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다. 정진 씨는 내 친한 친구지만 존재하지 않으니까.
정진 씨를 만들어낸 건, 이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하나의 숨통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언제나 같은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숨 막히는 일이다. ~ 다들 그런다고 생각하면 어렵진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도피처가 필요했다.

 

p.35

어딘가 정말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진 씨같이 아무 때고 기댈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

 

 p.37
생전 만나볼 일 없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나를 웃게 한다.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으니 조금쯤은, 적어도 하루쯤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거다.

 

힘들고 서러운 비정규직의 직장생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직장이라는 곳이 맡은 일 외에도 감정 소모 또한 엄청난 곳인 것 같다. 그곳은 직장생활이 아니라 직장 버텨내기이다.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 버텨내는 곳. 그곳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원동력을 제공해줄 자신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p.87

그에 따르면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건, 장난 혹은 놀이였다. 놀이하듯 부당한 곳에 일침을 가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무언가가 변하거나 확산될 것이다. 그게 그의 주장이었다.

 

세상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은 함께 뭉쳐 용기를 내기로 한다. 더 이상 세상이 자신들을 얕보고 이용하지 않도록 자신들의 인생 연극에서 반전 스토리를 만들 계획이다. 스스로가 세상에 끌려가지 않고 당당히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목소리를 낼 것이다.

 

모든 관객들이 무대 위로 당당히 올라갈 수 있는 사회.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소신 있게 행동하면 그것이 모여 바뀔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고 사소할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p.233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륙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온몸으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니 나를 보아 달라고 외쳐야 하는 세상에서 그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인정하며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힘든 현실이 자꾸 그것을 잊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개인은 특별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특별함의 기준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나답게 반짝인다.

 

 

 

* 이 서평은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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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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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제32회 만해 문학상 최종심 대상작에 오른 작품들 중 하나인 은희경 작가의 단편 소설집 「중국식 룰렛.

이 소설집에는 중국식 룰렛 / 장미의 왕자 / 대용품 / 불연속선 / 별의 동굴 / 정화된 밤의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중국식 룰렛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모여있는 곳. 미스터리 한 K의 술집.

 

 p.9~10

K의 술집에서는 세 종류의 위스키만을 팔았다. 씽글몰트로만. 다른 술은 없었다. 주문하는 방식도 여느 술집처럼 메뉴를 보고 고르는 게 아니었다. ~ 술의 정체는 끝까지 불문에 부쳐졌다. ~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상표가 무엇이 됐든 제 입맛대로 즐기면 그만이라는 게 그 집의 술 해석법이었다.

 

젊은 술집 주인 K.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남자이다.  

그리고 '나'. '나'는 요즘 가정에서 직장에서 최악이랄 수 있는 상황을 겪고 있는 의사이다.

어느 날 K는 '나'에게 전화해 이유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가게에 꼭 와달라고 했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가보기로 한다.

 

K의 술집.

K의 가게에는 K와 '나'외에도 K와 비슷한 또래 같은 아르마니 정장을 입은 청년과 검은 안경테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K는 가게 문을 닫고 '나', 그리고 그날 특별한 위스키를 주문한 그들과도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한다. 이제 그 네 사람은 모여 술을 마시며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K는 세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며 대화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다. 이야기는 주로 아르마니 청년과 중년 남자가 하고 있다. 스스로가 얼마나 운이 없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K는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p.44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그는 최소한 스스로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거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니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의미일까?

아무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병이 비워졌고, K는 새 술과 함께 그들에게 일종의 진실 게임을 제안한다.

'한 사람이 질문을 하고 지적받은 사람이 대답하고 술을 마신다. 대답을 못하면 술을 마실 수 없다'라는 것이 이 게임의 룰이다. 그리고 그 게임은 K가 첫 질문을 나에게 던짐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신 생애 최고의 날은 언제였습니까?"

 

 ​p.11

그리고 말 그대로 위스키가 '영혼' (spirit)이라고 불린다면 씽글몰트야말로 그중에서도 가장 정제된 형태이며, 순수한 영혼은 천사뿐 아니라 악마의 것이기도 하다.

 

 ​p.53

죽음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천사의 몫도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 영혼이 씽글몰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파티의 진실게임을 통해 K는 원하는 답을 얻었을까?

 

장미의 왕자

 

찻집에서 일하는 '나'.

'나'가 일하는 찻집에 수첩을 놓고 간 '그녀'.

