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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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Das Schloss에서 인용된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라는 아주 영묘()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간결하고 지적인 문장에 이야기 전체의 의미가 함유되어있음을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불현 듯 깨닫게 된다. 결코 기다리는 구원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그 환상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우주의 이치를 깨우쳐 주려는 듯 말이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고도(Godot)처럼.

 

이 헝가리 작가의 소설이 발표된 해가 1985년이다 보니 마침 동구 공산권이 붕괴된 1989년에 비추어 몰락의 끝에 선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잔인성과 황폐함, 그 기만성과 무기력의 세계를 지펴냈다는 해설이 따라붙곤 한다. 하지만 작품은 모든 인간사회에 내재한 실존적 불안에 대한 사색으로서 이렇게 제한된 텍스트로 읽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가상의 공간에 빠져드는 무력감과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인 현재에 가까운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은 대낮의 빛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추적추적 내리는 보슬비와 쏟아붓는 폭우의 빗소리, 안개 자욱한 시월의 밤이라는 어둠의 배경이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이 지배하고, 기이한 종소리에 한 남자(후터키)가 이웃 여자(슈미트 부인)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농장 사람들이 8개월간 죽도록 일한 품삯을 받으러 떠났던 여자의 남편(슈미트)은 혼자 돈을 차지하고 도주할 생각으로 예정보다 빨리 집에 도착하지만, 낌새를 챈 후터키에 의해 좌절된다. 소설은 똑 같이 닮은 절망으로 마주한 얼굴이라고 두 인물을 묘사한다. 사실 이들은 너절하게 쓰레기 더미만 남은 해체된 집단농장이지만 머물러 살 용기도 떠날 용기도 없는,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또 다른 이웃인 여자(헐리치 부인)가 농장을 떠난 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네들의 옛 리더였던 이리미아시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죽은 자의 부활’, 그는 절망의 덫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인식되고, 도주와 탈출의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기다림의 시간으로, 새로운 삶의 기대로 바뀐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러한 기대가 허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의 구성이 시간적 흐름의 배치가 아니라, ‘되돌아 본’, 혹은 다른 방향에서 본것과 같은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관점에 의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미아시와 파트너인 페트리너는 정부의 말단 정보 끄나풀인 파렴치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임무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 소위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 소환되어 다시금 정보제공의 압박을 받는다. 이때 이리미아시 발길의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은 이 인물의 목적은 물론 농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도사린 심리를 선명하게 들려준다. “여전히 주인 잃은 뼛속까지 노예일 뿐인 사람들의 어리석은 자기기만적 기다림의 확신이 집단농장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전체적인 틀을 거머쥐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2개의 장()으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는 소설의 구조에서 2개의 장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의사의 시점이다. 황폐하게 해체된 농장의 인간 군상들과 동일 집단에 포함되어있음에도 철저한 국외자로서 자신을 격리시키고, 은둔한 실내의 바깥을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토해내는 언어들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이야기의 구조적 틀까지 장악하고 있는 은유와 상징과 암시로 그득 차있다.

    

주변의 외적인 몰락에 맞서 자신의 기억력을 지켜내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기 위해 (P 87)”

 

사람들, 그곳의 모든 곳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의 역할이 부여되고 있다. 이 인물이 읽는 것으로 벤더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지질학서와 전쟁지역 르포사진이 실린 잡지가 등장하는데, 전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현재 시제로 쓰고 때로는 과거 시제로 쓴 어설픈 서술 때문에 혼란이 와서, ....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인류가 멸망한 이후의 예언적 묘사인지 아니면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지구의 지질 역사에 관한 과학적 기술인지 알 수 가 없었다.(P 92)”

 

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 인물이 쓰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관찰 기록이,  소설 자체의 예언적, 혹은 현재적 모호성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또한 후자는 잡지사진 왼쪽 구석에 모습을 드러낸 군사용 감시 장비를 보면서 탁월한 인간적 추적 관찰이라 하며 매혹되는 장면으로 전체주의의 주도면밀한 자기방어 체계가 지닌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유일 것이다.

 

이러한 은유는 소설 전체에 흩어져 교활하게 빛을 내고 있는데, 쓰레기같은 마을을 더욱 추하게 만드는 매춘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어린 딸의 학대와 방치다.

 

문 가까이에 있으면서 어디 멀리 가 있는 일을 소녀는 할 수 없었다.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따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살 수 없는 나라에서 사는 셈이었다.(P 161)”

 

어린 소녀 에슈티케의 입을 빌어 불가능한 삶의 세계를 발설케 하는가 하면, 소녀가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인간의 승리에 대한 욕망은 물론, 패배할 가능성이 없는 싸움의 승리에 도사린 수치 또한 발견케 함으로써 전체주의의 본성을 다시금 공박하기도 한다.

 

아마 소설 중 재미의 요소라면 막장 드라마에 근접한 장면, 그야말로 소설 제목인 사탄 탱고가 동적으로 표현되는, 이리미아시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술집의 전경이라 하겠다. 이곳은 가히 이미 종말에 다다른 인간들, 더 이상은 패배도 가능치 않은 인간들의 퇴화된 결말의 증거라 할 것이다. 마비의 적나라한 모습으로서. 도발적인 추파, 이웃집 여자의 육체에 대한 갈망, 그 관능적 욕망만이 넘실대고, 끊임없는 술과 탱고의 향락이 땀과 열기로 끈적이는 소돔의 현장이 펼쳐진다. 이러한 시간에 소녀 에슈티케는 악의 종자랄 수 있는 오빠(서니)가 알려준 천사들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쥐약을 먹음으로써 자살하고 만다.

