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페미니즘 관련 책을 펴볼 때마다 두렵다. 거기에 실린 글들은 이제 어느덧 게을러지고 보수적이 되어 버린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나의 무지와 무감각을 일순간에 깨뜨려 버리기 때문이다. 남성인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면에는 누군가에 대한 불평등이나 누군가의 불편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나도 조심히 살피고 겸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을 글과 말로라도 겪어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타인(비단 여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내게는 꽤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다.


이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돌아보면', '무사하면', '들리면', '연결되면' 좋겠다는 제목과 함께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저자를 통해 록산 게이가 말한 '소문자 페미니즘'을 나도 경험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질문은 정말 ‘생각이 없어서’ 폭력이 된다.", "한 번도 타인의 삶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페미니즘에 가닿을 수 없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누군가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무게가 실렸을 때이다." 삶이 묻어나 있는 그의 글은 하나의 아포리즘이 되어 내 머리속에 박혔다.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나도 그들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 소수자들을 바라보았던 그간의 나의 시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정도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나마 이 알량한 생각이 그들을 반대하고 혐오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구별지으며, 자기만족으로 버텨왔지만 이제는 자인해야 겠다. 내 생각은 '인정'이 아닌 '배제'였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 정도까지만 선을 그은 채, 내 기득권을 향유하며 애써 그들과 부딪치지 않은 채 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랬던 내게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모르는 세계를 외면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계속 불편해진 끝에, 나도 언젠가는 편해지면 좋겠다. 그동안 내가 무지를 도구로 나를 지켰다면, 앞으로는 불편함을 도구로 나의 무지를 깨뜨리기를 바란다. (이미 '아재' 혹은 '꼰대'의 길어 들어섰지만) 이해하는 '척'의 수준을 넘어 이런 생각과 이런 말과 이런 행동들에 대한 불편한 반응을 줄어들기를 바란다. 타인의 삶에 대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긍정할 수 있는 생각의 비율이라도 조금 더 늘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입으로 아는 척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질문은 정말 ‘생각이 없어서’ 폭력이 된다. 생각 없는 질문은 관심의 얼굴을 하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 11쪽

보통의 존재라고 못 박기에 나와 너는 고유하다. "학교는? 직장은? 결혼은? 아이는?"과 같은 질문이 공허한 이유이다. 걷는 보폭, 젓가락질하는 손가락 모양, 리듬을 탈 때 끄덕이는 고개의 각도, 드러나지 못한 욕망... 재단할 수 없는 사람들 고유의 빛을 본다. - 33쪽

억압은 학교나 직장 같이 보이는 시스템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니라는 학교를 그만두고, 하라는 취업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사회운동을 하고, 하라는 결혼을 거부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나름의 큼직한 반항들은 스스로가 관습과 통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해방은 가까운 관계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것은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고, 그래서 거부했을 때 죄책감을 주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통제한다는 말은 집착과 폭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 46쪽

사랑의 다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한 타인으로 남을 수 없는 걸까. 각자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날 선 말로 서로의 굳은살을 해체하며 예민하게 성장할 수 있는 관계로. 여전히 나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롤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힘을 때가 많지만, 많은 부분 이 욕망이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니라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란 걸 떠올리며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아니라면 말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 47쪽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누군가의 구원이 되지는 못하니까. 상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서 영향을 주는 것보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 친절한 타인으로 남는 게 더 어렵다. 관계 맺음의 상상력 갖기. 존재 앞에서 겸손해지기. 그것이 관심이 아니라 침범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 47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 삶에 존재했던 수많은 모순이 드러났다. 일상으로 받아들이던 것들을 건드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노동은 부엌의 고정된 풍경이었다. 아침·점심·저녁이 ‘뚝딱’ 나오는 거라 믿는 우리의 평범한 식사 시간처럼, 뼛속 깊이 새겨진 습관이기 때문에 모두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64쪽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외면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마땅한 도덕’과 ‘개인의 노력’을 들이미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지금쯤 그는 알게 되었을까. 사랑이 내 세계를 깨고 상대의 세계를 기꺼이 맞이하는 일이라면, 그 시절 그와 나는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 104, 105쪽

