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한 소설이었다.

소설집이라 적어놓고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 적어가고 있었다. 정말은 연작이나 소설집이라 할 것이 아니라 '장편 소설'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이야기 속에 셋 혹은 그 이상의 이야기가 제각각 이어지니 나름의 소설이라고, 별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지 모른다. 아무렴 어떨까? 하나의 이야기로 되어있든 여러 개로 나뉘어 있든 놀라운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최근 광고인 박웅현 씨의 저서인 <여덟 단어>가 100쇄 기념 양장본을 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0쇄, 대단한 기록이다. 그러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비할 바는 못된다. 이 작품은 순전히 작품성과 작가의 이름만으로 200쇄가 넘는 중쇄를 거쳤으며, 1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여전히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이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을 설명하려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까닭이란 것이 몹시 애달픈 것이라 차라리 이제는 그 생명이 끊어졌으면 싶기도 하다.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이 까닭은 의외로 한마디로 바꾸어 적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무엇하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 모두가 난장이인 것은 아니다. 아버지만이 난장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난장이이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난장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 다름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난장이 그 자체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그들은 모두 난장이다. 

 소설 속 난장이는 물론 키가 작다. 그러나 '난장이'는 단순히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약자'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한 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과 불행이 이 소설에는 담겨있다.


 이야기는 수학 선생님의 '뫼비우스의 띠' 이야기로 시작된다. 뫼비우스의 띠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 난장이와 그 가족들, 동료들의 고난에는 끝이 없다. 누가 잘했거나 잘못해서가 아닌 거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굴뚝 청소를 하고 내려온 두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게 내려왔고, 다른 아이는 얼굴이 새까매져서 내려왔다. 선생님은 묻는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와 얼굴이 더러운 아이 가운데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씼으러 가겠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한다. 

선생님이 일깨워준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얼굴이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얼굴이 더러울 줄 알고 씻으러 갈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들은 질문이 끝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다시 묻는다. 두 아이가 굴뚝청소를 하고 내려왔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게 내려왔고, 다른 아이는 얼굴이 새까매져서 내려왔다. 어느 쪽 아이가 얼굴을 씻으러 가겠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으러 갈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선생님은 아니라고 한다. 둘이 같이 굴뚝을 청소하러 갔다면 애초에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게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약자로서 온갖 고난에 시달리는 난장이와 그 가족들, 동료들은 어떤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약해져 간다. 그러나 그들을 부리는 자들은 나날이 부유해져 간다. 그러나 그 부유함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부당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부를 소유하는 것과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이 된다. 덜 주고, 더 부려 생겨난 이득을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쓰겠다며 생색을 내기도 한다. 반항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그나마 그 자리에서 쫓겨나 길로 내몰린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기에 돌볼 수 없으며, 부유한 자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담긴 이야기들의 단편이다. 지금 이 시대, 21세기, 첨단의 시대에는 더 이상 난장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1%와 99%의 벽은 허물어졌는가? 오히려 0.1%와 99.9%로 그 벽이 높아지지는 않았는가?


 이야기 속 난장이 가족의 비극은 난장이로 태어났음에도 거인들의 삶을 살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내다가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붙들고 놓지 말았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난장이였다. 거인의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존재였다. 거인은 난장이를 착취하는 존재들이었다. 허기가 지면 난장이를 집어삼키는 존재들이었다. 거인들은 난장이들 가운데 몇몇에게 거인의 탈을 씌워주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이 난장이라는 것을 잊고 거인처럼 굴었다. 난장이를 속이고 착취했으며 집어삼켰다. 그들은 그들이 거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거인들은 난장이의 100배, 1000배를 먹으면서도 허기져한다.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 한 조각의 빵까지 빼앗으려 한다. 배움의 기회를 빼앗아, 지식과 지혜를 차단한다. 모임이란 모임은 모두 불법으로 간주해 해산시키거나 잡아 가둔다. 그것도 아니면 낙인을 찍어 사람들이 멀리 하게 만든다. 모든 힘이 거인의 손에서 나왔고 모든 것이 거인의 손으로 들어갔다. 발전된 것은 경제와 산업이 아니라 착취의 수단인 것 같다. 이제는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면 구제받을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여기서는 저기로 가라 하고, 저기서는 여기로 가라 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에 갇힌 탓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은 몹시도 아기자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아기자기함이 비극적이 분위기를 더 두드러지게 한다. 감상을 적기 시작하기 전부터 횡설수설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적중하고 말았다. 더 어수선해지기 전에 얼버무리듯 보이더라도 여기서 마쳐야겠다. 

