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쯔타오를 데리고 성당에 간다. 루르드 성모상 앞에 이르렀을때 쯔타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시 사람들도 "누구세요?"라고 물었으며 그녀는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노라고 알려줬다. 쯔타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성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바닥에 글자도 써줬다. 쯔타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원죄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한 뒤 이 세상에서는 나와 그녀 모두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리송한 눈치였지만 내 말을 가슴에 새겼다. 다음날에는 루르드 성모를 보고 속으로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게 옳다. 내게는 그녀의 평온이 필요하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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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흙을 메웠는지 몰랐다. 평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재잘재잘, 바스락바스락 울리던 집안의 소리가 전부 사라졌다. 한때 미소 짓던, 슬퍼하던, 키득거리던, 찡그리던, 침울해하던 얼굴이 전부 똑같이 변해버렸다.
이런 밤을 겪었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 같나요? 그녀는 속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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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오랜 시간을 한결같이 보냈다. 한 해 한 해의 시간이 세밀하고 촘촘한 막처럼 그녀의 기억 뒤편에 놓인 것들을 층층이 덮었다. 한해에 한 장씩, 시간이 흐르면서 얇았던 막이 두껍게 쌓였고 판처럼 굳어졌다. 그렇게 그녀의 의식 속에 깊이 숨겨진 마귀들이 모조리 봉인되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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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시설로 위장한 안가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었다. 실은 사무용 건물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성을 마음껏 음미했다. 건물 1층에는 루비 튜즈데이가 있었다. 화장실에선 법률사무보조원들이 립스틱을 수정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사라진 핵배낭을 추적하고 천연두와 탄저균의 변종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사람들이 자기들 사이에 섞여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매번 위협 보고서에 사상자 추정치를 적어 넣을 때 그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게 우리의 임무였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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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미사는 우리 집의 전통이었지만, 이제 내게는 형식적인 의식이 아닌 보물찾기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뒤죽박죽인 단서들을 제대로 해석하기만 하면, 내면의 문이 열리며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지혜가 언젠가 양심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부여해줄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도. - P58

"비자는 어떻게 받을 건데?"
좋은 질문이었다. 태국에 있는 버마 대사관은 국제사회의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학생 비자와 여행 비자의 발급을 전부중단한 상태였다. 하지만 군부는 돈벌이가 절실했기에, 적법한 증거만 제출하면 사업 비자는 내주고 있었다. 코 모에 티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우리 모르게 랑군에서 비밀 사업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하지만 그런 사람과 연이 닿을지도 몰라." 내가 대답했다.
대릴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 논문의 자료 조사 차, 자유 버마를 위한 컨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알게 된 영국 남자로, 나이는 30대이며 기업 금융 전문가이자 아마추어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버마에 투자하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생계가 걸려 있으니 일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군부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다고 했다. - P66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영화 제작 기술을 이용해 자유 버마 운동을 돕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다. 그것도 벌써 1년이 다 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민진이 정글 끄트머리에 있는 매솟이라는 작은 마을의 공중전화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나는 대릴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기적처럼 요금 부담에 동의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상기시켜준 다음, 이렇게 물었다. "2주간 휴가를 내고 태국으로 올 생각 없어요? 나랑 결혼한 척하고 당신의 사업 비자로 같이 버마에 들어가 현 정권의 실상을 촬영하는 거예요."
대릴은 좋다고 대답했고, 나의 영원한 신용을 얻었다.
나는 오두막 동지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촬영할 수 있게가방을 개조했고, BIC 볼펜도 몇 자루 구입했다. 나중에 해체해서 필름을 숨겨 나오기 위한 용도였다. 대릴이 도착하자 우리는 방콕 공항에서 그를 맞이해서는, 달러 몇 장만 쥐여주면 뭐든 위조해주는 카오산 로드로 곧장 데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만든 결혼 증명서로 버마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심사대 직원 앞에서 우리는 일부러 다투는 척 연기했다. "출장 가는 김에 겸사겸사 허니문이라니,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대요." 내가 투덜거렸다. - P67

대릴이 복도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우리 가이드가 저녁 식사를 하실 거냐고 묻네." 그가 말했다. 나는 점점 더 대릴이 좋아졌다.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재미있고 용감했다. 고용주의 투자 선택을 자신의 사랑과 노력으로 만회할 필요성을 느끼는 은행 직원은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주최 측이 아주 세심하네요. ABC 카페래요?"
그가 빙긋 웃었다. "달리 어디겠어?"
민진의 연락망에 빨리 메모를 남겨보고 싶었다. 이 나라에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슬슬 확인해볼 때가 됐다.
ABC 카페는 술레 파고다와 악명 높은 트레이더스 호텔에서 겨우 몇 블록 떨어진 마하 반둘라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군 장성들이 중국 마약상을 만나 싱가포르 슬링을홀짝거리는 곳으로 유명했다. 외관은 낡은 서양식 살롱처럼 - P73

생겨서 보는 즉시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대릴에게 말했다. 그는 우리가 앉을 테이블을 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진은 화장실변기의 물탱크에 메모를 남기라고 했다. 나는 종이 타월을 한장 뽑아서 몇 줄 끼적였다. 혹시라도 중간에 가로채일 경우에대비해 신분이 드러날 만한 정보는 적지 않았다. 그냥 우리는잘 있으며, 배관에 문제가 없는지 알고 싶으니 답장을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도자기로 된 물탱크 뚜껑을 들어 올리자, 이미 테이프로 붙여놓은 종이가 보였고,
겉면에 아마릴리스 꽃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감자튀김을 주문해.‘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그가 가느다란 필치로 이곳에함께 있었다. 그만의 독특한 유머가 느껴졌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격적인혁명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우리는 지시에 따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잠시 후 한쪽에핫소스가 뿌려진 접시가 젓가락과 함께 서빙되었다. 웨이터가 나와 대릴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분 모두 환영합니다."라고 말해주자, 이 나라에 발을 디딘 이래 처음으로 정말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민 진은 이런 비밀 결사대의 안전한 기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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