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죽인 형사 형사 벡스트룀 시리즈
레이프 페르손 지음, 홍지로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출판사의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고 작성한 책입니다. 스포일러 없습니다. 





이야기는 공동주택에서 은퇴 후의 연금생활을 즐기던 전직 회계전문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매일 아침 신문을 돌리는 성실한 소말리아 출신 난민인 셉티무스 아코펠리가 끔찍한 시신을 발견했다. 

죽은 칼 다니엘손은 무쇠 냄비 뚜껑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고, 죽은 뒤에 목을 졸려 살해당했다.

이 끔찍한 사건은 벡스트룀에게 할당됐다.

인종차별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 계급차별주의자에 알콜중독자이기도 한 벡스트룀은 상사들에게는 차라리 제손으로 죽이고 싶은 꼴도보기 싫은 부하고 부하들에게는 끔찍하고 재수없는 상사였다. 그런데, 그가 조직에 붙어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의외로 큼직한 사건을 해결해냈기 때문이었다.  

칼 다니엘손의 죽음은 단순 폭행치사로 보였지만, 그의 은행 대여금고에서 수백만 크로나의 현금뭉치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점차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처음 몇페이지는 벡스트룀의 독백이 다소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를 욕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과 어떤 대화를 할 때마다 속으로 미친듯이 욕을 해대는데, 그 욕의 수위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벡스트룀은 정말 쓰레기 같은 인성을 지닌 인물이다. 인종, 성별, LGBT 등 온갖 금기시되는 개념들을 총 동원하어 쉬지 않고 욕을 해댄다.

그 욕이 정말이지, 너무나 창의적이어서 익숙해지니 웃음이 터져나올만큼 유머러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주인공이 모든 것에 차별주의적인 인물이라는 점만 빼면, 이 작품이야말로 정말이지 최근 대중문화계에서 큰 이슈인 'PC(정치적 올바름)' 에 가장 걸맞는 작품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온갖 인종과 커플들이 등장하고, 그들 모두 정당한 배역들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러한 균형성이 작가의 출신지이자 작품의 배경인 스웨덴의 단면으로 읽히기도 했다.

작품 안에서도 인종갈등과 남녀갈등, 계급갈등, 연금 생활자와 사회보장제도 안에서 편하게 지내는 젊은 백수로 대표되는 세대갈등, 난민,이민자들과의 민족갈등  등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속으로 수없는 욕을 쏟아내는 벡스트룀에게 조금씩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벡스트룀은 작가의 입장에선 위악적인 인물이고, 작품 내에서는 위선적인 인물이다. 독자에겐 자기 감정에 솔직한 인물이다. 

내가 느낀 감정은, 일종의 길티 플레져랄까.

겉으로는 사려깊은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욕을 내뱉는 벡스트룀이 이해되기 시작하자, 작품 안 모든 인물들의 속마음도 들리기 시작했다. 벡스트룀이 중남미계의 부하 경찰들을 욕하는동안, 그들 역시 겉으로는 위계질서에 따라 굽신대지만, 벡스트룀을 그 못지 않게 욕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모두가 예의라는 안경을 쓰고, 위선의 탈까지 쓴다. 

벡스트룀은 인간 그 자체의 모사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인종적, 민족적으로 대단히 폐쇄적인지라 작품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종, 민족갈등에 공감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이민자들을 홀대하고, 난민 출신 흑인들을 비하하는 등장 인물들의 태도를 보며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과연 나라고 다를까? 우리사회라고 다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침, 우리 사회에서도 난민 문제가 일기 시작했다. 엄청난 유언비어들이 양산되고, 난민들을 쫓아내자는 청원이 순식간에 30만을 넘는 동의를 얻는 모습을 지켜보며, 더더욱 불편한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우리 윗집, 아랫집에 예멘 난민과 시리아 난민, 소말리아 난민들이 들어온다면. 그들이 무리지어 동네 여기저기서 낯선 말을 하고, 낯선 몸동작을 하며, 낯선 눈빛을 보낸다면. 같은 시간마다 같은 곳을 향해 절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면. 

