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전 2
이종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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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惡(악)의 세력이 점점 그 힘을 더해가는 듯한, 그래서 선과 악의 일대 전쟁은 불가피해 보이는 기대를 던져주며 1권은 끝났었다.

2권은 전편과 달리 에피소드의 열거를 지양하고 작품의 진행속도와의 결합을 보다 공고히 하려는 듯이 줄거리 중심의 형태로 다소 변화를 준 것 같다. 즉, 선명해진 주제의식과 인물성격의 구체화, 서사성의 견고(堅固)화 등이 이루어져 재미를 더욱 만끽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선과 악의 대결구도, 얽히고설키기 시작하는 애정 네트워크, 지극히 통속적이고 적나라한 대화, 확전일로에 놓인 퇴마사와 영귀와의 전쟁에 대한 기대감 등 재미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섬세하고, 분명하게 깔아놓고 있는 것과 같다.

1권의 가물가물해진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부터 머리카락이 곧이 서고, 오한이 등골을 서늘하게 타고 내려오는 전율로 독자의 정신을 메다꽂는다. 이 구성전략은 처음부터 알지 못할 공포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는 묘미가 있다. 개운치 않은 떨림으로 멈칫거릴 틈도 없이 관능의 언어로 매혹하고, 새로운 등장인물로 신선함을 선사한다. 작가의 TV일일연속극적 시나리오와 엔딩 기법처럼, 독자들의 시선을 지면에 가두어놓고 또한, 호기심과 기대감의 적절한 오르내림을 주어 조절해댄다.

새로운 귀신, 액귀(縊鬼), 사령자(死靈者)의 등장은 악의 뻔뻔스러움과 비열함을 두드러지게 하여, 다음으로 미루어진 ‘무풍리’에서의 본격적인 혈전을 선악의 대결이란 명료한 구도로 뚜렷이 해놓는다. 한편, ‘숙희’의 모호한 태도, 악귀의 근원인 사람의 선함이란 흐릿한 경계를 통해, 여전히 선이 이겨내고는 있지만 악의 세력으로의 중심이동을 암시하여 애매한 균형을 조성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를 갈등과 긴장으로 더욱 팽팽하게 조여 놓는 역할을 수행하는 듯싶다.

귀신전 2를 한번 손에 든 독자들은 절대 내려놓지 못한다. 등장인물, 사건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여운을 남기고 있어 ‘귀신전 3’의 기대는 더욱 증폭되어 버린다. 권(拳)이 더해질수록 더욱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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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네로가의 영원한 밤
플라비오 산티 지음, 주효숙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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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괴테의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친근한 독서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상상의 문제이지만, 괴테가 이들 작품을 집필 할 당시의 심리적 상태를 마치 이해라도 할 수 있는 듯한 문장의 장치들로 대문호의 은밀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야릇한 호기심이 채워지기도 한다.

작품은 죽음에 임박한 괴테의 ‘고백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실존인물을 작중 주인공화 함으로써 리얼리티를 제고하고 이성의 냉철함으로 인한 분석적 잠재시각을 잠재워버린다.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여 진정되지 않는 의식 속에 쓰여 지는 그 강박적 불안감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이되어, 낯설고 막연한 공포감으로 시작하게 유인한다.

