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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세계화
쟝-피에르 바르니에 지음, 주형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세계화, 즉 파편화 되어있던 지역이 단일한 관계망이라는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6세기의 교역을 시작으로 19세기 산업화로 인한 운송수단의 극적인 발전을 배경으로 이해한‘월러스틴’의‘세계 체제’를 기본 개념으로 하고, ‘문화’는 “일정 사회 집단에 소속되어있다는 인식과 그의 동화를 위한 행동, 언어, 문화의 집합”으로서의 정체성과, 어린 시절부터 지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몸과 정신에 스며든 것으로서의 전통, 그리고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행동과 표상의 지침을 제공하는 방향 지시기능으로서 이해를 가진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지역화 되어있던 민족과 국가들 개별의 특수한 문화가 서구의 민족국가화로 인한 역사성에 기초하여 식민지의 건설과 제국화를 통한 계몽주의 보편성이라는 척도로 문화의 변질과 말살, 즉 전통적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의 제거라는 의도적인 문화파괴와 같은 근대세계체제로의 형성과정이라는 배경에서 힘의 상대적 약소국가나 민족이 우려하는 문화의 세계화가 내포하는 혐오감과 두려움의 진정한 실체를 논의한다.

운송수단과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달, 시장자유주의라는 현상은 물건과 행동양식의 교류를 세계화하는 것에 거의 어떠한 장벽도 없을 정도가 되게 하였으며, 이는 곧 막강한 자본의 힘에 의해 일방적인 전통문화의 침식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문화’는 문화 그자체가 아니라 ‘문화산업’, 다시 말해 문화를 생산하고 상품화하고 전파하는 산업 활동으로서 문화는 아니라는 것이며, 실제 파편화되어있고, 민족화 되어있으며, 전통적이고 특수한 지역 고유의 문화는 변질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특히 미국화에 대한 위험은 그렇다면 상상속의 두려움에 불과한 것인가?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지만 우리들의 삶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수많은 본질적인 문화를 간과할 수밖에 없는 돈 되는 스타에 의존하는 쇼 비즈니스가 지니는 미디어의 한계를 빗대어 문화상품을 만드는 것과 정체성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줄 문화의 건설과는 다른 문제라는 인식을 보인다. 즉 미디어나 문화산업은 이윤추구와 시장의 확대라는 탐욕스런 자본의 논리일 뿐이지, 실제 문화자체를 이야기하지 못하며, 인류 공동의 나침반과 기준의 제공과 같은 진정하고 보편적인 문화 세우기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화는 문화의 상품화를 통해 세계화의 파도 속에 불평등과 정치기구의 낙오와 같은 강자 중심의 일방적인 폭주의 징후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UNESCO의 문화유산에 대한 세계정책의 리더로서의 역할이 이러한 문화의 물질화로의 촉진으로 WTO(세계무역기구)에 빼앗길 정도이니 자국의 특수문화의 침식에 대한 방어와 긴장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영화산업에 대한‘문화적 예외’의 선언이나, 문화의 국제기구(제2의 WTO)를 통한 힘의 균형에 대한 제안은 나름 의미있는 제안으로 이해된다.

한편 저자는 문화란 헌팅턴식의 문명권과 같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며, 이것이 문화 변화의 동인(動因)으로 권력관계, 즉 집단과 사회적 범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문화적 식별을 동원하고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쟝보드리야르, 쟈크아탈리의 거시적 문화담론과 근대대량생산체제가 지닌 진정한 문화의 상실을 비판했던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프루트 학파를 비관주의라 비난하면서 미시적, 지역적 관점만이 문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주체의 창조, 상상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고유한 지역 특수성과 전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멸종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계’로서 항상 상황에 맞게 재가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존재라고 강변한다. 즉 시장과 자본, 산업의 논리로는 식별 및 방향지시기능을 지닌 문화를 결코 전복 시킬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과장되고 편향된 문화침식에 대한 논리의 실체를 이해할 것을 강조한다. 
 

