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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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멀어졌지만 한때 판타지와 무협지에 취해 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기연을 얻은 주인공의 한계를 모르는 무위와 환상적인 마법, 상상 속의 존재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현실에도 있을 것 같은 종족과 존재들을 보는 게 그렇게 재미날 수 없었던 거다.


 가끔씩은 단순한 장르 소설의 수준을 넘는 수작을 만난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고, 복잡하면서 어려운 책들에 천착하기 시작했던 것만 같다. 


 그래서였다. 

정말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을 읽어볼 생각을 했던 이유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한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하면 '죽음'을 떠올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필멸과 소멸이라는 전제가 인간을 규정하고, 가능성과 두려움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인 흡혈귀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흡혈귀, 양귀라고도 하고, 하이랜더라고도 하고, 고지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연히 제주에 닿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이어지는 살변, 사건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시체를 모아서 태우는 관직에 있던 염일규를 제주에 파견한다. 그러나 사건은 간단히 해결되지 않고, 희생자와 희생을 저지하려는 자, 그리고 고지인 사이의 대결이라는 피바람이 조선 땅에 불어닥친다.


 표지에 적힌대로 임금을 지키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대결이 흐름의 중심에 놓인다.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 결과는 역사가 말하고 있으니 궁금한 자는 조선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고지인'이라는 제목은 흡혈귀의 기원이라고 하는 예수를 칼로 찌른 병사에게 걸린 불사의 저주와 그 저주가 옮아간 사람들을 '하이랜더'라고 부른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하이랜더 = 고지인 이라니, 단순하면서도 어쩐지 우습고, 가벼우면서도, 그럴듯한 등식이다.


 이글의 제목으로 삼은 것처럼, 이 소설은 '죽지 않는 시간조차 죽일 수 있는 소설'이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면의 대결이 궁금했는데 마침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이 책을 읽어봐도 좋겠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생소한 어휘와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흡혈귀와 조선시대, 사랑과 의리, 왕과 신하의 다툼까지 그리고 있다보니 두 권으로는 부족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 '닥터 이방인'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작가인 최지영 씨를 믿어 봐도 좋겠다. 

 

 닥터 이방인의 원작인 <북의>가 이 작가의 작품이니 말이다.


 어떤 책에나 아쉬움은 있기 마련이나, 이 책에서는 굳이 찾지 않기로 한다. 괜스레 의미를 부여하고, 소위 순수 문학에서 찾고자 하는 의의나 깨달음이라는 잣대를 여기에까지 들이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혹시 상상해 본 적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의 침침한 골목에서 살아남은 고지인이 누군가의 피를 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고?

 괴이한 일은 쉬쉬하여 감추기 마련, 세상에 기괴한 일이 적지 않으므로 한 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시, 주변에 고지인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사람은 없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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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지비원 옮김 / 현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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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유명한 작가입니다. 

마지막 작품을 남긴 것이 100년도 더 전임에도 지금도 일본에서는 국민적으로 읽히는 국민 작가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 혹은 작가 중에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작가가 있는가를 떠올려보면 조금은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시험을 위해 공부하면서 기억한 이름은 있어도 작품이 기억에 남는 작가는 얼른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랄까요, 지금의 일본 사람들 역시 나쓰메 소세키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작가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거야 지금도 나쓰메 소세키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 쓴 책의 제목이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 책의 저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오쿠이즈미 히카루라는 사람은 분명 나쓰메 소세키를 소세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거야 이 책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니까요. 아주 여러 번 소세키의 작품을 읽었을 것이고, 다양하게 해석해보고 또 썼을 것임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은 몰라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아는 분은 제법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작품이 나쓰메 소세키의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하네요.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지만 대문호, 재능 있는 작가들은 대부분 처녀작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이제 좀 믿을만하다 싶으신지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어쩌다 보니 저도 이 작품은 세 번쯤 읽었네요. 하지만 지금도 그 고양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었거든요. 그냥 '고양이'로 살다 '고양이'로 죽습니다. 

 이 고양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건 회색이나 흰색이 섞여있거나, 노랑과 흰색이 섞인 고양이의 모습입니다. 섞인 것도 얼룩얼룩하게 섞인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섞여서 그 경계는 있지만 어느 색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색일 거라는 생각을 해요. 