나는 내가 경험하고 겪은 부분에 한해서만 잘 느끼고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상황은 분명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그렇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확신하려는 유혹 대신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기. 강단에 설 때,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도 내가 모르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갖기. ‘알 것 같은 느낌’에 속지 않는 부지런함도 함께. - 123쪽

불법의 주체는 바로 여성의 몸이다. 함께 잠자리를 가진 남성의 몸은 불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남성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 어떤 남자들은 그런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낙태하려는 여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를 위한다니!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도덕적인 섹스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낙태는 불법이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는 그 말들 속에 정작 나는 없다. - 156쪽

임신중절수술을 진료 목적 외의 마약을 처방하거나 환자에게 성폭력을 행한 것과 같은 의료 범죄와 등치시켜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분류해 처벌하겠다는 정부를 보며,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생력이 없고 아직 생명으로 볼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존재를 고려하는 도덕은 이처럼 공공연하게 얘기되지만, 원치 않은 임신으로 신체적·사회적 단절과 위험을 끌어안아야 하는 여성을 위한 도덕은 없다. - 158쪽

한 번도 타인의 삶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페미니즘에 가닿을 수 없다. "페미니즘이 뭐야?"라고 손쉽게 질문하고 상대가 친절하게 대답하길 바라는 태도로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가치에 조금도 닿을 수 없다. - 165쪽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뮤리엘 루카이저는 말했다. 한 여성의 시간과 몸의 서사에 세상 곳곳의 폭력과 차별이 배어 있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불러낼 거라고.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람들의 망설임이 눈에 보인다. 나 역시 그렇다. 폴더에서 기다리는 글자 뭉치들. 언젠가 내가 이 폴더를 다 털어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181쪽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나의 게으름은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누리는 권력이다.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노동에 기대어 편리함을 누렸을까. 얼마나 많은 차별 속에서 모른 척 편리함을 누렸을까. - 212쪽

리베카 솔닛은 우리가 명확한 언어를 구사하려는 것은 실패한 언어의 문제라고 했다. 불확실한 삶을 인정하고 견디기 어려우므로 자꾸 명료한 해답을 원하게 된다. 연인이나 결혼이라는 배타적 관계맺음, 모호한 감정에 이름붙이기, 꿈이라는 희망, 타인을 쉽게 침범하는 자세. 누군가 내 삶에 처방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 확실한 의미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은 여전하다. 하지만 명확한 관계맺음,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겼다. 자주 부끄러워하며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연습 중이다. 아, 그럼에도 싫은 건 ‘정확하게’ 싫다. - 232, 233쪽

공간을 운영하며 가장 크게 배운 점은 공간이 유지되는 것은 누군가의 노동 없이는 절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깨달음이다. 하루라도 환경미화원이 없으면 거리가 쓰레기로 덮이는 것처럼, 매우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노동은 우리의 모든 살을 지탱해주는 근본적 토대다. - 284쪽

시를 쓰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꼭 ‘도덕적 잣대’로 올바름을 강요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작품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삶의 태도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가지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무게가 실렸을 때이다. 어떤 ‘작품’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도 만든 이의 삶의 무게가 실릴 때인 것 같다. - 289쪽

"동정과 공감은 달라요.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타인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내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요. 공감적 상상력은 상대의 자리에 나를 세우는 일이에요. 내 세계가 깨지며 확장되는 일이죠. 모든 공부·만남·애도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어야 해요. 타인의 세계가 나를 바꿔놓고, 나를 죽이는 것. 우리는 더 불편해져야 해요." - 29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19 1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힘들어도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죠.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이니까요. ^^
 
서민적 정치 - 좌·우파를 넘어 서민파를 위한 발칙한 통찰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번은 아니지만 저자의 경향신문 칼럼을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 특유의 재치있는 표현과 반어적 문장에 빠져들고는 했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고르는데 별 주저함이 없었다. 제목 또한 '그 답게' 서민적 정치라고 하니, 그가 말하고 싶은 서민적 정치란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 읽고 보니 조금 허망한 느낌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특징 없이 서술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민 스타일의 논조에 대한 내 기대가 너무 컸나?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래도 다음 장에는 있겠지'라며 기대했던 서민적 표현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감능력, 민주적 리더, 관심과 감시, 색깔론, 지역감정, 선거를 통한 심판, 청년의 정치참여, 개성공단과 통일, 노조, 복지 등 책이 다루고 있는 정치적 소재들이 너무 다양하다. 정치에 관한 쉬운 글을 쓰려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는 그의 시선은 다소 평범하다. 물론 이와 같은 평범한 시각을 찾는 것에도 의미를 둘 수 있겠지만...


