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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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님이 해설을 썼다는 걸 알았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읽기 전이었다. 

읽고 난 후에 뒤 표지에 있는 정이현 작가님의 해설 일부를 발췌한 글을 봤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물론 해설 전문을 읽는 일은 이번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만한 자부심으로 뭉친 사내가 자신이 기실 길가에 핀 풀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가는 과정이다.

멋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에 설득력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좋아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도 거의 다 읽어봤다. 

 『한눈팔기』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주에서 그것은 저렇고, 저것은 이렇고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생각을 너무 많이 알게 되어버려서 그에게 실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게 걱정의 정체였다. 

 정이현 작가님과 다르게 생각한 부분을 먼저 말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다른 사람과 같다는 걸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 

 『한눈팔기』에서 보여주는 겐조의 내면은 분명 보통 사람처럼 흔들리고, 불안해하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협한다거나 자기 생각을 고쳐먹지는 않는다. 같은 것을 말하면서도 다르게 표현하고, 다른 것 안에 같은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분명히 다르다고 말하는 모순되지만 사실인 이야기를 거듭 말하고 보여주는 이유도 자신은 마지막까지 오만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아니었을까.


 간파당한 오만이라고 해도, 허울뿐인 자부심이라고 해도 굽히지 않으면 자기 자신만은 지켜낼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억지지만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나라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인물을 만든 소세키가 자신을 '길가에 핀 풀과 다르지 않다'고 인정할 리 없다. 설사 다르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그 다르지 않음 안에서 다름을 발견해 낼 사람이 소세키라고 생각한다. 


 앞에 말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한눈팔기』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본제는 『道草』인데 도무지 어떤 의미인지 오리무중이다. 자유롭게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자유롭게 해석하기로 했다. 대략 제목 그대로다. 풀이 잔뜩 깔린 길이 있다고 하자, 그 풀들이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풀은 아닐 거다. 거기에는 화려한 꽃도 있을 것이고, 잔디처럼 표시 나지 않게 뻗어가는 것도 있을 거다. 

 길 위의 풀들도 모두 다르다.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삶이 있다. 그 다름을 자기 자신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한눈팔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삶을 담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입양되었다가 본가로 돌아온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과 그 시간이 빌미가 되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잊어버리고 싶은 시간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이 주로 담겨 있다. 독특한 것은 이 작품이 특별히 어떤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적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그야말로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려고 적은 작품 같다고 하면 적절할까?


가장 가까워야 할 형제와 부부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이 괴롭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는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단지 사람은 저마다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면서도 묵묵히 그 괴로움을 끌어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이야기 속 겐조이고, 나쓰메 소세키였다.


 시기 상으로 보면 『한눈팔기』는 거의 말년에 쓴 작품이다. 어쩌면 멀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다음 세상에 남기는 유언처럼 혹은 자서전처럼 자기 삶을 돌아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에 골몰한다. 이 작품에서도 이해에 대해 거듭 이야기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의 주의와 주장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른, 수용이라고 할까.


 10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소세키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현재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어느 날 그는 그 청년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행복하네. 졸업하면 뭐가 되겠다든가 뭘 하겠다든가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건 선생님 세대 일이지요. 요즘 청년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물론 뭐가 되겠다든가 뭘 하겠다든가 하는 걸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세상이 그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과연 그가 졸업했던 시대에 비하면 지금 세상은 열 배나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주에 관한 물질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청년의 답에는 그의 의도와 다소 어긋난 점이 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과 그 말에 청년들이 답하는 말과 닮아 보이지 않는지.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멋진 문장은 이 부분인 것 같다. 

"세상에 매듭지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 한번 일어난 일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다만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니까 남들도 자신도 알 수 없을 뿐이야."

 매듭을 짓는다는 건 싹둑 끊어낸다는 것과는 다르다. 매듭을 어디에 짓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어떤 매듭을 지었는가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거기다 그 매듭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또 달라지기에 점점 알기 어려워지는 거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소세키는 쓸쓸했을까? 