 나름의 근거라면 하나쯤은 있습니다. 바로 이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를 부르는 호칭이죠. 골목대장 격의 고양이는 검둥이입니다. 어쩐지 야쿠자 같은 느낌이라 느낌이 팍 오는 고양이죠. 또 하나는 얼룩이인데, 일찍 죽습니다. 얼룩이나 검둥이가 아니라면 역시 회색이나 흰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구체적으로 왜 그렇냐고 물으신다면 모르겠다고, 그냥이라고 밖에는 답할 수가 없네요.


 이 책 얘기를 좀 하자면, 쉽게 말하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해설집' 혹은 소세키 '읽기 안내서'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한 권만 읽어도 소세키의 작품 10권을 읽은 것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기적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소세키 작품을 여러 권 읽었거나, 여러 번 읽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


소세키를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합니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가뿐하게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고 쉽습니다. 흔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작품 해설을 생각하고 '거기서 거기지 뭐'라고 여기신다면 아,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니까, 마음대로 하셔도 좋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총 10장에 걸쳐 10 작품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중간에 들어있는 소세키에 얽힌 칼럼도 쉽고 가볍게 읽힙니다. 이것으로 또 하나의 진리가 증명되는데요. 그 진리란 다름 아니라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어렵게 설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설명까지 쉽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하나는, 무엇인가가 쉽게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면 함부로 그것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안다고 믿고 싶고, 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는 것 같은 것'이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 스스로도 조심해야지 싶은 생각이 드는 부분이라 제가 적고서도 마음에 와 닿네요. 


혹시 소설은 재미가 없어서 읽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 재밌는 부분을 옮겨와 보기로 하겠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에는 아무런 재미가 없었던 소설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재미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예전에는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소설의 재미란 그때그때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설이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그 소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쪽

소설가 답다고 해야 할까요. '소설이 시시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그 소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보라고 하다니 말이죠. 하지만 저 역시 어느 정도는 이 견해에 공감합니다. 함량 미달의 소설이 아니라면, 특히 그것이 고전의 반열에 들고 꾸준히 읽힌다면, 그 책은 결코 시시하거나 재미없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나름의 재미를 추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대로 좋겠지만 시시하니까라거나 재미없어서라며 언젠가 읽어볼 가능성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이 시시하고 편협한 태도라는 건 분명합니다.


소세키의 작품과는 무관하지만 또 한 가지 좋은 이야기가 있어 나누고자 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독서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삶은 독서에 도움이 됩니다.
21쪽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삶은 독서에 도움이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재밌으면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경험이 늘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재밌어지는 것이 독서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는 사람의 복잡한 감정이나 욕구와 욕망의 충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 재미없다고 느꼈다가 자라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흥미롭게 여기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삶이 독서에 도움이 된다는 표현이 마음에 콕 박히더군요.


 책의 지면 대부분을 소세키 작품에 숨겨진 비밀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방법들을 이야기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책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 책만 읽어도 소세키의 작품 10권은 읽은 셈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작품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혹시 읽고 싶어 지는 책이 있다면 꼭 마저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네요. 


 타인의 해설이란  아무리 완벽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법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내놓은 해석은 부족함이 느껴지더라도 만족의 수준이 남다르게 됩니다.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고 했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분명 독서도 삶에 도움이 됩니다. 삶은 독서에 도움이 되고, 독서가 삶에 도움이 되기에 같은 작품을 다시 읽었을 때 다른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재미가 한층 크고 깊어질 것입니다. 


읽기 어렵다고 하는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기 위해 하는 독서마저도 의미가 있습니다. 독서도 결국 끈기 있는 연습으로 다져지는 능력이니까요. 

 책에서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책에서 얻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제가 찾기를 권하는 것은 자신의 삶입니다. 책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결코 교차할 수 없고, 마주할 수도 없었던 두 세계가 만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기적은 종종 화학작용에 비유되기도 해요.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무엇이 나오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죠. 화학작용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신화는 믿지 않는 주의입니다. 그러나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책들은 분명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인생의 무엇을 바꿀지, 어떻게 바꿀지는 읽는 이가 붙들고 있는 방향키를 어느 쪽으로 트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독서란 어디까지나 자율적이고, 열려있는 활동입니다. 그러니 가뿐하게 읽어나가세요.