야구광인 그가 평균자책점, 탈삼진 등의 수치를 통하여 선동렬보다 최동원이 더 우수하다는 편향을 영남의 지역감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나, 배트맨 vs 슈퍼맨을 각각 노동자와 경영자에 비유하며 슈퍼맨에 대응하기 위한 1만 명쯤의 배트맨이 있어야 조금은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그나마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던 '사표론'에 대한 주장은 크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진보정당에 투표하면 사표가 될까봐 비판적 지지를 선택하는데, 이해는 가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예컨대 지지율이 20% 정도만 돼도 다른 후보들이 진보정당 후보를 무시하지 못할 테고, 진보정당 후보가 낙선하더라도 지지율이 높으면 신임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할 때도 진보정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정책이 자연스럽게 국정에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 133, 134쪽

 

그는 사표에 대한 고민을 줄이고 진보정당에 투표를 해야하고,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율 확보가 곧 진보정책의 수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적 서술일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51대 48이라는 박빙의 결과를 낸 지난 대선 이후에 과연 (그가 말한 20%를 훨씬 넘는) 48%의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이 반영된 건이 얼마나 될까? 승자와 패자에 대한 확실한 분별이 있는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또 다시 같은 정당에서 정권을 잡는 것이 두려워 보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기우(杞憂)이며, 이를 단순히 사표를 우려한 반응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말하듯 입체적인 세상에 대한 그의 편향에 대해 비판할 의사는 조금도 없지만, 그와 반대적 편향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당의 포용성에 대한 한계도 검토해봐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는 서민들의 가슴에 금배지를 하나씩 달자고 제안한다. 헌법적 취지에 따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기타 공직자를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혐오에 빠진 정치 불신, 무소불위의 존재로서의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모두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이런 원론적인 주장에 더하여, 정 안되면 상징적으로라도 문방구에서 금배지를 사서 하나 달아보자고 하는 그의 제안이 평범하고 순진하게만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편향성을 회피하려는 강박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 위치와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직선 안에 0점을 두고 음수와 양수를 표현하는 것처럼 세상을 왼쪽과 오른쪽으로만 나눌 수는 없다. 세상은 입체다. 한쪽에서 보면 한 면만 보이지만, 사실 복잡하게 빛나는 다면체다. 편향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한 단면이다. 각자의 시선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어느 한 단면임을 인정한다면, 편향들이 모여야 다면체가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정치에 대한 열린 토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20쪽

어느새 우리는 스스로의 영역을 점점 더 좁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나와 생각이 같지 않다면, 모두 적이 된다. 정보는 넘쳐 난다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사실이 된다. 언론들이 프레임 장난을 하는데도, 원하는 것만 보고 있으니 거기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 사람도 좋지만 그래도 나는 이러이러한 점에서 저 사람이 더 마음에 들어"라고 말하기보다 그 사람의 단점만 강조한다. 선명한 지지가 선명한 비난은 아닐 텐데,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 후보를 깎아내린다. 다들 협오는 나와 먼 이야기라 생각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혐오다. - 44쪽

불이 났을 때 출구가 넓어서 다 탈출할 수 있다면 "당신이 먼저 나가세요"라며 배려하는 게 가능하지만, 출구가 좁아서 일부만 탈출이 가능하다면 배려고 뭐고 서로 나가려 할 것이다. 우리 청년들은 지금 상황을 후자라고 생각하기에, 미처 나오지 못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기보단 "그러게 미리 문 옆에 대기하고 있었어야지!"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 질서에 투항하다 보니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갖기는 어렵다. - 19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16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나온 서민 교수님의 책이 정치를 주제로 한 칼럼을 모은 거라서 그 글을 읽은 독자들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경계하자는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붉은눈 2017-05-19 18:41   좋아요 0 | URL
제가 배경지식이 없었군요. 제가 강렬한 칼럼만 접해서인지 칼럼을 모은 글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경계하자는 생각은 시민들이 정치 혹은 정치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화하기는, 적어도 제게는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최근 문빠 프레임이나 한경오 사태를 보면 지지와 숭배의 경계는 또 어디쯤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서점 한 켠에 켜켜이 쌓여 있는 책 표지를 무심히 보았다. 소설 코너에 있지 않았다면 만화로 착각할뻔 했다. 거기에는 한 소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쓰여져 있는 제목이 보였다. 아몬드. 