분명 쓸쓸했을 거다. 하지만 그 쓸쓸함이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다.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떠밀리듯 선택한 쓸쓸함이지만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태도는 고집과도 다르다. 가장 가까운 말을 찾자면 '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되기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에 의한 것, 스스로 자처한 것이기에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롱하면서, 때로는 비웃고 비난하면서, 그것이 자신임을 점점 더 밝히 알아갔을 거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마음은 내게도 있다. 어쩐지 그런 마음이 소세키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새삼 모든 독서가 자기 마음에 글을 비춰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는다. 그 해석이 어떻든 옳거나 그름이 있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것일 테지.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기억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세상이 바라는 나를 돌아보고 온 기분이랄까.


 『한눈팔기』는 그런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삶에서 잠시 눈을 돌려 과거로, 내일로 마음을 옮겨 보는 그런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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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맛 -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를 느끼는 감수성의 역사
알랭 코르뱅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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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는 당연하지만 인간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무척 억울할 것이 적지 않다. 그 억울할 것 가운데 한 자리는 분명 날씨가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날씨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건만 날씨 때문에 우울해지거나 슬퍼졌다고 말하는 건 예삿일이고, 날씨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날씨'가 존재한다면 그에게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 것처럼 하소연하는 이들도 거의, 늘, 언제나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인간이 날씨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고충'이 사라지게 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거다. 오히려 보통의 고충에 다툼이 추가될 거고 그 결과 날씨를 탓하는 사람만 늘어날 게 뻔하다.


 웃지 못할 일이 있다. 기상청에서 새로 도입했다는 슈퍼컴퓨터 이야기다. 기상청이 새로운 슈퍼컴퓨터를 도입했음에도 오히려 전보다 오보 횟수가 잦아졌고, 오차도 커졌다는 거다. 

 "세금을 들여서 무엇하는 짓?" 이 정도는 귀여운 편이다. 

 '기상청이 아니라 구라청'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여럿 봤다. 

기상청에서는 날씨가 변덕스러운 탓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웃기는 건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한 유럽의 경우 예보의 정확도가 올라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슈퍼컴퓨터라고 해도 기상을 예측해주는 건 아니다. 수집된 무수한 정보를 취합해 분석하는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거다. 최후의 결정과 해석은 숙련된 예보관이 하게 된다. 결국 일기예보도 사람 문제라는 거다.


 이웃집 할머니의 예보가 더 정확하더라는 말은 웃기지만 사실일 수 있다. 날씨 역시 경험을 통해 전조를 읽는 일에 속하니 말이다.


 《날씨의 맛》은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와 같은 기상현상을 주제로 여러 사람이 쓴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우리가 '날씨'라고 부르는 현상의 구성 요소와 기상 상태에 대한 인식과 감정의 변화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기상현상에 대한 인식에 치우쳐 있어서 편협해 보인다는 한계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인 공포와 경외, 놀라움과 애정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아쉬움도 있는데 문장 속에서 접속사의 위치나 쓰임이 의미를 밝히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텍스트의 해석과 이해 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해가 쉬운 번역도, 편집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날씨의 맛》의 번역자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도 번역했다고 적혀 있는데 찾아 읽어봐야겠다.


인상 깊었던 부분을 하나 발췌하는 걸로 감상을 마칠까 한다.

보험에 관해서는(보험으로 우리는 위험과 돌발적인 일에 경제적으로 대비한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기치 못한 일을 더욱 견디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고, 우리 각자는 더욱 개인적인 방식으로 이에 동의하면서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보장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신체, 보건, 건강과 맺는 관계에 접근하여 영향을 미치며(청결과 웰빙에 대한 우리의 걱정과, 일부 사람들이 드러내는 이에 대한 강박을 보라) 이 분야에 대한 우리의 요구사항은 나날이 배가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휴가를 위해 숙소나 기차표를 일찍부터 예약하도록 부추기는 것, 하늘의 색깔과 계절 고유의 돌발 사고를 예측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결국 같은 원리다. "우리는 규격에 맞춰진 계절을 기다리며", 언제나 태양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고, 계절들이 "달력에게 약속을 이행하기를 희망한다고, 드 세비녜 후작 부인도 어떤 서신에서 썼다. 돌발적인 기후 사건을 더욱더 참아내지 못하고, 우리 생활 방식은 점점 그것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으니 우리는 그 점에 관해서는 전혀 발전을 하지 못했다. 
《날씨의 맛》중