회사에서 나의 상사가 필리핀인이고, 내 파트너가 베트남인이라면.
그 중 일부는 게이이고, 일부는 무슬림이라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만약 통일되면, 북한 출신 사람들을 남한 사회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 엄청난 지역차별로 어마어마한 갈등이 생겨날터다.

심지어, 경찰이라면.

새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스웨덴 경찰 시스템의 공정성과 평등함이 놀라웠고,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건들을 통과해 왔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도 문제인지라, 이야기 자체보다 이런 점들이 먼저 신경쓰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다.

저자가 책 앞에 붙여놓은 '다 큰 아이들을 위한 사악한 이야기' 라는 문장이 아주 안성맞춤이다.

벡스트룀이 길티 플레져라면, 안니카 칼손 경위는 저스티스 플레져(이런 단어는 없겠지)를 주는 인물이다.

둘 다 위선의 탈을 쓰고 서로의 뒷다마를 까면서도 서로의 능력을 완벽히 존중하고, 결국은 함께 사건 해결을 위해 달려가는 조합이 참 신선했다. 특히, 벡스트룀이 안티 히어로라면, 안니카는 전형적인 히어로다. 알콜 중독자에 불평불만 투성이인 벡스트룀과 전도 유망한 여성 경찰이자 유능하고 머리도 팽팽 잘 돌아가는 안니카. 결국 따지고 보면 벡스트룀을 얼르고 달래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인물이도 하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깜찍한 반전까지.

 

이 작품은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사건들이 사실은 얽혀 있었고, 전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이 범인이며, 결코 예상하지 못한 동기가 있었다. 멕거핀과 힌트가 적절하게 흩어져있고, 반전도 꽤나 흥미롭다. 

범인과 대면해서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도 클리셰이지만, 어차피 추리소설은 장르 자체가 클리셰다. 

얼음틀 안에 어떤 음료를 넣어 얼릴까의 문제일 뿐이다. 

간만에 정말 푹 빠져 읽었다.

벡스트룀은, 정이 간다해도 다시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짜증나는 인물이지만, 다음 권에 안니카 칼손 경위가 나온다면, 꼭 다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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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셔츠
존 스칼지 지음, 이원경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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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인의 전쟁] 시리즈를 접한 사람이라면, 존 스칼지가 점거하고 있는 미묘한 지점을 익히 알 것이다. 

그의 작품은 엄밀히 분류하면 '스페이스 오페라' 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지식들을 전혀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발상과 아이디어들은 충분한 설득력을 품어 팬들에게 어필하지만, '스타쉽 트루퍼스' 류의 전쟁, 오락물의 클리셰들을 매우 영리하게 활용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레드셔츠]의 이야기는 아주 먼 미래, 지구의 대기권 밖 우주정거장에서 시작된다.

앤드류 달 소위는 우주 탐사선인 '인트레피드' 호에 배속된 참이다. 그는 정거장에서 역시 인트레피드 호에 배속된 '마이어 듀발' '지미 핸슨' , '핀' 과 '헤스터' 등을 만나게 되고, 이들과 함께 '인트레피드 연대기' 를 이끌어가게 된다. 

외계 행성인 '포샨' 에서 외계 종교의 사제 수업을 받은 경험이 있는 달은, 뒤늦게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탐사선 인트레피드 호의 '이종생물학 연구실' 이 배속된 것이다. 

달은 빠르게 인트레피드호의 이종생물학 연구실 대원들과 어울리며 적응하기 시작한다. 헌데, 이 우주 탐사선에는 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최근 몇년 동안, 탐사 과정중에 한두명씩 끊임없이 대원들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주 항해사인 케렌스키 대위는 '항해사' 임에도 무슨 연유로든 탐사팀에 포함되며, 각종 중상을 입지만 언제나 살아남아 귀환한다는 점도 희안한 일이었다. 이종생물학 연구실 대원들은 탐사팀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달 스스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     러    경       !!!!!!!!!!!!!!!!!!!!******************  

라지만,

이미 띠지에 초중반의 중요한 스포일러의 힌트가 적혀있고, 책의 뒷면에는 아예 스포일러의 내용이 빨간 글씨로 적혀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이 현지에서도 엄청난  화제가 된 작품이라... 어지간한 내용들은 다 밝혀진 참이지만,

나는 이 책을 받자마자 띠지째로 북커버로 감쌌고, 책을 읽기 전에는 그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는 터라, 스포일러를 완벽하게 피했다.