 그것이 나쓰메 소세키든, 밀란 쿤데라든, 헤밍웨이든, 찰스 디킨스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려움도, 시시함도 내려놓고 산책하듯 가볍게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그 시작이 이 책이어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네요. 세상에 이렇게 읽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될 테니까요.


 독서에 도움이 되는 삶과 삶에 도움이 되는 독서, 즐기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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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술래잡기 모삼과 무즈선의 사건파일
마옌난 지음, 류정정 옮김 / 몽실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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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절망적인 상황을 악몽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건 악몽이야!!" 하고 말이죠.

어떤 지독한 악몽이라도 깨어나면 사라지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현실이 그 어떤 악몽보다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이건 악몽이야라는 말속에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부정을 부정하고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제 선택의 시간입니다. 

 당신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억지스럽게 부정하는 것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정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시겠습니까?


 <사신의 술래잡기>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에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재적인 능력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탐정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모삼'

천재 탐정 모삼의 이름은 천재 법의학자 무즈선의 이름과 함께 나날이 유명해져 갑니다. 


그러던 중 기이한 사건, 아니, 참혹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람의 시신을 천 조각 이상으로 절단하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요.


범인은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보다 더 미쳐있는 변태 살인광이 분명했습니다. 

당연히 모삼은 그 사건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삼에게 경고가 날아듭니다.


"더 이상 이 사건을 파고들지 말아라. 계속한다면 너에게 지옥을 보여주겠다."하고요.


당연히 모삼이 포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더 깊이, 더 자세히 사건 속으로 들어가지요. 

그러던 어느 날 모삼은 현실 속 악몽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범인이 약속했던 '지옥'을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모삼은 범인의 칼에 수십 차례나 난도질당합니다. 

고통스러웠겠지요. 하지만 정말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준 것은 사랑하는 여자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건 이후 몇 개월 간이나 기억을 잃고 지내던 모삼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기억을 되찾습니다. 

그러자 범인은 모삼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게임을 시작하자며 편지를 보냅니다. 


한 쌍의 장갑과 함께 도착한 편지. 

그 편지가 게임의 시작을 알립니다. 

범인을 쫓고, 범인에게 쫓기는 술래잡기 게임의 시작을. 

사건의 범인은 얼마나 철두철미한 인간인지 무수한 사건을 벌이면서도 증거 하나, 흔적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 

단서는 단 하나.

모삼의 최면을 통해 알아낸 'L'이라는 타투입니다. 

모삼과 무즈선은 그 타투를 보고 범인을 'L'이라 부릅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들에도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은 사건의 배경과 동기가 기이하고, 어떤 사건은 범행 수법이 기이하며, L의 의도 역시 기이합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경찰이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더라도 미궁에 빠져 버린 '미해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시그널'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며 방영을 마쳤습니다. 그 드라마의 소재 역시 '미결 사건'이라고 들었습니다. 

증거의 불충분, 공소 시효의 소멸, 실제 범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에게 지워진 형벌. 

해결되지 않고 몇 년 혹은 몇십 년이나 미해결로 남겨지는 사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경찰이 인지하지 못한 사건들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보다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L의 의도가 기이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미해결 혹은 경찰이 인지하지 못한 사건들을 게임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치광이, 변태 살인범이 분명한 L이 경찰의 시야 밖에서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고, 범인들을 검거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L의 정체만큼이나 그 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범인을 잡는 쪽을 '정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정의가 너무나도 무능력한 탓에 무고한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때도 그 정의를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범죄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무능한 정의를 대신해 자신이 정의를 행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혔던,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직접적인 제재 혹은 위해를 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L은 그런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들의 복수를 돕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해결을 도와준 셈이 됩니다. 


의문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누가 더 정의로운 것일까요?


새삼스러운 의문은 아니지만 L을 보며 정말 새삼스럽게 떠올려봤습니다.

"도대체 정의란 것이 무엇인가?" 

"이 세계에 아직 정의가 남아있기는 한가?"