 미래의 어느 날에는 우리가 '삶의 변수'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이 예측 가능해질까? 그렇게 많은 것을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단순히 준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준비하는 것이 나으니까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나도 뒤처질 수 없다는 기분이라면 어쩐지 서글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산이 없어 짚을 엮어 쓰고 다니던 시대보다 지금의 우리가 더 젖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거다. 세탁과 건조가 더 간단해졌음에도 젖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더욱더 경계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풍의 위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압도적인 현상 앞에서는 그 어떤 대비나 준비도 무력해진다. 그 거대함과 강력함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지만 오히려 마음을 비우게 만들기도 했다.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오만임을 기억해야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젖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하늘에 대고 화를 내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명한지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염려된다면 언제나 가방에 우산을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그것이 번거롭다면 소나기를 걱정하는 걸 그만두는 편이 더 낫다.


 날씨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거나 의도를 품지도 않는다. 그저 거대한 흐름 안에서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없어야 할 곳에 없을 뿐이다. 물론 기상 이변이라는 변수도 있다. 그러나 큰 의미로 보면 기상 이변이라는 표현 역시 인간의 견해일 뿐, 자연의 견해는 아니다. 


 적이 부족해서 자연까지 적대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날씨를 탓하기를 그만두고 날씨를 맛보기를 권한다.

오늘 밤만 해도 빗소리가 이렇게 좋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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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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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음 놓고 재밌게 읽은 책을 만났다. 그런데 묘한 건 신나고 재밌게 읽었건만, 읽는 동안 크게 웃은 적이 있던가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거다. 

 뭐,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자. 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거다. 그리고 아마 몇 번쯤 '풋'이라거나 '푸흡'이라거나 '푸흐훗'이라거나 하고 웃기는 했을 거다. 지하철에서 거진 다 읽었으니 소리 내어 웃을 수 없었을 뿐.


 보건교사인 아는형, 아차, 안은영 선생님(별명이 아는형)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보고, 해로운 것들을 흩어버릴 수 있는 '엑소시스트'의 능력이 그것이다!(두둥) 


그렇다고 아는형 선생님, 아차, 안은영 선생님이 어떤 소설의 누구처럼 '월향'을 날린다거나, 기도력으로 싸우느냐? 그건 아니다. 안.은.영. 선생님의 무기는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다(이건 뭐, 설정부터 기대할만하다). 


 안은영 선생님은 보건교사다. 그러므로 당연히 배경은 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가 위치한 곳이 참 묘한 곳이라 자꾸만 나쁜 것들이 꼬이고 난리도 아니다. 다른 직장에 있을 때도 타고난 능력 때문에 힘들었기에 좀 편하게 지내볼 생각으로 학교에 발을 들였건만 역시 세상은 능력자를 가만두지 않는 모양이다. 


 이 학교에는 또 한 사람의 특이한 인물이 있는데 학교 창립자의 손자인 한문 선생님 홍인표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기운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안은영에게 힘을 빌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둘의 묘한 협력 관계는 학교의 다른 이들에게는 '연애질'로 보이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는.


 여하튼, 안은영 선생님은 매일매일 죽은 것과 산 것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것과의 혈투(?)를 계속한다. 이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는 미련과 산 자를 해치려는 원한과 죽은 자들보다 더 무서운 산 자들의 사념에 관한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작가의 말을 통해 알게 된 거지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대부분 실재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름 혹은 별명이었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전적으로 사실적인 존재라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보건교사 퇴마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 이렇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내는 시리즈에 들어갔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도 적었던 것처럼 재미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더 흥미로운 것은 아무 의미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가끔씩 스리슬쩍 비치는 현실의 모습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조금이라도 곱씹어 보지 않으면 지나간 줄도 모를 그런 풍경들. 

