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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평점 :
지금은 멀어졌지만 한때 판타지와 무협지에 취해 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기연을 얻은 주인공의 한계를 모르는 무위와 환상적인 마법, 상상 속의 존재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현실에도 있을 것 같은 종족과 존재들을 보는 게 그렇게 재미날 수 없었던 거다.
가끔씩은 단순한 장르 소설의 수준을 넘는 수작을 만난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고, 복잡하면서 어려운 책들에 천착하기 시작했던 것만 같다.
그래서였다.
정말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을 읽어볼 생각을 했던 이유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한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하면 '죽음'을 떠올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필멸과 소멸이라는 전제가 인간을 규정하고, 가능성과 두려움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인 흡혈귀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흡혈귀, 양귀라고도 하고, 하이랜더라고도 하고, 고지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연히 제주에 닿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이어지는 살변, 사건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시체를 모아서 태우는 관직에 있던 염일규를 제주에 파견한다. 그러나 사건은 간단히 해결되지 않고, 희생자와 희생을 저지하려는 자, 그리고 고지인 사이의 대결이라는 피바람이 조선 땅에 불어닥친다.
표지에 적힌대로 임금을 지키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대결이 흐름의 중심에 놓인다.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 결과는 역사가 말하고 있으니 궁금한 자는 조선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고지인'이라는 제목은 흡혈귀의 기원이라고 하는 예수를 칼로 찌른 병사에게 걸린 불사의 저주와 그 저주가 옮아간 사람들을 '하이랜더'라고 부른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하이랜더 = 고지인 이라니, 단순하면서도 어쩐지 우습고, 가벼우면서도, 그럴듯한 등식이다.
이글의 제목으로 삼은 것처럼, 이 소설은 '죽지 않는 시간조차 죽일 수 있는 소설'이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면의 대결이 궁금했는데 마침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이 책을 읽어봐도 좋겠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생소한 어휘와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흡혈귀와 조선시대, 사랑과 의리, 왕과 신하의 다툼까지 그리고 있다보니 두 권으로는 부족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 '닥터 이방인'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작가인 최지영 씨를 믿어 봐도 좋겠다.
닥터 이방인의 원작인 <북의>가 이 작가의 작품이니 말이다.
어떤 책에나 아쉬움은 있기 마련이나, 이 책에서는 굳이 찾지 않기로 한다. 괜스레 의미를 부여하고, 소위 순수 문학에서 찾고자 하는 의의나 깨달음이라는 잣대를 여기에까지 들이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혹시 상상해 본 적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의 침침한 골목에서 살아남은 고지인이 누군가의 피를 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고?
괴이한 일은 쉬쉬하여 감추기 마련, 세상에 기괴한 일이 적지 않으므로 한 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시, 주변에 고지인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사람은 없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