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소설의 언어는 두 기능, 즉 기능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진동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이야기의 집이므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고(기능성), 언어로 만드는 예술품이므로 이야기 없이도 존립할 수 있어야 한다(예술성), 그러니까 소설의 언어는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목적이다. 이 역설을 견더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 작가는 어느 쪽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인간성의 위대함과 허약함을 동시에 꿰뚫는 이야기가 있고, 책 전체가 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문장들이 있다. 참혹한 비극을 다룬 문학이 아름다워도 되는가. 라는 문제는 오랫동안 이 동네의 난제였다. 이 소설은 그 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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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자기에게 몽규가 어떤 존재인가를 되짚다가 자기가 누구인지 또렷이 알게 될 것이다. 닮은 두 존재가 나란히 서 있을 때  오히려 각자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서사적 흐름은 동주가 몽규에게 느끼는 삼정의 굴곡을 따라 곡선을 그린다. 북간도 용정에서 광명중학을 다니던 때의 윤동주가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함께 듣는 시점(1935년 1월 1일 전후로 추정되는)에서 본론이 시작될 때, 역사적 현실과 예술의 가치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는 아직 잠재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러다가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진학해 친구들과 문예지를 만들 무렵(1938년 이후) 둘의 입장 차이는 표면화되어 충돌이 벌어진다. 둘의 갈등은 이를테면,
‘산문적 인간‘과 ‘시적 인간‘의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몽규의 관심은 메시지의 효율적 전달을 통한 행동에의 촉구에 있고, 동주의 관심은 문학을 통한 인간 내면의 표현과 더 깊은 차원의 소통 가능성에 있다. 전자에게 후자는 나약해 보이고 후자에게 전자는 편협해 보인다.
여기까지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저 둘의 갈등은, 일제강점기를 물론이요. 어쩌면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오래된 예술 논쟁의 소박한 판본처럼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영화가 하에 김여지는 것은1942년 ) 시절을 다루면서다. 위에것이 없다고 말한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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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밍웨이는 문학과 삶 사이의 장막을 축소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작가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일이죠.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라는 작품을 보셨습니까? 장인의 솜씨예요. 정말이지 이것은 지금까지 쓰인 이야기 중에서 최고의 것 중 하나입니다.(아서 파워, 《제임스 조이스와의 대화》,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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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59쪽) 

그녀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말하지 말자. 그저 이 뒷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출발한 소설이라는 것만 말하자. 이 소설에 몇 개의 뒷모습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뒷모습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여 허둥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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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에게 혜화는 아이는 정말로 죽었으며 아이가 죽을 때 아이
를 제외한 모두가 무책임했다는 뼈아픈 진실을 재확인한다. 이 둘이 반드시 한 번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둘은 이처럼 반드시 한 번은 함께 울었어야 했다. 처음으로 함께 흘리는 이 눈물 속에서 혜화는 여전히 철없는 한수의 속죄를 이미 절반 이상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수가 한 일은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 장면에서 이 영화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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