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든 연인이든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않는 이유가 타인을 믿을 수 없어서, 즉 누군가 그걸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 할까 봐서냐고 묻는다면 절반은 맞다. 다른 절반은 마음의 재판을 읽게 될까 봐 두려워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관계에서는, 나에 대한 상대의 평가가 그리 궁금하지도 않고 안다 해도 그 결과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 일상이 빈번하게 포개지는 가까운 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판결도 과연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재은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의 마음에는 사랑만큼 미움 또한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단순히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눈앞에서 살아 날뛰는 질감으로 대면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읽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말하겠지만, 정말 한 번도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번도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순임 정도 아닐까. 그래서 재은은 인간관계의 휴정 상태를 가장 선호해 왔다. 사랑도 증오도 없는 그런 상태를. - P157
"내가 살면서 후회하는 딱 한 가지가 있긴 한데 그걸 이길 건 세상에 없어." 진지한 얼굴이었다. "저번 겨울 에스메랄다 한정판 오픈런에 늦은 거. 하필 왜 그날늦잠을 잤을까. 지금까지 문제없던 내 폰은 어째서 그날만 알람을 울리지 않았나. 어째서 나는 에스메랄다를 신을 수 없게 되었나.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문제인가. 다시 생각해도 열 받아" 유명 브랜드의 농구화 이야기였다. 올그 시시한 독백을 듣는데 눈물이 고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할 거라고 재은은생각했다. 어느덧 현서는 한 걸음 좁혀 와 있었다. 재은은 스스로 묶어 두었던 손을 풀었다. 다시 팔 하나 팔 하나 차례로 조심스럽게 현서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밀려드는 그의잔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방금 전 읽었던 재은을 향한 감정 그대로였다. 뜨겁지는 않지만 차가웠던 적 또한 없는, 재은도 알고 있는 보통의 포근한 온도,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익숙해진 베개의 편안한 촉감을 닮은 그런 감정이었다. - P163
동일한 기억을 타인의 잔상으로 읽는 행위는 그 순간을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되새기게 하는데, 재은에게는 현서만이 그럴 수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 P166
표지 너머의 기억도 그랬다. 이 담벼락 아래에서 오래전 현서와함께 하던 날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봄비와 함께 벼락도 쏟아지던 오후의 기억이었다. 하굣길 재은과 현서가 각자의 우산을 하나씩 들고서 고개를 쳐들고 담벼락 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위에 푹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삼색 아기 고양이가 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몰라도 내려오기는 정작 겁이 나는지 웅크린 채 꼼짝 않고 두 사람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고양이의 오른쪽 눈가에는 제법 깊은 상처가보였다. 잔상에서 들리는 소리는 전혀 없지만 그날의 빗소리, 고양이의울음소리, 주고받은 말들을 재은은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못 내려오고 있는 거 같지? 현서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네. 어떻게 할까. 재은이 자기 우산을 땅바닥에 내려 두자 현서도 똑같이 따라했다. 우산 두 개가 활짝 펼쳐진 채 바닥에 놓이고 두 사람도 고양이처럼 푹 젖어 버렸다. -준비됐어? - P164
재은이 묻고 현서는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췄다. 그 어깨에 오르자 너 왜 이렇게 무거워졌냐고 볼멘소리하면서도 현서는 재은이 흔들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무릎을 지지하고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턱 끝과 팔꿈치에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현서가 무릎을 곧게 폈을 때, 재은의 눈높이가 드디어 담벼락위 고양이와 맞았다. -같이 내려갈래, 야옹아? 고양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재은의 두 눈을응시하기만 했다. 정말로 나를 맡겨도 좋을 존재인지 판단하는듯이. 침묵 속에서 믿음에 관한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천둥소리만이 요란했다. 고양이는 몇 분이 더 흐른 후에야 재은을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그 잔상에 이어 놀란 순임의 얼굴이 나타났다. 멀쩡한 우산을갖고 있는 두 녀석이 몽땅 젖은 채로 웬 고양이를 데리고 왔으니무리도 아니었다. 재은이 말했다. -엄마, 얘는 벼락이에요. ‘키워도 돼요?‘ 묻는 대신 이름부터 내밀었다. -벼락 치는 날 담벼락에서 만난 애라 벼락이라나. 현서가 곁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설명을 거들었다. ‘다녀왔습니다‘를 말하는 투로. -우리가 좀 봐 줄까 봐요. 다친 거 같아서요. -괜찮죠? -괜찮죠? -네? 연이은 괜찮죠 공세에 어처구니없어하는 순임에게 벼락이가야옹 소리를 냈다. 마치 자기가 ‘난 여기 있어도 괜찮아! 도장을 찍듯이. 벼락이가 처음으로 낸 목소리였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재은 역시 그날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손에 꼽게 좋아하는 기억이었으니까. 현서에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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