한 가지 기대는 이 책의 다음 이야기들을 지켜본다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있습니다.

L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했는지 알게 된다면 말이죠.


물론, 모삼과 무즈선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에도 흥미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건들은 하나의 곁가지일 뿐 줄기나 뿌리가 되지는 못하겠지요. 


<사신의 술래잡기>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미스터리 소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목격한 작품입니다. 그 죽음의 방식도 잔인하고 또 가혹하더군요.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물음도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추악함과 비극적인 이야기들과의 필연적 마주침입니다. 뉴스와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무수히 마주치는 이야기들을 책에서까지 봐야 한다는 건 때때로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것은 그들의 투쟁을 지켜보는 과정을 통해 현실에서의 투쟁의 단서 혹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 때문입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이 끝나지 않는 한,

투쟁 역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아는 만큼 막연한 두려움은 줄어듭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건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게임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서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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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상 - 나는 음식에서 삶을 배웠다, 환경부 선정 "2016 우수환경도서"
켈시 티머먼 지음, 문희경 옮김 / 부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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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땅을 일궈 자식을 키웠고, 가르쳤고, 출가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손과 마음이 많이 가는 다년 생 작물의 하나와 다를 것이 없다. 

땅에서 나서, 땅의 힘으로 자라, 땅으로 돌아가는 그런 자연의 일부라는 이야기다.


 <식탁 위의 세상>의 저자인 켈시 티머먼은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관심만큼 애정 역시 커다란 사람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그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되물어 주어야겠다.

"당신은 오늘 하루 먹은 음식들을 기억하는가?"

"그 중에 어디에서, 어떻게 길러지고 수확되어 당신의 식탁에 올라와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십중 팔구는 알지 못할 것이다.

 

 켈시 티머먼은 자신이 먹는 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생산되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궁금하게 여겼다.

보통 이상의, 사실은 엄청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궁금하게 여기는 것 이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상당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찾아가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하는 일을 실제로 해보기도 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처사와 힘겨운 생활을 보며 서글퍼 하기도 한다.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우리와 무관한 남들의 이야기일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음식 의존형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기 중의 유기물을 자연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기관을 갖게 되지 않는 한, 살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곧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며칠동안 먹은 것들을 몇 가지 적어보자면 대략 이렇다.

커피 15잔 정도. (원두로는 150~200g)

필리핀 산 바나나 12개

허쉬 초콜릿 크런치 1개(100g?)

랍스터 X

사과주스 X


켈시 티머먼은 위에 적은 다섯 가지 음식을 찾아간다.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기에 랍스터는 지금까지 한 번 먹어봤을 뿐이고, 최근에는 사과주스는 먹은 일이 없었다. 

 

 이 다섯 가지 음식은 모두 켈시 티머먼의 고향인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미국으로 수입된 것들이다. 

사과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음식은 한국에서도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사과는 생산되기는 하지만 국내에 들어와 있는 사과주스의 대부분에는 수입산 과즙이 담겨 있다. 결국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정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 음식들을 생산하는 이들의 삶은 대체로 가난하고, 비참하며, 비극적인 것이었다.  

 가난과 비참은 그렇다고 해도 비극적이기까지 한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일하면 일할 수록 가난해지고,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고 하더니, 어쩌면 그렇게 비슷하지 않아도 좋을 것까지 다 비슷한지 세계 어디를 가든 가장 힘들게 고생하고, 노력하는 이들은 대체로 착취 당하는 위치에 머문다. 