    

 

소녀의 죽음은 마을에 도착한 이리미아시의 저열한 목적의 도구가 되어 연설에 이용된다. 자신에게 궁핍과 절망으로부터의 구제를 기대하는 무기력한 인간들의 시선을 인식하며, 그네들의 허약함과 비겁함, 무기력을 질타하고,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리곤 일격을 가하는데,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희생자운운하며, 미래의 전망을, 희망,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하고, 이 기만의 덫, 환상에 젖은 인간들은 죽도록 일해 받은 돈을 내놓는다. 이리미아시가 드디어 자신들에게 새롭게 도약하는 길을 찾아주었음에 감사하며.

 

결국, 술집에, 의사가 은둔하는 실내에, 매춘장소인 마을창고에,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이들의 집 도처에 처진 거미줄’, 그 덫에 의사의 신랄한 묘사처럼 너절하고 무능한 무지렁이(yokels)은 자신들의 삶을 담보한다. 그리곤 살던 가재도구와 창틀과 문짝을 부수고 이리미아시와 약속한 장소로 떠난다. 하지만 희망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 줄 목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들의 마음속에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이리미아시가 모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앉아 ....갈림길이 나와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낡은 트럭이

자신의 생을 결정짓는 것을 다만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P 355)”

 

전제주의 정부의 거미줄같은 정보 끄나풀의 한 지점이 되어 이들은 아무런 재산도 기약도 없이 전국으로 뿔뿔이 흩뿌려진다. 이리미아시가 군()정보당국에 제출한 정보원들의 삶에 관한 보고서의 소개로 이루어진 하나의 장()은 정말 가관이다. 너무 허접해서 다시 작성해야 하는 정보부서 기록자들의 목소리로 들려지는데, 일반적인 지적 수준의 저하에 관한 한 예라 한탄한다. 무지렁이들의 구원자인 이리미아시의 실체, 그 한계인 하찮음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리미아시가 기술한 사람들 면면에 대한 서술은 늙어빠진 창녀, 씻지 않아서 더러운 험담쟁이, 알코올에 절은 난쟁이, 바닥없는 난폭한 어둠의 구덩이에 교차하는 원시적인 둔감함과.....,, 열등한 지적 능력과 강한 자에게만 비굴한 태도....” 와 같이 애초에 그들에게 티끌만큼의 연민이나 동정, 도움의 의지라는 것은 존재치 않았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하지만 예견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능성을 도둑맞고 하나의 덫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덫에 걸릴 것만 같은 예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썩은 문틀에서 온전한 나무 부분을 찾는 일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항상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체념을 인생에 도입할 수가 없다. 설혹 그것이 부질없는 것, 기만이고 환상인 줄 알지라도 말이다. 그들에겐 떠날 용기를 부추길, 단지 하나의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소설은 가히 발칙한 상태에 도달한다. 모두가 떠난 마을에 의사는 기록을 되살피고 새로이 적어나간다. 그런데 종소리가 들려온다. 독자들은 소설의 첫 페이지에 기이한 종소리에 잠을 깨는 후터키를 기억한다. 의사 역시 지난번 종소리를 들은 기록을 찾지만 찾지 못한다. 작가의 술책이다. 아마도 기록하기를 잊었거나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고 의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지만, 이건 거짓이다. 그는 주도면밀한 관찰과 기록을 하는 과도하고 병적인 질서 강박증에 있는 사람이다. 사실은 기록은 이제 시작된다는 의미의 선언일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사)내가 정신을 어느 정도 집중하기만 하면 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쓰기만 하면 일이 일어난다니.”라고 자신이 소유한 능력을 묘사하고, 어느 한도까지는 혼란스러운 사건들 배후의 메커니즘에도 간섭할 수 있었다! (P 387)”고 말한다. 그리곤 시작 페이지에 등장했던 완전히 똑같은 후터키의 독백이 써지기 시작한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P 14 P 396)”

 

끊임없이 현실의 탈출을 꿈꾸지만 이것의 벗어남은 어쩜 살아있는 자는 결코 알지 못하는 저 두려운 작별일지 모르며, 늪같은 삶의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유혹이라는 도망은 환상, 아니 망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또한 제아무리 혼란스러운 세계일지라도 의미가 분명 있으리라 믿지만 결국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면상일 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남긴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Life is a malicious tale, told by cosmic idiocy,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는 에피그램이 진실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의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이 닫힌 구조의 이야기는 몰락의 닫힌 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몰락의 상태에 갇혀끊임없이 헤매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성경에 계시된 시대가 도래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만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광신자인 헐리치 부인이 결연히 중얼거리는 어째서 불속에 이 모든 것을 처넣을 최후의 심판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지라며 계시록을 뒤적이는 손길, 그 분노와 우려와 증오의 눈길이 더욱 매섭게 파고든다. 내겐 완성되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폐쇄되어 있는 세계, 그 한정된 세계의 직시를 요청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망상을 버려라. 결국 세계의 질서는 지질의 변동처럼 들고 날 뿐 이다. 돌고 돈다. 그 밖에 아무런 뜻도 없다. 새로운 시작은 단지 거기서 시작될 수 있을 뿐이라고. 요한 계시록주석집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끝)

 

 

P.S. 또 다른 결론을 생각해보며 : 가능성의 새로운 시작

 

만일 의사에게 종소리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시작과 끝이 맞닿는 이 해괴한 기록의 문장은 과거가 사라지게 하며, 이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농장 사람들의 삶의 세계, 즉 허무와 무력감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상황들이 타원형으로 서로에게 흘러들어가면서, 오래 전에 빼앗겼던 결과의 개방성을 다시 획득하게 될 터이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결합을 제시하며 삶의 여분의 가능성이 되돌아 올 것임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의 가능성,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한 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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