178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팔레르모’에 도착한 괴테의 기이한 여정을 쫒는다. 작품의 전반부는 선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자가 들려주는 음습하고 괴이한 ‘보스코네로家’의 비밀스런 이야기로, 그리고 후반부는 작중인물로서 괴테가 직면하는 자신의 경험으로 시간적 연속선상에서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머리만 뜯긴 채 나뒹구는 사체, 잔혹하게 훼손된 농부들의 시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하인과 경감 등 도통 사건의 전말을 좆을 수 없는 연쇄적인 살인사건이 이어진다. 단지 주어지는 암시란 “삶은 피를 먹고 산다”, 그리고  “심오한 징후”라는 뜻 모를 의문을 던져줄 뿐이다. 기억상실증과 수면발작증을 앓는 보스코네로가의 계승자인 남작 ‘페데리고’와 어린 시절 가정교사인 ‘텔라모니오’, 이 추상적 단서의 의미를 찾기 위한 집요한 수소문, 겁에 질린 판사, 사체를 수집하는 외과수술의,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 보이는 변호사까지 끔직한 살인사건의 본질에 혼란을 주는 징후들과 막연한 단서를 마구 흩뿌려 대어 독자의 긴장을 팽팽한 강도로 높여나간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그 집요한 공포와 전율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 괴테의 지성과 이성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에 그칠 줄 모르고 외쳐대는 악(惡)의 실체는 바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을 뿐 아니라 언제든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본 것 아닐까? 초현실적인 실체에 직면한 고귀한 우리의 이성이 이렇듯 마지막 순간까지 부들부들 떨게 만들고 그를 써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진실은 무엇일까?

괴테가 이 낯선 곳에서 체험한 지옥과 악의 실체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로 현현하고, ‘발푸루기스의 밤’에 모티브를 제공한다. 진실이 아닐지언정 작가 ‘플라비오 산티’의 이 악마적 고백록은 미스터리 공포소설로서, 또한 메리 셸리, 로폴리도리의 계보를 잇는 정통 고딕소설로서뿐 아니라 탄탄한 서사와 문학성으로 독자의 지성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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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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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실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무엇인가? 단세포 생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바이러스는 “무기질 적이고 딱딱한 기계적 오브제 지나지 않아 생명으로서의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바이러스는 무생물인가? 생물을 단순한 물질과 구분 짓는 유일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 유일한 특징이란 ‘자기 복제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증식되는 세포분자는 어떻게 자신의 특성을 전달하는가?  “끊임없이 무질서한 열운동에 농락당하는 원자의 행위가 어떻게 고도의 질서를 요구하는 생명활동”을 손상시키지 않고 “질서 정연한 상태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인가? 이 생명 시스템에 고찰은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겸허와 경외감을 던져준다.

이 저술의 매력은 뉴욕 대기 중의 독특한 진동의 향수와 보스턴의 목가적이고 학문적 분위기와 같은 서정성과 저자의 연구생활에서의 경험적 진술이 어울려 자칫 이론적이고 낯설기만 할 수 있는 분자세포학, 분자생물학의 세계를 통해 생명의 실체를 수월하게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여준다.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하여 미국 근대기초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사이먼 플렉스’의 세균분리, 네덜란드‘바이예린크’의 세균과는 다른 미세한 감염입자 즉, 바이러스의 발견, 그리고‘오즈월드 에이버리’에 의한 세계최초로 생명의 본체인 ‘유전자’-‘형질전환물질’- 구성단위의 발견 등을 오늘의 생명시스템에 이르는 위대한 과학적 발견으로서 그 이론적 의의와 내용을 상세하게, 그러나 일반  자 누구든지 이해하기 쉬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생물의 유전자정보 담당자로서의 DNA에 대한 구조와 그 대칭성이 지니는 의미, 이후 왓슨, 클릭, 윌킨스로 이어지는 DNA나선형 사슬에 그 과학적 발견과 생물학적 특성의 규명을 가능케 한 ‘샤가프의 퍼즐’의 설명은 이 저술의 중추적 내용이 되고 있는 ‘동적 평형’과 같이 분자세포학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원자는 그렇게 작은데 우리의 몸은 왜 이렇게 큰 것 일까? 하는 이 원초적 질문에 대한 ‘평방근의 법칙(루트n의 법칙), 즉 오차율의 부정확성을 줄이기 위한 고도의 질서를 요구하는 생명활동에 치명성을 줄이기 위해’자연이 선택한 이 오묘한 신비, 그리고 핵산의 위태로운 균형과 같은 네트워크화 된 ‘상보성’과, “생명이란 요소가 모여 생긴 구성물이 아니라 요소의 흐름을 유발하는 효과”라고 새로운 생명관을 제공한 ‘루돌프 쇤하이머’의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란 생명의 정의 등, 이 화려한 생물학적 발견에 대한 지식의 향연은 가히 매혹적이다! 라는 표현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어진다.