경제주의적 관점을 폐기하고 진정한 문화의 세계화를 생각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이러한 문화의 지역적 특수성과 고유성의 항구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은 다양한 문화적 담론과 흥미로운 세계화의 논의들을 적시하고 있다. 문화산업의 기원이나 문화의 세계적 정치경제학, 문화정책과 특수문화의 침식에 대한 담론은 문화를 구상하고 문화의 주체와 보편성에 대한 귀중한 배경지식을 제공하여준다. 또한 담론, 소리, 영상, 예술, 그리고 사회구성원인 인간에 의해 획득된 모든 다른 능력과 습관을 발신하고 상품화하는 문화산업 활동에 대한 진중한 미래 방향에 대한 지침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과연 문화의 세계화는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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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비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대한 고고학적 소재를 지닌 이 작품은 인간의 호기심에 있어서 단연 으뜸인 자신을 알고자하는 본능 탓인지 책장을 여는 순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인류 최고(最古)의 사원(temple)으로 추정되는 터키의 동남부 시리아 접경지역인 샤늘르우르파 인근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의 거석(巨石)발굴이란 고고학적 사실에 기초한 팩션(Faction)이라는 측면에서 잠자던 인문학적 지식욕까지 발동하게 한다.

중세에서부터 18~19세기의 비밀종교단체, ‘윌리엄 워즈워스’와 ‘제임스 조이스’등 영국의 문호들이 인용되고, 인류학, 고고학, 진화심리학의 논리적 접근이 이루어지며, 『성경』속 이야기와 외경(外經)인 「에녹서」의 구절들, 「창세기」에 숨겨진 비밀들까지 작품 속 고고학적 진실에 이르는데 동원되는 지식들은 아마도‘지적 탐험의 극치’라 하여야 할 정도이다.
게다가 런던경시청의 형사, 더 타임지의 해외특파원, 미모의 고고학자 등 등장인물들의 매력적 구성은 물론 잔악한 인신공희(人身供犧)를 모방한 연쇄살인, 종교와 인종적 갈등이 첨예한 분쟁지역인 쿠르디스탄 지역에서의 불안과 위협까지 가세하여‘미스터리 팩션’의 진수를 느끼게 해준다.

작품은 영국 런던에서의 살인미수 사건과 터키의 거석발굴지인 괴베클리테페가 이원화 되어 궁극에는 계속되는 영국에서의 연쇄살인사건의 동기와 1만 년 전 인신공희가 시작된 곳, 괴베클리테페가 지닌 의미와 결합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살인범이 행하는 희생제의(祭儀)로서의 성격을 갖는 인신공희의 수법은 잔혹함을 넘어서는 사악함과 참담함을 보여준다. 바이킹족, 아즈텍족 등의 잔인한 살해방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그 사실감을 높이고, 살인범의 가계(家系)를 따라 18.9세기 영국의 귀족과 지식인으로 구성되었던‘헬파이어 클럽’의 실체를 고증하여 그 역사적 진실성으로 다가가게 하여 작품의 신비성을 극단적으로 제고시킨다.