그래서, 이 책의 정말 큰 즐거움들을 모두 온 몸으로 느꼈다!!!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더이상 내 글도 읽지 마시고, 책 커버에서 어떠한 텍스트도 읽지 마시길 강추드린다.








 







이 작품은 일종의 메타 소설로 읽힌다.

책을 읽다보면, 힌트가 끊임없이 던져지고, 중반쯤에 큰 반전이 던져지며  이야기의 휙이 180도로 바뀌게 된다. 

이 반전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 축이기에, 알고 보면 이야기의 재미가 반감될 것이 뻔해보이는데, 반전의 핵심 키워드가 띠지와 책 표지에 커다랗게 적혀있는게 참 아쉬웠다.


그렇다.

[스타트렉].


인트레피드 호의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스타트렉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연속극의 등장인물들과 같음을 깨닫는다.

달리 말하자면, 21세기에 만들어진 드라마의 내용이 수십세기가 훌쩍 흐른 미래에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 미국에서 [인트레피드 연대기] 라는 드라마가 제작된 적이 있었고, 달 소위가 속한 세계의 이야기들이 그 드라마의 내용대로 똑같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안에서는 드라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서로에게 간섭하고 있다고 설정한다.

이는, 아직 제작되지 않은 드라마라도, 등장인물들이 주도적으로 각본을 쓸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함께 해야했고, 그가 케렌스키 대위임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달 소위는 과거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과거의 지구로 가는 에피소드를 참조해 케렌스키를 셔틀에 태워 태양속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케렌스키와 달, 듀발 등의 친구들은 현재의 플로리다에 당도하게 된다. 

달 소위와 일행들은 플로리다에서 자신을 연기하는 연기자들과 만나게 되고, 드라마 제작자와 작가들을 만나 자신들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데...



정말 '골때리게' 재밌었다.

이야기는 위에 요약한대로 두개의 덩어리로 나뉘어진다.

거의 책의 중반부를 기점으로 나뉘어져서, 깔끔하게 1,2부로 나뉘는 느낌이다.

위에 언급했듯, 작가는 의도적으로 힌트를 마구 던져주는데, 나는 처음에는 게임 속 이야기일 줄 알았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케렌스키' 주변의 NPC들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 있는 [스타트렉] 이라는 단어를 보지 말 것을 요구한 것이다. 게임과 드라마의 간극을 다른 독자들도 충분히 느껴보기를 바란다.   

 

이 작품은 사실은 '글쓰기' 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모든 창작자들은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를 만들어내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어느 곳으론가 팡 튀어나가는 생생한 경험.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다.

배경과 설정, 캐릭터의 성격이 입체적으로 어우러지면, 자신이 창조해낸 캐릭터는 마치 부모님에게 반항하는 사춘기 자식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이야기 속을 뛰어다닌다. 

이 작품은 그러한 창작자들의 소망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다. 


창작자는 창작물에 세계에 관여한다. 그리고, 창작물이 창작자의 세계에 관여한다.

쉽게 할 수 있는 망상적 상상이지만, 구체적으로 구현해내긴 쉽지 않다.

존 스칼지는 정말 쉽게 해낸 것 같다.

정말 놀라웠다. 너무나 재밌기도 했고.

그가 점유하고 있는 독특한 지점. 그에 딱 맞는 작품이기도 했다.

오직 존 스칼지만이 쓸 수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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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말 1~3 세트 - 전3권 - 6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6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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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뛰어난 것을 신에게 바친다.' 

경기대회에서 우승한 가장 빠르고, 강한 말이 희생제물로 쓰였다. 

'시월의 말' 은 그렇게 재단에서 목이 잘리는 말을 의미했다. 희생제가 끝나면 그 목은 두 무리의 하층민들에게 던져졌다. 수부라 지구의 하층민들과 사크라 가도 지구의 하층민들이 이 목을 두고 난투에 가까운 소동을 벌였다. 이 목을 차지한 무리는 자신들이 속한 지구의 대표 건물에 그 목을 못박아 자랑했다.  


