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 네안데르탈인에서 데니소바인까지
스반테 페보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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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성 : ★

유용성 :  

재미 :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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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무리가 짙게 낀 다음날은 비가 내릴 확률이 높다."

 "저녁 노을이 유난히 붉은 다음 날은 흐릴 확률이 높다."

 "아침 안개가 낀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덥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위에 적은 내용들은 중고등학교에서 모두 배웠던 거다. 어쩌면 이제는 워낙 간단히 날씨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기에 배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래의 친구들에게 저런 내용을 이야기해줄 때면, 종종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되묻는 통에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혼자만 배웠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보기도 하는거다. 이런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며 "지금 이 책을 왜 읽고 있는 것일까?"하는 물음과 "이 책을 읽어서 뭘 하려는 걸까?"하는 의문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 책의 쓸모는 뭘까?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아지는 것이 있기는 할까? 

 무엇을 알고 싶어서 읽고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이 물음들에 적당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런 교양 과학서들과 조금 멀어지게 될 거다. 

 사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권한 것도 아닌데다 심지어 스스로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사서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품는다는 건 모순된 행동임이 분명하다. 필요하지 않았다면 사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고, 왜 읽어야하는지 모르겠다면 읽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앞부분은 연구의 목표오 과정을 거듭 확인하고 나열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몹시 지루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발견이나 연구가 그렇듯 정말 운이 좋은 게 아니라면 모든 발전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 책 역시 그렇다. 단순히 흥미로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이 정도였다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려 한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깜짝 놀랄 준비를 해두는 게 좋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는 제법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니 하는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고, 네안데르탈 인은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와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멸종한 것으로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네안데르 탈 인의 DNA를 분석한 결과를 통해 네안데르탈 인이 현재의 인류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네안데르탈 인은 멸종하지 않았다. 네안데르탈 인은 우리 안에 살아있다."고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니면 말고.


 다카노 가즈아키는 소설 『제노사이드』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 인을 멸종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네안데르탈 인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잡아먹히거나 학살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 인의 유전자가 현대의 인류에게 남아있으므로 '멸종했다'는 표현은 조금 성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간의 DNA 지도가 완성된 이후에 진행된 고대인류의 DNA 연구에 대한 최신의 보고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과 몇 그램의 뼈만 가지고도 네안데르탈 인을 '복제'할 수도 있다는 암시도 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로 어딘가에서는 이미 복제를 해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복제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책 속에서 연구한 네안데르탈 인과 데니소바인의 DNA 연구 결과는 분명 인류의 역사와 진화에 영향을 준 요소들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어떤 형질의 발현을 담당하는지, 왜 진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했는지, 결정적으로 분기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성도 커진 게 사실이다.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는 걸 잊지 말자. 

 네안데르탈 인의 유전자가 인류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저자인 스반테 페보도 염려한 것처럼 인종차별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에 굴절을 더하고 차별을 정당화 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책에서 언급된 내용은 없지만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동시에 두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네안데르탈 인이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도태된 것처럼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 역시 언제든 새로운 종에 밀려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권의 책이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책은 세상에 나온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역시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 전해진 의미는 단순하게는 "네안데르탈 인은 사라지지 않았다"였고, 조금 깊이는 "인류 역시 같은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대 인류와 진화에 관심이 있는 분은 꼭 읽어보시길.

당신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네안데르탈 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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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 Movie Tie-in 펭귄클래식 139
솔로몬 노섭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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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소설이라고 부르기 미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도, 가상의 이야기도 아닌 누군가에는 현실이었던 이야기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로 전락한 상태로 절망적일 정도로 길게 느껴졌을 12년 동안의 이야기인 거다. 


 이 작품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은 1808년 노예제도가 폐지된 미국의 북부, 뉴욕 주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노예였지만 마음 좋은 주인을 만나 일찍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솔로몬 노섭은 흑인이지만 자유인으로서 30년 넘는 시간을 보낸다.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고 기술을 익히고, 부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납치되어 아직 노예제도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남부로 끌려가게 된다. 자신의 본래 신분을 떠벌렸다가는 언제든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다시는 가족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 된다. 결국 솔로몬 노섭은 틈을 노려 편지를 보내서 소식을 전하거나 탈출을 궁리하면서 훌륭한 노예를 연기한다. 


