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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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한 감상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 읽어보는 그런.



스스로에게 일 년에 한 번 씩은 꼭 묻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왜 읽는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쓰는가?"입니다.

근 6년 간, 한 해에 두 번 이상 묻는 적은 있어도 한 번도 묻지 않은 해가 없던 물음입니다.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그때마다 다르면서, 그리 다르지 않아서 비슷하게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달라져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거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숙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휘갈기면 그만인 감상(구상은 물론이고, 퇴고는커녕, 다시 읽어보지 않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과 횡설수설이란 말이 대단히 적절하게 느껴지는 칼럼이라 끄적인 글들과 감정과 현상을 뒤섞어 충동적으로 내질러 놓은 시의 아류들.

 왜 이런 것들을 그렇게나 많이, 끊임없이 쏟아내었던가, 오늘 맞닥뜨린 물음은 "왜 쓰는가?"였습니다.


 한국의 작가들,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그 가능성의 싹이 돋보이는 작가들의 작품 발굴이 '젊은작가상'의 목적일 겁니다. 그렇다면,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은 한국문학의 기대주, 혹은 한국 문학의 현주소 정도의 의미는 갖고 있으리라 봅니다. 


 '기대주들' 이 작가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왜 쓰는가?"하는 질문이 이들 젊은 작가들에게 옮겨간다고 해도 기이하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궁금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2013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들은 다른 해에 실린 작품들보다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더 균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종옥, 이장욱, 김미월, 손보미, 박솔뫼, 정용준, 황정은. 

 한국 문학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게도 대부분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만큼,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그만큼, 잘 쓰는 사람들일 겁니다.

  

 김종옥과 이장욱, 정용준과 박솔뫼의 작품은 한참 전에 읽었고, 이번에 마저 읽은 게 김미월, 황정은, 손보미였습니다. 

 기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반발감, 반항심이 일어난 건 황정은의 <上行>을 읽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여, 작가의 노트까지를 읽어보니 작가의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라 합니다. 그 경험이란 나이 든 모녀, 그러니까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어머니가 마당에 나란히 서서 배웅하던 모습이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上行>은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와 오제가 오제의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 고추를 따고, 감을 따고, 호박이며, 배추며, 은행까지를 받아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른 날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읽은 것이 일요일이 아니었다면, 피곤하다며 누운 자세로 읽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를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우연',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대단히 충동적인 반항심은 그렇게 불거졌습니다.

 처음의 반항심은 시골을 향해 내려가는 차 안의 풍경을 그린 장면에서 생겨났습니다. 첫 장도 넘기지 않았던 시점이니, 어쩌면 처음부터 반항심을 숨기고 페이지를 펼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별 감정도 없으면서, 참 못된 마음입니다.

 오제의 어머니는 나에게 토마토를 먹으라고 건네줍니다. 나는 토마토를 쥐고 있다가 조금씩 먹습니다. 여기서 떠올린 생각이란 역시 엉뚱하고 억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토마토를 만만히 보는 거야? 토마토가 차 안에서 먹기 얼마나 힘든데!"

줄여 적으면 이 정도의 생각을 떠올렸던 겁니다.

 아, 토마토는 잘 익어도 여전히 껍질이 질길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토마토의 속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한쪽을 잘못 깨물면 씨와 함께 즙이 터져 나가거나 흘리기 쉽습니다. 그런 토마토를 나에게 건넨 오제의 어머니에게 반항심이 생긴 건지, 감히 차 안에서 소설의 인물에게 토마토를 먹인 작가를 향한 반항심인지 솔직히 지금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신, 차 안에서는 토마토를 먹거나 먹으라고 건네지 말아야지 하고 엉뚱한 다짐을 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반항심이 일었던 장면도 토마토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 밖으로 토마토 꼭지를 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깃털처럼 기척도 없이 허공을 날아'갔다고 합니다. 토마토의 꼭지가 말입니다. 차 안에서 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건 기본 소양입니다. 그리고 토마토 꼭지가 어떻게 날아가는지 볼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시력'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토마토 꼭지를 창 밖으로 버리다니?"