 커피를 생산하는 농가도, 카카오를 생산하는 농가도, 바나나를 수확하는 노동자들도, 바닷가재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잠수를 하는 어부들도 노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수입을 가져간다. 나머지는 회사와 상인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례로 공정 무역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역시 그들이 표방하는 공정함을 실현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이 판매하는 원두에 박아넣은 홍보 문구와 재배 농민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뜬구름 잡기 식으로 부풀려지거나 왜곡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원두를 제공하는 농가들은 심지어 스타벅스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초콜릿의 현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노력과 고생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 수익의 대부분은 초콜릿 회사가 차지한다. 바나나 농장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그 모든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노동자체가 아닌 아무리 노력하고 고생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스타벅스에 원두를 판매하는 커피 농장 사람들의 생활이 담긴 책을 읽으며 스타벅스에서 파는 커피를 마시는 기분은 어쩐지 몹시도 이상한 것이었다. 
 그토록 윤리적이고 공정함을 자랑하던 거대한 기업의 위선, 그만큼의 위선으로도 커피에 쓴맛이 더해지지 않는 것 역시 이상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 식탁에 오르는 수 많은 음식들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매끼 먹는 밥을 짓기 위한 쌀이 어디서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지.
과일들은 어떻게 재배되고, 수확되어, 보관되었다가 오는지.
고기는?
생선은?
우리는 우리 몸에 가장 가까운 음식에 대해 너무나 소홀하고 또 무관심 하다. 

싼 것만을 찾는가하면, 친환경이나 유기농이라는 간판에 간단히 현혹된다. 
더 싸게 사기 위해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그 음식의 질이 높아지는지 떨어지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높아지는 데에 이유가 있다면 낮아지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원료가 같은 사료를 먹여, 동일한 기간을 키우고, 재배하는데도 값이 비정상적으로 싸다면 거기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겠는가?

 이 책은 결코 수입 식품을 배척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할 생각도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오히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켈시 티머먼이 세계를 돌며 음식의 근원을 찾아간 이유는 궁금해서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을 생산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생활을 하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혹시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에 유해하거나 위험한 어떤 것이 첨가되고 있다면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켈시 티머먼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들과 사람들을 위해서 더 건강하고 안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산하는 이들의 생활과 복지의 향상 혹은 정당한 대가의 지불을 이야기한다.

 켈시 티머먼이 애정이 커다란 사람인 이유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 뿐 아니라, 자신이 먹는 것들을 키우고, 생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사랑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고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오지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따뜻한 마음, 고마워하는 애정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인 거다.
이 책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비극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먹는지 알고, 먹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어떤 것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효율적인 소비인지 한 번 더 생각할 수는 있다. 

 일단 내가 먹는 것 가운데 확실한 것이 하나는 있다.

쌀, 이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농약을 세 번 칠 때, 한 번도 치지 않고(사실은 바빠서 치지 못하셨다고 하셨지만) 길러낸 유기농 쌀이다. 

 정말,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무엇 하나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매일 마시는 커피의 원두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손쉽게 까먹는 바나나에 어떤 서글픈 사연이 있는지.
달콤한 초콜릿이 뒤에 얼마나 씁쓸한 이야기가 있는지.
특별한 날 즐기는 랍스터 요리에 어떤 비극이 담겨 있는지.
오늘 저녁에도 마셨을지 모르는 사과 주스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들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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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통의 심리학 -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
리처드 H.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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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만 이야기해두고자 한다.

하나는 책의 제목인 '쌤통 심리'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해석이라는 사실이 적절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샤덴프로이데, 즉 쌤통의 심리를 확실하게 깨달았다는 거다. 

 그래서 이 감상은 불편함과 깨달음에 대한 것이 되겠다.


 이 책의 번역 제목은 <쌤통의 심리학>이다. 어쩐지 소소하고, 가벼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를 알게 되면 그 생각이 정말 맞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THE JOY OF PAIN: SCHADENFREUDE AND THE DARK SIDE OF HUMAN NATURE, FIRST EDITION"

이 책의 원제다.


 직역하면 <고통이 주는 기쁨: 샤덴프로이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 정도가 될까?

