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마음 놓고 재밌게 읽은 책을 만났다. 그런데 묘한 건 신나고 재밌게 읽었건만, 읽는 동안 크게 웃은 적이 있던가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거다. 

 뭐,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자. 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거다. 그리고 아마 몇 번쯤 '풋'이라거나 '푸흡'이라거나 '푸흐훗'이라거나 하고 웃기는 했을 거다. 지하철에서 거진 다 읽었으니 소리 내어 웃을 수 없었을 뿐.


 보건교사인 아는형, 아차, 안은영 선생님(별명이 아는형)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보고, 해로운 것들을 흩어버릴 수 있는 '엑소시스트'의 능력이 그것이다!(두둥) 


그렇다고 아는형 선생님, 아차, 안은영 선생님이 어떤 소설의 누구처럼 '월향'을 날린다거나, 기도력으로 싸우느냐? 그건 아니다. 안.은.영. 선생님의 무기는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다(이건 뭐, 설정부터 기대할만하다). 


 안은영 선생님은 보건교사다. 그러므로 당연히 배경은 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가 위치한 곳이 참 묘한 곳이라 자꾸만 나쁜 것들이 꼬이고 난리도 아니다. 다른 직장에 있을 때도 타고난 능력 때문에 힘들었기에 좀 편하게 지내볼 생각으로 학교에 발을 들였건만 역시 세상은 능력자를 가만두지 않는 모양이다. 


 이 학교에는 또 한 사람의 특이한 인물이 있는데 학교 창립자의 손자인 한문 선생님 홍인표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기운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안은영에게 힘을 빌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둘의 묘한 협력 관계는 학교의 다른 이들에게는 '연애질'로 보이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는.


 여하튼, 안은영 선생님은 매일매일 죽은 것과 산 것과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것과의 혈투(?)를 계속한다. 이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는 미련과 산 자를 해치려는 원한과 죽은 자들보다 더 무서운 산 자들의 사념에 관한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작가의 말을 통해 알게 된 거지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대부분 실재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름 혹은 별명이었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전적으로 사실적인 존재라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보건교사 퇴마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 이렇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내는 시리즈에 들어갔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도 적었던 것처럼 재미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더 흥미로운 것은 아무 의미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가끔씩 스리슬쩍 비치는 현실의 모습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조금이라도 곱씹어 보지 않으면 지나간 줄도 모를 그런 풍경들. 

 하지만 그런 걸 오래 곱씹거나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호흡을 끊어가며 집요하게 굴어서야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한 번 더 읽게 되면 그때는 사건이나 배경의 의미나 전개 등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의도를 찾아볼까 싶기는 하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굳이 의미를 찾지 않는 것이 더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현명한 태도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안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좋을 책을 발견했다는 기쁨 외에도 이 작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단순한 건데, 흔히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한 상대방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복수를 꾀한다는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특이한 학교에, 묘한 인물들의 이야기인데 결국 흔한 무협지 속 복수극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다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무협지보다 좋은 건 상상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벌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나 존재가 등장할 수 있는 것도 판타지다. 무협지는 '초인'들의 세계에 가까워서 오히려 현실적인데도 이 세상은 현실적인 무협지보다 환상적인 판타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현실적인 것보다 판타지가 더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류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지는 걸 그렇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또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다. 


 하지만 판타지가 좋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환상적인 일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좋은 거다. 결국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들, 얼토당토않은 사건들이 일어나도 내 삶의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정말 재밌게 읽힌다. 늦었지만, 이 책을 주신 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다시 전한다. 

고맙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