"나에겐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장 저주하는 누군가도 그것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다. 물론, 아몬드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도 아몬드가 가리키는 은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겠다. 주인공인 윤재에게 이상이 있는 딱 그만한 크기의 '편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절대 깨지지 않는 딱딱한 질감의 그 무엇(본성, 고집, 특징 같은 것)을 말하는지. 프롤로그의 아몬드를 '편도체'로 치환해 읽으니 조금 웃긴다. 그래서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각자가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여겨본다. 

성장소설이지만 마냥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사건을 담담히 묘사하고 결국 홀로 남겨진 윤재를 대할 때는 마치 <7년의 밤>의 서원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둘은 달랐다. 한 사람은 피해자의 자식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해자의 자식이다. 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일렉시티미아'라고 하는 감정표현불능증에 걸린 소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트라우마에 의해 세상과의 문을 닫아버린 소년이다. 공교롭게도 읽다보니 이야기 속에 윤재와 대비되는 곤이가 등장한다. 버려졌다고 생각하기에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으로 사는 그 아이는 윤재가 성장하여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는 또다른 계기가 된다.


생각해보니, 아몬드를 '일렉시티미아'로 치환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겐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선천적인 감정의 씨가 있다. 더러는 말랑말랑한 씨를 갖고 있어서 그것이 금방 떠지고 싹을 틔우지만, 어떤 이는 아주 딱딱한 것을 갖고 있어서 전혀 싹이 트지 않거나 싹을 틔우기에는 아주 많은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다.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순간순간에 반응하며 즉시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행동은 결국 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아주 작은 씨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고립된 자아, 내면의 표출, 외부와의 갈등, 자신의 본성에 대한 탐구, 조화로운 자아의 형성은 성장소설에서 살펴볼 수 있는 소재들이다. 아이가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무엇도 정답이 아닌 무수한 갈래 길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선천적/후천적으로 보다 분명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희미하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런 방황과 그것을 직면했을 때의 내 몸부림들이 지금의 나를 키운 것이다. 성장소설의 좋은 점은 이제는 잊혀진 내 무언가를 한번쯤 무심코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있는 것도 같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 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 90쪽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 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그래서 나는 5월이 한 해 중 가장 나태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한 것에 비해 너무 값지다고 평가받는 달. 세상과 내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되는 달이 5월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게 움직이고 빛난다. 나와 누워 있는 엄마만이 영원한 1월처럼 딱딱하고 잿빛이었다. - 152쪽

-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들이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난 그런 애가 아닌데... - 167쪽

삶이 장난을 걸어올 때마다 곤이는 자주 생각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손을 잡아 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잡으려 해도 결국 자기는 버림받을 거라고. - 168쪽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 171, 172쪽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 176쪽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 24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을 보고는 시들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나이듦의 예찬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단순한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읽고 보니 정말 죽지 않는 현상 그대로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적어 놓은 동일한 제목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타인의 생명을 흡입하여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할머니의 삶을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자기보다 약한 자들로부터의 착취를 통해 부(富)를 연장해가는 이 시대의 기득권 세력일 수도 있고, 사라질듯 사라질듯 하면서도 결코 근절되지 않는 사회악일 수도 있으며, 재산분배를 위하여 내심 할머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속물적 근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총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일과 양육(월춘 장구), 존재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관계(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현재의 자아와 태생의 근본(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종교와 본성 그리고 삶(부활 무렵), 국가적 이념과 개인의 삶(맨발로 글목을 돌다)과 같이, 이 단편들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는 소재는 매우 넓고 다양하다. 