역사가 스포일러라, 1권의 첫장부터 조심조심 페이지를 넘겼다.

카이사르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셰익스피어와 BBC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고 있어서, '여기부터일까?' '이쯤일까?' 하며 조마조마했다. 과연 매컬로는 위인의 죽음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너무 궁금해서 미리 뒤를 넘겨보고 싶을 정도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에서 시작된 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의 일인자' 는 술라를 거쳐 나이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에게로, 그리고 카이사르에게로 넘겨졌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의 죽음으로 폼페이우스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카이사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보니파의 준동에 의해 정치권력의 균형추는 크게 흔들렸다. 크라수스의 죽음과 함께 '삼두연합'은 깨진지 오래였지만, 폼페이우스와 사돈으로 연합하며 카이사르는 로마의 권력을 차근차근 장악한 터였다.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은 보니파는 비불루스와 카토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카이사르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결국 카이사르는 '주사위를 던졌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다'. 이탈리아는 다시 내전의 격랑에 휘말렸다. 그들은 카이사르를 '독재자', '왕' 이라 불렀다. 폼페이우스와 카토를 위시한 보니파는 스스로를 '공화파' 라 불렀다. 그들에게 카이사르는 공화정의 적이었다. 


 [시월의 말] 은 이집트에서 시작된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비록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의 군대에게 패했지만, 시리아 등 동방 속주의 공화파들을 재결집시켜 이후를 도모하려 했다. 카이사르와 공화파의 대결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내란은 속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도시들은 공화파와 카이사르파로 나뉘었고, 그에 따라 속주의 총독들도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했다. 동방 속주는 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보니파가 파견한 총독들이 많았다. 로마의 곡물은 주로 이집트를 비롯한 동방 속주에서 나왔고, 내전이 길어질수록 동방 속주의 중요성은 커질 터였다. 폼페이우스는 동방을 향해 도피로를 잡았다.  이 정보를 파악한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에게 잘보이기 위해 이집트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를 죽이고 그 목을 선물로 보낸다.  


 하지만,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큰 오해였다. 집정관까지 지낸 로마인이 이집트에서 참살당한 사건은 카이사르에게 알렉산드리아 정벌에 대한 명분이 되었고, 카이사르 개인적으로도 큰 충격과 분노로 다가왔다.

그는 결코 공화파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온 카이사르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클레오파트라.

하지만, 남동생이자 남편이기도 한(!!)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축출당해 지방으로 쫓겨난 그녀에겐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가 양탄자에 말려 카이사르에게 바쳐지는 장면이 여기서 등장한다.

수많은 작품에서 허접한 양탄자에서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는 자기보다 몇배나 나이가 많았던 카이사르를 사로잡은 엄청난 미인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역시, 콜린 매컬로는 달랐다. 

[시월의 말]의 카이사르에게 바쳐진 돗자리 안에서 솟아난  클레오파트라는 어떠한 매력포인트도 없었다. 로마인에 비해 피부는 갈색이고,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비쩍 마른 마케도니아 혈통 소녀의 외모가 로마의 숱한 귀부인들을 농락한 카이사르의 욕망을 자극했을 리는 만무하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그저, 딸 율리아보다 어린 깡마른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벌한 뒤에 프톨레마이오스를 그대로 둘 마음이 없었다.

폼페이우스를 척살한 프톨레마이이오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로마인의 복수를 해야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가 군주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집트는 속주로 거느리기에 너무 넓었고, 시리아, 아프리카등 여러 국가들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었으며, 이집트 안에서 자기들만의 공고한 집단을 이루고 있던 유대인들도 다루기에 쉽지 않았다. 총독을 파견하여 속주로 다스리는 것보다, 철저한 계약관계로 국가대 국가로 맺어지는 편이 나았다.

프톨레마이오스를 축출해내고, 그 자리에는 클레오파트라를 앉히는 편이 나았다.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의 정략적 가치가 생긴 것이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줌으로써 로마의 오랜 우방이 될 씨앗을 심었다.    