 만약 나였다면 30년 넘는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불과 며칠 만에 박탈당하고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많은 흑인들이 납치되어 노예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주인에게 살해당하거나 도망치려다 죽거나 잡혀와서 맞아 죽거나 하는 비극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남은 노예들은 더 순종적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일단 사람이기에 살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놀라운 건 대부분의 노예들은 결코 반항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은 완전히 길들어 있었다. 이것은 학습된 무기력과 다르다. 어떤 노예들은 '기꺼이' 노예를 자처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노리고 다른 노예들을 괴롭히는 노예도 있었다. 


 사실 이런 풍경은 현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 있다. 노예를 자처하는 사람과 노예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흔히 우리는 '권력의 노예'라는 말 혹은 '금전의 노예'라는 말을 예사로 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말을 하는 본인들이 그 누구보다 앞장서 있는 노예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노예 12년 속 솔로몬 노섭의 경우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글을 몰랐다면, 손재주가 없었다면, 악기를 잘 연주하지 못했다면 그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았을 거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몰랐다면 악사로 고용되어 납치되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를 납치하려는 사람들이 무슨 구실을 대고 그를 끌어들였을지 모르기에 그의 배움과 앎이 힘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겠다. 


 솔로몬 노섭이 노예 생활을 끝내고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이 자유인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였다. 자유는 마치 형상기억 합금 같다. 자유롭던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한 그 자유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0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을 잊고 노예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자유를 위한 생존보다 생존을 위한 복종을 택한다면 자유를 되찾을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거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하루하루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여자 노예의 사연이었다. 그 여자는 주인에게 사랑을 받아 거의 자유인처럼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인이 약해진 틈을 타, 여자 주인과 사위가 그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상에게 팔아버린 거였다. 아직 어린 딸은 크면 예뻐질 것이라며 높은 값을 매겨 여자를 산 주인이 함께 사들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들과도 그렇게 헤어졌다. 혼자 남은 여자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느라 야위고 약해져 간다. 그리고 결국 아이들과 다시 만나는 일 없이 일찍 죽어 묻힌다. 


 우리나라에도 노예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바로 노비제도다. 하지만 나는 노예제도보다  노비제도가 더 악독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노예는 피부색이 다르거나 인종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다른 인종을 저능하다고 여겼고, 천하다고 믿었으며, 발달이 덜 된 미개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를 노예에게 심어주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 재우고 가축과 동일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비제도는 어떤가? 바로 이웃하고 지내던 이웃집 사람들이 다음 날부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같은 민족, 같은 피부색, 같은 교육 수준에 있어도 노비는 양반은커녕 평민과 마주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지독한 차별과 계급의 구별이 우리나라에는 있었다. 노비는 혼까지 노비로 물들게 만들었다. 노비 문서를 만들어 대대로 사고 팔며 종속시켰다. 노비는 물건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분이 천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개혁의 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꽉 막힌 세계. 그것이 과거 우리나라에 드리웠던 어둠이다. 


 이 시대는 어떨까? 조선이 대한민국이 되면서 우리는 자유를 되찾은 걸까?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누리고 있는가? 


 노예와 자유인의 간극은 아주 작은 사고의 차이에 있다. 자유인이라고 해도 사고가 노예나 다름없으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노예처럼 묶여 있더라도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고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노예로 살다 노예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생각의 문제다. 행동은 생각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무의식적인 행동, 충동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생각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의지라는 이야기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처럼 부려지는 삶이 있는가 하면, 노예로 태어나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되묻는다. 대답은 당연히 자유로운 삶이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 것이다. 


 나는 노예는 되지 않겠다.

그런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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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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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매일 '더 많은 것'을 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고, 효율을 높여야한다는 강박이 지극히 평범하면서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마 이런 깨달음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고 떠올렸다가 잊어버리고, 다시 잊었다가 떠올리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뭐, 그런 거겠죠. 이번의 깨달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질 거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몇 자 적어두기로 해요. 내일 혹은 더 나중의 내가 지금 끄적여 둔 이 글을 보고 다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라도요.


 『모모』를 처음 읽은 건, 10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오래됐거나 덜 오래 된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때 어쩌다 읽게 됐는지는 기억하지 못해요. 그러나 그때도 이야기 속 모모의 모습과 시간도둑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렇게 살지 않겠어"라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모』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색 신사들, 즉 시간 도둑들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저 역시 잊어버린채 살아왔지요. 바쁘기 때문에 잊어버린 것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바빠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두 가지 모두 사실이에요. 

 저는 잊어버렸고, 또 바빠졌다고 느꼈어요.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된 이유는 그런 거였습니다. 단순한 거였어요. 이런 물음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나는 왜 시간을 아낄수록 더 바빠지고, 시간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


 책을 읽을 틈이 있음에도 전처럼 느긋하게 책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책을 읽으면서도 순간순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하는 생각에 방해를 받았구요. 결국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죠. 