그 중 1, 3, 5번째 수록되어 있는 '월춘 장구',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에세이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각 소설에는 소설가인 공지영이 등장하며 현실의 자신과 관련 있을 것 같은 상황(글을 쓰다가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는 엄마의 이야기, 자신이 예전에 잃어버린 친동생이 소설가 공지영 같다며 확인하려고 찾아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 일본에서 책을 출간하게 된 공지영이 만난 특이한 이력의 번역가 H에 대한 이야기)이 전개된다. '이런 것도 소설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작가는 어쩌면 '소설=픽션'이라는 관념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 4번째 수록되어 있는 것이 나 또는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설이라는 것'에 가까운 내용일 것인데, 내가 이 두 편이 그래도 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되짚어보니, 그건 단지 다른 단편들처럼 '공지영'이라는 소설가가 등장하지 않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작가와 관련된 배경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뚜렷한 형식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떠한 것은 에세이 같고 어떠한 것은 소설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저 내 고정적인 생각 때문일까. 하지만 내가 갖는 이런 혼란에 대하여 작가는 그것이 그리 낯선 시선이 아니라고 다독이는 듯 하다. 한 검사의 말을 통해 작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투명해지고 점점 흐트러지는 경계에 대하여, 어쩌면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말이지요. 자신이 있었어요. 이건 이 죄고, 저건 저 죄목이고, 너는 범인이고 너는 아니고……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힘들어요. 점점 더 말이지요. 힘들고, 또 무서워요.”

 

문득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소설이 자신의 배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소설로 봐달라고 했던 작가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이 책이 소설에 대한 소재의 확장성을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갈래로 흩어진 삶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평소 작가가 고민하던 바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블라인드 포인트, 라고 산에 오르던 친구는 말했다.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무슨 죽음과 무슨 삶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에서 산악인들은 언제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대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을 준다고. 거기서 주저앉는 사람이 참 많이도 있다고, 그러나 그 공포를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그 정상을 허락한다고. - 17, 18쪽

이미 저질러진 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내가 잠 안 오는 밤 동이 틀 때까지 뒤척이며 그때는 이렇게 했다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거기 가지 않았더라면, 아아 정녕 그랬더라면... 수만 번 되뇌인다 한들, 혹은 내가 앞으로는 어리석게 살지 않을 거야, 정말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살겠어, 두 팔에 고개를 묻고 흐느껴 운들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미래도 아니며 현재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나는 그저 통째로의 이 삶, 나의 어리석음과 돌이킬 수 없었던 결정들과 원하지 않았으나 내게 주어졌던 이 삶, 그러니 결국은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온전히 내 책임인 이 삶... 찬물에 풍덩 넣어 삶아내는 통돼지고기처럼 다리도 있고 꼬리도 있고 뭉툭한 코도, 다 깎이지 않은 털도 있는 통째로의 이 삶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었다. - 112, 113쪽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삶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며 우리 삶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끝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것이라고. - 125쪽

"넌 운명이란 것을 믿니? 어느 날 운전면허 시험의 한 과정처럼 돌발 상황이라는 것이 생의 급브레이크를 밟게 하고, 우리가 믿었던 질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상식을 비웃으며 단 한 번뿐인 우리 생의 모든 것을 똥창에 거꾸로 처박아버릴 수 있는 난데없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류가 생긴 이래로 그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친 적이 없어. 여기 푸른 별 지구 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과 서에서." - 189쪽

"운명이 생을 덮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안다. 그 포충망 속에 사로잡히고 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을 중심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라고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구경거리가 되어 런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썼다. - 195, 196쪽

힘이 있는 인간들은 힘이 없는 인간들을 죽게 할 방법을 천 가지쯤 가지고 있다. 가끔 정신과 물질을 모두 내게 의지하고 있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권력이 얼마나 악에 물들기 쉬운 것인가를 깨닫고 소스라친다. 내가 마음먹으면 나는 아이들을 때리거나 고문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거나 불구가 되게 하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할수록 그들이 나를 의지할수록, 나 이외의 것에 그들이 속수무책일수록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 200쪽

이런 구절을 읽었어. "다만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_’, ‘숨겨진 것(크립톤)’ 그리고 ‘낯선 것(제논’, ‘움직임이 없는 것(아르곤)’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 그 가운데는 공기의 일 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양이 존재하는 아르곤, 곧 ‘움직임이 없는 것’이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그 양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유지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이산화탄소보다 스무 배 또는 서른 배나 많은 양이다." 신기하지 않니? 원소들이 제 처지에 만족하고 있다는 표현이라니. - 204, 205쪽.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 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 내게 이것을 가르쳐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나온 석류 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 214, 215쪽