이 당시 평균수명이 50~60 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카이사르는 인생의 황혼기에 막 발을 들여넣은 셈이다.

우리 삶에서 나이를 느끼는 순간은  당연하게도 육체의 쇠락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 시대의 군인이라면, 매일같이 수십킬로그램의 등짐을 지고 매일 수십킬로미터를 행군하던 시기다.

카이사르는 항상 보병들과 함께 했던 장군이다. 매우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였던 그는 그 즈음, 이미 육체의 쇠락을 느꼈을 것이다.

수많은 사가들이 추측하는 카이사르의 지병인 간질발작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드러나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카이사르는 수많은 역사기록을 통해 인류 역사상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가장 완벽한 정복군주로 손꼽힌다. 알렉산더가 뜻밖의 이른 죽음으로 신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카이사르는 이 간질 발작(으로 추정되는)의 기록으로 인간의 역사에 남았다. (한편, 간질 발작이 다른 병들과는 달리 당시 신관들이 '접신' 했을때의 모습과 닮아있어서 '신에게 선택받은 증거' 로도 읽혔다고 한다.)

콜린 매컬로는 이 발작도 매우매우 현실적으로 추론해서 소설 안에 너무 잘 녹여냈다.

카이사르 간질설은 나폴레옹 치질설과 함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애초에 '간질' 은 병명이 아니라, 증상이다.

원인이 너무 다양한 병변이라 그 시대의 다른 이들처럼 어떠한 지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콜린 매컬로는 기록상 카이사르가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해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인한 저혈당을 원인으로 삼았다. 카이사르가 워낙 예민한 성격이라 위에 관련된 다양한 병을 앓았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심한 위궤양과 저혈당도 간질과 같은 발작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당대의 식습관을 떠올리면, 귀족들은 그런 병들을 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시월의 말] 에서 초반을 장식하는 인물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이지만, 중반을 장식하는 인물은 다름아닌 카토이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의 오랜 정부였던 세르빌리아의 이복 오빠. 그리고 그녀가 평생에 걸쳐 가장 증오하는 인물. 카이사르를 가장 맹렬히 공격했던 보니파의 아이콘이자 철저한 금욕주의자.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괴이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 카토.

작품 전체를 통틀어 카이사르와 함께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마력적인 매력을 풍기는 인물이다. 

특히 최후까지도 너무너무 인상적인데, 그 페이지를 읽으며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자신의 OO를 꺼내는 최후. 이건 진짜....

너무나 카토다운 죽음이었다. 


 

[시월의 말]의 후반부 이야기의 축은 '계승자'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었던 안토니우스의 대립으로 옮겨간다.

카이사를 암살한 세력들은 권력의 공백을 장악하지 못했고,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카이사르의 군자금들을 접수하면서 가장 먼저 행동을 개시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술라, 카이사르에게도 각기 약점은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약점에 비교하니, 약점도 아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약점을 알면서도 그를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그 재능을 읽었고, 약점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조언들을 건넸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는 진정한 동료들을 두면서 약점들을 커버하고자 했다. 그들 중 하나가 내가 2000년 대학입시때 소묘로 그렸던(ㅋㅋ) 아그리파였다. 젊은 정치 천재가 동료들을 얻고, 탁월한 정치감각을 발휘해 육체적인 약점을 극복하며 차근차근 성장하는 이야기는 흡사 일본만화처럼 흥미롭기 짝이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로마 공화정의 최후의 정확한 시기' 를 점찍지 못한다. 

이는 이후 동서 로마의 멸망 시점을 특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로마는 시대를 지배한 패러다임이었고, 정신이었다. 

그저 왕과 나라이름이 바뀐게 아니다. 

수백년간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바뀌는데, 바뀌는 과정이 한두해 뚝딱 해서 바뀔 리가 없다.

로마 공화정의 종말은 고대와 중세의 전환기를 대표하는 사건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으로 로마라는 거대한 문명을 유지할 수 없음을 간파해냈다.  

