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월색 - 안국선.이해조.최찬식 소설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0
안국선.이해조.최찬식 지음, 권영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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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의 영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고전은 읽어도‘신소설(新小說)’이라 불리는 당대의 우리문학 작품은 왠지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정도로 치부하고 대중의 독서물(讀書物)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선입견을 가져왔다.
고작 신소설 작가 몇 사람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는 대강의 이야기흐름만을 가진 천박하고 막연한 이해로 식자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이들 신소설이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고, 고고한 문학적 향취를 지녔다거나 세계의 고전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세풍을 견뎌낼 만한 숭고한 인류의 사상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한국의 문학사에 있어 본격적인 근대문학을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신문명과 근대사상을 보급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던 작품들임을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신소설이란 1906년부터 약 10년간、구한말 개화기의 啓蒙文学이라 할 수 있다. 조선반도를 에워워싼 세계열강들의 외압에 대결할 만한 정신적, 물질적 기반이 모두 취약했던 당시로서는 근대화된 서구와 일본 등 외세에 무력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개화된 일부 지식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깨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게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는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이라는 식민지사회로의 이전이 있기에 자주독립, 신교육, 과학지식, 미신타파, 남녀평등과 여권확장, 민주주의와 같은 사상의 근대화는 절실한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발표된 신소설 모두가 구한말 조선인의 순수한 정신적 각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작품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인 대동아공영의 찬양, 고무와 같은 친일(親日)적인 것들도 있지만 역시 야만에서 문명으로 개화한다는 근대성의 추구라는 의미만은 공통적인 것이었다 하겠다.

이 소설집은 1908년에 발표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이해조의 『구마검』. 1910년에 발표된 이해조의『자유종』, 그리고 1912년 발표된 최찬식의『추월색』 네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1910년의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계몽의 주제가 확연하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발표된『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은 그야말로 결딴난 당시 사회의 패악과 무력감을 냉혹하게 비난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그 부도덕함을 준엄하게 논박하고 있는 것은 수록된 여타 작품들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 모두(冒頭)에“지금 세상은 인문이 결딴나서 도덕도 없어지고, 의리도 없어지고, 염치도 없어지고, 절개도 없어져서 사람마다 더럽고 흐린 풍랑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라서 세상이 다 악한 고로...”하고 시작한다. 결국 인간들은 금수나 초목보다 못한 것들이어서 바로 금수(禽獸)와 초목(草木)이 인간의‘무도패덕(無道悖德)’함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부여하고, 이어 동물, 곤충들이 연이어 연단에 서서 고사성어를 빗대어 인간의 패덕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날더러 도적놈 잡으라하면 벼슬하는 관인은 거반 다 감옥서 감이요.”하는 구절에 이르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100년 전의 그 때를 판박이 한 것만 같은 마치 시간이 과거로 회귀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될 정도가 된다.

그러나 같은 해 발표된『구마검』에서는 일체의 정치적 자존을 외치는 목소리가 없다. 다만, 미신타파라는 하나의 주제로 허무맹랑한 무당의 사욕이 한 사대부가를 패망에 이르게 할 정도에 이르는 과정을 미신에 모든 행위를 기탁하는 무지한 아낙네를 중심으로 무참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실 극단적인 무당(巫堂)맹신의 서사는 지나치게 과장되어서 당시에 그 계몽적 효과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통사회와의 단절을 획책하기 위한 근대화 전략에 지적고뇌 없이 백성들을 계도하려했던 당대 지식인의 한계를 보는 안타까움이 드는 작품이라 하겠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자유종』은 합방을 불과 1개월 남짓 앞둔 시기에 발표된 작품인데,『구마검』과는 달리 부권(婦權)을 확보하자는 양성평등과 나아가 국력의 신장을 이루기위해서 여권(女權)은 절대적 필수라고 주장하며, 국세(國勢)가 빈약한 것은 학문이 없는 연고이며,  자국 정신은 간데없고 “중국 혼만 길러서 언필칭 『좌전』이라 『강목』이라 하여 남의 나라 기 천년 흥망성쇠만 노래하고 내나라 빈부강약은 꿈도 아니 꾸다가 오늘 이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체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역시 오늘의 한국사회가 미국중심의 일방적인 문화와 교육수용으로 사상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힘이 되어“주체는 없고 객체만 숭상”하는 모양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는“묵은 허물을 일제히 벗어버립시다.”고 주장하며, “조금 유식하다는 사람들과 늙은이들은 벗기가 극히 어려워 ~(中略)~ 반쯤 벗다가 기진하거나, 아니 벗으려고 앙탈하다가 죽는 사람도 왕왕있습니다...”하고 보수적 집단들의 변화에 저항하는 모습을 빗대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아무튼 문학적 성취라 이를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나 당대의 사회상을 오늘과 견주어 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사실이다.