"게다가, 토마토 꼭지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고?"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황당하고 부당한 의문입니다마는 떠올려 버렸으니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적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으니 간략히 적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으로 반항심이 일었던 건 '여긴 00 사람도 없다'라고 자꾸만 거듭 되뇌는 부분이었습니다. 시골이라고, 사람이 없다고, 자꾸만자꾸만 되뇌는 게 싫었습니다. 

그다음은 시골 할머니를 두고 '노부인, 두 부인'하고 부인칭 하는 거였습니다. 

서울 사람의 알량한 표현이라는 베베꼬인 마음에서 그렇게 생각했음을 밝힙니다. 촌에 사는 할머니에게 '부인'하는 호칭을 붙이는 시골 사람을 본 일이 없는 제 견문이 좁은 건지 모르겠으나,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실적이지 않은 호칭을 쓰다니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습니다.

 그저, 다만 '노인'이라고 하면 됐을 것을 굳이 왜 그랬을까 싶은 마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다 건너뛰고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마르지 않은 고추는 무겁습니다. 자루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루가 가득 찰 때까지 고추밭을 끌고 다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자루를 가득 채워 끌고 다녔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서울 사람의 시골 판타지 소설처럼 읽혔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작 이 한 문장을 적기 위해 구구절절 그렇게 많은 말을 해야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래야 했다고, 필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까 말입니다.


 "왜 쓰는가?"하는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엉뚱하게도 황정은의 <上行>에서 느낀 반항심을 이어 적었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필요했습니다. 조금 전에 적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 말입니다.


 올해의 "왜 쓰는가?"하는 물음에 적을 대답은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입니다.

적지 않으면 모르니까라고 바꿔 적어도 그 의미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모르는 게 누구냐?"하고 물을 수도 있겠는데, 어느 쪽이냐 하면 둘 다입니다.

둘이 누구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과 적은 걸 읽는 이, 둘이라고 답할 생각입니다.


 사실, "왜 쓰는가?"를 묻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회의감'입니다.

"내가 이것을 적어서 무엇이 달라질까?"

"결국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언제나 대충 휘갈기고 마는 이 몇 마디 문장의 나열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래서, 누가 이 글을 읽게 될까?"

"이걸 읽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알게 될까?"

"알게 된다고 해서 어떤 걸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고 해서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무수한 물음에 답하기를 그만두고자 하는 회의감 말입니다.

글이 없으면 물을 이유도 사라질 것이고, 이유가 사라진다면 회의감이 생겨날 이유도 없을 텐데.


 그러면서도 또 이렇게 구구절절, 떠들고 있는 걸 보면 저는 참 떠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쓰는 걸 간단히 멈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왜 쓰는지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뚜렷한 목적도 없으면서 자꾸만 쓰려고 드는 자신이 우스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왜 쓰는가?"하는 물음에 나름의 답을 달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한 결에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왜 읽었습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기에 적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 글에 대한 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나는 왜 읽는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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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6
강상중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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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교수를 처음 알게 된 책은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민하는 힘』이었다. 재일 교포인 강상중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과 막스 베버의 사상을 통해 현대의 세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민, 좌절, 슬픔, 고통, 외로움. 100년도 전에 쓴 이야기 속 인물들과 사상이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것, 최초의 발견은 아니지만 아마도 가장 강렬하게 그 사실을 인식시켰던 작가가 바로 강상중 교수였다.

 이후에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통해 강상중 교수의 아들이 자살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세키의 작품 속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외로움으로 선택한 죽음의 길이었다. 강상중 교수는 몹시 좌절하고 절망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도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며 깨달은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아들과 더 가까워지지 못했던, 아버지로서의 미안함을 가슴에 묻고 다시 소세키의 작품을 이야기하던 강상중 교수의 모습. 딱 한 번 다녀온 강연에서 본 그 모습은 담담해서 더 처절해 보였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세 번째로 읽는 강상중 교수의 책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주제는 어김없이 나쓰메 소세키와 그의 작품이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첫 번째 장편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시작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세키의 작품인 『마음』으로 끝이 난다. 