 

"왜 이렇게 된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내가 그렇게 되는 걸 허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모』에서 시간 도둑들은 결코 무단으로 시간을 빼앗아 가지는 않아요.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허락을 받고 난 후에야 시간을 빼내게 되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 도둑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고, 너무 바빠서 다시 생각할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사람들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더 시간이 없어지게 되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버려요. 서두르지 않으면 뒤쳐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에 떨지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모모는 자꾸만 더 서두르려는 사람에게 '느리게 할수록 더 빨리 나아가게 되'는 공간을 통해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느긋해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전력을 다해 달려나가는 걸 보게 될 것이고, 그들이 달려가면서 하는 소리를 듣게 될 테니까요. 

 "어이! 넌 지금 어마어마하게 뒤쳐지고 있다고! 패배자가 되고 말 거라고!!"

결국 이 말을 자꾸만 거듭해서 듣는 동안 조바심이 커질테고 다시 전력질주하는 대열로 돌아가게 되는 거지요.



 가볍게 쓰고 자려고 했는데 이거 또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해버렸네요.


『모모』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눠주는 존재인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내놓죠. 물론 모모는 푸는 데 성공하지요.

그 수수께끼는 이렇습니다.




  210쪽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이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셋째를 보려고 하면 두 형 중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 말해보렴.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꼬마야, 그들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으면, 넌 세 명의 막강한 지배자 이름을 알아맞히는 셈이야. 그들은 함께 커다란 왕국을 다스린단다. 또 왕국 자체이기도 하지! 그 점에서 그들은 똑같아.


 오이디푸스 왕은 스핑크스가 내놓는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테베의 왕이 되지요. 그 결말이 행복했든 불행했든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은 스핑크스의 재앙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지요. 모모에게 주어진 수수께끼는 무척 복잡해 보입니다. 하지만 호라 박사는 모모가 풀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호라 박사와 함께 있는 정확히 '반 시간 앞을 내다보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역시 모모가 수수께끼를 푼다고 말하고요. 

 수수께끼의 핵심은 '세 형제'가 누구인가와 '그들이 함께 다스리는 왕국'이 어디인가입니다.


 정답을 알려드리자면 세 형제란 시간의 세 가지 속성,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의미해요. 

첫째는 미래고, 둘째는 과거고, 셋째는 현재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중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벌써 나갔다고 했지요. 

셋째가 있으려면 첫째가 둘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미래가 과거가 되는 중간이 바로 현재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보려고 하지만 우리가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현재를 보려고 해도 과거나 미래만 보게 되는 거지요. 세 형제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또 셋이겠지요. 

 그 세 명이 다스리는 왕국은 당연히 이 세상입니다. 

 모모는 오이디푸스 왕처럼 왕위를 얻지는 못하지만 시간의 속성을 깨달음으로써 시간 도둑들을 물리치고 갇혀있던 시간들을 본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전처럼 마음 껏 상상하며 뛰놀 수 있게 되고, 어른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일하고 살아가는 게 가능하게 되지요. 모모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 돌아오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모모 이야기의 핵심은 '시간'에 있지요. 

그런데 이 시간을 빼앗아 가는 시간 도둑들은 사실 그 사람 자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위해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과 자신만을 위한 시간들을 줄이거나 없애버란다는 거지요. 그것은 성공일수도 있고, 권력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되고, 단지 열심히 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 무의미한 열심의 실천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말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과의 시간을 희생시키는 식이죠. 나중에는 돈은 많지만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 되는 것일까요?

 카르페 디엠. 

우리는 이 말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죠. 

"현재에 충실하라", "지금을 즐겨라" 뭐 이런 뜻이라는 걸요. 하지만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느끼는 게 사실이에요. 지금 이렇게 쓰고 있지만 제게도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달려야 하는데 무슨 소리냐며 잠꼬대 혹은 팔자 좋은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미래와 과거는 모두 현재를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방금 전에 현재였던 순간은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어요. 이제 월요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할 시간이라는 거지요. 어쩌면 이번 주 역시 지난 주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 바빠질 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제나 여유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모모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입니다. 모모가 무엇을 해줘서도 아니고, 뭔가를 많이 가진 것도 아니지만 모모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모모에게만 가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요. 모모의 비결은 잘 들어주는 것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잘 들어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모모에게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모라고 48시간을 사는 건 아니지요. 다만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줄 수 있는 시간을 얼마든지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는 거지요. 


