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결혼은 처가살이가 기본

시집살이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늘 듣다 보니 그것이 우리의 오랜 풍습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결혼은 남귀여가혼인 처가살이가 기본이었다. 이런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결혼과 동시에 처가로 몸만 쏙 들어가 살면 되니 남성 입장에서는 이 처가살이가 아주 괜찮은 풍습이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도 여성이 결혼하면 시집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19세기 즈음 시작된 풍습으로 이후 일제강점기를지나면서 공고화되었을 뿐, 조선시대에는 처가살이가 기본이었다.
처가에 들어가 살면 장인 장모가 사위를 먹이고 입히고공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관직까지 다 알아서 해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장인이 자신을 더 여러 면으로 돌봐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사위의 첩까지 장인이 골라주었다. 이런 제도가 가능했던 것은 남녀가 균등하게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아들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유산을 받을 수 없지만 처가에 들어가 살면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장인이 돌아가시면 딸이 처가 유산을 상속받으니 독립해 살 수도 있다. - P62

조선시대 초부터 신진사대부를 비롯한 양반 기득권자들이 어떻게든 시집살이를 정착시키려 애를 썼다. 남성의 가치와 가부장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시대가 막을 연 1392년부터 줄기차게 시집살이를 추진했다지만 성공하진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관련 기록을 보면 이에 대한 고민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세종은 온 백성이 처가살이를 해오던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풍습을 어떻게든시집살이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솔선수범해 자기의 딸인 옹주를 시집살이를 하도록 사위의 집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풍습과는 정반대로 한 것이다. 당대 지존인 왕이 몸소 이런 결정을 내렸음에도 대신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날 대통령의 권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왕조차도 이 풍습을 바꾸지 못했다. - P63

기본적으로 처가살이를 하다가『흥부전」이 탄생할 때쯤 비로소 장자 위주의 상속제로 바뛰기 시작했다.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바뀌는 시점은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시작은 대략 17세기중후반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자료를 보면17세기 후반쯤에 장자 위주로 재산을 상속했다는 몇몇 기록을 볼 수 있다. 아직 전면적 확산은 아니고 이런저런 타협적 양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차츰 확산되었다.
이때는 딸에게는 아예 상속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딸이 밉거나 차별해서가 아니라 혼인한 뒤 시집살이하게 된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사돈집에 재산을 내주는 격이니 더 이상 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게 된 것이다.
「홍부전』은 바로 이렇게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구조가바뀌던 시기를 그 배경으로 한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로 바뀌면서 늘어난 것은 사실 남성들의 부담이다. 가장이란 허울은 좋지만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여성이 자기 집에 들어와 살게 되니 경제적으로 자신이 먼저 독립해야 했다. 먹고 살려면마땅히 그래야 했다. 이런 시대인 만큼 흥부는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아주 똑바로 말이다. - P65

이런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먹고살아야 하니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손을 벌린다.
여유가 있는 양반집에서는 그렇게 찾아와 손을 벌리는 친족들을 내치지 못하고 거두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점점종법 제도가 갖춰지고 강화되었다.
종법 제도는 정실에게서 태어난 장자 위주로 가문 전체를 유지하는 일종의 사회 시스템이다. 이는 조선 후기가족 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가족 윤리를 기반으로 한 조선사회의 규범적 체제를 지탱시킨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되었다. 한마디로 상호부조와 사회복지 시스템이었다.
조선 후기에 종법 제도가 강화된 것은 양반 가부장의 힘을 강화해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이 시작은 아니다. 몰락하는 양반이 많아지는 시대에 한 가문의 장자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정리해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먹거리를 줌으로써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 문중, 종가, 적장자, 예법등의 관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먹고사는 지극히 현실적 이득에 동의해 종법제가 강화된 것이다.
- P69

「춘향전』의 본질은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이며,
기다림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 그것을 뚫고 나가려는 강한 열망이다. - P96