로마에서 가장 먼 속주까지 법률이 도달하기까지는 몇년이나 걸렸지만, 정작 집정관의 임기는 고작해야 한두해에 불과하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을 여러번 역임하면서 그 맹점을 해결했고, 술라는 독재관이라는 예외조항을 강화하여 적용시켰다. 콜린 매컬로와 많은 학자들이 공화정의 종말을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기준점을 찍는 이유이다.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후 콜린 매컬로는 독자들의 성원에 못이겨 7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를 집필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월의 말] 을 통해 로마 제국의 꿈을 이미 싹틔웠다. 이미 동서를 가르는 거대한 지배체계도 상상해냈다. 옥타비아누스의 로마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비록 콜린 매컬로의 로마사는 다음권이 마지막이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만들어갈 새로운 로마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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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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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을 잡아주는 우리 몸에서 가장 크고 강한 힘줄인 '아킬레스건'.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신半人半神'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는 우리 몸의 일부에 아로새겨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스파르타의 왕 아가멤논의 아내인 헬레나를 훔쳐 달아난 트로이아의 파리스 왕자, 그에 분개한 아가멤논의 스파르타를 위시한 그리스 동맹국들과 트로이아의 10년에 걸친 전쟁. 유명한 신들과, 반신 영웅, 인간 영웅들이 어우러졌던 대전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스파르타-그리스 연합군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아의 노왕 프리아모스의 장자인 헥토르일 것이다. ('목마' 를 뺀다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던 너무너무 유명한 이야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트로이아 전쟁' 이다.

   

고전은 후세의 작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수많은 창작 이론들이 고전을 통해 정립되었고, 수많은 지망생들이 고전 앞에서 도전하고, 때론 좌절하며, 상당한 모티프를 얻는다.

특히, '재해석' 에 대한 욕망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틀거린 적이 있을 것이다. 원작의 위대함에 기댈 수도 있고, 작가 이전에 독자, 연구자에 가까운 측면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밑질게 별로 없는' '엉김' 인 셈이다. 

작가들이 이 위대한 텍스트를 다룰 때 '원전을 최대한 존중', 하거나 '원전을 철저히 파괴' 하지 않는 이상 독자들에게 '진부함'과 '클리셰' 이상의 인상을 주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초반부는 2004년에 제작된 영화 [트로이] 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영화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원작을 따라가되, 현실성을 중요시했다. 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반신의 개념도 없었다. 고전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전체적인 인상은 원전을 최대한 존중하는 쪽에 가깝다.

신화 속 인물들의 성격이나 대사들이 신화 속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님프' 테티스도 등장한다. 신화처럼 '신'이 인격과 형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아킬레우스의 뒷꿈치를 잡고 스틱스 강에 넣었다 빼는 이야기가 빠진 정도랄까.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 내용을 다 아는데도,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영화 [트로이] 의 이미지는 단지 배경에 머무를 뿐,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스는 이내 완벽히 사라졌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오디세우스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생생했기 때문이다. 


비록 완역판이 아니더라도, 호메로스의 원작을 접해본 이는 많을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호기롭게 두꺼운 [일리아드]를 펴들었다가 한달 넘게 붙들며 간신히 마지막장을 덮은 뒤, [오디세이아] 는 수년째 책장에서 먼지만 먹고 있다. 원작은 고대 그리스의 율시로 운율이 맞을텐데, 희랍어의 그 뉘앙스를 현대 한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터다. 게다가 인물보다 사건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지고, 당시의 스타일 상 섬세한 심리묘사나 화려한 배경묘사가 있을 리 없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런 점들을 십분 활용하여 원전이 남긴 여백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묘사를 채워넣고,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원전을 벤치마킹한 아름다운 운율의 문장들이 펼쳐진다. 비록, 그 역시 번역체이기에 작가의 의도를 100% 이해할 순 없겠지만, 역자는 확실히 이해했고, 그것을 한글로 옮기기 위해 엄청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특히 마지막, 33 챕터는 마치 한편의 단편처럼 꽉 짜여진 서사시를 보여주는데, 절벽까지 치솟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감정의 파고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간의 동성애가 지금보다 더 관대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료는 차고 넘친다.  