 시간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만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지쳐가는 분들께 이 책 『모모』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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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11-18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요ㅎㅎ 시간은 모두다 똑같이 주어지는데 왜자꾸 짧다고 느껴지는지 시간에 비해 왜 성관 없냐고 늘 투정하고 저 자신에게 스트레스만 쌓인거 같거든요... ㅜㅜ

대장물방울 2015-11-21 06:43   좋아요 0 | URL
^^ 맞아요. 정말 요즘에는 어찌나 시간이 빨리가는지 일주일이 하루 같아요.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함께 힘내요!!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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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물기가 마르는 속도보다 더 빨리 흩어져 사라진다. 그 신속한 휘발성이 기억 본래의 속성인지 오직 나에게만 그런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고백하고 시작하려고 한다. 이 책을 읽은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용의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곱씹지 않고, 음미하지 않고, 되새기지 않고 후다닥 읽어내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읽혔다. 후다닥 하고.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거나 앙금처럼 고이지 않았다. 이제와서 혈육이라니. 혈연의 트라우마라니. 한국이 싫어서 이민갈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는 넘치는 이 시대에 말이다. 

 혈육이라는 끊기지 않는 연결, 그 족쇄와 같은 구속과 부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회적인 이슈를 문제을 제기하며 담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문제는 공감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격하게 공감하게 되지는 않았다. 이 공감의 부재가 무지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많은 것을 알고자 하지만 그 앎이 절대적이지는 않으며, 거의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앎이므로. 


 '혈육'이라는 표현을 공유하는 범위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에 비해 대단히 좁다. 내 경우에 '혈육'이라고 하면 멀리 잡아도 6촌까지다. 6촌은 할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의 아들딸들의 아들딸까지다. 교류가 적은 집이라면 일가족만이 혈육의 개념 안에 포함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혈육이란 그렇게 좁을 수도 있는 개념인 거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혈육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호적을 파내면 혈연이 무의미해진다고 믿는 사람이 지금도 존재한다. '절연'은 전기만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 연결까지도 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용준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 혈연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 상징적이며 고질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수십 년이나 떨어져 잊고 지내던 아버지가 어느날 회사로 찾아온 것으로 일상과 사고가 무너질 듯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순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점점 커져서 지금까지 부정했던 모든 시간을 불식시키려고 한다. 그러면서 던지는 말이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혈육이니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혈육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무엇을 해도 혈육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혈연이란 분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가장 강력하고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은 사회적 의미로서의 혈연이 아닌가 싶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오히려 더 강한 유대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관계다. 단순히 혈육이기 때문에 묶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구식의, 과거의 생각이다. 그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기에 혈육에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혈육이라는 사실로 정당화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초월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뿐'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모든 결과는 선택의 산물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이다. 선택지가 불합리하고 부자유스러우며, 부자연스러웠다고 해도 그것은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강압'이나 '위협'에 의한 것이 아닌한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예외를 하나 적어보면 위협에 의한 성폭력 같은 것이 있겠다. 성폭력이란 피해자 쪽이 약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범죄 행위다. 거기에는 어떤 정당화의 가능성도 없다. 실수나 잘못이라는 말을 성폭력 앞에 가져다 붙이는 것만큼 파렴치한 일이 있을까.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극악한 행위가 바로 성폭력 행위다.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은 학습된 무기력 혹은 편리한 관습을 따르는 관성에 불과하다. 


 변덕은 동요와는 다른 것 같다. 심장이 얼음으로 된 것 같은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일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의 방문 사실을 알고 동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혈육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하는 식의 고정된 관념에 의한 것이다. 혈육이기에 오히려 냉정해지고 모질어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다. 혈육에게 오히려 모질게 구는 것이 마찬가지로 혈육에 얽매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혈육에게나 타인에게도 무심하게 구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다. 오히려 지나가다 우연히 먹이를 던져 준 들개나 길고양이에게 더 마음을 쓰는 사람도 있다. 


