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그렇듯이 나는 소설도 겉으로 보이는 스토리나 분명한 주제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해. 작가가 구사하는 어휘와 문장과 어조, 혹은 호흡, 혹은 글의 텍스처 속에 숨겨진 질서나 운동 같은 게 더 중요하다고 봐. 사실은 글을 쓰는 작가 자신도 이 숨은 그림의 지도는 잘 몰라. 그래서 글을 쓰겠지. 지도는 독자인 내가 찾아내는 거야. 베스트셀러가 왜 싫은지 알아? 작가가 자기 문제를 찾는 게 아니라 인기 품목과 어조를 고르는 사람이어서 그래. 좋은 작가는 자신의 문제와 관계없는 건 절대로 못 쓰는 사람이라고. - P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 P208

만약 신이 나타나 스토리텔링으로, 이를테면 신화 같은 방식으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한다면 목화는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 나타나 신금화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 어떤 말이라도 목화는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자진한 것이 아니라 목화의 기도가 신을 호출했으므로, 무슨 말이든 기꺼이 믿을 마음이 목화에게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 P209

삶과 죽음을 나누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극단적 반응은 저절로 스며들어 의식을 지배했다.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슬퍼하는 사람 편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을 전혀 다른 세계라고 인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엇은 무엇보다 더 나은 것, 가치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무언가를 긍정하면 다른 것은부정되었다. - P214

목화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판단을 멈추었다. 그리고 중개 중에 이전에는 하지 않는 것을했다.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 P221

임천자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지금을 기다렸어. 수없이 연습했지. 사람을 살리던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을 위한 연습이었을 거야. 목화는 임천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임천자는 눈을 감았다. 목화는 임천자를 끝까지 지켜봤다. - P226

상실 앞에서 슬픔은 마땅했다. 그것을 너무 오랫동안 미뤄왔다. 그래서 금화가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꼬맹이 쌍둥이가 걱정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더 큰 바람은, 이제 마땅한 슬픔으로 나를 기억해 줘. 기약 없는 희망으로 나를 외롭게 두지 마. 죽음은 사라짐. 말도 안 되는 죽음은, 느닷없는 죽음은, 쓰러진 나무에 깔린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많다. 바로 그런 죽음을 숱하게 지켜보면서도 목화는 오랜 세월 금화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죽겠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 P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 P104

그거 아세요? 모든 과학에는 수학식이 있는데 비행기가 나는 원리 중에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방정식이 있대요.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이라고, 3차원에서도 해가 항상 존재하는지를 아직 증명하지 못했대요. 그러니까……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 거죠. - P116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 P125

힘들면 세 번 정도 참아보고 그만두면 돼. 끌사장이 덧붙였다. 세 번 참은 게 아까워서 네번째도 참게 될 거야. - P132

정원에게 목화는 자기를 반영하는 거대한 감정덩어리였다.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하찮게 여기는 존재.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무심한 말 한마디의 진의를 의심하는 상대. 그 간극을 만드는 사람은 목화가 아니었다. 한정원의 상황이었다. - P134

목화가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한 노인이 거대한 나무의 속을 파서 죽음을 가뒀다는 내용 때문이다. 죽음이 나무에 갇히고 사람들이 죽지 않으니 세상은 혼란스러워졌다. 수호의 신 비슈누가 나타나 나무에 갇힌 죽음을 구했다. 그리고 죽음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더는 어딘가에 죽음을 가두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이전까지 죽음은 보이는 존재였다. 목화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나무에 충분히 죽음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무의 속을 볼 때마다 목화는 그 나무에 갇힌 것을 상상했다. 사람, 새, 반딧불, 다람쥐, 코끼리, 사슴, 꿩, 멧돼지, 곰, 구름, 빛, 어둠, 그림자, 빗물, 바람, 영혼, 노래, 시간, 슬픔, 희망, 상실, 환희, 쾌락, 즐거움, 괴로움, 기쁨, 고통, 공포, 불안, 증오, 분노, 욕망, 탐욕, 거짓, 위선, 위악, 교만, 고독, 허무, 사랑, 나무가 가두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 - P138

신목수.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거야. 한 사람이 살 때 다른 사람은 죽어. 신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고? 그럼 그때 죽은 다른 사람들은? 신이 자기를 보살핀다는 생각만큼 순진하고 이기적인 건 없어. 산 사람이나 삶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거야. 신의 옹졸한 차별을 은총이라 부르면서. - P184