신화와 고전 속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를 동성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이고, 이 작품 역시 그를 따르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의해 철저히 삭제되고 무시되었던 고대 신화와 고전 속 동성애 코드들은 대중들의 인식변화 속에서 활발하게 되살아나는 중이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식수준은 단지 포르노의 한 카테고리 정도에 머무르는 듯 하지만, 인간과 유인원 외 다종다양한 동물들의 동성애가 관찰, 보고되면서 동성애에 붙어있는 '이반'이라는 딱지를 뗄 날이 머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걸 다 떠나, 무엇보다, 이 설정이 신화속에서 아킬레우스가 분노했던 이유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서사와 소재 자체는 대단히 진부하다. 하기사, 신화와 고전이야말로 이런 이야기들의 모태인 셈이니. 수원水源의 물 맛이 새로울 리 없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과, 그 관계를 용납할 수 없는 어머니,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의 시선과 '예언' 에 사로잡혀 있는 시한부의 운명.

버림받은 아들과, 자애로운 스승님까지. 

이런 진부한 소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캐릭터와 호흡, 그리고 문장력일터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고전을 가장 진보적으로 재해석한 작가는 SF작가인 댄 시먼스일 것이다. 그는[일리움]과 [올림포스]를 통해 화성에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재현했다. 초미래 과학과 화성, 그리고 그리스 신들. 그야말로 상상초월의 조합이었다.  

매들린 밀러는 그처럼 파격적인 재해석은 아니다. 오히려 정통적인 시각으로 고전에 다가섰다. 화려한 액션과 시각적인 묘사들은 현대적이지만, 절절한 사랑과 인물들의 성격, 갈등은 고전적이다.

무엇보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나 헥토르가 아니라, 철저히 주변인물인 파트로클로스를 중심 화자의 자리에 앉힌 것이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진부함에 맞선 매들린 밀러의 정공법은, 내가 보기엔 결코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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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4
켄 폴릿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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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묘하게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다.

지난번엔 일본이었다면, 이번엔 런던이다. 

됭케르크에서 참혹한 패배를 겪고, 병사들은 거의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거되어 유럽의 중서부는 독일 천하였다. 

영국은 그야말로 국가 전체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모든 철강소와 공장들은 군수물품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됭케르크에 버리고 온 것들을 충당해야 했다. 군수품이 부족했다. 미국의 참여가 절실했다. 영국의 모든 외교력이 동원됐다.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중동의 민족들에게 조약을 남발했다.

영국의 금융, 경제시장은 사실상 정지되고, 모든 생산활동은 군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파이프 공장에서는 지금까지 만들어낸 파이프들을 이용해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짧은시간동안 급조한 것 치고 고장률이 적어서 꽤 오랫동안 쓰였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의 스파이들. 

지금은 탐 크루즈 덕분에 잘 알려진 MI+n 이 이 시기에 활약햤다.

영국군사정보총국 MI5. 탐 크루즈가 활약한 MI'6' 는 대외정보활동을 했고, MI'5' 는 국내방첩활동이 주 임무다.

당시 MI5는 영국내에서 활동 중인 독일 스파이들을 이미 모두 꿰고 있었다. 이들을 이용해 역정보를 흘리는, 소위 '이중스파이' 작전이 이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MI5의 그물망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독일의 특급 스파이가 있었다. MI5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오직 두가지. 그가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사실 하나와, 암호명 '바늘' 뿐이었다.

그는 실제로 바늘처럼 포위의 그물망을 잘도 피해나갔다. 


이야기는 세 방향으로 진행된다.

먼저 독일 스파이 암호명 "니들"; 페이브스. 페이브스를 통해 당대 평범한 영국인들의 생활상과 그 안에 숨어든 스파이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때도 정보국에서 활약했던 MI5 소속의 중세사학자 고들리먼과 경찰 출신의 파트너 블로그스. 고령의 고들리먼은 머리, 젊은 블로그스가 손과 발처럼 움직인다. 고들리먼과 블로그스는 나이 차이는 꽤 나지만, 얼마전 아내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치열한 추격 속에서도 이 두 콤비가 보여주는 파트너쉽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세번째로 신혼여행에서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전도유망한 장교였던 데이비드와 그의 아내 루시의 이야기가 다소 생뚱맞게 들어가 있다. (물론, 장르문학을 많이 접한 독자들은 이들의 역할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과연 이 세 방향으로 달려가는 기차들이, 어떤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가 이 작품의 궁극적인 포인트고, 그 포인트까지 가는 과정은 쫓고 쫓기는 서스펜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첩보 장르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필사적으로 수집했을 사료들과 타고난 스토리 텔러로서의 센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첩보물은 많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다.