또한 췌장의 소화효소 생산세포의 세포막을 구성하는 GP2란 단백질이 생명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기위한 GP2 넉아웃실험과 그 결과 GP2마우스(쥐)의 성공적인 배양과 탄생에서 기계적 비교와 같은 인간의 오만한 과학적 실험이 가져온 어리석음을 겸허하게 반성하기도 한다. 이 실험에서 저자는 생명현상의 다양한 중복과 과잉이 생명시스템 자체에 이미 사전에 준비되어있고, 질서 그 자체를 유지하는 생명이라는 시스템의 고유현상- 동적 평형 -의 경이로움에 숙연해진다.

프랭클린의 DNA C선 해독자료를 훔친 윌킨스와 왓슨의 몰염치 같은 과학적 발견 뒤에 숨겨진 에피소드에서, 펄레이드의 단백질 흐름의 가시화 연구, 슈뢰딩거의 브라운운동과 확산, 평균하면 등 풍요로운 분자생물학의 역사 등 다양한 연구 성과에 이르기까지 이 저술은 문학작품을 능가하는 몰입을 견인하며, 철학과 문학, 과학이 통섭하는 학문적 다채로움의 장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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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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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항해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다. 내 마음속의 가장 극악한 부분을 찾아 진짜 지옥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면 지금이 정확히 그 장면이라 할 것이다.”거대한 파도와 누더기가 된 구명보트에 실려 오직 죽음만이 엄습하는 검푸른 대양의 한가운데 절망에 빠진 나라면 내 육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고 말지 않았을까? 그 고통과 실의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을까?

육신이 흐물흐물 완전히 곤죽이 돼 이성의 명령을 잘 이행하려 들지 않고, 그저 휴식만을 원하고 고통에서 구제받을 길만 찾으려 할 때, 그리고 영원히 구원의 손길에 닿을 수 없는 끝나지 않을 극악한 환경의 연속이라면, 우린 그 때에도 살아낼 수 있다고 자아를 재촉할 수 있을까?

대서양의 한가운데 저자‘스티븐 캘러핸’의 6.4M 소형 순양함‘솔로’호가 침몰하고, 구명보트에 다급하게 생존을 의지하기위해 몸을 옮길 때, 그의 뇌리에 수없이 교차하는 당혹스러움과 절망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 살기위한 본능적인 구상들이 나의 뇌에서도 공감을 일으킨다. 이제 망망대해에 그야말로 漂流(표류)가 시작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76일간의 잔혹한 삶과 죽음의 시험의 여정에서 오늘에 이르는 나의 인생여정이 이처럼 표류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유가 아닐 것이다.

“어제는 내리쬐는 햇빛으로 600그램의 신선한 물을 만들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구름덕분에 살이 타 들어갈 것 같은 오후의 햇살은 피할 수 있었지만, 나의 생명수는 그 양이 줄어들 것이다. 삶은 모순투성이다.”이처럼 삶은 양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大海(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끈질기게 반응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캘러핸의 감정에 불쑥 불쑥 끼어들던 그‘정신적, 육체적 신경의 모든 방어막이 벗겨 나가고 완전히 맨 몸뚱아리가 노출되어버린 듯’한 절망만이 맴돌고 있을 때, “넌 죽어!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죽을 거야.”하고 정신과 육체의 방임으로 치달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의 “ 그래. 반드시 이 고비를 넘기고 말겠어. 다시 시작해. 문제를 가려내.”하는 이성의 승리를 견인하는 독백에서 절로 숙연해짐을 느낀다.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평온한 환경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나약해빠진 회피와 절망, 의기소침이 부끄러워진다.