 

 이야기의 말미에 선생님은 사람들이 모르는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한다. 내게는 그 말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는 이 절망이 그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세계 어디를 봐도 다르지 않다. 난장이만의 세계 속에서는 그 가운데 조금 큰 난장이가 왕 노릇을 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무언가 다른, 전혀 색다른 어떤 계기 혹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계기란 간단히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변화 역시 요원한 일이다. 앞으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300쇄, 400쇄를 거듭할 것이고, 그 사이에 무수한 난장이가 쓰러져 한 줌도 되지 않는 재가되어 흩어질 것이다. 


 아, 나를 데리러 우주인이 왔다. 나는 이제 여러분이 모르는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혹성에서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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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마카롱 에디션
생텍쥐페리 지음, 허희정 옮김, 윌리엄 리스 해설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또 적거나 적어 보냈던 문장이 담겨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200쪽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세상에 뿌리 없이 커 올라간 나무나 풀은 어디에도 없다. 어린 왕자의 행성 B612를 붕괴 위기로 몰아갈 위험을 가진 바오밥 나무 역시 몇 갈래의 뿌리에서 시작되는 거다. 그러나 세상에 오직 하나, 인간이 종종 자신의 근본과 뿌리를 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고는 한다. 이런 오만은 자연의 어디에도 없는 인간 특유의 것이다. 인간이 이 오만의 벗어던질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생텍쥐페리가 비행했던 넓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혹은 바다, 별로 가득한  밤하늘 정도가 있을 뿐이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삶을 몹시도 사랑한 사람이다. 이것은 추측이 아닌 확신인데, 그의 이야기가 이런 생각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사막에서 혹은 만년설로 뒤덮인 산 속에서 홀로 죽어가더라도 고통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격렬하게 불타오를 생명의 고동을 지켜보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 역시 추측이 아닌 확신이다. 그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어떤 것에도 연민 어린 눈빛을 보내지 않았음이 그 증거다. 


오래전 읽었던 기억이 있음에도 처음 읽는 것처럼 읽을 수밖에 없었다. 빈곤한 기억의 용량 탓이기도 하고 또 시간이 흐른 만큼 이야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의 느낌이 어땠는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그러나 불시착한 사막에서 이슬을 받았으나 먹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려서 구토에 시달려 오히려 더 괴로워지고 말았다는 부분만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추측해보면 처음 읽었을 때는 생텍쥐페리의 '모험'에 더 열광했던 것 같다. 첫 비행을  허가받은 생텍쥐페리의 기쁨과 흥분, 동시에 두려움에 공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생텍쥐페리의 매 순간이 모험 같던 비행이나 불시착보다, 그의 친구들과 그가 만난 사람들이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바르크라고 불린 노예 이야기와 직장을 떠나 전장으로 나와 전투를 앞둔 중사와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생텍쥐페리는 누구보다 사막과 사막의 밤하늘을 선명하게 그려낸 작가일 것이다. 그가 아니고는 사막에 숨겨진 오아시스의 가치와 신기루의 위험을 그렇게 실감 나게 그릴 수 없었을 거다. 


 이 책의 제목은 <인간의 대지>다. 그러나 제목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대지다. 대지가 있기에 인간이 설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지가 없이는 비행조차 불가능하다. 수상선이 있지 않으냐고? 왜, 바다 위에서 비행기 한 번 조립해 볼 텐가?


 188쪽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는 절대적 소명에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을 언급했다. 다른 이들이 수도원을 선택하듯 항공로를 선택했던 이들을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들을 찬양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는 내 의도에 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감탄해야 할 것은 바로 그들에게 터전을 마련해 준 대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밝히듯이 생텍쥐페리는 '인간'보다 '대지'에 감탄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럿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사막이 황량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황량한 동시에 사막 어딘가에 인간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사막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새벽 생텍쥐페리와 동료들이 사람들로 가득한 어느 파티장에서 그 시간에 사막에서 벌어질 일들과 일상적인 풍경을 생각하며 그 장소의 자신들을 시시하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대지의 부재 때문이었을 거다. 그들은 사막을 떠나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고독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에 빠져있었던 거다. 물론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부인이 있으며, 자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작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은 '절대적 소명'이었으니.