끝으로 합방이 이루어진 1912년 발표된 『추월색(秋月色)』은 그야말로 이전의 작품들과 완연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 역시 일본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 신바시(新橋),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경성(京城)과 만주 봉천까지를 아우른다. 정임과 창영이라는 어린 소녀와 소년의 성장과정에서 겪는 천신만고(千辛萬苦)끝의 헤피엔딩이라는 다소 의아한 사건들의 진행 속에서 신문명의 당위를 강조하는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 혼인이 약조된 창영의 집안이 민란으로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자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를 과감히 떠나 일본의 유학길로 도피하는 정임이라는 여성을 그려낸다.

구습(舊習)에 대항하여 신문명의 효율성과 합리성이란 장점, 그리고 물질적 풍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우연성에 의지하는 등 소설적 엉성함이 다소 읽기를 방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봉천으로의 신혼 여행길에선 젊은 부부는 부설된 철도를 놓고“동양행복의 기초”, “황색인종도 차차 진흥되는 조짐”이라는 등의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를 향한 야욕을 비판 없이 수용, 편승하는 것과 같은 무지함이 있다. 다만, 수록된 네 작품 중에는 그나마 가장 근대문학에 가까운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비교적 세련된 작품이어서 춘원 이광수의『무정(無情)』과 유사한 느낌을 갖게도 된다.

한편 이 소설집은 잊혀진 우리말 표현들이나 고사성어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독서가 되기도 한다. 100년 전의 그 때와 오늘을 비교해보는 간접적인 사회학적 체험과 같은 뜻하지 않은 수확도 안겨 주며, 작품의 해설은 물론, 각 작품마다의 어휘들에 대한 사전이 수록되어 있어 우리 문학학습에 유용한 도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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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빅토르 로다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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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열광적인 응원과 지원이 계속되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독립된 주체로서 분리된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별의별 시시콜콜한 일상의 사건들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그 어느 시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꽤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통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는가하면, 너무 유치했던 것에 왜 그리 심각했었는지 웃음이 나오는 대목도 있다. 또한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추억도 있고, 지워버렸으면 싶은 죄책감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모든 것들과 그 과정이 오늘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르면 인간의 성장이란 것이 슬프고도 경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마틸다’란 열네 살 소녀의 변화무쌍한 감성의 기록인 이 작품에서 맹랑하고, 당혹스러운 시선과 행동은 물론 죄책감과 도덕적 회의 등 그 내적 혼란과 세상에 대한 적의, 그리고 어느 샌가 넓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타협하는 인간을 발견케 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란 바로 자연과 우주의 리듬을 절로 익혀가고 외롭지만 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이해케 한다.

마틸다에게 열여섯 살 언니‘헬렌’의 죽음은 1년이 되도록 지울 수 없는 상실감과 깊은 상처로 작동하기만 한다. 엄마와 유대가 깊었던 언니의 죽음은 마틸다와 엄마의 관계를 더욱 소원하게 만들기만 하고,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다스리기 어려운 교묘한 감정이 되어 마음을 괴롭힌다. 엄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실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엄마를 구해내기 위해 자극적인 행동을 일삼지만 이는 관계를 회복시키기는커녕 더욱 손상된 감정을 키우기만 한다.
누군가에 의해 철로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밀려 사망했다는 믿음은 커 보이기만 했던 우상인 언니의 죽음 이면에 놓인 진실을 찾으려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언니의 이메일 휴면계정에 들어가 유령의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한다.