 구구절절, 어지럽게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혈육이라는 것이 필연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인간의 감각이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혈육에 이끌릴 정도로 예민한 것인 동시에 확실한 혈육에게도 얼마든지 무덤덤할 수 있다. 혈육이라 사랑하는 것도, 혈육이라 미워하는 것도 아닌,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읽으며 혈육이라는 대단히 가까운 집단 속에서 벌어질 법한 갈등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불안해 하지 말자. 전혀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잘 쓴 소설이라고 느꼈다. 가장 큰 이유는 매끄럽게, 거의 내리 읽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단편들을 모아 담은 것이고, 그 주인공의 사정이나 상황, 이야기가 전혀 다름에도 단절감이나 흐름의 끊김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넓은 바다 속을 흐르는 각각의 해류처럼 저마다 흐르는 동시에 함께 나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혈육'이라는 커다란 공통 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띠지에 적힌 문구의 '서사'가 각각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거대한 통로를 뜻한다면 이 작품들은 분명 서사가 살아있는 작품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서사의 흐름 안에 독자 역시 포함되어 함께 흐를테니 더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솔직히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 가운데 정말 공감되는 것은 없었다. <개들> 정도가 어려서 시골에서 본 개를 잡는 풍경들을 떠올리게 했기에 가장 와닿았을 뿐이다. 트라우마가 없어서가 아니다. 만약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갈등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크게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구절 메모해둔 곳이 있어 남기기로 한다.

  105쪽 

 농장에서는 거부하는 개가 없다. 늙고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다리를 절고 눈이 돌아간 병신이라도 농장은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저울이 평등한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평등은 어디에도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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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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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야기의 소제목인 '스노볼'을 보며 조지 오웰의 짤막한 풍자소설이자 고발 소설인 『동물농장』을 떠올린 사람이 나만은 아니길.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즐겨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2015년 국제 도서전에서 사 가지고 온 몇 권 안 되는 책 가운데 한 권이다.  그때 산 책 가운데 한 권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서 다른 공간의 낯선, 혹은 그 책에게는 더 잘 어울리는 곳에 꽂혀 있다. 이 책을 떠나 보낸다면 누구에게 보낼 수 있을까? 솔직히 냉큼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누구에게 줘도 될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 책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즐겨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한 말의 반복 같지만 조금 다르다. 자신이 즐겁게 읽었다고 느껴지는 것을 권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불편한 것을 어떻게 선뜻 건네며 권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게 선뜻 건네기에는 책 표지마냥 차갑고 또 무거운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노골적인 이야기를 즐겨 읽지 않는다면서 하루키는 어떻게 즐겨 읽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그런 의문을 떠올렸을 사람이 있다면 하루키는 전혀 노골적인 문체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루키의 세계는  꿈속처럼 혹은 안개 속 풍경처럼 언제나 모호하다. 현실인가 하면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이 배경인 경우가 많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이 세계, 현실에 대한 은유로 존재한다. 그 세계의 사건들, 일화들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어디까지나 은유에 능한 작가라고 해야지 노골적인 작가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내 짧고 좁은 생각이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책 『최선의 삶』을 골랐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목, 다른 하나는 "체급이 달랐다"고 한 심사평이었다. 제목에는 어떤 식으로 공감해야  할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지만 체급이 달랐다는 말은 납득이 갔다. 물론 다른 작품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알지도 못하며 그것을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반칙이라고 할 수 있을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격을 느낄 수 없으면서  끊임없이 불편함을 자극하는 끈질김이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편했다. 그러나 중간에 읽기를 그쳤다가 다시 읽기 시작한 뒤로는 내리 읽어 내려갔을 만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에든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성격 탓에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불편했다. 그 어떤 외적인 요인도 일탈이나 방황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또다시 불편했다. 이 아이들, 이 아이의 삶이 제목처럼 최선의 삶이라면. 그런 삶 외에는 도무지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런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몹시 불편했다. 불편함을 피해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불편함이 기다리는 그런 이야기. 어쩌면 최악의 삶을 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나의 시선을 놓아주었다. 솔직히 다 읽고 난 후에도 그저 불편함 외에는 무슨 이야기였는지, 뭘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잘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확신처럼 떠올랐다. 불편한 데다, 재밌는 구석이라고는 없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의 무엇이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했을까? 아마 앞으로도 오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을 것만 같다.


 최선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존경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최선의 삶을 꿈꾸고 그릴 수 있을까? 그저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누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하는 기분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원망이 생겨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수동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노출되어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굳이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불편했고, 또 이런 밋밋한 감상으로 밖에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지금의 상태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거다.


 누군가 내게 "그 책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봐"라고 말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림이 없다면 읽어봐도 되고 안 읽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한다. 아니다. 동류는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거다. 자기 안의 해소되지 않은, 사라질 것 같지 않은 환상과도 같은 괴로움과 자주 마주친다면 그 환상, 시원하게 지워버리는 게 최선이 아닐까?


 우스운 건 그토록 불편했던 소설이 마지막 장을 덮고 한 동안을 보낸 후 감상을 적는 지금에는 조금은 아련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정말, 최선이란 게 뭔지. 우습기만 하다. 이유모를 웃음만 난다. 

 뭐, 그런 작품이다. 무슨 말을 더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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