 이 이야기는 온통 사랑과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사랑이 컸던 만큼 사랑스러움을 잃어가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도 컸던 모양이다. 생텍쥐페리는 마치 유언이라도 하듯 마지막에 이렇게 적는다.


215쪽

오직 '정신'만이 진흙에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


 흔히 인간은 흙에서 왔다고 말한다. 숨을 쉬는 흙, 그것이 인간인 셈이다. 생텍쥐페리가 말하는 그런 흙을 인간으로 만드는 본질은 '정신'이라는 숨결이다. 정신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저 단순한 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흙에 불과한 인간이란 개성을 상실한 인간이다. 찍어내듯 길러지는 어린아이 들이다. 인간 속에서 죽어가는 모차르트다. 만약 생텍쥐페리가 이 시대를 돌아본다면 분명 대단히 실망한 채 돌아갈 것이다. 사막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으며, 그 안에 숨은 생명이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음을 슬퍼할 것이다. 무엇보다 대지에 감탄하는 인간이 거의 사라져버렸음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이제 위대한 것은 자연도 대지도 아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이라고 한다. 


 <인간의 대지>는 <어린 왕자>처럼 아기자기하지는 않다. 그러나 생텍쥐페리 특유의 짤막한 문장이 그려내는 다채로운 풍경은 오히려 더 풍부하게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고독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코 직접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저절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다. 적어도 인간을 설 수 있게 해주는 대지의 가치에 대해 한 번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막 한 가운데 불시착하던 날, 물탱크는 터져버리고 먹을 것도 거의 남지 않았음을 깨닫던 순간에도 생텍쥐페리는 2시간이나 편안한 잠을 즐긴다. 거의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200킬로미터를 희망도 없이 걸어가면서도 걷기를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거듭 되는 신기루에 기쁨과 실망을 오가면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면서 익숙한 데 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관계 때문이다. 


208쪽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아무리 하찮은 역할일지라도 그 역할을 깨달을 때, 그때에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그때에만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니까.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 죽음에도 의미를 준다면 반대로 죽음에 의미를 주는 것은 삶에도 의미를 갖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밀어낼 필요도 꺼릴 필요도 피할 필요도 없는 거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포기의 종용이 아닌 최후의 순간까지 대지 위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내라는 의미일 거다. 무엇이든 '기꺼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꺼이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되지만 강제로 일을 한다면 노예가 되는 것과 같다. 최선을 다한 삶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해도 그 삶이 허무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삶은 죽음으로서 더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는 거다. 


 <인간의 대지>는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잃어가는 본래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를 기쁘게 했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일러주는 이야기다. 몹시 고독하고 위태로운 동시에 지극히 인간다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웠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인 것이다.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된 이들 혹은 준비 중인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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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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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존재는 어느 순간에 글을 그만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것일까? 