실의에 잠겨 무력해진 가족의 사랑을 복원하기 위해, 아니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키위해 언니의 마지막 자취를 따라가는 마틸다의 행로는 왠지 모를 아픔으로 숙연해지게 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가족의 연대, 사랑의 복원을 위한 걸음뿐 아니라, 유일하다시피한 친구‘애나’에 대한 우정이 미묘한 질투와 인정이라는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겪으면서 보다 성숙한 관계로 변화하는 모습이나, 동갑내기 남자친구‘케빈’에 대한 이성적 호기심으로의 진전 또한 의젓하게 수용하는 모습에서 자기애의 훌륭한 정착을 인지하는‘성장’이란 독특한 여정에 신뢰를 갖게 되기도 한다.

인간이 성장해 간다는 것, “정말이지 서두를게 뭐람?”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서히 다가오는 것일 게다. 죽은 언니의 노란색 드레스, 언니의 1주기에 입고서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다치게 하였던, 극복하지 못한 정신적 고통은 누군가가 덜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사랑으로부터 잊혀 질수밖에 없는 언니에 대한 죄책감의 진실을 확인하기위해 언니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행위는 이 작품에서 그 상징적 위치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어린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게 된다. 마주한 언니의 남자친구로부터 듣게 되는 그렇게 완벽하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만 비추어지던 언니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게 됨으로써, 바로 사람들마다 지닌 그 고유한 비밀의 실체, 즉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는 두 개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얀 눈이 내리는 밤, 케빈과 가진 자기만의 비밀이 생긴 날, 언니의 노란색 드레스를 묻는 마틸다의 행위는 눈시울을 적실 정도의 감동이 되어 몰려온다. 언니만의 비밀, 엄마만의 비밀, 아빠의 내면은 그들만의 것. 그렇게 삶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비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성장을 위해 거치는 무수한 감정들과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이해를 쌓아가는 여정이 발칙하게, 때론 애달프고, 안타깝게 그려지지만 그러나 당당하게 마주하고 이겨나가는 열네 살 소녀의 깨달음에 어느새 격려와 갈채를 보내게 된다. 모든 첫 경험은 실로 두려운 것일 게다. 아스라한 절망과 슬픔을 지나 비로소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본 느낌이다. 또 하나의 감동적이고 숭고한 성장소설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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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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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는 화가 자신을 투영한다. 한 걸음 더 내딛어, 모든 초상화는 자화상이다! 라고까지 하면 억측이라 할까? 시각적 형상이 아니라 내면세계가 이전되어 전달되는 그 감상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조금 비틀어서 다시 정의한다면 초상화는 이미 왜곡된 이미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대략 1890년대쯤으로 추정되는 뉴욕 상류사회의 파티장면에서 시작되는데, 연회의 안주인(主人)‘리드 부인’의 초상화와 실제인물의 불일치에 대한 발칙한 서술과 이를 그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피암보’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자기회의로 작품의 전개방향을 일찌감치 제시한다.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초상화라는 제한된 영역에 묶여 자신만의 예술적 창의성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내적 갈등을 겪던‘피암보’앞에 엄청난 계약금의 제안과 함께, 대상인물을 보지 않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야릇한 의뢰가 들어온다.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초상화가가 아니라 진정한 예술성의 지향을 위한 충분한 경제적 토대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로 황당한 이 계약을 수락한다. 병풍 뒤에 숨어서 들려주는‘샤르부크 부인’자신의 이야기들을 통해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병풍 뒤에 앉아있지만 상대자인 화가 피암보의 모든 것을 뚫어보고 통제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샤르부크부인과 오직 목소리와 야야기의 내용을 통해서만 대상을 그려내야 하는 화가의 이 게임은 이미 불공정함을 내재하고 있다.

