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 끌려 들어가지만 마." 엄마가 농담을 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지금까지 지어낸 말들 중에 제일 큰 거짓말이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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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펼친 모든 공격은 물속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다. 물결은 모든 방향으로 퍼진다. 증오의 물결, 분노의 물결, 그리고 복수심의 물결이 일어난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테러리스트가 성장한다. - P141

테러에 대항했던 덴마크의 전략도 물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다. 그 돌멩이 또한 모든 방향으로 물결을 보낸다. 감사와 공감의 물결이 일어난다. 테러리스트 대신 믿을 만한 시민들이 생겨난다. - P141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작가 조지 오웰도 비슷한 경험을기록으로 남겼다. "전해야 할 소식이 있는 전령으로 보이는 한남자가 참호에서 뛰어나와 벽 위를 내달렸다. 아주 잘 보였다. 그는 반라의 몸으로 두 손으로 바지를 움켜쥔 채 뛰고 있었다. 나는 그를 쏘지 않았다. 나는 파시스트를 죽이기 위해 여기 왔지만, 바지를 움켜쥔 한 남자는 파시스트가 아니라 분명히 용무가 급한 한 사람이었다. 당신과 같은 "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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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워 앤 스윗. 내 스위티가 선물해줬어."
"스위티라면, 남편?"
"아마도."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밤에 먹고 싶다고 하니까 사다줬어. 다녀올게, 하고는 외투도 안 입고 나가더라고. 한국은 지금 춥거든. 여기와는 반대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중이야. 아무튼 남편이 편의점에서 사왔어. 나갔다가 돌아왔어. 앗 추워 하면서."
"스위티 맞네." 척이 아내의 임신 시절 얘기를 했다. 입덧이 심했을 때 웬일로 맥모닝을 먹고 싶어 했는데깜빡했고, 다음날 아침 사다줬더니 먹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야. 쌍둥이가 고등학생이 된지금까지 서운해한다고 했다. "총량의 법칙 아닐까. 여기서 내가 사워한 만큼 거기서 당신 남편이 스윗해졌으니, 지구가 평화로운 거겠지."
"어쩌면." - P199

"누가 될까요?"
은협이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뼛속까지 프롤레타리아여서요. 서울 시장 재보선 때도 이쪽이 되길 바라면서 저쪽을 찍었어요."
"바라던 대로 됐군요."
"죽는 건 비겁해요." 은협이 자살한 전 시장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렇지 않나요?"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어요. 그보다" 나는 더 흡족한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죽는 게 우월 전략이었겠고요." - P70

공항에서 나는 정직 씨와 성실 씨에게 가욋돈을 송금했다. 받는 통장에 남길 말에 ‘뽀찌‘라고 적었다. 보조원들은 중개사의 계모임 날을 꿰고 있었다. 도장을 두고 나간다는 사실도, 목요일에 2302호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실수로 은협임을 밝히지 않았다.
집을 내놓으셨나요?라고만 물었다. 월세를 놓을 예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증금이 보일 씨에게 땅을 팔아 받을 수 있는 돈과 얼추 맞았다.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외면하기에는 너무 절묘한 우연이었다.
한 달 단기 임대했다.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었으니 그쪽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계약 날 집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주도에 살았으므로 당연했다. 위임장은 중개사무소에서 보관 중이었다. 예상대로 중개사는 도장을 놓고 계모임에 갔다. - P193

보일 씨는 내게 현금을 건넸고, 나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보냈고, 집주인은 은협에게 전세금을 돌려줬고, 은협은 내게 전세금을 보냈다. 키세스. 나는 2202호 임대인에게 마지막 월세를 입금했다. 오늘로 만기였다.
명절에 한우도 보내주고 크리스마스에는 와인을 문고리에 걸어놓고 가는 다정한 분이었다. 동대표 남편의고등학교 동창이랬던가. 아무튼 신사였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졌다.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핸드폰이 뜨거웠다. 손난로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송금버튼을 누르다 하마터면 전화를 받을 뻔했다. 언니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백 통 가까이 쌓여 있었다. 야도 있었고 썅년아,도 있었다. 2202호 집주인, 내가 아니라 진짜 집주인이 들렀다고 했다. 다정한 신사는 내게 작별인사를 건넬 겸, 안방의 치수를 잴 겸 방문했다. 곧 결혼하는 아들의 신혼집에 붙박이장을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사전에 내게 양해를 구했고, 만날 약속도 정한 터였다. 둘 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썅년아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다시 언니가 되었다. 언니, 설마 무슨 일있는 거 아니죠? 이 와중에도 내가 죽었을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 P194