'제임스 본드'의 원작인 로저 무어의 '007' 시리즈는 물론이고, 비록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초기를 장식한 것이 하드보일드한 형사들과 냉전시대를 누빈 스파이들이 펼치는 스릴과 서스펜스였다.

이 작품엔 형사물로서의 탐문, 추적과 스파이들간의 치열한 정보전이 모두 녹아있다.

반면, 장르물로서의 한계 역시 명확하다.

이런 플롯의 작품은 만화, 영화, 드라마까지 확장한다면, 대충 생각해도 여러개가 떠오를 정도다.

켄 폴릿은 클리셰가 주는 진부함과 전형성을 정면돌파한다. 오로지 필력과 탁월한 연출, 구성으로 지루함을 이겨내고, 진부함 속에서도 빛나는 '재미' 를 선사한다. 

특히 데이비드와 페이브스, 루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클라이맥스는 그야말로 백미였다. 

비밀, 불륜, 액션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그야말로 '섹시하게' 엔딩으로 달음박친다. 



무엇보다, 켄 폴릿이라는 작가의 팬으로써 비교적 초기작인 이 작품 안에서 후속작들의 원형이 되는 듯한 인물과 소재들이 보여서 재밌었다.

고들리먼과 페이브스가 성당에서 만나 건축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대지의 기둥]이 떠올랐고, 데이비드와 루시 부부의 모습에서는 '근대 3부작' 의 3부 [영원의 끝] 에서의 레베카 부부가 떠올랐다. 그리고, 회상 장면에서 등장하는 고들리먼의 아내는 역시 근대 3부작의 2부 [세계의 겨울] 에서 폭탄이 떨어진 런던 시내에서 앰뷸런스를 운전하던 데이지가 보였고. 


전쟁은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그러한 절박함이 혁신적인 사고를 이끌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보를 이뤄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사고를 할 수 없도록 몰아친다. 식민국과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붙여, 쏟아지는 총탄 앞으로 뛰어들게 만들고, 폭탄실은 비행기째로 전함에 들이받게 만든다. 비상식적인 명령을 반복하면서, 명령에 불복종하면 아군이라도 가차없이 청년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다. 집단적 광기. 그것은 민족과 국가, 애족과 애국, 숭고와 희생이라는 단어로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 되풀이되도 좋은 이야기가 있다.

아니, 그렇게 영원히 되풀이 되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 안에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우리는 언제나 불의한 폭력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실이고, 전쟁이란 그런 불의한 폭력의 집합체라는 점이다.



 







ps.  읽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점.

일단,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요 소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해 영국과 미국이 준비했던 수많은 기만 작전들 중 하나인 "남 포티튜드 작전" 이다.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막강했지만, 동부전선의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치르고 있는 터라 병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상륙작전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작전이다. 단단한 해안진지가 구축되면 상대보다 다섯배가 많은 군세로도 상륙하기 쉽지 않다. 독일은 영미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알아냈다. 유력한 장소는 칼레와 노르망디였으나, 이 두 장소를 두고 히틀러와 휘하 장군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전쟁 초기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나, 당시의 히틀러는 군수뇌부로부터 점점 신용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대립에 영국과 미국이 수행한 수많은 기만작전이 유효했다.

라디오를 통해 일관된 거짓 정보들을 흘렸고, 조작된 암호를 독일의 감청망에 퍼뜨렸다. 뿐만 아니었다. 독일의 항공사진을 대비해 헐리우드 특수효과 팀을 섭외하여 영국 켄트주에 대규모 진지를 구축하고, 탱크와 전차 모형들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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