인신공희를 즐기는 사악한 연쇄 살인범, 웨일리가문의 악마,‘제이미 클론커리’를 좇아 기독
교 정통 교리를 비웃고 반대하던 역사적 근거와 배경에 얽힌 이야기는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 축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인류 기원의 비밀을 지니고 있는 쿠르디스탄 지역의 이교도집단인‘예지드파’를 중심으로 괴베클리테페의 발굴지에 숨겨진 비밀, 바로 그 비밀을 둘러싼 각축은 살인범과 더 타임지의 특파원인‘로버트 로브 러트렐’기자와의 대결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 긴장과 궁금증은 거의 폭발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정교한 스릴과 미스터리한 구조의 궁극이 도달하는 곳은 소설의 표제처럼 최초의 인류 기원에 대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인간, 그러니까 인류의 첫 조상 인류들의 상호교배에 대한 설화적 기억을 풀어낸다. 작품 곳곳에 쌓인 수수께끼들의 파편을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엮어나가는 최고의 지적흥분을 불러오는 재미, 인류의 수렵채집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급작스런 전환의 사유, 인간 타락의 정체에 대한 근원, ‘아브라함’그리고 ‘하란’, 일신론 종교 모두가 바로 괴베클리테페의 끔찍했던 사건으로 모이는 것으로부터 일종의 스트레스 신드롬으로서의 종교출현까지, 어쩌면 인간 본성에 깃든 병적인 폭력성에 대한 탁월한 지적 기획이라고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학적 성향을 가장 폭력적 방식으로 계승한 오늘의 인류, 그래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모든 망상, 인간 영혼이 지린 지독한 똥오줌 냄새. 그게 바로 종교이고 성배라고 주장하는 악마, ‘클론커리’의 인간 내면에 대한 폭로가 이야기의 본질이고 작가 정말의 의도인지도. 고고학을 비롯한 다채로운 지적도구들, 액션 어드벤처, 미스터리 그리고 서스펜스, 아무튼 이 종합선물세트 같은 소설을 무어라 명명해야 할지...진정 호감을 가지고 읽어 볼 저술이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류의 기원과 종교의 발원이 모두 까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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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아득하고 비현실적일 것만 같은, 배고픔과 향수(鄕愁), 연민과 혐오의 일상을 들려주는‘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회상은 견고하게 세운 내 어쭙잖은 이성과 인간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하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아니 항시 죽음이 드리워진 러시아 강제수용소의 삶이 아닌 삶의 사연들보다 감히 인간의 생각을 이렇게까지 묘사해 내는 작가의 언어와 문장에 더욱 경악하였다고 하는 것이 진솔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굶주림의 실체, 고향과 가족에 돌아가야 한다는 귀향과 그리움의 본질, 그리고 그 실체와 본질마저도 갉아 먹혀 마음이 소실된 사물화 되다시피 한 사람의 처절한 내면을 보게 된다. 인종주의, 민족주의가 야기한 인간의 또 다른 폭력의 역사, 그러나 역사에는 기재되지 않은 역사 밖에서 자행되는 다수자의 야만성과 무관심, 기회주의적인 소수자 속의 다수자에 대한 비굴한 본성의 적나라한 드러냄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인 독일계 17살 소년,‘레오’는 가족의 대표로서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대수롭지 않은 할머니의 말을 가지고 러시아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이후 생존해서 귀향할 때 까지 5년에 걸친 배고픔과 향수와 죽음이 넘실대는 혹독한 수용소의 일상이 철저할 정도의 감정이 배제된 담담한 사실적 묘사로 그 구체성과 내면의 작은 흐름까지 포착하여 두려움과 공포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고 확연하게 들려준다.
몸이 일을 버텨내도록 하기위해 오직 삽질을 위해 삽질을 하는 처절하고 강도 높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단 한번 배급되는 800그램의 빵 한 조각, 그리고 양배추 건더기조차 없는 멀건 수프에 의존해야 하는 생존의 고통은 “모든 대상이 내 배고픔의 외연이 되었다.”고하는 정도에 이른다.

자신의 안에 사는‘배고픈 천사’에 조종당하고 농락당하는 나, 바람조차 허기를 먹여 키워, 추상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싣고 오는 순간, 항상, 늘 거기에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오는 배고픔에 휘둘리는 순간 배고픈 천사는 “숨결을 그네 뛰게 하고,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를 만든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삽질을 하고, “삽질이 조금도 두렵지 않”으며, 두려운 건 오히려 나 자신이 되고, 삽질을 하는 도중에 딴 생각을 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된다.