이미지 형상화를 위해 들려주는 샤르부크부인의 성장과 삶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의 거대한 한 축이 되어 신화적 신비로움과 기묘한 궁금증을 야기하고 과거의 기억이 현실의 사건에까지 은밀히 조우하여 궁극에는 삶의 욕망이라는 본질에 와 닿으며, 볼 수 없는 존재인 샤르부크부인이라는 인물의  실제에 도달하려는 피암보의 갈망과 섞여 다양한 감성적 이야기들과 사건을 만들어내고, 여기에 긴장감과 의미적 풍성함을 위한‘피눈물 흘리는’여인들의 그로테스크한 죽음과 피암보의 신변적 위기와 같은 서스펜스까지 더해져 재미와 속도감이 배가된다.

특히 이 소설을 우아한 매력에 젖어들게 하는 요소인 당대 화가들의 등장은 지적이고 심미적 욕구까지 일깨우면서 인물의 성격을 강화하거나 사건의 전환을 위한 적절한 포인트로 작용하여 현실과 이상, 외형적 모습과 은밀한 내면의 이중성이라는 본원적인 인간 욕망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19세기말 상류사회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린 인상주의 화가‘사전트’가‘피암보’의 스승으로 등장하여 역사적 사실성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적 성취를 위한 동경과 갈망을 자극하는 인물로서 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인‘앨버트 라이더’를 통해 삶의 가치에 대한 현재성을 제고시키기도 한다.

실존으로서‘샤르부크 부인’의 외형적 형상화라는 초상화가 삶의 이야기라는 내면을 통해 재현되어야 한다는 이 대립은 사실‘눈’이라는 시각적 도구에 의지하는 우리로서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 가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피적 외형에 현혹되지 말라, 지금까지의 인식수단을 잊어라! 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의식의 저항은 실로 대단히 관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신비감에 대해 작동하는 상상력의 진화는 샤르부크 부인에 대한 피암보의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점진적 증대로 표현되는데, 이는 진실을 방해할 뿐이다. 눈에서 피를 흘리며 순간에 사망하는 연속되는 의문의 살인사건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눈에 대한 복수의 행위이다. 이와 같은 은유는 바로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서사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중심흐름과 샤르부크부인이 들려주는 환상적이며 동화같은 자기 삶의 이야기가 맞닿는 지점에 이르러 그 의미를 비로소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쌍둥이 눈(雪)의 결정과 같은 이 작품의 뛰어난 은유들과 회화작품에 대한 지적 탐험, 눈(目)을 통한 가치와 인식의 왜곡과 진실에 대한 고뇌, 예술적 성취와 같은 삶의 이상에 대한 갈망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이처럼 닿을 것 같지 않던 사건들과 욕망의 갈등이 선회하면서 조우하는 귀결에 이르는 무결점의 완벽한 플롯은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재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같은 주제, 그리고 지적 풍미까지 넘치는 가히 예술소설의 여왕(女王)적 작품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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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부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자태는 메트로폴리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그녀 아닌가요. 필리아 님 리뷰를 보니 막 궁금해지는군요!

필리아 2010-09-06 16:13   좋아요 0 | URL
네, 말 많았던 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사전트의 '마담X'가 맞습니다. 어깨끈 하나가 흘러내린 본래의 그림을 지나치게 관능적이라 하여 수정하였다죠...
 