  

 나쓰메 소세키를 읽어보려는 사람들, 호기심은 있지만 어쩐지 고전이라 읽기 힘들지 않을까 망설이는 이들에게 이 책은 소세키의 작품 세계를 친절하고도 쉽게 깊은 곳까지 열어 보여준다. 지인 중에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언제 읽는 게 좋냐고 물어본 이가 있었는데, 한 작품쯤 읽은 후나, 이제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읽어보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뛰어난 재원이었지만, 영국 생활 중에 마음의 병을 앓을 정도로 섬세했고, 나라의 잘못된 정책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글을 쓸 만큼의 소신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세키였기에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소세키의 마음이 작품에 담기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강상중 교수는 소세키의 대표작들의 작품 세계와 인물,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자신이 삶을 통해 깨달은 사실에 비추어 해석해서 들려준다. 강상중 교수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세키 연구자가 아닌 독자라는 입장은 소세키를 읽고 있거나 읽으려는 우리와 동일하기에 참고 삼아 알아두기에 거리감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면 작품이나 작품의 의미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쓰메 소세키라는 '한 인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왜 하필 이렇게 해야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길 때가 있는데, 강상중 교수는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던 이유를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풀어주고 있다.


 일본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나쓰메 소세키라는 위대한 작가도 실제로는 외롭고 유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약하고 깨지기 쉬운 내면을 간신히 붙들어 가며 하루를, 일 년을 살아냈다는 거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만 같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논문도 아니고, 전문가의 저작도 아니다. 한 독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풀어주는 이야기인 만큼 어렵지 않게 읽힌다. 부작용이 하나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나면 부쩍 소세키의 작품이 궁금해질지 모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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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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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예고 없는 비를 만난다면 백에 구십구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들거나, 우산을 쓸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나는 급한 일이 없다면 비를 피하고, 좀처럼 그치지 않겠다 싶으면 우산을 사는 편입니다(덕분에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이 여섯 개쯤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쫄딱 젖은 상태로, 아주 바쁘고 급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그런 사람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때그때 다를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비 맞는 걸 좋아하는가 보다'할 수도 있겠고, '미친 거 아니야?'할 수도 있겠고, '급한 볼일이 있나 보다'할 수도 있겠고, '우산 살 돈이 없나 보다'할 수도 있겠고, '더운가 보다'할 수도 있겠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상상을 조금 더 진행시켜 보죠. 

좀 전에 말한,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아주 바쁜 듯 걸어가는 그 사람이 1년 365일 정말 미친 듯이 걸어 다닌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운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직업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요. 그 사람은 단지 걷고 또 걷기를 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쳤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모른 척해야 할까요?


 이미 예상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앞서 얘기한 '그 사람'의 이름은 '좀머 씨'입니다. 이 책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죠. 좀머 씨에게는 '강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강박을 간단히 설명하면, 한 곳에 멈춰서 있으면 '무엇'인가가 자신을 찾아낼 거라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정말 좀머 씨는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쳐 다닙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박이 쏟아지는 날에도,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끊임없이 걷고 또 걷지요. 좀머 씨를 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병이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 병이란 게 정신병이기에 결국 거칠게 말하면 미쳤다는데 동의하는 셈이죠. 

 책의 제목은 『좀머 씨 이야기』지만 실제 화자는 '나'이고, 전체적인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좀머 씨는 그 이야기 속에 서너 번 등장할 뿐이죠. 그럼에도 책의 제목이 『좀머 씨 이야기』인 이유는 '나'의 삶에서 좀머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역할'인지 궁금하신 분은 한 번 읽어보세요. 길지 않은 이야기라 금세 읽을 겁니다.


 '나'는 좀머 씨가 이야기하는 걸 딱 한 번 보게 됩니다.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던 날이었고, '나'는 아버지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죠. 폭우와 우박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들판을 지나갈 때 '나'는 좀머 씨를 보게 됩니다. 폭우와 우박에도 걷기를 그치지 않은 좀머 씨였지요. 

 '나'의 아버지는 좀머 씨에게 자동차에 타기를 권하며, 평소에는 '틀에 박힌 빈말'이라며 쓰지 말라고 하던 표현인 '그러다가 죽겠어요'라고 말해버립니다. 아버지 나름대로는 좀머 씨를 생각해서 한 말이겠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좀머 씨는 몹시 흥분해서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처음 『좀머 씨 이야기』를 읽었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라는 좀머 씨의 외침이 단숨에 가슴에 와서 박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굳이 이런저런 설명의 말들을 가져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죠. 