격리된 시간과 공간, 그곳이 괴롭히는 것은 이렇듯 죽음이 엄습하는 배고픔 외에도 “원치 않아도 절로 떠오르는 생각”,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없어지고 구체적인 고향과 전혀 상관이 없는‘향수(鄕愁)’, 연기를 내며 타다가 결국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끝내 생존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두려움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2 년 만에 고향으로부터 날아든 어머니의 편지는 하얀 박음질을 한 엽서에 동생의 출생을 알리는 단 한 줄의 내용뿐이다. 문득‘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떠오른다.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보라는 그녀의 말을 우린 잊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미처 우리들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는 주체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에 이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싶지만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으므로 대신 현혹이라는 스위치를 누르고”있는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는“내가 그 한 줄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안다면.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하는 레오의 인식에 이르러 뭉클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범인류적인 문화행사라도 되는 듯 위생적인” 빵의 배급의식을 치루는 수용소의 특권자일 수 있는‘펜야’앞에서, 그녀의 공정성을 북둗우기 위해 웃어 보이느라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는 레오의 모습은 배고픔과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으로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소설의 표현들, 어휘와 문장들이 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강렬하고 시니컬하기도 하며, 담백한 느낌은 심장 깊숙이 파고드는 정말 새로운 감동이라 하여 할 것 같다. 소외된 역사와 불완전한 인간본성에 대한 새로운 돌발점을 지독하리만큼 세밀하게 폭로하는 이 소설의 뚜렷한 주제의식과 서사구조의 압도적인 탁월함을 감히 무어라 하여야 할지 나의 서술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배고픈 천사와 싸우고, 중노동과 텅 빈 그리움을 부여잡고, 죽음을 격려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세상과 격리된 수용소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레오가“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밀리듯 보내진다는 공포”로 울부짖는 것을 우린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 달갑지 않은 안도감을 보이는 가족에게서 우리들의 또 다른 이기심, 자기기만에 대한 연민이라는 우울한 자화상들을 보는 것만 같은 초라함을 확인하게 된다.

“세월에 약탈당하고, 한때 배고픔에 약탈당해 속은 황폐해지고 얼굴에는 눈(目)의 허기가 번득이는” 나는 여전히 수용소에 있고,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허름하고 집요하고 은밀하고 혐오스럽고 잘 잊히고, 쉽게 용서하지 않으며, 닳아도 새것”인 그곳, 바로 그의 보물은 단지 구조바꿈만 하여 그를 타고 올라가 강박이라는 마법을 거는 것이다. 17살의 어린 소년이 22살의 청년이 되어 돌아온 고향은 그에게는 또 다른 고통의 장소가 되고 만다. 전쟁의 뒷길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들, 그리고 바로 그 약자의 사회에서 다시금 반복되는 폭력, 너무도 아픈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하고 우리사회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다시금 깨우친다. 작가의 고백처럼 이 작품을 시의 옷을 입힌 비극이고 이 시대의 처참한 문학적 증언이자 명예라 함에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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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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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담형식으로 써진 이 책은 빨리, 많이 읽기위한 속독이나, 다독의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책 읽기를 즐겨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굳이‘책 읽는 방법’이란 것이 그리 요구되는 기능도 아니고, 그 즐겨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하고 편리한 습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 아니겠는가.

책의 성격이나 유형에 따라 책 읽는 자세도 달리한다는 대담자인 책 읽기의 전문가인‘마쓰오카 세이고’처럼 자신만의 습관적 규칙이 있듯이, 저마다의 편리한 자세가 있다. 책 읽는 방법에 이것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나 도달해야하는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나는 소파에 눕거나 의자에 등을 깊이 밀어 넣고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해야 비로소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책을 읽다가 관심 있는 대목에 밑줄을 그을 수 있는 분홍색 형광펜과 책갈피를 항상 대동해야 한다. 이러한 환경적 조건을 만드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굳어진 습관이다.