 하지만 그런 걸 오래 곱씹거나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호흡을 끊어가며 집요하게 굴어서야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한 번 더 읽게 되면 그때는 사건이나 배경의 의미나 전개 등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의도를 찾아볼까 싶기는 하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굳이 의미를 찾지 않는 것이 더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현명한 태도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안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좋을 책을 발견했다는 기쁨 외에도 이 작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단순한 건데, 흔히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한 상대방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복수를 꾀한다는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특이한 학교에, 묘한 인물들의 이야기인데 결국 흔한 무협지 속 복수극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다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무협지보다 좋은 건 상상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벌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나 존재가 등장할 수 있는 것도 판타지다. 무협지는 '초인'들의 세계에 가까워서 오히려 현실적인데도 이 세상은 현실적인 무협지보다 환상적인 판타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현실적인 것보다 판타지가 더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류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지는 걸 그렇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또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다. 


 하지만 판타지가 좋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환상적인 일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좋은 거다. 결국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들, 얼토당토않은 사건들이 일어나도 내 삶의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정말 재밌게 읽힌다. 늦었지만, 이 책을 주신 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다시 전한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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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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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말로 설명하는 일에 유난히 서툴다. 글로는 능숙한가? 그렇지도 못하다. 

왜 이렇게 서툰 걸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허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나은 글로 몇 자 적는 게 고작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대학교 교서관에서 발견한 이후 줄곧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준 적이 없었다. 이레 출판사의 판본, 올재 클래식의 판본을 거쳐, 새로 출간된 현암사의 판본까지. 그저 『마음』이기만 하면 그저 좋았다.


 『마음』은 '나'가 만난 '선생님' 이야기다. 나의 부모님도 등장하지만 그쪽의 사정에는 좀처럼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선생님'의 사연이 너무나 기가 막혔고, 비밀이 몹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더 끌렸던 거다. 

 이야기의 결말을 먼저 밝히는 걸 피하는 편이지만 이 이야기는 결말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이기에 짧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감상을 시작하기로 한다.


 '나'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에게는 자살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자살한 데에는 선생님의 잘못도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 그 배신은 친구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지켜왔던 신념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친구가 자살한 후에 선생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며 멀리 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선생님이 보낸 두꺼운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는 선생님의 유서였다.


 '묵독파티'에서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한 분이 내게 "비극을 좋아하시나 봐요."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사실이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극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비극적인 이야기, 이루어지지 못한, 엇갈린, 빗나간, 부서진, 깨어진, 멀어진, 다시는 만나지 못한. 

비극을 소개하는 데 쓰는 표현은 많고도 많다. 그만큼 세상에는 무수한 비극이 있을 거라는 걸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비극의 유용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비극의 유용성'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비극 속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해의 극한, 미움의 극한, 질투의 극한, 엇갈림의 극한, 몰이해의 극한. 슬픔의 극한도 빼놓을 수 없겠다. 


비극을 읽는 동안 나는 누구도 미워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누구든 미워하고 상처 입힐 수 있다. 

'유토피아'

비극의 무대는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슬픔과 고통, 아픔과 괴로움을 얼마든지 경험해도 상처가 되지 않는 무제한의 힐링캠프다.


 선생님의 친구는 자살하기 전 유서를 남긴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내가 가장 통절하게 느낀 것은 마지막에 먹으로 덧붙인 듯이 보이는, 좀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았을까 하는 의미의 문구였어.
『마음』중

만약 가깝게 지낸 누군가가 스스로 폭력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나'에게 남긴 것이 분명한 문장이 나의 마음에 파고 들어와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 따라다닌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만 할까? 


선생님의 고민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친구의 죽음 이후에 모든 즐거움을 떠나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며 조용히 자라나는 죄의식을 지켜보며 괴로워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결말,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를 선생님이 대신 택해줬을 때, 그 비극적인 결말은 그와 함께 괴로워하던 나를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비극이 주는 승화. 

『마음』은 내게 카타르시스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주었다.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하고 묻고는 "마흔쯤 살면 되지 않을까?"하는 물음으로 답하던 날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늘었지만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나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날까지 악착같이 무엇을 이루고 가겠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흐지부지하게, 적당히 태평하게 지내도 좋지 않은가 할 뿐이다. 

 흐지부지하고, 흐릿하고, 희미한 시간. 

그런 삶은 분명 내게 잘 어울리는 그런 삶일 거였으니까.


 아니다.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솔직히는 이루고자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다만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을 읽고 있으면 언제나 서글픈 안심감에 안도하게 된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 결말을 맞은 사람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 어떤 결과의 원인이나 이유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의미를 포함해서 말이다.