어제 척이 했던 당부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을 믿거나 도와주지 마. 살해당하지 말라는 뜻이야. 고개를 들자 부인이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냈다. 망치로 내 머리통을 내리쳤다.
숲의 나무 사이로 태양이 떠올랐다. 빛이 일직선을 그렸다. 머리통에서 새어나온 피가 흙에 길을 내며 느리게 흘렀다. 피투성이가 된 이마 아래로 놀란 듯 치뜬 눈과 헤벌어진 입이 보였다. 마침내 운동화 끈이 매듭지어졌다. 쓰러져 죽은 나로부터 내가 일어섰다. 허물을 벗듯 시체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갈라진 우주가 저쪽으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 우주에서 나는 무사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부인이 미소 지었다.
우리는 왼손으로 악수했다. ■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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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시겠는지. 둘이 결혼한 이유는 ‘두 줄‘이 아니었다. 임신 공격도 아니었다. 그것은 최초에 한하여 유효한 개념이므로, 각기 다른 의도가 결국 같은 결과를 빚어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부부는 천생연분이었다. 자식을 넷이나 뒀다는 것도 그 증거였다. - P102

지금 누가 창피하고 누가 무서운데. 내가 더 창피해, 네가 더 무서워. 그토록 바라던 일 아니었나. 누구 보여줄 것도 아닌데 왜 여자 옷을 입나. 숫기만 있었어도 그 조그만 단칸방에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을것이다. 밖에 나가지도 못할 성격으로 어떻게 이런 과격한 취미를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정수리 가발 사는 걸 말리지 않았더라면, 은협은 이제는 익숙해진 방식으로 후회했다. 가만 놔뒀더라면 집에서 쫓겨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속이 터졌지만 보일 씨를 어르고 달랬다. 저 큰 구두를 자신이 신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일 씨가 해야 했다. 최소 백 번은 신어야 본전일까 말까 했다. - P103

내가 민희를 예뻐할 수있는 건 내 애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기는 잠깐 볼 때 가장 예뻤다. - P129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에는 귀가 없으므로 아무리 기구한 사연을 들려준다 한들 정직하고 성실하게 흐를 터였다. - P133

셋째 아이는 아파트 청약 가점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곤 했다. 모든 셋째 아이가 청약 키즈는 아니었지만 모든 청약키즈는 셋째 아이였다. - P136

새콤달콤이 있었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었다. 없었어도 살아갈 수 없었다. 새콤달콤이 있는 우주, 새콤달콤이 없는 우주, 우주가 분기해도 결과는 같을 터였다. 경찰은 귀찮은 기색 없이 사진 파일을 뒤적였다. 차 안에서 새콤달콤이 발견되었는지 아닌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들었고, 한쪽 우주로 갈라져나왔고,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된 우주인가?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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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수저가 아무리 환경주의를 표방하는 제품이라 하더라도 주변마저 빈해 보이면 곤란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환경주의가 아니라 환경주의적인 것이었다. 둘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았다. 알고도 모르는 척 했으며, 모르는 척한다는 것도 서로 모른 척했다. 일종의 공모였다. - P66

상암에 다녀온 날 이후 나는 은협의 인생을 얼마간 대신 살아주고 있었다. 은협이 자기 존재를 의탁, 혹은 위탁해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다‘는 말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몸이 두 개면 한 몸은 놀고 한 몸은 전과 똑같이 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몸이 두 개든 스무 개든 모자랄 수밖에 없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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