왜 세계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가 - 국제원조를 둘러싼 정치와 외교적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
캐럴 랭커스터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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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구호를 받는 나라, 원조 수혜국이라는 딱지가 늘 붙어 다녔다. 불과 10년 남짓 전까지의 일이다. IMF로부터 긴급 구제자금에다 이웃 일본으로부터 구속성 원조를 받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치욕스러움이 바로 어제의 일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 교역과 국민총생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부담, 즉 지금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를 이젠 돌려줘야 하는 대열에 합류하여야 하지 않겠냐는 보이지 않는 압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웃 일본은 공여국의 대열에 선 이런 한국을 자신들의 집중적이고 선진적인 원조를 통하여 성공적인 발전과 사회 안정을 이룩시킨 모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무슨 망발이냐고 하기에는 60,70년대 일본의 원조가 한국경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 냉전시대, 자본주의체제의 최전선으로서의 지역적 위치로 인하여 자신들의 국익과 위상의 유지를 위해 미국 또한 한국의 주요 공여(供與)국이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 원조는 과연 순수하게 한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자는 의도였을까? 그네들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의 본질이란 그런 연민과 선의의 인도적 정신과는 결코 무관하였음을 이 저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조대국이라 할 수 있는 덴마크,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5개 국가의 대외원조 역사와 그네들의 원조정책, 원조를 위한 정치, 사회적 조직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통한 본질의 규명이 있으며, 이로부터 21세기 행성 지구에서의 원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미래 제안과 구상이 있다.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분석되는 이들 5개국의 해외원조의 목적은 분명 그 출발의 가치나 정책적 방향에서 많은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구 500 만 명에 불과한 유럽의 소국인 덴마크가 GNP 1%의 공여순위 1위 국가라는 아주 낯선 이해처럼, 의외의 사실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원조란 “수혜국 국민의 형편을 개선할 요량으로 정부가 다른 독립 정부나, NGO 혹은 세계은행과 UNDP 등 국제기구에 공적 재원을 이전하는 자발적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의에서 보듯이 원조의 표면적 행위에는 공여국의 목적은 설명되고 있지 않다. 다만 빈국이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전후 복구, 불안정한 사회의 안정을 지원하는 등 수혜국의 형편을 나아지도록 돕기 위한 행위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대외원조가 실제 수혜국들의 형편을 개선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어떠한 확신도 없다는 것이 이 저술의 주요 결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공여국들의 원조 목적을 보면 그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않다. 

공여율은 세계 20위권에 머물지만 공여금액은 단연 최고의 규모인 미국의 원조 목적은‘외교’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대외원조의 목적을 영리나 개발과 같은 목적으로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에는 그 속성상 한계가 있지만, 1990년대 구소련이 붕괴하기까지 냉전체제에서 자기진영의 확보를 위한 세력의 다짐을 위한 원조였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오직‘영리’목적의 원조로 원자재의 확보나 수출증진을 위한 구속성 원조와 같이 돈벌이를 위한 것이었으며, 보건이나 교육 등 진정한 원조에는 거의 배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최근에 와서 국제사회의 질책과 압력에 따라 이와 같은 구속성 원조라는 야박한 인심을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없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원조와 깊은 인연을 맺는 두 국가의 원조의 성격에서와 같이 이들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기여했다는 주장에는 많은 위선과 기만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대일 교역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근저에는 일본의 물품을 사들이는 것으로 한정된다던가, 일본 기업의 제품이나 기계장치에 의한 산업건설에만 지출되도록 하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구속성 원조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의 원조는 그네들의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식민지국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에 종속시키고, 외교 시장에서 자신들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독일의 경우, 전후 복구를 위한 마셜플랜의 주요 수혜국으로서의 세계사회에 대한 보상의 성격으로 출발하여 동독과의 냉전시대 경쟁에서의 외교적 우위를 확보키 위한 정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강대국의 대외원조는 표면상으로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것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자국의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위한 구실 이상이 아니었음을 이해케 된다.

반면에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원조정책을 덴마크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공여 프로그램은 빈곤퇴치를 강조하는 순수한 개발원조로서 그네들의‘인도적 개방주의’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인류사회를 위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조는 정치조건을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치 하에 빈국들의 국가능력,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의 장려, 인권의 신장, 보건위생 등 뚜렷하게 빈곤에 집중하고 있으며, 원조금액의 25%라는 엄청난 규모를‘무상원조’에 할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원조의 본래적 정의와 같이 수헤국과 국민의 형편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세계의 사회적 양심’을 실천하고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국가라는 점이다.