어쩐지 내게는 샤덴프로이데에 대한 거북함이 있다. 이와 비슷한 거북함을 주는 표현이 있는데 '홀로코스트'가 그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유대인이 생각하는 샤덴프로이데나 홀로코스트는 다른 민족들, 다른 언어에서의 의미와는 무척 다르다고 생각한다. 샤덴프로이데는 가볍게 '쌤통'으로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목표가 되는 대상의 불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기쁨까지를 희생하는 가학적인 면이 담긴 표현이라고 알고 있다. 가십에 관한 한 기사에서 진중권 씨는 샤덴프로이데를 언급하며, '남이 못되는 꼴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가리키는 말이다'(2013년 4월 6일 중앙일보)라고 했다. 대표적인 지식인인 그가 한 말이니 틀리지는 않았겠지만 깊이 파고 들어간다면 가볍게 웃어 넘길 수도 없는 표현이라고 덧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샤덴프로이데는 악마적인 즐거움이다. 자신의 영혼을 팔아 타인의 영혼의 파멸을 사는 행위가 바로 샤덴프로이데라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자신 또한 파멸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보고자 하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표현 역시 유대인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비유대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두고 자꾸만 '홀로코스트'라고 한다. 이 책 <쌤통의 심리학>에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성물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올리는 것이 홀로코스트인 셈이다.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는 유대인을 제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홀로코스트라고 했던 거다. 몰살 지경에 몰렸던 민족에게 "너희들은 신에게 바쳐지는 성스러운 제물이었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말이다.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부의 삶을 살아야했던 분들께 "당신들은 신성한 봉사를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런 배경들로 인해 이 책을 무척 까칠한 자세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는데, 샤덴프로이데와 비슷한 상태다. 

이 책은 타인의 불행, 고통, 실패, 패배,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것들을 접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 통쾌함, 기쁨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기와 질투에서부터 유대인 대학살에 이르는 그 성질도, 결과도 다른 많은 일들의 뒤에 숨겨진 심리가 바로 샤덴프로이데, 쌤통 심리라고 말한다. 몇 번인가 부정해보려고 했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 안에도 그런 감정들, 심리들이 얼마간은 담겨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틈만 보이면 시비를 걸어보겠다는 까칠한 마음으로 읽어나갔기에 평소에는 보고 지나쳤을 이야기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모순되게도 가장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은 '쌤통 심리'라고 적은 제목이었다. 쌤통이라고 하면 너무 가벼운 느낌이라 이 책 속의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사소한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가벼운 것처럼 들리는 표현 속에 얼마나 심각하고 지독한 악감정이 숨겨져있는지 일깨우는 역설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사뿐히 즈려밟고'라는 표현처럼 어울리지 않는 표현과 의미를 함께 담아냄으로써 경계심을 높이고, 더욱 조심하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샤덴프로이데의 기쁨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남아 있을 리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인 행간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의 괴로움과 고통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쓰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으면 하고 말이다. 


 이 책에는 가벼운 쌤통 심리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악의적인 심리까지의 다양한 심리가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로 묶여 있다. 권선징악의 개념에서 악인이 망하거나, 처벌받거나, 다치거나 하는 것은 통쾌할 수 있다. 하지만 선의의 경쟁자의 불행까지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것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어수선한 글을 정리하면 이렇다.


 쌤통 심리라는 표현은 어쩐지 자업자득을 의미하는 것 같고, 가볍게 느껴진다.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 거다. 하지만 쌤통 심리 혹은 질투는 때로 치명적인 상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저자는 경고한다. 그처럼 가볍고 사소하게 느껴졌던 쌤통의 심리가 어떤 상황에서는 최악이자 절망의 심리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질투할 수 있다. 경쟁 관계에 있는 혹은 어쩐지 미운 상대의 불행을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을 후회하고, 상대의 불행을 두고 기뻐했던 마음을 부끄럽게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 실패, 아픔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설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잡고, 돌이키려 애쓰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다. 

 인간에게는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도 있지만 동시에 황금률 혹은 은률 또한 존재한다. 

자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않고, 자신이 받고자 하는 것을 타인에게 줄 수도 있다는 거다.


 저자의 의도는 모르겠다. 왜 이런 연구를 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단지 타인의 고통을 즐겨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어 선함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까칠하게 읽느라 마음 놓고 읽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저자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어쩌면 그 까칠했던 마음 역시 쌤통의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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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최근에 담았는데 말씀대로 원제와 번역 제목이 달라서 쌤통과 pain(고통)은 어감부터 다르니까 햇갈려서 구입을 망설이고 있어요 ^^

대장물방울 2016-02-19 11:39   좋아요 1 | URL
쌤통부터 고통까지 포괄적인 주제와 소재가 담겨 있어요. 뭉뚱그려서 읽으면 이 책의 가치는 상당부분 평가절하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경우에는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살피는데 쓰려는 생각의 단서라고 생각하고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