여전히 찜찜하다면 춘향의 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대개가 ‘성춘향‘으로 알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참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춘향‘은 지금의 전주 지방에서 판각되어 유통된 『열녀춘향수절가女守의 영향을 받은 작품에서만 그렇다. 서울 지역에서 유통된 『춘향전』에서는 춘향의 성이 ‘김‘이다. 즉, ‘김춘향‘
이다.
사실 『춘향전』 이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이본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南原古詞』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던 텍스트였다. 그「남원고사에 등장하는 춘향의 성이 ‘김‘이다. 그러니 광복이전까지 서울 사람 대부분은 춘향을 김춘향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춘향전』의 성춘향 어쩌고 하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했을 가능성이 크다. 광복 이후 영화, 드라마 등에서 춘향을 ‘성춘향‘으로 고정시켜 만들면서 성춘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진짜 춘향의 성은 없다. 이른 시기의 대다수 『춘향전』 이본은 다 그렇다. 당연한 소리다. 낳아준 어머니는 확실하나 아버지를 모르기에 그렇고, 혹시 안다해도 성을 붙이기도 쉽지 않다. - P106

관기는 지방에 출장 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필수요원으로 남원은 물론 어느 관청이든 법률로 그 숫자를 정해놓았다. 그런데 보통 지방관이 내려와 한 기녀와 지내다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곳을 떠날 때 그기녀를 데려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국법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다른 기생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관기를 빼돌리는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법으로 이를 금했고, 신임 사또는 필수적으로 그 인원을 확인했다. 그것이 기생점고다. 변학도가 특별히 음탕해서 기생점고부터 한 게 아니라 국가 재산인 관기를 점검했을 뿐이다.
그렇다. 독자들의 눈에 이게 불편했던 것이다.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으로 여기는 시각이 마뜩잖았고, 그래서 자꾸본질을 어그러지게 보았던 것이다. 기녀는 천민으로 그냥 막 대하는 존재였다. - P111

이런 상황이니 ‘춘향전을 앞에 두고는 늘 고심이다. 진짜 춘향은 정점의 화신이 아니라 섹스의 화신이라고 말하면 천하의 몹쓸 놈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밝히는 놈에서부터 음란을 부채질하는 반동분자까지 뭐든 될 수 있다.
민족의 고전을 도색잡지로 만드는 못된 놈이 되지 않으려면 하는 수 없다. 타협해 같이 입을 모아 춘향을 욕하든지,
춘향의 절개를 찬양해야 한다. 아니면 그냥 보고도 못 본책 입을 꾹 다물든지,
결국 이렇게 현대의 춘향이는 혁명성을 빼앗겼고 《춘향전 》은 고루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춘향은 지고지순한 사랑과 정절로 남성을 기다리는 멋진(?) 여자가 되었고, 평생 미치도록 이몽룡을 따라다니는 질긴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춘향은 질긴 여자도 아니고 잡년도 아니며 열녀도 아니다. 춘향은 ‘봄의 향기‘이고 ‘혁명가‘였으며, 《춘향전》은 민중의 열망을 담아낸 민족의 고전이었다. 이제 그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 P131

 그야말로아무것도 아닌 천대받는 일개 기녀였지만 그녀는 진정한 여성다움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당대 문제에 도전했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강렬한 웅변을 뿜어냈다.
그것을 알아본 민중들이 『춘향전』에 열광했다. 그리고이몽룡도 아니고 당연히 변학도도 아닌 ‘춘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춘향전‘으로 만들었다. 당대에 가장 천하고 한심하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 일 없는 그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야말로 「춘향전』이 가지고 있는 혁명성의 한 모습이다.
게다가 이런 열망은 앞서 본 것처럼 성이 없을 수밖에없는 춘향이를 ‘김춘향‘, ‘성춘향‘, ‘안춘향‘ 등 지역마다 자신들의 고장을 상징하는 성을 붙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히 「춘향전』이 인기가 높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열망과 희망을 춘향에게 모두 투영했다는 의미이고, 자기들만의 춘향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의미다. 어떻게든 ‘우리 춘향‘이고 싶었던당대 민중들의 마음에서 「춘향전』 혁명성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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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은 욕심에 대한 이야기다. 과도해서 자신을 망각하고 남을 해코지하는 놀부의 욕심만이 아니라, 과도해서 자신을 해치고 급기야 주변까지 망쳐놓는 흥부의 욕심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야기다. 비록 놀부의 욕심은 쉽게눈에 띄고 흥부의 욕심은 판별하기 쉽지 않지만 똑같은 문제다. 그 욕심의 본질은 같다. 양상만 반대일 뿐 서로 닮은꼴이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말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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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야 듣거라. 사람이라 하는 것이 믿는 데가 있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법이다. 너도 나이를 먹었고,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는 놈이면서 사람 사는 것이 어려운 줄은 조금도 모르고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놀고먹으니, 내 이제 그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 부모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장손의 차지인데, 하물며 이 세간은 나 혼자 장만했으니 네 것이 아니다. 이제 네 처자를 데리고 어서 멀리 떠나거라. 만일 지체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썩꺼져라."
-『박타령』 신재효본 - P26