76일간의 표류를 가능케 해준 그의 생명선인 구명보트‘러버더키3호’,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主食(주식)이 되어 준‘만새기’와의 생존을 둔 혈투는, “자연의 경이란 추한 공포에 둘러싸인 아름다움이라 할 만하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살아남기 위해 반응하는 강렬한 깨들음과 엄청난 열정의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각인된다.

스칠 듯 지나가는 대형선박들을 향해 쏘아 올리는 조명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지나쳐버리고, 아련히 그 모습이 사라짐을 바라보는 표류자의 심경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구명선 바닥이 찢겨 생존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극한적 좌절에서 취약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지만, “신체적 자아와 본능이 일종의 무대 감독으로서 모든 현실을 재배치하고 통제”하는 캘러핸의 ‘생존의 세계’에서 인간의 숭고한 정신적 승리를 보게 된다.

항로의 끝이 어디가 될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니면 영원히 그 끝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는 표류자로서 그의 역할 - 그저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구명보트에서 기다리기, 어패류를 잡아먹을 것, 잡은 물고기를 잘 손질해서 저장하고 배분해서 먹기, 증류기를 소중히 다루어 식수를 확보하기 -이지만, 그는 이렇듯 단순하기까지 해 보이는 역할에 미묘한 변화가 생길 때 마다 결정적인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심각한 파장이 들이친다. 나는 정말 죽고 말았을 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 머리로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다. 마음속 창조의 세계는 결코 물리적인 법칙의 제약을 받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적인 음식공급이 결핍된 조난의 혹독한 생존을 위한 시간 속에서 “내 몸에 양분을 공급하기위해 내 감정에게 살해를 강요한다. 나 자신에게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나의 팔과 다리에게 노역을 강요”하는 처절한 극기에서 다시금 작은 장애에도 엄살을 부리기만 하던 내 인생항로의 왜소한 굴절이 가소로워지기도 한다.

아홉 척의 선박이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고, 열두 마리의 상어가 그를 위협했다. 그리고 생존과 죽음의 아슬한 싸움의 76일째, 세 명의 검게 그을린 사람들, 그들의 배 ‘클레망스’가 그의 앞에 나타나고, 캘러핸, 그의 앙상하고 상처투성이의 몸에 번지는 환희가 바로 나의 감동이고 승리이고 기쁨이 되어 “삶이란 바로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을 깊게 이해케 된다.

우리네 삶이 캘러핸의 표류보다 더 악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공포에서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정신과 육체의 갈등에서 바로 우리 인간 본연의 숭엄한 이성과 행동을 본다. 또한 그의 표류처럼 그 항로의 끝을 모르는 여정처럼 우리의 인생항로의 끝을 알기도 힘들다. 그러나 “도전이란 늘 위기를 통해서 우리를 혹독하게 시험”하지 않는가? 그 시험을 끝내고 나면 바로 달콤한 가정이 있고, 평온한 침대와 사랑스런 가족이 있음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 되지 않는가? 그의‘숱한 약점과 절망’,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삶의 겸손을 배우게 된다. 캘러핸의 표류는 정말 값진 고귀한 경험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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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선 여행 - 과학의 역사를 따라 걷는 유쾌한 천문학 산책
쳇 레이모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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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 나아가 천체, 우주의 근원적 발생까지, 우리 인간의 위대한 정신적 소산에 대한 자연과학적 발자취를 기반으로 한 철학적인 사색의 여정이다. 오늘의 인류에게 자오선이 갖는 의미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지구시간, 아니 우주시간의 기준선이다.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북극과 남극을 연결하는 수직의 선인 본초자오선을 경계로 15도 마다 1시간씩의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 자오선이 오늘 왜 영국의 그리니치를 지나는 것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해관계국의 갈등과 확정에 이르는 역사적 일화를 소개하며, 인류의 합일점으로서의 그 고귀하고 숭고한 가치를 사유한다. 이렇듯 인류 정신의 합의가 가능하듯이 오늘의 종교간 갈등, 인종간의 갈등도 인간의 위대한 행로에서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연결 짓기도 한다.