<네메시스>는 절필을 선언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작가라는 존재의 속성 상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또 다른 마지막 작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앎과 사고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알 수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은 신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완벽한 존재를 말이다. 제목의 네메시스 역시 신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는 네메시스를 단순히 복수의 여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네메시스의 진정한 속성은 복수가 아닌 균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이 균형이란 것 또한 인간적인 의미와 개념의 균형은 아닌 것 같다. 왜 선한 자에게 불행이 그치지 않으며, 악한 자들에게 안락한 삶이 주어지는가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 행복과 불행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결과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불행과 불운으로 근심하기 시작한다면 불행을 하나 더 늘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던 1944년 미국의 한 도시다.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주요 인물인 버키는 유진 캔터라는 이름의 체육 교사다. 그는 전쟁에 참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과 가장 친한 두 명의 친구처럼 말이다. 비록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는 완벽에 가깝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력이 너무 나빠 군대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실망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체육교사인 그는 아이들의 방학 기간 동안 놀이터의 관리자로 일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그는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마을에서 기승을 부리던 폴리오(소아마비)가 버키가 놀이터 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마을을 덮쳐온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으며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정말 우수한 아이와 너무나 착했던 아이가 폴리오로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는다.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역시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집어삼켜지기 않기 위해, 혼란의 강도를 키우지 않기 위해 놀이터에서의 놀이는 계속되었고, 그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나름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마치 신은 버키의 최선을 비웃듯이 폴리오의 희생자들을 늘려간다. 어느 밤에는 하룻밤 사이에 열 명이 넘는 환자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환자 가운데에는 버키가 아끼고 사랑했으며 지키고자 했던 아이들이 꼭 한두 명씩 포함되어 있었다. 버키는 계속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간다. 그러던 버키에게 그의 약혼녀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일할 것을 권한다. 버키는 갈등하지만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제안을 수락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도망치듯 자리를 옮겨버린다. 그는 스스로가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죄책감을 갖고 평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은 그 나름의 속죄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결국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란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네메시스가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균형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신적인 것이라면 이야기 속의 희생의 제물이 누가 되었건 인간이 설명하거나 납득할 필요는 없어진다. 그저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가거나 쓰러지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토록 단순하기만 한 것일까? 버키는 신에게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왜 그토록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능 넘치는 아이들의 재능을 못쓰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느냐고 원망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반드시' 그 아이들이었어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우연히 그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 아이가 재능이 있는지, 뛰어난지, 착한지 여부는 불행과 거의 무관하다. 흔히 권선징악이라 말하고, 사필귀정이라 말하지만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해도 언제쯤 그런 '심판'이 내려지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보편적인 현상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정말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이 세계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그런 것은 거의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그럼에도 버키, 우리의 캔터 선생은 그렇게 간단히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다. 


 신이 내리는 재앙과 시련 앞에 인간은 한 없이 작고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자기의 만족을 먹고사는 존재다. 신의 응답을 확인하는 것도 멋지지만 자기만의 진리를 추구하는 삶 또한 아름답게 느껴진다. 미련스럽고 고집스러운 존재들이 남기는 어떤 유산들이 종종 오랜 시간 사랑받게 되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해석이니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이야기 속에서 폴리오의 희생자가 되는 아이들이 모두 버키, 즉 캔터 선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버키가 유난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버키를 사랑하고 존경한 아이들 모두가 희생자가 됐다. 버키를 '우상'처럼 여긴 아이들이 그 주요 희생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떠오른 배경이다. 버키는 유대인이다. 버키가 포함된 사회도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아이들도 거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에게는 유일무이한 신이 있다. 그리고 그 신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은 언제나 가혹하고 무시무시해서 겁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이기도 하고, 질병이기도 하며, 박해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이 모든 것이 등장한다. 죽음도, 질병도, 박해도 말이다. 가장 뛰어난 아이들조차 자신의 선생을 우상처럼 여기고 따른 것으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 이것은 분명 지나친 생각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은 우연이다. 불행도, 행복도,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조차도 말이다. 

 

 평생 담배를 피워온 흡연자는 90살 100살까지 살지만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보지 않은 그의 부인은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고 해보자. 이 결과를 두고 역시 간접흡연이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학적인 설명 가운데 하나이며,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건강을 위해 담배를 멀리 한 사람이 폐암에 덜 걸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신의 의지, 뜻과 같은 것으로는 이러한 '불합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착한 사람에게 거듭되는 불행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책은 사실 그렇게 흥미진진하지도, 유쾌하지도, 의미심장하게 읽히지도 않았다.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까지 최대의 궁금증이란 게 고작 "이 소설은 도대체 시점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하는 것이었을 정도다.