굶주려 죽게 된 사람에게는 먹던 밥을 덜어주고, 추위에 얼고 병든 사람에게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노인이 짐을 지고 가면 자청해서 대신 짊어지고, 장마통에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삯도 안 받고 강을 건네주고, 남의 집에 불이 나면 달려가 그 집 세간살이를 대신지켜주고, 길에 돈이나 패물이 떨어져 있으면 옆에 지키고 섰다가 임자가 찾아오면 돌려주고, 깊은 산속에서 시신의 백골을 보면 땅을 깊이 파서 대신 묻어주고, 수절하는 과부를 보쌈하는 자들이 있으면 쫓아가서 뺏어오고, 어진 사람을 누군가 모함하면 대신 나서서 변명해주고, 딱한 사정의 사람이 횡액을 만나서 고생하면 달려가 도와주고, 길 잃은 어린아이가 있으면 그 부모를 찾아주고, 주막에서 병든 여행객을 보면 그 사람 본가에 소식을 기별하는 등•••••• 이렇게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못 버니, 놀부가 오죽 미워하겠는가.

----- 《 박타령》 신재효본 - P29

그 많은 흥부의 아이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정답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이다. 홍부의 그 많은 아이들은 그냥 있었다. 글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품을 팔아 돈을 벌지도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냥 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버지 흥부를 상대로 밥 타령, 먹을 것 타령이나 하며 괴롭히는 게 전부였다. 한두 살짜리는 그럴 수 있지만 열댓 살먹은 자식들까지 그랬다는 게 문제다. 그때는 열여섯이 결혼 적령기여서 열댓 살만 되면 시집가고 장가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몸뚱이 다 큰 아이들이 집에 들어앉아 밥 타령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먹을게 없어 굶주리면서도 그러고만 있었다.
뭔가 많이 이상하고 뭔가 많이 비뚤어져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대체 왜 일을 하지 않았을까? 가난과 굶주림의 엄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단지 징징대며 보채는 것으로 일관했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분명한 하나는 그들이 보고 배운 게 단지 그뿐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란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보고 듣고자란 게 아버지가 비루먹은 말처럼 비실비실 다니며 빌어먹고 매품이나 파는 게 전부라면 그 자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성장했을까? 잘은 몰라도 뭔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만은 분명하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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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에서 나와 발끝으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개들이 저희를 두고 간 걸 알면 실망할 것이다. 그래도 예배 보는 곳에 개들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층 홀에서는 남두라는 한국인 하인이 우리가 외출하기 전 마지막 지시 사항을 듣고 우리를 배웅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 마시는 시간에는 돌아올 거예요." 남두 곁을 지나며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한국의 가을이 펼쳐내는 황금빛 장관 속으로 들어섰다. 진입로와 양쪽 잔디밭에는 노란 낙엽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화단에서는 암녹색의 회양목과 삼나무를 배경으로 스러져가기 직전의 백일홍들이 가지각색의 보석들처럼 마지막 찬란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감들은 첫 서리가 내려 빛을 밝혀줄 때를 기다리는 작은 램프들 같았고, 높게 자란 포플러 나무들은 보초를 서듯이 우리 정원의 경계에 빙 둘러서 있었다. 잠이라도 자고 있었는지 문지기가 자기 방에서 뛰쳐나와 대문을 열어젖히자, 마치 구름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서울 시내 전경이 대문이라는 액자속에 담긴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 눈 아래로 펼쳐졌다. 아침밥을 짓느라 불을 지핀소나무 장작 내음이 사방에 번지며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어느 계절보다 가을을 좋아한다. 가을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아무튼 가을만 되면 늘 치맛단을 질끈 올려 잡고 계절을 한껏 만끽하며 뛰어다니고 싶어진다. 이런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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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매머드를 사냥하는 대신 울창한 숲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온대지방의 경우 가을에 사방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도토리는 농한기인 추운 겨울을 나게 해주는 고마운 식량 자원이었다.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발견된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흐르는 물에 도토리가 담긴 망을 넣어서 타닌을 빼고 도토리를 가공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림터가 발견되었다. 도토리를 묵형태로 가공해서 먹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도 도토리묵이라는 요리가 없다. - P26

