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개인이 저마다 깨어나면 사회도 세상도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은 어리석은 것일까. 

"사람들을 깨워야만 한다."

"먼저 깨달은 우리가 모두에게 전해야만 한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정말 절대적인 진리이며,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깨우고, 누가 누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계몽 :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깨우고 이끈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식민 제국주의.

그들은 무지몽매한 인간과 인종과 후진적인 나라를 일깨우겠다고 표방했다. 선진국의 문물과 서양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더 효율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빼앗아 가기 위해, 그들은 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계몽했다.


 꿈.

그들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 마주해야 했던 것은 그 어떤 지독한 악몽보다 더 가혹한 생지옥, 없던 것으로 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무덤 같은 시간이었다. 


말하기를.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산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답하기를.

"아니오. 이제 그만 '살아지기'를 원합니다. 죽음에서 '살아갈'지라도 오롯한 나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계몽의 폭력성은 지극히 크고, 극악하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이 나은 것이다." 

이 모든 말들은 지극히 정당한 폭력인 동시에, 지극히 부당한 폭력이 된다.


먼저 고백하기로 하자. 

나는 이 작품 『채식주의자』에서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소리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채식주의자』는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작품은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화자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한 것에서 시작해서, 영혜가 죽음의 문턱 즈음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기묘하고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제목은 '채식주의자'이지만 이야기 속에는 채식주의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육류만을 먹지 않는 사람, 생선은 먹는 사람, 계란은 먹는 사람, 고기, 생선, 계란, 유제품 등 동물성인 것은 모두 먹지 않는 사람. 이렇게나 많은 거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의'를 갖고 있다는 거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발적인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자발적인 이유로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원하지도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유형자, 죄인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계기는 꿈 때문이다. 고기가 널려있는 꿈, 얼굴들, 하지만 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년의 영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흰둥이의 기억과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기억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갑작스럽다고 한다면 왜 하필 그날부터였는가 하는 것 정도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왜, 그날부터였을까?


 처음에는 채식만 하면 됐던 것이 자해와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자신이 나무이며 더 이상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영혜의 삶에 가장 깊이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형부와 언니다. 형부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하려 하지만 그 작품은 완전히 식물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언니, 언니는 자신의 남편이 동생에게 한 짓을 확인한 후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 강인하게 버텨왔던 인격에 생겨난 균열을 감지한다. 그것은 충격이나 경악이라고 하기보다 슬픔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서 오는 슬픔.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후의 슬픔. 그런 슬픔 말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공통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게 『채식주의자』는 그저 보통의 소설로 읽힐 뿐이었다. 잘 썼고, 잘 읽히며, 거의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이상적인 한 편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그런 소설이다. 

  

 기이한 것은 『채식주의자』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야기를 읽는 내내 느낀 것이 동물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본능이나 욕구와는 다르다. 동물의 그것은 언제나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어쩐지 막막하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식물적인 것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까?

이것은 나의 편견이다. 식물은 온건하다거나 식물은 생존 욕구가 강하지 않다거나, 식물은 욕망하지 않는다거나, 식물은 잘 어우러진다는 식의 모든 것들이 편견이다. 

  

 촌놈인 나는 식물의 우악스러운 생명력을 익히 보며 자랐다. 식물의 탐욕스러움과 잔인함도 얼마든지 겪었다. 식물의 잔인함은 의도하지 않고도 그렇게 한다는 데에 있으며, 죄의식이나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고, 다만 DNA에 담긴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다는 데에 있다.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정의는 달라져야 한다. 식물적인 것은 거스르지 않지만, 동물적인 것은 거스른다는 식으로 말이다. 채식을 한다는 것은 동물적인 행위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편하고 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잡식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육식만 하거나, 채식만 한다면 자칫 불균형을 초래하기 쉽다. 영양의 불균형은 곧 정신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육식만 하는 것도, 채식만 하는 것도 어려운 이유다. 


 채식주의자는 몹시 섬세해야 한다. 언제, 어떤 음식에, 어떤 재료가 동물적인 것인지 살피고, 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채식을 하면 건강해진다는 말은 그 수준이 적절하며, 균형이 맞을 때의 이야기다. 극단적이고 무모한 채식은 생명을 늘리기보다 단축시키는 결과를 부른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라고 불러도 적절하지 않다. 다만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뿐이다.


 『채식주의자』가 동물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태에도 폭력적인 면모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동물적인 것처럼 충동적이거나 갑작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폭력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유예를 주거나 애초부터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다. 

 동물적인 폭력은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며, 무엇인가가 '파괴'되는 결과를 부른다. 그 피는 붉을 수도 있고, 푸를 수도 있으며, 하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그 피가 과도하면 반드시 죽음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적는 것을 잊었는데 동물적인 폭력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다. 이것은 소리도, 흐르는 피도 없지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며, 그 결과는 확실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의 의식은 소설의 밖을 떠돌았다. 소설 안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 혹은 발견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바깥 세계에서 구해야만 했던 거다. 그 결과가 채식주의와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이었다. 이야기가 던진 폭력과 채식이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런 식의 그림을 그려낸 셈이다. 


 이렇게 짧지 않은 글을 끄적이는 동안에도 솔직히 이야기하면 '내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극히 식물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동물임에도 식물적으로 사고한다. 식물적으로 사고하는 동시에 동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그 모순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음도 안다. 

 인간은 비극적이며 희극적이다. 인간이 곧 모순이기에. 


나는 아마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 거라는 걸 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지지 않았던 것임도 안다. 

  

미숙함은 미숙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에 깊이가 있다면 그 깊이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정도로 깊은 것이거나, 너무 파고 들어와 그 깊이보다 깊게 들어왔기에 영원히 발견할 수 없는 얕은 것일 거다. 

 안타까운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의 의지로는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거다. 지금 끄적인 이 글 속에 담긴 생각들이 정말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 그 어떤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감상을 읽는 사람 중에 누군가 있어, 자기의 이야기를, 생각을 들려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나는 잡식주의자다. 채식주의자의 편도 육식주의자의 편도 아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의 적이며, 육식주의자의 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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