이모.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약을 씹어 먹고 책상을 치우던 루나가 떠올랐다. 나무의 선의를 믿어야 하는가.
그래, 루나야
꿈에서 나를 봤어?
응, 이모가 종종 이상한 꿈을 꿔서.
목화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천천히 걸었다. 더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네가 깊은 잠을 잤다고 말하려는데 루나가 작은 소리로 먼저 말했다.
・・・・・・고마워.
목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째서 고맙다는 걸까.
이모가 날 깨워줬잖아. 우리 같은 꿈을 꿨나 봐.
목화는 우뚝 선 채로 되물었다.
나를 봤어?
응, 이모가 있어서 그래도 조금은 덜 무서웠던 것 같아.
목화는 말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태 살린 사람들도 모두 나를 봤으면 어쩌지. 설마 죽어가던 사람들에게도 내가 보였을까. 하라는 대로만 할 뿐 모르고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부당하고 위험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 P193

알아. 나도 너처럼 그렇게 내몸에 얼굴을 파묻고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구덩이에 다 묻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 엊그제도 그랬고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게.
너를 보고 있을게. 네가 네 손으로 네 인생을 파묻지 않도록 내가 감시해 줄게. - P195

그들한테는 자기 불행이 노다지인 거야. 누구한테도 뺏기기 싫은 굉장한 보석인 거지. 왜냐면 내 불행만이 나를 위로하니까. 알아주니까. 가장 가까이서 나를 지켜주니까.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건………… 거부할 일도 아니고 원망할 일도 아니야. 언젠가는 네가 기적 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네 자식을 그렇게 구한다고 생각해봐. 그때도 오직 한 사람만 구할수 있다고 불행해할까.
미수가 해보지 않은 생각은 아니었다. 동시에 미수는 다른 생각도 했다. 만약 내 자식 대신 다른 사람을 구해야한다면? 신이 그것을 지시한다면? 그것까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그들은 이제 위가 아닌 옆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두 나무의 끄트머리 이파리는 이미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너의 꽃과 나의 꽃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지고 싶어서 - P13

태풍이 몰고 온 온갖 위협 속에서 두 나무는 서로 뿌리를 움켜잡고 가지를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봄이 오더라도 새잎을 만들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짐했다. 봄이 오면 마지막인 것처럼 더 많은 꽃을 피우겠다고. 이어 다짐했다. 열매 따위 맺지 않고 뿌리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더 많은 열매만이 다른 세계에 닿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다짐을 번복하고 반복해도 비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태풍은 숲을 손아귀에 구겨 쥐어 바다 한가운데로 내팽개치려고 했다. 뿌리가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숲의 존재들이 한 번쯤은 은밀하게 꿈꾸던 그 바다로. - P15

다음해 봄. 두 나무는 정지했다. 죽음을 흉내 내는 방법으로 죽음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짙푸르고 무성한 잎을, 생명을 뽐내는 꽃을 삶을 퍼트리는 열매를 단 한 번도가져보지 못한 나무처럼, 태풍이 구겨버릴 삶은 거기 없는것처럼, 그들은 죽은 듯이 살기로 했다. 더는 자라지 않고그대로 멈추려고 했다. - P15

월화는 자기를 소문의 소용돌이에 가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쓸 때 들뜨던 마음을 떠올렸다. 글에 쓴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따돌림이지만 어쨌든 그 또한 글에 쓴 내용이었다. 월화는 소문을 지어내는 아이들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들 또한 실제로 월화가 밤마다 중학생들과 어울리며 날라리 짓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어른과 키스하는 대가로 돈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까? 월화는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다. 이화정을 비롯한 다섯 명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나긴 생각 끝에 월화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소문을 지어내는 이유는 심심해서다. 월화의 하루하루가 그러하듯이. - P34

심심해서 상상했고 지어낸 이야기를 퍼트렸고 그것을 거듭하다 보니 진심으로 월화를 싫어하게 되었다.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심심할 수가 없다.
월화는 소문을 두려워하는 대신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이 더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말과 행동을 꾸몄다. 그것은 연기에 가까웠다. 연기하는 삶은 재미있었다. 그들이지어낼 소문을 짐작하는 시간은 흥미로웠고 짐작이 적중할 때는 짜릿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앞서가고 끌어가는 것. 휩쓸리지 않고 관망하는 것. 그들이 싫어해도 월화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싫어하는 자기는 연기로 만들어낸 가짜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 같으면 상처받는 연기를 할 수도 있었다. 슬프고 우울한 연기도 가능했다. 월화는 자기 짐작대로 반응하는 그들이 우스웠다. 월화는 지는 방법을 몰랐다. - P35

소문은 죽음보다 잔인했다. 목수도 목화도 그 누구도 그날의 일을 온전히 그대로 기억할수 없었다. 사실 아닌 것이, 감정이, 착각이 섞였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없었다. - P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