그녀에게 수첩을 준 '나'이자 '그'​.

이 세 사람의 연결 고리인 검은색 소가죽 수첩.

 

 ​p.58

운명이란 비정하고 무자비하지만 늘 전령을 먼저 보내 경고를 할 만큼은 용의주도하다고 어릴 때부터 나는 종종 생각해왔다. 그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방심하는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집행해버린다.

나는 경고를 받아들이는 의미로 카운터 아래 칸에 놓아두었던 숄더백을 꺼내 그 안에 수첩을 집어넣었다.

 

 ​p.74

수첩은 검은색이고 소가죽이었는데, 미래의 나에 대해 뭔가 적혀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를 왜 떠났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이야기의 중심은 찻집의 '나'와 '그'.

 

 ​p.59

나는 그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나마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알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함박눈이 미친 듯이 내려서 귀퉁이에 홀로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봄이 되어서야 당신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갑자기 느껴진 기척. 그리고 떨어진 명함.

그녀가 운명의 경고로 받아들인 수첩처럼 이번에도 운명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낸 것일까?


 

▶ 대용품 

 

'봄밤-멀미-J-해후-소년과 소녀-소년과 소년-봄밤'의 소제목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야기.

어린 두 소년이 함께 했던 '봄밤'에서 혼자가 된 소년의 '봄밤'

이 두 소년의 사연이 놀랍고도 짠했다.

 

 ​p.105~106

그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대용품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래서 자신의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거라고. ~ 왜냐하면 어른이니까.

 ~

 잘못 어른이 돼버린 사람에게도 아주 가끔 어린 시절의 짧은 꿈과 해후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그것은 생의 찬란한 진품을 되찾는 순간이며, 그때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고 불꽃의 그림자가 강물에 어리면서 진짜 축제가 시작되는 거라고. 그 축제에는 오랜 세월 그토록 멀어지려 했던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해줄지도 모른다. ~

 

그 소년은 자라 성인이 된 후인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또 다른 소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 불연속선

 

'가방'에 얽힌 '그'와 '나', 그리고 사진.

 

그의 이야기.

그와 나는 같은 날, 같은 공항으로 입국해 가방이 바뀌어 버린다. 그의 가방을 가져가버린 '나'에게 계속 연락을 하지만 그는 아무 연락도, 보낸 문자메시지의 답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는 날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나의 이야기.

'나'는 왜 가방이 바뀌었음에도 일주일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그와의 만남도 불연속선에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사진.

 

 ​p.133

그런 생각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생은 절취선처럼 불연속적으로 이어졌다가 약간 위태로운 절단면에 이르러 끊어져버리는 것이니까.

 

 ​p.137

그 뒤로도 그는 내가 자주 자신을 놀라게 만든다고 했다.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일기예보에서 보던 불연속선을 연상시킨다는 거였다.

 

담고 옮기고 꺼내는 것 중에 그릇과 사진, 가방이 있다. 이따금 그것들은 불연속선의 끝에 자리 잡아 화살표처럼 방향을 가리켜 보인다. 그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릴 것이다.


 

▶ 별의 동굴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는 9년째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마흔여섯 살의 평범한 독신 남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그의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형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그는 그의 삶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 나름의 기준에 만족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해진 부정맥으로 수술 일정이 잡히고, 그는 그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아마 겁이 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p.163

어떤 인생 말인가. 그는 중얼거렸다. 나에게 좋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언제였을까.

 

 ​p.168

대체 이처럼 비겁한 자기 위안의 논리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박탈감에 굴복해왔던 것일까. 식은 밥 같은 중간지대의 안전이 그에게 남긴 것은 고독뿐이었다.


▶ 정화된 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 불안한 그녀. 그녀는 안정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학교 근처의 성당을 찾게 되고, 거기서 우연히 성가를 듣고 감명을 받아 성가대에 들어가게 된다. 후에 계속 성당을 다니며 젬마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다.

같은 성가대 소속이며 지휘자인 가브리엘을 짝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잘 챙겨주는 로사에게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세상의 비밀은 없는 법. 비밀만 없으면 다행이겠으나 그녀의 비밀을 안 후의 사람들의 태도가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그다지 취향을 내세우지 않고, 튀지 않는다. (인물 묘사를 보면 좀 튀는 인물들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용조용하다. 단지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 속에 섞여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거창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평범함이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일지도 모르고, 내 주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 이 리뷰는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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