그러나 이 전문가는 무엇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가 보다. 책을 편집하고, 책을 집필하고, 책 읽는 전문화된 방법을 연구하는 편집공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책 읽는 행위 자체에 이미 목적을 수반한 사람이기에 우리 일반적인 독자들의 책 읽기와는 근원적 차이를 지니고 있는듯하다.
일례로 그는 읽은 책에 대한 연대기 노트를 만들고, 또한 인용노트를 만든다. 아마 이러한 자신의 읽기에 대한 역사를 만드는 행위가 독서의 질을 제고할 수는 있겠지만 글쓰기를 전제하지 않는 대다수의 우리들에게는 사실 낯 선 주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가 말하는 독서법은 그만의 방법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이 저작에서 수용하고자 하는 내용은 독서가 지니는 인문학적 성찰이라 하고 싶다. 예로서 “독서는 덮여있던 것을 열어나가는 행위”라 정의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주체로서의 독자의 겸양을 말하거나, “미량의 비자기(非自己)를 주입해서 자기라고 하는 면역시스템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자기 반영으로서의 독서철학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편집공학으로 본 독서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어떠한 형태의‘커뮤니케이션 모델’이 교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편집모델의 상호작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관심을 추가한다면 이 독서의 대가는 어떻게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독서방법론들을 축적하였는지에 대한 역할 모델을 취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수많은 책을 읽다보면“빛을 발하는 한 권의 책”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면서 그것을 ‘열쇠 책’ 또는 ‘키 북’이라 명명하여 상호텍스트성이 독서력을 확장시키는데 얼마나 유용한지 알려주며, 독서를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독서리듬’에 대한 감각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저작은 독서에 대한 의미론적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전문화된 독서기술의 면모들을 엿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따라서 진정 독서력의 확장이나 방법론적 전환을 모색하는 독서가들에게는 훌륭한 참고서가 될 터이지만, 여기서 무언가 획기적인 독서기법의 획득과 같은 얕은 기능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그저 책을 통해 타자와 교류하고, 그곳에서 내 무지의 세계를 줄여나가며, 마음을 정돈하고 위무하는 즐거움의 세계로 책을 읽는다. 삶의 다양한 가치 그 자체로서의 책이 이미 풍요로움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차례독서법’, ‘표시독서법’, ‘매핑독서법’, 그리고 ‘대각선 편집독서’등 다독을 위한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방법론들이 체험적인 설명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이 저술이 분명, 독서에 대한 생생한 인문학적 증언이 되어, 우리들의 독서를 보다 질적인 성장으로 나가는 길을 지원하고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책을 진정 재미있고 즐기는, 나아가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도구로서 진일보한 방법론을 배우고자 하는 독서인들에게는 멋진 모델이고 지식이 되어 줄 고수의 비법 전수가 될 터이다. ‘책에 납치당하는 스릴’과  책의 마력을 거듭 확인하는 유익한 계기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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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불어넣기 아시아 문학선 8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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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은‘오키나와’라는 일본속의 이방지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떨칠 수 없는 호감, 아니 동질의 유대감을 가졌다고 하여야 할 것 같다. 일본의 한 지역으로 표기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나 일본인들과는 유리된 소수자들의 지울 수 없는 사연들이‘자이니치’라고 불리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우리의 재일동포들의 그것과 겹쳐 애틋하고 아련한 통증으로 살아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6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 어디에도 격렬한 구호나 감정의 과잉을 찾을 수 없지만, 본토라는 주류의 단선적 역사로부터 퇴출되거나, 배제되고 지워진 오키나와인들의 기억과 정체성, 고유의 문화적 리듬을 복원하려는 작가적 노력이 전체를 장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그네들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진 것들, 기억의 망각에 숨겨진 것들, 역사적 단일성이라는 강제에 의해 포함되지 못했던 기억들을 아주 나지막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작품들은 주체성을 장악한 자가 통합한 하나의 시간적 좌표를 벗어나고 해체하여 이질적이라고 버려진 그네들 고유의 풍속과 삶의 기억들을 잔잔하게 풀어낸다.