 이런 게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좀머 씨에게만 보이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보통의 사람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좀머 씨는 그 '무엇'이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느껴졌던 것일 거라고요. 


 우리는 종종 '호의'를 베풉니다. 대부분의 경우 호의는 받아들여지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정중히 거절당하기도 하죠. 하지만 좀머 씨처럼 배은망덕하게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네, 배은망덕이라고 적었습니다. 일부러 적은 거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좀머 씨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오히려 꺼려하는 호의를, 그것도 '틀에 박힌 빈말'을 건네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던 것 아닐까요.


  정말 의미도 없이, 무용하게 매일 걷기만 하는 좀머 씨는 우연히 '나'의 생명을 구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마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할 줄도 몰랐던 어린 생명을 구한 거죠. 상투적인 줄 알지만 아이러니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좀머 씨는 '나'를 구합니다. 좀머 씨가 원해서 그랬든 아니든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구하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는 '나'가 좀머 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평생을 '무엇'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좀머 씨가 스스로 호수 밑으로 가라앉는 걸 선택한 그날에 우연히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거죠.

 좀머 씨는 도망치기를 그만두고 가라앉기를 선택합니다. '나'는 그런 좀머 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있고요. 

'나'는 좀머 씨를 부르지도, 구하지도 않습니다. 서서히 멀어지며, 좀머 씨의 허리가, 가슴이, 어깨가, 머리까지 잠겨 파문이 사라질 때까지 다만 바라보고 있었죠. 

 법적으로 '나'는 자살을 방조한 셈이 되기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구할 수 있었던 소중한 생명을 죽게 내버려둔 도의적인 책임 또한 피할 수 없고요. 하지만 좀머 씨가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좀머 씨 자신이 이제는 그만 도망치기를 멈추기를 바란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도 '나'였던 거죠. 

 좀머 씨의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부탁을 '나'는 들어줬던 거죠.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평생 도망치기만을 계속하던 사람이 도망치기를 그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겠죠.

 좀머 씨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많은 것에서부터, 아주 많은 순간에 도망치기를 거듭해 왔습니다. 지금도 어떤 일들에서는 도망치기를 계속하고 있고요. 도망치기를 그만둔 일들을 생각해보면, 도망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일이 더 많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서 도망치는 건 쉽지는 않지만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도망쳐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 경우를 얘기해 보죠.

나는 언제 도망쳤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두려울 때 나는 도망쳤습니다. 마주하기 벅찰 만큼 두려움이 클 때, 도망치고 또 도망쳤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바닥이 없는 두려움의 구덩이로 몰아넣었습니다. 모르기에 두렵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도망치기에 알 수도 없는 상황이 반복됐던 거죠.

   

 평생을 도망쳤던 좀머 씨는 마지막에 무엇을 알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일을 그만둘 만한 어떤 것을 얻었을 테니까요. 

좀머 씨가 지쳐서 포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기라는 감정의 근원은 약함이기에 그렇게 단호하게 가라앉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저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도망치기를 그쳐 가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가, 이상한 세상이라거나, 이해 못할 세상이라며 포기하기를 거듭했죠. 정말 뻔하고 단순한 거지만 나를 모르고서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볐던 게 무모했던 거죠. 

 그릇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물을 담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셈이랄까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일들에서, 생각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평생 도망치다 끝이 날지도 모르죠. 그래도 조금은 더 필사적이 되어야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도망치는 것도 필사적으로, 맞서는 것도 필사적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도망치기를 그쳐도 되는 날에 닿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인들 어떤가요.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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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3648 2016-10-1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는데 생각하는 깊이가 다른것 같습니다. 정말 글 잘 쓰신것 같습니다

대장물방울 2016-10-20 00:32   좋아요 0 | URL
영광입니다. :)
같은 책을 읽은 분과 알게 되어서 기뻐요.
 
필경사 바틀비 바벨의 도서관 27
허먼 멜빌 지음, 김세미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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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우리는 언제 놀라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 속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했는가?"하는 물음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필경사 바틀비』는 두 질문에 같은 것으로 답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내가 생각한 답은 '허무함' 혹은 그와 쌍둥이나 다름없는 '덧없음'이다. 