 '버키'였다가, '캔터 선생님'이었다가, '나'였다가 하다 보니 시점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물론 이 시점에 대한 비밀은 마지막 장에서 풀린다. 정말 그 한 줄에 거의 모든 혼란이 정리가 되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말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의 혼란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미국 내의 유대인 차별과 같은 사회적인 논란들을 들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믿음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 싶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작품은 지나치게 미국적이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가 노벨상을 번번이 놓치는 이유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이것 역시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러나 어쩐지 필립 로스는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으로 떠올라 버렸다. 이렇게 적었는데 다음 해에 필립 로스가 노벨상을 받아도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 거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우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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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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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세 편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는 두 편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한 편의 안티고네 이야기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세 편의 이야기의 제목이자 실린 순서대로 써 본 것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이 죽고 난 후, 그의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성으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다. 대략 상황을 적어보면 이렇다.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광야로 떠돌아 다니다 콜로노스에서 숨진다. 그 직전에 그의 두 아들 가운데 장자인 폴뤼네이케스가 자신의 동생이 자신을 몰아냈다며 아버지를 찾아온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폴뤼네이케스를 냉정하게 내쳤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더해 돌려보낸다. 그 저주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저주대로 두 아들은 서로 다투다 서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문제는 왕이 된 크레온이 동생인 에테오클레스는 장례를 치러준 반면 폴뤼네이케스는 들짐승에게 뜯어 먹히도록 시체를 방치하도록 명령했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 시신을 장례 지내지도 묻지도 못하게 한데서 생겨났다. 여동생 안티고네는 오빠인 폴뤼네이케스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결국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다 파수꾼에게 붙잡혀 동굴에 갇혀 죽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비극이다.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만큼 혹은 셰익스피어보다 먼저 비극을 쓴 것으로 따지면 셰익스피어보다 더 단호하게 비극을 완성해버린다. 주요 등장 인물이 모두 죽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신의 의지'가 개입해서 그들을 죽이거나 살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신 앞에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며 무력했다. 그 무력함이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일 것 같은 <안티고네>는 이렇게 거의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의 시작인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테바이를 구해낸 영웅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어 자식까지 낳은 패륜아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란 잘 알려진 것으로 "아침에는 네 발로 다니고, 점심에는 두 발로 다니며, 저녁에는 세 발로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정답이 '인간'인 그 수수께끼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나라에 '오염'이 생겨나 희생자가 늘어가고 피해가 커지자 이 오염을 없애기 위해 원인을 캐 나가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 밝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이 한 실수를 알아챈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결로 생을 마친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머리장식으로 눈을 멀게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추방할 것을 크레온에게 부탁하지만 그 결말은 보여주지 않고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지막 이야기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세상을 떠돌아 다니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복수의 여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다. 오랜 방황으로 저주가 풀린 것인지 오이디푸스의 안식이 가까워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테나이의 왕인 테세우스에게 나라의 번영을 약속하며 그 땅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테세우스 외에는 누구도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이디푸스의 축복의 조건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는 <안티고네>에서 알 수 있다. 


 세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적는데 너무 많은 지면을 써버렸다. 그래도 하려던 말은 적어야겠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에게 어떤 악감정을 가졌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성적 욕구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누명이다. 이 책 속의 세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모든 행위를 자신의 의지로 행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신의 의지'가 개입해 있었다. 

 처음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이디푸스를 버리게 만든 것도 '신탁'이었다. 버림받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고향인 줄도 모르고 고향으로 향하게 된 계기도 역시 '신탁'이었다. 이 신탁의 내용은 '오이디푸스가 자라면 그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며,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그 신탁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모두가 그 신탁을 피했다고 믿었던 생각을 비웃듯이 완전하게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과격하게 굴었던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오이디푸스도 언급하듯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를 향해 "당신이 내 아버지입니까?"하고 묻지는 않는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니란 말이다. "아임 유어 파더"같은 식의 대사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대사인 거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죽이고,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것도 전적으로 왕이 되려는 속셈에서라고 볼 수 없다. 이제 막 나라의 관문을 지나려는 자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 스핑크스가 자살할지 어떨지 어떻게 알았겠으며 그 나라의 왕비가 왕을 잃고 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계산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신들이 꾸민 음모였다는 것 말고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런 선량한 오이디푸스를 어머니를 범하려는 욕망의 이름으로 삼아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한다. 


 오이디푸스는 비겁한 자가 아니다. 몰상식하지도 않다. 오히려 지극히 선량하며 공정한 인간이다. 그런 공정한 인간이 신이 보기에는 좋은 놀잇감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축복해줄 테니 실컷 골탕 먹어봐." 하는 식인 것도 같다.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성경 속 인물인 '욥'과도 닮아 있다. 

악마의 손에 넘겨져 온갖 시험을 겪는 동안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잃어갔던 욥은 결국 신을 원망하기에 이르렀을 거였다. 물론, 성경 속에서는 악마의 시험을 이겨내고 새로이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얻게 된다. 그러나 재산과 달리 가족은 '보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무시되었다. 그들이 천국에 갔을 거라고? 천국에서의 삶은 천국에서의 삶이고 지상에서의 삶은 지상에서의 삶이다. 둘은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하나를 빼앗으면서 다른 것을 주겠다고 하다니, 갓난아기도 그런 행위의 부당함을 알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던가.