성경을 펴니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꿈에서 깬 자가 꿈을 업신여기듯...’
그제야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이었다가 ‘소란만 피우는 소리와 분노’였다가 ‘훅 하면 꺼지는 날숨’과 같다는 걸 불현 듯 깨닫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으면 이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어린것들의 하루 양식을 벌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제 제게 남은 유일한 진실입니다. 한 줌의 자기 비하도 없는 이 진실 속에는 신실한 희망이 있습니다. - 22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을 소재로 삼음 책을 그리 즐겨 읽지는 않지만, 제목에 계속 눈이 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제목이 그대로 읽히지 않고,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바뀐 채 내 눈에 박히고 있었다. 마침 4월이었다. 3년만에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찬란한 봄에 나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곤 한다. 첫장을 펴니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라고 쓰인 한편의 시가 적혀 있다. 무슨 뜻인지 머리로 채 이해하기도 전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마시고 내쉬는 숨결이 이제 더 이상 나를 통하지 않는, 그저 허공을 떠도는 바람이 되는 순간이라니...


책은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신경외과 의사인 그가 폐암 진단을 받게된 순간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기까지의 생각과 성장과정을 담았다. 2부에서는 전도유망한 그가 레지던트 생활을 막 마치려 할 때 암 진단을 받게 되고, 투병생활과 의사로서의 삶을 병행하는 시간들이 담겨 있다. 결론은 이미 예상했지만, 남아 있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호전되던 그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에필로그는 아내의 몫으로 남겨졌던 것으로 보아, 10년의 삶이 남았다면 의사생활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고, 1년이 남았다면 책을 쓰고 싶다고 했던 그에게는 아마도 이 책을 끝맺을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사람과 홀로 남겨진 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의 조합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절묘한 구성으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의 감정을 자극한다. 


"나는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였다"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는 참았던 감정이 그대로 주저 앉는 것을 느꼈다. 가장 사적인 친밀감이 있는 사람인 아내가 목격자로서 한자 한자 써내려간 남편의 소멸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절박한 순간이지만 격렬하지 않은 담담한 서술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작가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성숙'이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주어진 삶을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동일한 뜻의 단어가 형용사로 쓰여 삶을 비출 것인지, 부사로 쓰여 산다는 행위를 비출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부스러진 희망, 애절한 사랑, 준비되지 않은 이별, 그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해 버리거나 스스로 과열되지 않는 것, 주어진 날들을 견디어 내는 것은 슬프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 105, 106쪽

생물학, 도덕, 삶, 그리고 죽음의 개별적인 가닥들이 마침내 서로 엮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완벽한 도덕 체계는 아니더라도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 잡히고 그 안에 내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긴장감 높은 분야의 의사는 삶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삶이 굴절되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환자를 만나게 된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 140, 141쪽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 161쪽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자가 원하는 건 의사가 숨기는 과학 지식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실존적 진정성이다. 통계를 지나치게 파고드는 건 소금물로 갈증을 해결하려는 것과 같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고뇌에 빠지는 일은 생존 가능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164쪽

예전에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나는 죽음과 마주한 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에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입장이 갈린 채, 의학을 계속 파고들지 아니면 문학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죽음과 마주하며 나는 예전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 아니면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버둥거렸다. - 169쪽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 179, 180쪽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히포크라테스나 마이모니데스, 오슬러도 가르쳐 주지 않은 뭔가를 배웠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 197, 198쪽

과학을 형이상학의 결정권자로 보면 세상에서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 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런 의미가 모두 사라진 세상은 결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를 믿으면 반드시 신도 믿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에 대해 어떤 근거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거도 마련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인생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적 주장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되고 과학적 지식이 곧 모든 지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 201쪽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방법론은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영원불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손쉽게 조작하기 위해, 현상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축속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만든다. 과학은 재현 가능성과 인위적인 객관성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을 내세울 때는 탁월하지만,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은 경험적이고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핵심적인 감정과 과학 이론 사이의 간극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 어떤 사상 체계도 인간 경험을 온전하게 담을 수 없다. 형이상학은 계시(啓示)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 201, 202쪽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어느 쪽이든 그 야망은 과거의 것이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 233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4-26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많다고 해서 성숙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알차게 보내고, 타인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성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