수록된 작품들에서 그네들 고유의 전통적 풍속으로 혼을 불어넣거나 영혼과 대화를 하는 신녀의 등장, 치성을 드리는 장면 등 근대화로 인해 퇴출된 비근대적 주술신앙의 요소를 도처에서 발견하게 되는데,「혼 불어넣기」,「이승의 상처를 이끌고」, 「내해」라는 세 편의 작품은 이러한 자신들만의 민속적 고유문화를 복원함으로써 오키나와인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하여 전통적 유산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직접 닿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작품 중 특별히 애착이가는 작품으로 표제인「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을 들 수 있는데, 천진무구한 소년의 시선으로 비추어지는 비릿한 회상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2차 대전 중 에는 일본인들의 폭력과 살상에 떨고, 전쟁 후 27년간의 미군 통치에서 일본에 반환되던 1972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유치하고 천박해 보이며”, “얼굴에 큰 점이 있고 깐깐해 보이는 노인네(이토 히로부미)가” 찍혀있는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일본의 화폐로 바뀌는 것으로부터 “오키나와 반환이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라는 소년의 인식처럼 이 소설은 웅변조의 거대 담론식 접근이 아니라 잔잔한 서정적 화폭에 담아 배제된 역사를 회생시키고 있다.

강어귀 외딴집에서 과일나무를 가꾸며 낚시로 살아가는 노인의 뜰에 자란 과일을 훔치고 그 노인을 골려먹는 재미로‘습격’을 반복하던 악동 소년과 노인의 교감, 그리고 노인의 옛 이야기에 흠뻑 빠져 피어오르는 아련한 그리움을 담은 기억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옹기단지에 담긴 술의 사연으로 이어지며 코끝이 징하고 울려댄다. 이처럼 작품들은 지난날들의 기억을 끌어내는 후일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흐리고 애틋한 감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듯하다.

오키나와를 방문한 일본 황태자를 향한 화염병 투척사건을 작은 일화처럼 흘려버리고, 일본군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과 아들을 둔 여인네들의 슬픔조차도 일상의 그리움으로 처리되지만, 가주마루(정령이 깃든 나무)아래서 죽은 영혼들과 대화하는 또 다른 영혼의 사랑과 외로움, 시린 기억에서 본토와 차별되어 자신의 것을 상실하고 이질적인 것을 수용할 밖에 없었던 오키나와인의 소외되고 배타된 역사를 소생시킨다.

미군의 스파이라고 일본군에게 끌려가 처형당했던 오키나와인, 미군으로부터는 일본인이라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 그리곤 반환 후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신들, 미군기지에 스며들어 삶을 꾸려가는 기지촌의 여자와 아이들처럼 일본 속에서 버려진 낯 선 얼굴을 한 오키나와가 각각의 작품들을 채우고 있다.

달콤하고 아득한 감각과 “똑똑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가 가슴의 고동”소리를 닮은 단편,「붉은 야자나무 잎사귀」의 불안감과 죄의식, 자기혐오를 겪는 소년의 모습에서, ‘다우치’라 불리는 투계 ‘아카’와 소년을 통해 소수자의 분노를 표현한 「투계(鬪鷄)」는 통합되고 단일화된 역사에서 자기의 것, 강요된 단선과 엄연히 차이가 있는 자신들의 것을 생성하고, 주류에 대항함으로써만 지워진 자신들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음을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단편,「이승의 상처를 이끌고」에 등장하는 가주마루 아래서 붙잡고 놔주지 않는 영혼들이 들려주었던 얘기를 들려주면 진지한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곤 했던 남자가 있는데, 마치 이 소설집 전체가 들려주려는 그네들의 망각에 숨겨진 것들을 모두 들어주는 성스러운 존재처럼 이해된다. 역사화를 둘러싼 힘과의 대립에서 소외되고 지워진 것들을 여느 참여문학의 작품처럼 급진적인 양식에 담아 전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역사 밖에 사건들을 안으로 끌어들여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눈을 비로소 開眼시켜주는 역할을 담백하고 은은한 문장으로 멋지게 해내고 있다. 일본의 주류문학에 가려 보지 못했던 소수자의 문학,‘오키나와(沖繩)’를 이야기하는 메도루마 에게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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