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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잠을 찾아서 - 세상의 모든 달콤하고 괴로운 잠 이야기
마이클 맥거 지음, 임현경 옮김 / 현암사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불을 끄면 침대의 반이 세상의 전부다. 마침내 우리는 항복한다. 내일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잠이 드는 순간, 세계는 다시 무한히 확장된다.” (P 291 中에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의 가치를 폄훼하는 커다란 사회의 목소리들이 잠이 부족해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잠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은근히 종용하기까지 한다. 마치 잠자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통제력을 지닌 인간만이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다는 듯이. 반면에 사람들은 과도한 각종 소음에 불가항력적으로 노출된 현실, 상실이나 슬픔, 깊은 마음의 상처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대낮처럼 빛나는 도시의 밤이 호시탐탐 인간의 잠을 암살하고,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부족한 잠으로 잃는지도 모르는 체 기억의 능력이 쪼그라든다.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 잠이 인간에게 주는 긍정의 역할을 발견하려는 목적이랄 수 있다. ‘왜 자야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으로서의 잠에 대한 근거로서. 또한 언젠가부터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에 대한 위로의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굉장한 사회학적, 혹은 의학적, 철학적 담론의 발견이 아니라 그저 이와 같은 소박한 의도를 부분적이라도 해갈시켜주는 그런 것이면 족하다는 생각에서.
마침 저자 ‘마이클 맥거’는 오랜 수면무호흡증에 시달린 전직 신부요, 현직 교사로서 자신의 경험과 겸허한 식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언어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피로와 사회적 의미, 그리고 소소한 문학적 기반을 통해 잠의 역할을 정말 소박하게 설명하고 있어 정신의 과도한 소비 없이 이완된 상태에서 읽어 나갈 수 있게 하여준다.
책은 토막잠을 자며 “수면 부족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며 밤을 환하게 밝힌 전구 발명자인 에디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신경쇠약으로 사망했다. 맥베스처럼 잠을 살해하려했지만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그가 아니어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터이다. 잠을 멸시하는 자의 욕심이 인간에게서 빼앗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잠의 존중과 폄하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와 법률의 차이로 구별되는 『오디세이아』와 『아이네이스』, 두 작품으로 그 차이를 들려주는데, 전자가 집, 안식처로 돌아오는 이야기인 반면에 후자는 집을 떠나는 이야기란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사회는 『아이네이스』처럼 사람을 밖으로 떠미는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 동기 찾기를 독려하며, 집이라는 균형과 조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자신의 침대와, 크고 넓은 세상에서 삶의 목적을 찾아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침대를 벗어나는 것의 가치 투쟁이랄 수도 있겠다. 과연 무엇이 인간적 진실일까?
수천 년 동안 자란 올리브나무 그루터기를 그 자리에서 깎아 만든 오디세우스의 부동의 침대인가, 아니면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버리는 아이네이스가 떠난 침대인가?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안식인가? 영원한 안식이란 없다는 것인가? 21세기 오늘, 우리들의 가치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대립은 잠을 늦게까지 자던 ‘르네 데카르트’와 멸시하던 ‘데이비드 흄’의 철학에까지 이어지는데, 비몽사몽의 데카르트가 아직도 자신이 자고 있는 건 아닌가해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깨어있음의 증명이 연유했다는 우스개에서, 수천 번의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해서 곧 인과관계가 함의한다고 추론할 수 없다며,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고 확실성에 대한 의심론을 전개한 흄을 보면서, 잠이란 삶에 대한 피해갈 수 없는 철학적 주제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게도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조건들에 회의적인 시선에 무게를 두는 듯, 수면 부족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무수한 변화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발을 신고자는 아이, 한 밤중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로부터 그네들 삶의 이면에는 항시 혼란스러운 잠자리가 있었다는 교사로서의 증언에서 시작되어, 수면 부족이 ‘감정적 결핍’을 동반하는 중독이라는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경향에 대해서, 환자가 죽기를 바라는 수면부족의 만성적 피로에 시달리는 외과의사의 고백에 배어있는 도덕성의 약화를, 변덕과 예민함을 증가시키고, 기억력 손상과 반응속도를 현저히 늦추며 인지장애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일화와 사례들을 역사적 사건이나 문학 작품들을 곁들여 보여준다.
어쩌면 가장 주목할 대목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내부 생체시계인 24시간 주기 리듬인 ‘서캐디언 리듬(Circadian rhythm)’이란 것이다. 이것은 교대제 노동자들의 고통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낮과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꿈도 꾸지 못할 사치임에도 장거리 여행의 시차에서 느끼는 몽롱한 효과에 매양 젖어 있게 만든다. 인간을 기계적 도구화한 현대사회의 가장 잔인한 생태계로 빈번하게 지적되는 지점이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래서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 이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화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며, 수면제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제약 산업들이 휘파람을 불고, 잠 못 자고 거리로 밤거리를 헤매며 소비하는 사람들을 자본은 더욱 즐긴다. 밤이 실종된 사회를 강권하는 자본의 세계.
이제 사람들은 잠을 너무 자지 않아 ‘돈키호테’처럼 “뇌가 바짝 마르고 싱싱함을 잃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고” 자기 내면의 빛을 차단한다. 그래서 언어와 기억을 빼앗긴 세상의 이야기인 ‘조지 오웰’의 『1984』는 다시금 우리 현재에 대한 보고(報告)로 소환된다. 기억능력과 언어 능력은 자는 동안 형성된다고 한다.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는 문화는 어휘를 잃게 하고 빈약한 소통만을 남긴다. 또한 인간의 예술인 ‘기억’은 사라지고 경영기술의 한 형태인 ‘보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잡다한 자극에 지치고 정작 자신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기울일 힘을 상실해간다.
나는 두 시간 이상을 지속하여 잠들지 못하고 있다. 불면증이다. 서너 차례 깨다 잠들다를 반복하는 매일 당면하는 두려움과 짜증이 고통스럽다.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오면 각성을 위해 카페인을 찾는다. 이런 흥분제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사회에 포섭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 우울한 일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커피 속 카페인은 뇌에게 속도를 늦추고 잠잘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는 억제성 신경전달 물질인 아데노신을 통제하고 피로는 그대로 둔 채 그저 브레이크 장치만 잘라버린다고 한다. 증상을 잠시 숨긴다는 것이다. 이제 태평양과 대서양의 물고기들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카페인이 하수구에 배출되고 있을 만큼 오늘 우리는 정신의 마비 속, 환상의 세계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불빛, 책 속의 까만 잉크를 읽는 것은 뇌에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한다고 한다. 전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생성시키는 반면에 후자는 서캐니언 리듬을 통제하고 중추 신경계의 과부하를 막도록 돕는 멜라토닌을 생성시킨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것과 스마트폰을 보는 것은 신체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이란 것이다. 잠을 쫓아내려는 사회, 아이네이스의 등 떠미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한 내 발버둥은 이처럼 독서에서도 계속되어지는 모양이다. 제대로 깨어있다는 것, 제대로 잠을 잔다는 것이 올바른 세상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우는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