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이에요. 시하를 사랑하고 싶어요. 진정한 사랑을요. 진짜를 느끼고 싶어요. 진짜 시하를 만나고 싶어요. 한순간이라도 좋아요. 제 뇌를 꺼내서 산산이 분해해 버린다 해도 상관없어요. 시하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세계의 끝을 건너고 싶어 하는 아이구나. 알아. 관계는 늘 아득하지. —도 한때는 영원히 —을 이해할 방법이 있을 거라 오해하고 있었지."
빛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존재는 하나의 세계니까. 네 안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구겨지고 찌그러져.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려. 영원히, 마주하는 순간 망가져 버리는 거야. 너도 그도."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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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요, 정상인데 뭐하자고 계속 재는 거죠?"
몸에 문제가 있다면 괜찮겠다고, 차라리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니라 몸이 잘못된 거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잡하고 따분한 말이어서 입을 다물었다. 침대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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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가 가장 친절하게 죽는 방법이라면 최악의 방법은 불에 타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디 윌러드는 그때 본 병속에 든 태아 중에는 아가미가 있는 아이도 있다고 말했다.
물고기랑 똑같은 단계를 거친 아이들이라고. - P209

"못 가겠어요."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당신은 돌아가요."
나는 헤엄쳐서 돌아가지 못할만큼 녹초가 될 때까지 수영할 작정이었다. 앞으로 나갈 때 내 심장박동 소리가 답답한 모터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 P210

그때 내 몸이 온갖 종류의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순간에 양손이 늘어졌고, 그러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내 의도대로라면 순식간에 죽는 거였는데,
남은 감각을 지닌 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혹은 함정에 빠져 무감각하게 오십 년 동안 우리에 갇혀 있게 되겠지. 사람들은 내가 정신이 나간 걸 알면 엄마가 반대해도 날 요양원에 넣어 치료받게 하라고 엄마를 설득하리라.
내 경우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잡화점에서 비정상적인 심리에 관한 문고판 책 몇 권을 사서 책에 나온 내용과 내 증상을 비교해보니, 나는 가장 가망없는 경우와 맞아떨어졌다.
스캔들을 다루는 신문 외에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심리학 서적뿐이었다. 작은 출구가 남아 있어서, 인생을 적절하게 끝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P212

최근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될까 고민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엄청난 죄로 본다는 걸 알았다. 정말 그렇다면 자살을 만류할 방법을 알고 있을 터였다. - P218

금고를 열어 수면제 병을 꺼냈다. 수면제가 기대보다 많이 있었다.
적어도 쉰 알은 될 것 같았다.
엄마가 밤마다 조금씩 주는 약을 모으며 기다렸다면 오십일은 걸렸을 터였다. 오십 일 후면 대학이 개강을 하고 동생이 독일에서 돌아올 터였다. 그러면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 - P223

부드러운 나방 같은 거미줄이 얼굴에 닿았다. 검은 우비로 그림자처럼 몸을 감싼 채 약병을 열었다. 재빨리 수면제를 한알씩 입에 넣었고 중간중간 물을 삼켰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약을 다 먹었을 즈음에는 눈앞에 울긋불긋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약병이 손에서 미끄러졌고, 난 누웠다.
정적이 꼬리를 늘이니 조약돌과 조가비가 드러났다. 초라하게 부서진 내 삶 전부도 그 순간 그것이 하나가 되더니, 밀려드는 파도 속에서 날 잠으로 밀어 넣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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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마주 닿는 감촉 속에서, 불안은 김 서린 창문 밖 풍경처럼 희미해지는 듯 했다. - P198

왜 이렇게 다른 거야? 왜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건데? 말한다고 전해지긴 하는 거야? 시하야. 너는 왜 거기에 있어? 내 안이 아니라. 그런 건 너무 쓸쓸하지 않나? 이런 말을 해 봐야 너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만 짓겠지. - P216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대로 네가 나를 사랑해 준다면 좋을 텐데. 아주 잠깐이라도. - P217

"시하야, 나는 한 번도 널 만난 적이 없어. 내가 보는 너는 빛이 나의 망막에 맺어준 상이야. 내가 듣는 너는 고막을 진동하는 공기의 떨림이야. 내가 만지는 너는 피부가 보내는 전기신호일 뿐이야. 내가 기억하는 너는………… 나의 뇌가 멋대로 해석해 구겨 놓은 납작한 착각이야. 헛된 희망이야. 시하야. 나는 널 몰라. 한 번도 너를 알았던 적이 없어. 우리가 주고받는 말들은 그저 허공에 미끄러질 뿐이야." - P246

"나는 그 말이 진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래서 진심을 다할 수가 없는 거야. 우리 사이엔 아득한 단절이 있어. 내 세계의 끝까지 걸어가도 네가 있는 세계로는 넘어갈 수가 없어. 우린 서로 다른 몸에 갇혀 있어."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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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처음에는 누구나 겁나서 죽을 것처럼 구니까요."
나는 웃으려 했지만 살갗이 양피지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닥터 고든은 내 머리 양쪽에 쇠로 된 원반 두 개를 설치했다. 그가 이마 위에 있는 끈으로 원반들을 조이고, 철사를 주며 깨물라고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만큼의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뭔가 굽히며 세상이 끝난 것처럼 나를 안고 흔들어댔다. 타다다다다닥,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공중에 파란빛이 번쩍거렸고, 그때마다 몸이 홱홱 젖혀져서 뼈가 으스러질것 같았다. 잘린 식물처럼 몸에서 수액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이러나. - P191

인위적, 겉으로 꾸민, 가짜의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해.‘
스무하루째 잠을 못 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는 수백만 가지 형체와 그늘진 막다른 길들, 서랍장과 옷장, 옷가방 속에는 그늘이 있었다. 지구의 밤 쪽으로 끝없는 그늘이 뻗어 있었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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