만주에서 역사상 첫 번째 소주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왜 하필 거란에서 세계 최초의 증류주가 만들어졌을까?
거란이 세계 최초의 소주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생활 방식(유목민)과 지리적 환경(만주) 때문이다. 증류주는 순도가 높은 술이기 때문에 많은 양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즉,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휴대가 편한 술이었다. 또한, 만주는 겨울이 긴 지역이어서 증류 과정중 냉각 시 필요한 얼음을 구하기 쉬웠다. 만주 일대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함께 살았기 때문에 누룩과 같은 술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다. 한마디로 소주를 대량 생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는 의미다.
유목 민족이었던 거란은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 몽골까지 진출하여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다양한 교류를 했다. 그 무렵 아랍인들은 이미 증류 기술을 갖고 있었다. - P31

소주가 ‘세계의 술‘이 된 것은 몽골제국 건국 시기부터다. 거대한 제국이었던 몽골의 정복 활동과 역참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몽골제국의 영향력이 미친 곳에서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황실에서 증류주 제조를 관리했던 거란과 달리 몽골제국은 증류 기술을 숨기지 않고 널리 확산시켰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복지에 소주 제조법을 전해주면 현지인들이 그 소주를 즐기는 가운데에 자연히 몽골제국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릴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일종의 동화 정책이다.
피지배인들을 알코올로 다스렸던 것은 몽골뿐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술 식민주의(alchoolosialisme)‘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 P32

 지배 국가가 피지배인들에게 술을 공급하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시키는 식민주의 전략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원주민을 정복할 때,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벌할 때, 현지인의 반발을 누르고자 사용한 방법이 바로 술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소주를 뜻하는 단어 ‘아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몽골,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등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이고, 동남아 일대에도 증류주를 가리키는 말에 ‘아라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에서 소주를 ‘아랄길(吉)‘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존재한다. 경상도 일대 방언에서는 ‘아기‘가 술 또는 술지게미를 가리킨다. 아라기는 아랍 지역의 증류 시설인 ‘알렘빅‘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아랍어로 ‘땀‘이라는 뜻이다. 증류 과정에서 술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땀과 같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는 소주를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고려 시인 목은 이색이 자신의 시에서 소주를 이슬로 표현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화된 술을 만드는 증류과정을 담고 있는 비유다. 오늘날 우리가인터넷으로 소통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세계는 소주(증류주)로 대동단결하고 있던 셈이다. - P33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서는 약 5,000년 전부터 빗살무늬토기를 빚었던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점차 기후가 추워지면서 위기를 맞는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은 추운 기후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연해주와 동북한 지역의 집터에서는 거대한 항아리들이 다수 발견되었지만발굴되는 곡물은 적었다. 이 시기를 살던 사람들은 추워진 기후에 따라 농사 대신 사냥을 해야 했고 기나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커다란 항아리에 많은 음식을 보존해야 했을 것이다.
월동 음식으로 풍부한 비타민을 함유한 김치 같은 발효 채소가빠질 수 없다.  - P38