 비극이기에 필연적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이해'로 수렴되어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선생님을 통해 이런 고백을 들려주는 이유도 그런 것일 테고.


 술은 끊었지만 아무것도 할 마음이 일지 않았네. 어쩔 수 없으니 책을 읽었지. 하지만 그냥 읽기만 하고 내팽개쳤어. 아내가 나에게 종종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네.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지.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싶어 슬펐네. 이해시킬 수단이 있는데도 이해시킬 용기가 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슬퍼지더군. 나는 적막했네. 어떤 곳으로부터도 떨어져 세상에 홀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자주 있었지.
『마음』중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온전히 자신에게서 그치기를 바라며, 이해시키고 싶지만, 이해시킬 수도 있지만 용기 낼 수 없어 적막한 시간을 홀로 견디는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단 한 사람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이해시킬 수 없는,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과 외로움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아는 삶. 차라리 몰랐더라면 괴로움도 없었을 텐데.


  역시 말로든 글로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소개하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름 분투했건만 결국 여기까지 와보니, "나는 『마음』을 좋아합니다."하고 고백하기 위해 긴 글을 적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있음만 깨닫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하는 것 외에 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책에 대한, 작품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듯 사람에 대한 고백도 이처럼 수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선생님을 변호하고 싶어 보탠다. 친구를 배신했고, 그 결과 혹은 원래의 결심에 결심을 더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선생님은 악인이 아니다. 사랑을 믿었고, 또 믿고자 했던 선생님은 다만 용기 없는 가엾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는 돈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았네. 따라서 남이 보면 이상한 것이라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된 것이라도 내 가슴속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양립할 수 있었지. 

창피를 당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과는 좀 다른 거였어. (''')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럭저럭 안정되는 법이라는 이치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열중해 있었지. 다시 말해 나는 아주 고상한 이론가였던 거네. 동시에 가장 에둘러 가는 사랑의 실천가였던 셈이지.
『마음』중

두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생님'은 사랑을 믿었고,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에 열중했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사랑했기에 몹시 외로워야 했던 모순의 희생자였다. 


 사랑이 넘치는, 고백이 판치는, 이별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이 시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은 믿어보고 싶지 않은가? 이 미련하고 답답한 사랑이 행복이 되는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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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개인이 저마다 깨어나면 사회도 세상도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은 어리석은 것일까. 

"사람들을 깨워야만 한다."

"먼저 깨달은 우리가 모두에게 전해야만 한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정말 절대적인 진리이며,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깨우고, 누가 누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계몽 :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깨우고 이끈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식민 제국주의.

그들은 무지몽매한 인간과 인종과 후진적인 나라를 일깨우겠다고 표방했다. 선진국의 문물과 서양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더 효율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빼앗아 가기 위해, 그들은 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계몽했다.


 꿈.

그들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 마주해야 했던 것은 그 어떤 지독한 악몽보다 더 가혹한 생지옥, 없던 것으로 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무덤 같은 시간이었다. 


말하기를.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산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답하기를.

"아니오. 이제 그만 '살아지기'를 원합니다. 죽음에서 '살아갈'지라도 오롯한 나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계몽의 폭력성은 지극히 크고, 극악하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이 나은 것이다." 

이 모든 말들은 지극히 정당한 폭력인 동시에, 지극히 부당한 폭력이 된다.


먼저 고백하기로 하자. 

나는 이 작품 『채식주의자』에서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소리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채식주의자』는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작품은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화자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한 것에서 시작해서, 영혜가 죽음의 문턱 즈음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기묘하고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제목은 '채식주의자'이지만 이야기 속에는 채식주의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육류만을 먹지 않는 사람, 생선은 먹는 사람, 계란은 먹는 사람, 고기, 생선, 계란, 유제품 등 동물성인 것은 모두 먹지 않는 사람. 이렇게나 많은 거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의'를 갖고 있다는 거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발적인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자발적인 이유로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원하지도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유형자, 죄인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계기는 꿈 때문이다. 고기가 널려있는 꿈, 얼굴들, 하지만 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년의 영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흰둥이의 기억과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기억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갑작스럽다고 한다면 왜 하필 그날부터였는가 하는 것 정도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왜, 그날부터였을까?