무엇의 허무함이고 덧없음인지 얼마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신을 '나'로 소개한 화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극도의 안전 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법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야망 없는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며, '부자들의 채권과 저당권과 권리증서들을 다루며 안락하게 일'하는 신중함이 장점이라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나'가 업무가 크게 늘면서 새로운 필경사를 고용하게 된다. 그렇게 고용된 필경사가 바로 '바틀비'다. 

 보통의 필경사를 기대했던 '나'의 바람과 무관하게 바틀비는 필사 외의 업무를 거부한다. 정말 당당하고도 단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거다. 아마도 '나'가 극도의 안전 주의자인 동시에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업무를 거부하고도 바틀비는 당장에 해고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틀비는 점점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늘어간다. 

 '나'는 결국 특단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바틀비의 운명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한다.

『모비딕』속 에이해브의 광기에 찬 복수와 비극적 운명과도 닮아 있는 바틀비지만 그 태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하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인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바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자면 '수동적 능동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가 결말에 닿아 '나'가 바틀비의 이력을 이야기해줄 때까지 독자는 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지, 그 고집스러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저절로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바틀비의 '싶은'이라는 표현이 갖는 마력이 전염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내 경우에는 평생을 필사로 먹고 살아온 60대 동료 필경사인 터키가 쓴 '싶다'는 단어를 '나'가 짚어내는 순간에 바틀비처럼 나 자신 역시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에 놀란 이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뭐라고 마음속에 숨겨진 '소망'이라고 해도 좋을 본능을 일깨웠을까 싶어 졌기 때문이다. 

 터키도, 또 다른 필경사 니퍼즈도, 화자인 '나'조차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틀비의 당당하고도 단호한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태도에 끌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가 결말 무렵에 이르면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끌림, 전염이 사실은 이미 텅 빈 껍데기를 향한 '죽어버린' 혹은 '의미를 잃어버린' 어떤 것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 짧은 소설, 도무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거부를 거듭하는 바틀비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 된다(왜 그런지 궁금하다면 길지 않으니 꼭 읽어보시길).    


 세상에 존재하는 일단의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하나의 의미가 살아남아 전해지기 위해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바틀비의 이야기가 허무함과 덧없음에 수렴하는 이유는 이미 바틀비는 의미를 잃고 껍데기만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바틀비의 말과 행동이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 또한 바틀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 역시 텅 비어있었으므로, 바틀비의 울림을 따라 공명했던 것이 아닐까. 그 공명이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의 내부에까지 퍼졌던 것은 아닐까.


 '본래 그러했어야 했던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 의도가 전해 지거나 실현되지 못하고 유실되어 사라졌다면, 그 사라짐으로 인해 처음의 의도를 통해 삶의 무게 혹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 행복해져야 했던 사람들이 불행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갔다면(반드시 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닐지라도) 처음의 의도는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바틀비의 이야기에 담긴 비극은 그 지독한 허무함으로 허무 타령을 일 삼곤 했던 나를 놀라게 했다.

덧없음이 다시 의미를 갖는 순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함은, 덧없음은 상실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바틀비의 삶은 허무했으나 그의 이야기는 전해지고 다시 전해져서 다른 의미를 낳을 것이다. 

'싶다'는 말이 사치처럼, 때로는 금기처럼 되어버린 시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오래된 박물관의 박제처럼 낡아가는 이 날들에 바틀비의 삶은 어떤 의미를 낳게 될까.

 새롭게 생겨난 이 의미에 허무함과 덧없음에서 느꼈던 놀라움보다 더 커다란 놀라움을 느낀다.


 조용하고 격렬하게 분노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을 소유한 바틀비.

나도 가끔 바틀비처럼 말하고 싶어 질 것 같다.

"아니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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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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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걸 쓰다 말고 간단히 죽어버렸을까."

이 소설의 마지막에 적힌 -미완-이라는 단어를 보며 했던 생각이었어요. 

600페이지 가까이 늘어놓고도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이야기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글을 읽는 일이 쓸쓸한 일이라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다음이 없는 이야기.

