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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나의 항해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다. 내 마음속의 가장 극악한 부분을 찾아 진짜 지옥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면 지금이 정확히 그 장면이라 할 것이다.”거대한 파도와 누더기가 된 구명보트에 실려 오직 죽음만이 엄습하는 검푸른 대양의 한가운데 절망에 빠진 나라면 내 육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고 말지 않았을까? 그 고통과 실의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을까?
육신이 흐물흐물 완전히 곤죽이 돼 이성의 명령을 잘 이행하려 들지 않고, 그저 휴식만을 원하고 고통에서 구제받을 길만 찾으려 할 때, 그리고 영원히 구원의 손길에 닿을 수 없는 끝나지 않을 극악한 환경의 연속이라면, 우린 그 때에도 살아낼 수 있다고 자아를 재촉할 수 있을까?
대서양의 한가운데 저자‘스티븐 캘러핸’의 6.4M 소형 순양함‘솔로’호가 침몰하고, 구명보트에 다급하게 생존을 의지하기위해 몸을 옮길 때, 그의 뇌리에 수없이 교차하는 당혹스러움과 절망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 살기위한 본능적인 구상들이 나의 뇌에서도 공감을 일으킨다. 이제 망망대해에 그야말로 漂流(표류)가 시작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76일간의 잔혹한 삶과 죽음의 시험의 여정에서 오늘에 이르는 나의 인생여정이 이처럼 표류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유가 아닐 것이다.
“어제는 내리쬐는 햇빛으로 600그램의 신선한 물을 만들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구름덕분에 살이 타 들어갈 것 같은 오후의 햇살은 피할 수 있었지만, 나의 생명수는 그 양이 줄어들 것이다. 삶은 모순투성이다.”이처럼 삶은 양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大海(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끈질기게 반응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캘러핸의 감정에 불쑥 불쑥 끼어들던 그‘정신적, 육체적 신경의 모든 방어막이 벗겨 나가고 완전히 맨 몸뚱아리가 노출되어버린 듯’한 절망만이 맴돌고 있을 때, “넌 죽어!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죽을 거야.”하고 정신과 육체의 방임으로 치달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의 “ 그래. 반드시 이 고비를 넘기고 말겠어. 다시 시작해. 문제를 가려내.”하는 이성의 승리를 견인하는 독백에서 절로 숙연해짐을 느낀다.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평온한 환경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나약해빠진 회피와 절망, 의기소침이 부끄러워진다.
76일간의 표류를 가능케 해준 그의 생명선인 구명보트‘러버더키3호’,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主食(주식)이 되어 준‘만새기’와의 생존을 둔 혈투는, “자연의 경이란 추한 공포에 둘러싸인 아름다움이라 할 만하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살아남기 위해 반응하는 강렬한 깨들음과 엄청난 열정의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각인된다.
스칠 듯 지나가는 대형선박들을 향해 쏘아 올리는 조명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지나쳐버리고, 아련히 그 모습이 사라짐을 바라보는 표류자의 심경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구명선 바닥이 찢겨 생존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극한적 좌절에서 취약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지만, “신체적 자아와 본능이 일종의 무대 감독으로서 모든 현실을 재배치하고 통제”하는 캘러핸의 ‘생존의 세계’에서 인간의 숭고한 정신적 승리를 보게 된다.
항로의 끝이 어디가 될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니면 영원히 그 끝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는 표류자로서 그의 역할 - 그저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구명보트에서 기다리기, 어패류를 잡아먹을 것, 잡은 물고기를 잘 손질해서 저장하고 배분해서 먹기, 증류기를 소중히 다루어 식수를 확보하기 -이지만, 그는 이렇듯 단순하기까지 해 보이는 역할에 미묘한 변화가 생길 때 마다 결정적인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심각한 파장이 들이친다. 나는 정말 죽고 말았을 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 머리로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다. 마음속 창조의 세계는 결코 물리적인 법칙의 제약을 받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적인 음식공급이 결핍된 조난의 혹독한 생존을 위한 시간 속에서 “내 몸에 양분을 공급하기위해 내 감정에게 살해를 강요한다. 나 자신에게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나의 팔과 다리에게 노역을 강요”하는 처절한 극기에서 다시금 작은 장애에도 엄살을 부리기만 하던 내 인생항로의 왜소한 굴절이 가소로워지기도 한다.
아홉 척의 선박이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고, 열두 마리의 상어가 그를 위협했다. 그리고 생존과 죽음의 아슬한 싸움의 76일째, 세 명의 검게 그을린 사람들, 그들의 배 ‘클레망스’가 그의 앞에 나타나고, 캘러핸, 그의 앙상하고 상처투성이의 몸에 번지는 환희가 바로 나의 감동이고 승리이고 기쁨이 되어 “삶이란 바로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을 깊게 이해케 된다.
우리네 삶이 캘러핸의 표류보다 더 악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공포에서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정신과 육체의 갈등에서 바로 우리 인간 본연의 숭엄한 이성과 행동을 본다. 또한 그의 표류처럼 그 항로의 끝을 모르는 여정처럼 우리의 인생항로의 끝을 알기도 힘들다. 그러나 “도전이란 늘 위기를 통해서 우리를 혹독하게 시험”하지 않는가? 그 시험을 끝내고 나면 바로 달콤한 가정이 있고, 평온한 침대와 사랑스런 가족이 있음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 되지 않는가? 그의‘숱한 약점과 절망’,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삶의 겸손을 배우게 된다. 캘러핸의 표류는 정말 값진 고귀한 경험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