 처음에는 채식만 하면 됐던 것이 자해와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자신이 나무이며 더 이상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영혜의 삶에 가장 깊이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형부와 언니다. 형부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하려 하지만 그 작품은 완전히 식물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언니, 언니는 자신의 남편이 동생에게 한 짓을 확인한 후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 강인하게 버텨왔던 인격에 생겨난 균열을 감지한다. 그것은 충격이나 경악이라고 하기보다 슬픔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서 오는 슬픔.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후의 슬픔. 그런 슬픔 말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공통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게 『채식주의자』는 그저 보통의 소설로 읽힐 뿐이었다. 잘 썼고, 잘 읽히며, 거의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이상적인 한 편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그런 소설이다. 

  

 기이한 것은 『채식주의자』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야기를 읽는 내내 느낀 것이 동물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본능이나 욕구와는 다르다. 동물의 그것은 언제나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어쩐지 막막하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식물적인 것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

이것은 나의 편견이다. 식물은 온건하다거나 식물은 생존 욕구가 강하지 않다거나, 식물은 욕망하지 않는다거나, 식물은 잘 어우러진다는 식의 모든 것들이 편견이다. 

  

 촌놈인 나는 식물의 우악스러운 생명력을 익히 보며 자랐다. 식물의 탐욕스러움과 잔인함도 얼마든지 겪었다. 식물의 잔인함은 의도하지 않고도 그렇게 한다는 데에 있으며, 죄의식이나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고, 다만 DNA에 담긴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다는 데에 있다.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정의는 달라져야 한다. 식물적인 것은 거스르지 않지만, 동물적인 것은 거스른다는 식으로 말이다. 채식을 한다는 것은 동물적인 행위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편하고 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잡식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육식만 하거나, 채식만 한다면 자칫 불균형을 초래하기 쉽다. 영양의 불균형은 곧 정신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육식만 하는 것도, 채식만 하는 것도 어려운 이유다. 


 채식주의자는 몹시 섬세해야 한다. 언제, 어떤 음식에, 어떤 재료가 동물적인 것인지 살피고, 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채식을 하면 건강해진다는 말은 그 수준이 적절하며, 균형이 맞을 때의 이야기다. 극단적이고 무모한 채식은 생명을 늘리기보다 단축시키는 결과를 부른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라고 불러도 적절하지 않다. 다만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뿐이다.


 『채식주의자』가 동물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태에도 폭력적인 면모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동물적인 것처럼 충동적이거나 갑작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폭력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유예를 주거나 애초부터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다. 

 동물적인 폭력은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며, 무엇인가가 '파괴'되는 결과를 부른다. 그 피는 붉을 수도 있고, 푸를 수도 있으며, 하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그 피가 과도하면 반드시 죽음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적는 것을 잊었는데 동물적인 폭력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다. 이것은 소리도, 흐르는 피도 없지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며, 그 결과는 확실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의 의식은 소설의 밖을 떠돌았다. 소설 안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 혹은 발견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바깥 세계에서 구해야만 했던 거다. 그 결과가 채식주의와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이었다. 이야기가 던진 폭력과 채식이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런 식의 그림을 그려낸 셈이다. 


 이렇게 짧지 않은 글을 끄적이는 동안에도 솔직히 이야기하면 '내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극히 식물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동물임에도 식물적으로 사고한다. 식물적으로 사고하는 동시에 동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그 모순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음도 안다. 

 인간은 비극적이며 희극적이다. 인간이 곧 모순이기에. 


나는 아마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 거라는 걸 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지지 않았던 것임도 안다. 

  

미숙함은 미숙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에 깊이가 있다면 그 깊이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정도로 깊은 것이거나, 너무 파고 들어와 그 깊이보다 깊게 들어왔기에 영원히 발견할 수 없는 얕은 것일 거다. 

 안타까운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의지로는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거다. 지금 끄적인 이 글 속에 담긴 생각들이 정말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 그 어떤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감상을 읽는 사람 중에 누군가 있어, 자기의 이야기를, 생각을 들려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나는 잡식주의자다. 채식주의자의 편도 육식주의자의 편도 아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의 적이며, 육식주의자의 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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