구덩이는 마을의 김장독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이후에도 옥저에서 발해로 이어지던 시대의 마을로 추정되는 이 지역 집터에서는 빠짐없이 거대한 항아리가 집 근처에 묻힌 채로 발굴되었다. 내가 크라스키노(Kraskino) 발해 성터 발굴에 참여했을 때도 집 근처에서는 늘 거대한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함께 발굴 작업을 하던 러시아 학자들도 입을 모아서 그 항아리들이 ‘고려인들의 김장독‘과 똑같다며 신기해했다. 겨울이 매섭고 긴 지역에서 마을을 이루며 농사를 지었던 우리 민족에게 이런 저장 토기는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절임 배추, 유라시아인을 살리다

앞서도 말했지만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양 곳곳에서는 김치와 매우 유사한, 배추를 발효시킨 음식들이 널리 유행한다. 가령,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오스트리아 알자스 지역의 슈쿠르트,
러시아의 절임 양배추(카푸스타)와 그것을 넣어 끓인 수프(시)가 그것들이다. 이 ‘시‘라는 수프는 고춧가루를 조금만 더 넣으면 김치찌개와 흡사한 맛이 난다.
값도 싸고 양도 푸짐한 배추를 절여서 만든 음식은 러시아인들에게 단순한 요리가 아니었다. 고기를 쉽게 먹기 어려웠던 가난한 러시아 농민들의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영혼의 수프였다.  - P41

...강추위를 여섯 해나 경험하는 동안 나를 추위와 허기에서 지켜준 음식은 단연 돼지비계를 염장한 ‘살로(salo)‘였다. 살로를 만드는 레시피는 지역과 사람마다 정말 다양하다. 하지만 그기본은 대개 비슷하다. 서늘한 봄이나 가을에 돼지비계 또는 삼겹살을 준비해 큼지막하게 잘라서 항아리에 넣고 그 위에 소금을 넉넉히 뿌린다. 며칠이 지나면 삼투압 현상으로 소금이 비계에 배어들며 염장이 된다. 기호에 따라서 소금과 함께 후추나 고추 같은향료를 넣기도 한다. 완성된 살로는 얇게 잘라서 빵 위에 얹어 먹는다. 살로는 고열량인 데다 각종 비타민이 풍부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살로는 우크라이나의 전통음식인데,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는 우크라이나 출신이 아주 많기때문에 그들의 음식이 자연스럽게 시베리아의 토착 음식처럼 여겨지게 됐다. - P50

돼지비계를 먹는 풍습은 우크라이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 로마의 ‘라르도‘라는 음식도 돼지비계를 활용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돼지비계는 ‘포크 스크래칭‘이라고 하는 요리에 사용된다. 우리 역사에서는 북방의 추운 곳에 살던 루인과 그들의후손인 만주족들이 돼지비계 요리를 해먹었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돼지비계를 먹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재료의 특성상 상하기 쉽고, 역한 냄새가 강하기 때문에 잡내를 없애고 요리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층이나 고기를 손질하는 일부 사람들만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살로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한때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에 살로박물관이 있었을 만큼 이들은 살로를 민족의 음식으로 자부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든다. 우크라이나는 ‘체르노젬(chernozem)‘이라는 흑토 지대가 발달한 세계의 곡창지대다. 쉽게 말해 신선한 곡물과 야채가 풍부하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돼지비계 요리가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힘든 환경을 개척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가 숨어 있다. - P51

살로의 어원도 이처럼 동쪽에서 지속적으로 밀려온 유목민들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살로는 ‘말안장(saddle)‘이라는 뜻을 가진고대 슬라브인의 언어 ‘sadlo‘에서 유래했다. 돼지 속살 위에 얹어진 지방이 마치 푹신한 안장 같아 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유럽에서는 육회의 일종인 타르타르 스테이크가 기마민족이 말안장밑에 말고기를 넣어 육질을 부드럽게 만든 것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설(說)이 있는데, 사실은 살로를 잘못 이해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살로는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담긴 음식이다. 16세기 이후 우크라이나는 코사크인들의 발흥으로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초원 유목민의 오랜 풍습인 변발의 일종인 ‘추드‘를 하고, 강인한 기마민족으로서 독립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살로가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무슬림인 튀르크나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였던 돼지비계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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