계속될 수 없는 이야기.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이야기.

필연만이 있고, 우연은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는 쓸쓸한 것이더군요.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0대 남자가 있어요. 

남자에게는 과거가 여럿 있는데(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역사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여자'입니다.

결혼의 상대가 아닌 그 '여자'와 헤어진 지 오래지 않아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아내인데, 이 아내와의 만남이 제법 극적이라 당시에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남자에게가 아니라 여자에게 드물게요. 

이 남자의 아내는 독립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주관도 뚜렷해서 당시 일본의 여성상보다는 '현대 여성상(그런 게 있다면 말 입니다만)'에 더 가깝습니다.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지요. 

 남자의 집도, 여자의 집도 제법 잘 살아서 생활에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남자나 여자나 조금은 헤프달까요, 자기들을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다 보니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받아 살고 있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벗어날 생각이 없이 당연히 계속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죠. 그러다 남자의 아버지가 화가 나서는 더는 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해버립니다. 남자는 곤란해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으로 태평하게 지냅니다. 실제로도 어떻게든 되어가지요.

 이 남자에게는 병이 있는데(죽을병은 아니고요), 그 병의 치료를 위해 수술을 하게 됩니다. 간단한 거라고는 해도 일주일쯤 입원해 있어야 하는 거였죠. 병원에 병문안을 온 사람이 몇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남자를 돌봐주고 있는 집안의 부인입니다.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고, 남자의 '과거의 여자'와도 밀접한 사람이죠. 그 사람이 와서는 전에 그 여자의 근황을 알려주며 제안을 하나 합니다. 

 그 여자가 유산으로 요양 중인 온천으로 이 남자를 보내주겠다는 거였죠. 물론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고요. 

 그 전과 후에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사람들의 심리와 시선을 따라다니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줍니다. 소세키 답다고 해야겠죠.


 이런 식의 이야기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100년 전에 죽었습니다. 

 100년 전은 일본이란 나라가 지금보다 더 가부장적이고 호전적인 시대였기에 소세키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나는 남성우월주의를 참아줄 수 있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이 소세키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사상이 아닌, 시선을 말이죠. 

 잘 사는 집안 출신의, 최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인 소세키가 왜 그렇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외로워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런 이해에 대한 갈망과 고독이 만들어낸 세상을 향한 시선과 해석을 즐길 뿐이죠.

 소세키가 편안하게 읽히는 이유는 사람답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사소한 일로 다투고 삐치고, 고집을 부리고, 허세를 내세우고,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경제를 논한다거나, 세계를 염려하지도 않는 평범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도 이해를 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남의 것 같지 않아서요.

  

 그런 소세키가 죽기 직전까지 쓰던 작품이 바로 이 『명암』이라는 소설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이야기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우연에 대해서라면 저마다 한 마디씩 할 말이 있겠고, 생각이 있겠지요. 소세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푸앵카레의 주장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이 우연, 우연, 하는 이른바 우연한 사건이라는 건 원인이 너무 복잡해서 도무지 짐작이 안 될 때 쓰는 말이네."

 그럴 듯 한 말이죠? 

그런데 이런 우연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쉽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알게 되는 순간 우연은 당연한 결과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소세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이상해도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그래서 이제 이상하지 않아요. 이유만 들으면 뭐든지 당연해지네요."

정말 당연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가 납득할 만하다면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존재.

사람이란 그런 모순된 존재입니다. 아주 당연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면 이상하게 여기는 그런 존재요.


그래서일 겁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보다 필연적인 사건에 더 놀라게 되는 것이라고요.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해놓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고는 하는지.


나비효과, 머피의 법칙.

그건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과학 콘서트>라는 책에서도 우연에 대한 이야기 나옵니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연이란 신이 서명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가명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원인 없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원인이 있는데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막연히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암』을 통해 소세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이요. 

그런데 혹시 아나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을지요.

 이 이야기를 쓰다 소세키가 죽는 것도,

100년이 지난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읽은 것도,

이 이야기를 읽고 쓴 이 감상을 당신이 읽는 것도.


세상에 우연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무수한 선택의 연속과  결과 외에는요.

당신은 우연을 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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