이 저술은 이처럼 주요 원조대국의 원조목적에 대한 다각적인 고찰은 물론 원조방법과 원조를 위한 조직에 대한 형태를 검토하고 있어, 그네들의 시행착오와 정치적 현실에 입각한 다양한 시스템들을 통해 새롭게 원조국가의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유용한 기반정보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대외원조 시스템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원조국으로서의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과 지속가능한 체제를 위한 사회 환경의 측면이다. 내부의 평등과 사회 정의의 강조, 그리고 국가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에 적절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성숙한 역량을 지녀야 한다는 것으로, 청소년 교육 등 원조에 대한 대중홍보는 물론 국민과 의회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명성 등에 대한 조언은 각별히 유념해야 할 요인이라 할 것이다. 넓게 공유된 사회적 합의는 쉬이 단절되지 않으며, 부패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제 원조에 대한 한 층 깊어지고 진지해 진 안목을 지니게 된다. NGO를 비롯한 기타 민간 구호기관은 물론, 대외 원조정책의 기획과 조직에 관여하는 정부관계자들이 꼭 참조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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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좀 독특하다. 수사관, 탐정 한 명 등장하지 않은 범죄 추리소설이니 말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일본의 장맛비는 정말 기분이 나쁘다. 그 후덥지근한 기운이란...새벽 세시, 죽은 남편으로 애를 끓이는 꿈속에 들려오는 벨소리, 지극히 비상식적인 시간에 울리는 전화. 그리곤 아침 댓바람부터 친구‘요코’의 행방을 묻는 그녀의 애인인‘나루세’가 야쿠자를 동행하고 무작정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허락도 없이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요코가 나루세의 모기업 비자금 1억엔을 갖고 사라졌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이니 의심 대상순위 1번이란다.

끌려간 곳은 야쿠자 일파의 회장실, 일주일을 줄 터이니 요코와 사라진 돈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것, 이제 ‘무라노 미로’라는 여인은 친구 덕택에 목숨을 건 친구 찾기에 돌입하게 된다.  무고하게 처해진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여성 이상의 모습을 발견키 어렵지만 추진력은 가히 여느 수사관을 능가한다.

작품은 당연 사라진 요코에 맞추어지고, 여기서 작가‘기리노 나쓰오’식 음울하며, 엽기적이고, 음탕한 소재들이 하나씩 그 얼굴을 드러낸다. 본디지 룩을 입고 페티쉬 이벤트를 연출하는 등 선정성으로 저널계의 시선을 모은 르포라이터인 요코의 삶의 궤적을 밟아 나갈수록 친구의 낯설기만 한 진실을 발견케 된다. 1억엔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된 나루세와 요코를 찾으려는 미로의 연합전선은 불신과 신뢰를 오가며 어렵사리 전개 된다. 요코의 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유카리’, 그녀의 연인인 듯한‘후지무라’, 요코와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 SM쇼를 통해 죽음의 문학을 실현하는‘가와조에’, 어디선가 본 듯한 무희(舞姬) 등 모두 요코의 잠적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연결 할 수가 없다.  

소설은 요코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정통 저널리스트로서의 야망을 향해 독일의 도시로 치닫고, 네오나치(neo-nazi)파벌간의 암살사건의 현장에 있었음이 드러나지만, 인종차별의 체험기였던 당초 르포의 목적이 바뀌었음이 밝혀진다. 자신의 입지를 키워나가던 야심적 르포라이터의 잠적과 비자금 도난 사건을 둘러싼 단순한 추적이 네오나치즘, SM쇼, 나루세의 전부인과 요코와의 감정대립까지 얽히며, 무수한 복선을 만들어 낸다. 약속된 일주일이란 기간 내에 요코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추적의 매듭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되던 인물은 자살이 추정되는 주검으로 발견되고, 미궁으로 빠지지만 의외의 명쾌한 단서가 포착되고 사건은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듯하다.

기리노 나쓰오가 누구인가!‘반전의 여왕’답게, 불과 책장을 몇 장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자가 남긴 의미심장한 메시지부터 주어진 단서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욕망의 끈적거림이 묻어나는 세상에서 어둠과 죽음은 어디에서 시작되겠는가? 아시아적 상상을 넘어서는 탁월한 작품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 동양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의 추구까지, 그리고 가히 논리적 정교함과 치밀한 구성에 있어서는 어떠한 극찬도 아깝지 않을 정도에 이른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까지 장치된 세밀함을 발견하면 아!~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무라노 미로’라는 여탐정을 탄생시키는 시리즈의 첫 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기리노 나쓰오를 영리한 언어의 야수(野獸)’라 했던가? 어둠의 세계가 정말 우아하게 마음껏 뛰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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