 오이디푸스 왕은 마지막 순간에 마치 수호신처럼 위상이 회복되지만 자식들조차 그의 임종을 볼 수 없게 된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 삶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장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저주받아 태어나 축복받은 죽음에 이른다는 게 가능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내게는 그러지 말아주기를 꼭 부탁하고 싶어 진다. 


오이디푸스, 이 가련한 사람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꼬리표를 달아 두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라도 그의 이름에서 콤플렉스를 떼어내 주고 싶다. 


 

 선량한 오이디푸스여, 편안히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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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무희.천 마리 학.호수 을유세계문학전집 39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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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세 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세 편을 읽는 데는 거의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읽는 것 이상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마음이 흐트러지고 무뎌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결국 세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남아서 움켜쥘 수 있던 생각이란 몹시도 편협한 데다 뻔한 것이라 낙담하기도 했다.

그 생각을 풀어 적으면 이런 문장이 될 거다.


"전 후 일본의 풍요롭고도 빈곤한 세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만큼 망가져 있던 게 분명하다."


 전후의 충격은 여러 면에서 일본을 망가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즈의 무희>와 <천마리 학>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진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즈의 무희>에 남아 있던 모호한 아름다움이 <천마리 학>에서는 허무할 뿐 아니라 짓밟히고 침범당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이제부터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아름다움보다 연민과 미련으로 가득한 미래를 끌어 안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망령에 시달리듯, 과거의 꿈 같은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재밌게 느꼈던 것은 <호수>였다. 국내에는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짜임새가 좋았다. 등장 인물 가운데 누구하나 버려지지 않고 두루 돌아가며 역할을 받아 쓰이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당사자 둘은 모르지만 사실은 둘 모두가 제각각, 나름의 인연으로 이어진 또 다른 사람을 공유하는 그런 형태였다. 그러나 그나마 <호수>까지 모호한데다 허무하기까지 한 결말로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끝내버림으로써 허탈함을 부풀렸다. 

 잘 해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결정적인 일격을 당해 허무하게 목적을 잃어버린 채 항복해버린 전쟁과 닮아 있는 결말이었다.


<이즈의 무희>에는 무희 일행을 뒤쫓는 학생이 등장한다.

<천 마리 학>에는 아버지와 무관해지려 하고,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마치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듯 이끌려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아버지의 환영에 이끌려 다닌다는 건 내 인상일 뿐이고 실제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그러나 '천 마리 학'에 이끌리면서도 멀리 하려고 하는 모순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건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끈질긴 인연의 그림자였다.

<호수>에서는 여자들을 미행하고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도 분명 허무함으로 가득차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에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을 것도 같다. 이런 쫓고 쫓김의 원인은 다른 데가 아닌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고독했기에 끊임없이 무엇, 혹은 누군가를 쫓아다녀야 했을까.


 이 세 이야기를 거의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길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느낀다. 


 아,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 1968년 이라기에 나이를 계산해보려고 작가 소개를 읽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생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69세쯤이 된다. 작가 소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두 살과 세 살 때 잇달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되던 해 누나를 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열다섯 살에 조부마저 잃어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바로 앞에 적었던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는 것의 배경에는 상실과 고독이 숨겨져 있던 모양이다. 작품을 아주 헛 읽은 것은 아니구나 하는 위안이 들기도 하지만 뭔가, 그래도 그렇게 쫓겨다녀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나 하는 반항하는 마음이 움트는 걸 아주 막을 수가 없다.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는 동정과 공감의 마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란다. 


 부모와 형제 자매, 조부모까지 모두 잃은 것만으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은 고단했을 것이며 흔들렸을 거다.

거기에 나약해질 시기에 나라의 젊은이들의 무수한 죽음을 목격함과 동시에 전쟁의 패망에 더해, 전 후 나라의 타락까지 그대로 지켜봐야했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의 나라를 떠나 이상향을 찾아 가고 싶은 마음도 품었던 게 아닐까. 


 설국까지 읽고 다시 읽어보면 조금 더 나은 인상에 닿을 수 있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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