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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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말로 설명하는 일에 유난히 서툴다. 글로는 능숙한가? 그렇지도 못하다. 

왜 이렇게 서툰 걸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허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나은 글로 몇 자 적는 게 고작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대학교 교서관에서 발견한 이후 줄곧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준 적이 없었다. 이레 출판사의 판본, 올재 클래식의 판본을 거쳐, 새로 출간된 현암사의 판본까지. 그저 『마음』이기만 하면 그저 좋았다.


 『마음』은 '나'가 만난 '선생님' 이야기다. 나의 부모님도 등장하지만 그쪽의 사정에는 좀처럼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선생님'의 사연이 너무나 기가 막혔고, 비밀이 몹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더 끌렸던 거다. 

 이야기의 결말을 먼저 밝히는 걸 피하는 편이지만 이 이야기는 결말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이기에 짧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감상을 시작하기로 한다.


 '나'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에게는 자살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자살한 데에는 선생님의 잘못도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 그 배신은 친구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지켜왔던 신념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친구가 자살한 후에 선생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며 멀리 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선생님이 보낸 두꺼운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는 선생님의 유서였다.


 '묵독파티'에서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한 분이 내게 "비극을 좋아하시나 봐요."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사실이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극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비극적인 이야기, 이루어지지 못한, 엇갈린, 빗나간, 부서진, 깨어진, 멀어진, 다시는 만나지 못한. 

비극을 소개하는 데 쓰는 표현은 많고도 많다. 그만큼 세상에는 무수한 비극이 있을 거라는 걸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비극의 유용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비극의 유용성'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비극 속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해의 극한, 미움의 극한, 질투의 극한, 엇갈림의 극한, 몰이해의 극한. 슬픔의 극한도 빼놓을 수 없겠다. 


비극을 읽는 동안 나는 누구도 미워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누구든 미워하고 상처 입힐 수 있다. 

'유토피아'

비극의 무대는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슬픔과 고통, 아픔과 괴로움을 얼마든지 경험해도 상처가 되지 않는 무제한의 힐링캠프다.


 선생님의 친구는 자살하기 전 유서를 남긴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내가 가장 통절하게 느낀 것은 마지막에 먹으로 덧붙인 듯이 보이는, 좀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았을까 하는 의미의 문구였어.
『마음』중

만약 가깝게 지낸 누군가가 스스로 폭력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나'에게 남긴 것이 분명한 문장이 나의 마음에 파고 들어와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 따라다닌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만 할까? 


선생님의 고민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친구의 죽음 이후에 모든 즐거움을 떠나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며 조용히 자라나는 죄의식을 지켜보며 괴로워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결말,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를 선생님이 대신 택해줬을 때, 그 비극적인 결말은 그와 함께 괴로워하던 나를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비극이 주는 승화. 

『마음』은 내게 카타르시스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주었다.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하고 묻고는 "마흔쯤 살면 되지 않을까?"하는 물음으로 답하던 날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늘었지만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나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날까지 악착같이 무엇을 이루고 가겠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흐지부지하게, 적당히 태평하게 지내도 좋지 않은가 할 뿐이다. 

 흐지부지하고, 흐릿하고, 희미한 시간. 

그런 삶은 분명 내게 잘 어울리는 그런 삶일 거였으니까.


 아니다.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솔직히는 이루고자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다만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을 읽고 있으면 언제나 서글픈 안심감에 안도하게 된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 결말을 맞은 사람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 어떤 결과의 원인이나 이유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의미를 포함해서 말이다.


 비극이기에 필연적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이해'로 수렴되어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선생님을 통해 이런 고백을 들려주는 이유도 그런 것일 테고.


 술은 끊었지만 아무것도 할 마음이 일지 않았네. 어쩔 수 없으니 책을 읽었지. 하지만 그냥 읽기만 하고 내팽개쳤어. 아내가 나에게 종종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네.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지.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싶어 슬펐네. 이해시킬 수단이 있는데도 이해시킬 용기가 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슬퍼지더군. 나는 적막했네. 어떤 곳으로부터도 떨어져 세상에 홀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자주 있었지.
『마음』중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온전히 자신에게서 그치기를 바라며, 이해시키고 싶지만, 이해시킬 수도 있지만 용기 낼 수 없어 적막한 시간을 홀로 견디는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단 한 사람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이해시킬 수 없는,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과 외로움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아는 삶. 차라리 몰랐더라면 괴로움도 없었을 텐데.


  역시 말로든 글로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소개하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름 분투했건만 결국 여기까지 와보니, "나는 『마음』을 좋아합니다."하고 고백하기 위해 긴 글을 적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있음만 깨닫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하는 것 외에 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책에 대한, 작품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듯 사람에 대한 고백도 이처럼 수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선생님을 변호하고 싶어 보탠다. 친구를 배신했고, 그 결과 혹은 원래의 결심에 결심을 더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선생님은 악인이 아니다. 사랑을 믿었고, 또 믿고자 했던 선생님은 다만 용기 없는 가엾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는 돈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았네. 따라서 남이 보면 이상한 것이라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된 것이라도 내 가슴속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양립할 수 있었지. 

창피를 당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과는 좀 다른 거였어. (''')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럭저럭 안정되는 법이라는 이치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열중해 있었지. 다시 말해 나는 아주 고상한 이론가였던 거네. 동시에 가장 에둘러 가는 사랑의 실천가였던 셈이지.
『마음』중

두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생님'은 사랑을 믿었고,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에 열중했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사랑했기에 몹시 외로워야 했던 모순의 희생자였다. 


 사랑이 넘치는, 고백이 판치는, 이별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이 시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은 믿어보고 싶지 않은가? 이 미련하고 답답한 사랑이 행복이 되는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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