자오선을 여행하기로 한 저자의 위와 같은 인류정신의 숭엄함 위에 놓인 과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위한 노력들의 자취를 시(詩)가 흐르듯 저작의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철저한 기독교 집안의 종교적 환경과 가치에 둘러싸여 성장한 저자가 “신이 우주를 만들어낸 단 한 가지 이유는 죄와 구원의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로 쓰기 위해서일 뿐이었다.”고 인간 중심적인 종교에 헛웃음을 날리고, 서구중심의 역사적 추진력에 대한 허위에 대해 각성을 하기에는 진실을 쫒는 과학적 탐구의 산물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자아중심적인 세계에서 직접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공간으로, 우리가 결코 경험한 적 없는 과거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미래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여행을 시작” 하는 인간의 과학적 창의성에는 절로 숙연해진다. 이 저술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에서 시작하여 케플러, 뉴턴에 이르는 지구와 우주의 탐구에서 퀴비에, 제임스 허턴의 동일과정설과 같은 지구역사의 가설에 이른 탁월한 인간들에 대한 경외를 보여준다.

“허턴은 바위의 흔적을 설명하는 데 신의 간섭 같은 것은 필요 없으며, 오로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자연의 힘을 주시해야 한다.”고 지질학 시간이 인간의 시간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토록 거대한 시간의 심연을 바라보려니 현기증이 날 만큼 마음까지도 넓어지는 듯 했다.”고 지질학적 시간의 탄생에 열정적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편 헉슬리의 노동자들을 위한 연설문을 인용하면서 과학적 가르침은 “도덕심이 향상되고 자유, 평등, 박애 정신과 새로운 천상세계, 새로운 지상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이 널리 퍼지기 바랐다.”고 우리가 과학에서 찾는 믿음에 대한 지식을 주장한다. 많은 과학적 발견이 당시대에는 진실이라 여겨졌지만 오늘에서는 그 과학적 진실이 오류임이 밝혀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과학이 밝혀내는 것은 본원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의미”라고 하며, “자연 자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도록 이끄는 완전히 객관적이고 보장된 방법, 즉 절대 오류가 없는 불변의 진리를 낳는 “과학적 방법”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우리가 과학에서 찾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다른 대안보다 믿음직한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저술에 매료되는 것은 이와 같은 과학에 대한 철학적 사색뿐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분명 거대한 인간 역사 드라마의 일부로서 우연이든 고의이든 같은 종 내의 대량 살상이 이루어졌다는 충격적인 증거일 뿐 만 아니라 ‘호모사피엔스’ 때문에 생물의 다양성에 발생한 가장 중대한 손실이다.”라는 인류기원에 대한 탐험과,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인간 본성에 대한 연민으로서 “딸의 죽음은 자연에 도덕율 따위는 없으며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그의 주장에 통렬한 의미를 선사했다.”와 같이 흥미로운 공감을 조성하는 문체에 있기도 하다.

“과거나 미래의 누구보다도 심오하게 우주의 본성을 들여다 보았는지 모르지만”하고 뉴턴의 우주에 대한 겸허의 소박한 한 구절이 절로 오만한 나의 이성을 잠재운다. “거대한 진실의 바다는 고스란히 미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 있는데 나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이따금씩 좀 더 매끄러운 자갈이나 조개보다 모양이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듯하다.”

자오선을 따라 영국의 남부 피치헤이븐에서 시작하여 울스소프, 배로올험버에 이르는 인류의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따라 거니는 사색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지를 인정하고, 진정한 믿음의 버팀목 없이 단지 두발로 서서 존재의 신비를 맞딱뜨리기 위한 용기를 보게 된다. 저술의 말미에 자오선이 갖는 인류의 의미로 “저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려는 뿌리 깊은 경향을 뒤엎은 과학적 사고의 승리이며, 아직도 격렬하게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종교와 정치, 인종의 차이가 언젠가는 무의미한 것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희망의 징조다.”라고 하는 저자의 인류화합과 과학적 가치에 대한 기대에 그저 감정을 편승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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