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환하게, 또한 그토록 슬프게 미소 짓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그 눈부심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내게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건네주었다. - P308

마흔이 넘은 남자가 딸 같은 나이의 젊은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을 때 어떤 심정이 드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젊음에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자신의 나이에 겁을 먹고,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내 곁에 묶어둘 수 있을까,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레이코는 사와모리가 자신의 몸을 거액의 돈으로 사들인 것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 P309

레이코가 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용서해주고 어떤 부탁을 하든 들어주면서 지속적으로 착한 사람을 지불해주는 것만이 내 나이의 남자에게 허락된 사랑의 방식이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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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돌연한 분노에 자신의 조각상이 마침내 영혼을 가진 진짜 인간이 되어 나타난 듯한 놀람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분노가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파괴해 추하게 뒤틀렸을 때, 그는 비로소 거센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날 밤 안에 이 여자를 죽이자고 마음먹었다…. - P167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단지 자신의 꿈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에 동화의 세계를 통해 알아버린 꿈을, 어느 날 갑자기 공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성장한 뒤에도 잊지 못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떤 희생이든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미모는 레이코에게 야망이라는 또하나의 무기를 안겨주었고, 야망은 다시 레이코를 한층 더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꿈에의 계단을 몇 칸씩 뛰어오를 수 있는 특별한 구두가 되어주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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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년 전 어느 날, 내 얼굴을 사고로 파괴해버린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전 재산을 털어 나를 뉴욕의세계 최고 실력자라는 성형외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렇게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그 새로운 얼굴에 눈독을 들인 유명한 사진작가는 나를 작업실로 데려가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리고 이런 얼굴에는 다른 화장법이 어울린다면서 립스틱이며 아이섀도로 내 얼굴을 온통 칠해버렸다. 또 어느 날은 유명한 여성 디자이너가 잡지 사진을 봤다면서 접근하더니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혀 무대에 세웠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그리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의 신인 디자이너는 나를 파리에 데려가 자신이 잠자리를 함께한 세계적으로유명한 동성애자 디자이너에게 나를 팔아넘겼다. 또 어느 날은나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살 많은 패션모델이 친근한 얼굴로 다가와 친구가 되자면서 내 왼쪽 젖가슴에 자신과똑같은 나비 문신을 하라고 권했다. 또 다른 날, 어느 섬유회사의젊은 사장은 나를 호텔로 청해서 1억 엔의 돈다발로 내 몸을 샀다. 그리고 다른 돈다발을 풀어 자신이 고른 새빨간 드레스를 입히고 자기 회사의 TV 광고에 출연시켰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레코드 회사의 젊은 여성 디렉터는 내 음성이 꽃의 꿀 같다면서 서툰 노래를 부르게 해서 목소리까지 돈으로 바꾸었다. - P24

한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는 단지 이레 동안이 필요할 뿐이었다. 한 여자의 몸을 조각내고 살을 샅샅이 먹어치우는 데는 일곱 명의 손과 입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이따금 거울 속에서 이제는 전혀 내가 아니게 된 괴물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 돌려버린 눈으로 항상 멍하니 죽음만을 응시했다. - P25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술잔 중 하나를 마시면 죽음이 찾아오고 다른 하나를 마시면 기분 좋은 취기가 찾아온다는 게 문득 신기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죽음 또한 지금의 나에게는 술보다 기분 좋은 취기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자주 술을 마셨지만 어떤 취기도 내가 인간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해주지는 않았다. - P38

이제 곧 찾아올 나의 죽음과 납 인형에 건배의 미소를 날렸다. 살인자와 피해자는 2미터 거리를 두고 삼초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살해하려는 자와 살해당하기를 원하는 자가 마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공범처럼 시선을 주고받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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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작은 것에 비유되었다. 아름다움을 상찬할 때조차 사람들은 ‘작다‘라는 단어를 썼다. 사 년 전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르네 마르탱은 나를 ‘동양의 작은 진주‘라 일컬었고, 작년 봄에 <라이프>지에서는 ‘밤에 반짝이는 작은 물방울‘이라 묘사했다. 마치 나의 아름다움이 거대한 힘을 가질까봐 두려워서 반드시 가로막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 P6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만일 모델이 되지 않았다면 오년 후 오늘 밤에 죽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종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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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언젠가 네 눈빛이 나에게 알려줬지. 증오가 아니라 환상이 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그래서 나는 다른 꿈을 꾸게 됐어. 네가 지상을 말할 때 반짝이는 눈빛이 좋아서, 너를 먼 곳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어. 네게 세계를 돌려주고 싶었어. 어쩌면이 행성 전체가, 네가 마땅히 거닐었어야 할 곳이니까." - P384

범람체의 연결망에 전이자들이 유입되면서, 이들은 행성 전체를 아주 느리지만 연결된 형태로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범람체는 이 행성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인간이 개체 중심적인 존재이기만 했을 때, 그들은 개인 혹은 작은 집단만을 생각했을 뿐, 행성전체를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람체와 결합된 인간은 연결망 속에서 사고하고, 그렇기에 자신이 행성 전체의 일부라는 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지상의 일부를 인간의 터전으로 삼더라도, 지금 늪과 연결된 이들에게는 무작정 뻗어나가고 싶은욕망이 없었다. 연결망을 통해 생각한다는 것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전체로 이어진 생각 체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스스로의 생각을 재검토하는 일이었다. 부분적인 충돌이 있었고 그 부분이 전체에 영향을 미쳤지만, 전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부분은 없었다. 범람체와 결합된 인간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 P418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태린은 그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 P419

"그야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 P420

태린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이제프처럼, 태린도 아주먼 곳으로 그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먼 곳으로 와서야 태린은 알았다. 증오하는 것들이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 더 멀리까지 올 수 있다고. 이제프도그걸 알아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 P424

"네가 보는 이 풍경은 어때?"
그렇게 물으며 태린은 눈을 감았다.
시야가 변했다. 바다는 수많은 소리와, 움직임과, 열기와 재잘거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파도를 따라 입자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만났고, 그 표면에서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기류가 무수한 원을 그렸다. 원들이 합쳐지고 일그러지고 다시 흩어졌다. 부드러움도 날카로움도 서늘함도 따듯함도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밤의 바다는 많은 색깔들을 품고 있었다. 온몸으로 감각되는 빛의 조각들을.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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