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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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을 잡아주는 우리 몸에서 가장 크고 강한 힘줄인 '아킬레스건'.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신半人半神'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는 우리 몸의 일부에 아로새겨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스파르타의 왕 아가멤논의 아내인 헬레나를 훔쳐 달아난 트로이아의 파리스 왕자, 그에 분개한 아가멤논의 스파르타를 위시한 그리스 동맹국들과 트로이아의 10년에 걸친 전쟁. 유명한 신들과, 반신 영웅, 인간 영웅들이 어우러졌던 대전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스파르타-그리스 연합군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아의 노왕 프리아모스의 장자인 헥토르일 것이다. ('목마' 를 뺀다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던 너무너무 유명한 이야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트로이아 전쟁' 이다.

   

고전은 후세의 작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수많은 창작 이론들이 고전을 통해 정립되었고, 수많은 지망생들이 고전 앞에서 도전하고, 때론 좌절하며, 상당한 모티프를 얻는다.

특히, '재해석' 에 대한 욕망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틀거린 적이 있을 것이다. 원작의 위대함에 기댈 수도 있고, 작가 이전에 독자, 연구자에 가까운 측면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밑질게 별로 없는' '엉김' 인 셈이다. 

작가들이 이 위대한 텍스트를 다룰 때 '원전을 최대한 존중', 하거나 '원전을 철저히 파괴' 하지 않는 이상 독자들에게 '진부함'과 '클리셰' 이상의 인상을 주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초반부는 2004년에 제작된 영화 [트로이] 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영화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원작을 따라가되, 현실성을 중요시했다. 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반신의 개념도 없었다. 고전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전체적인 인상은 원전을 최대한 존중하는 쪽에 가깝다.

신화 속 인물들의 성격이나 대사들이 신화 속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님프' 테티스도 등장한다. 신화처럼 '신'이 인격과 형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아킬레우스의 뒷꿈치를 잡고 스틱스 강에 넣었다 빼는 이야기가 빠진 정도랄까.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 내용을 다 아는데도,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영화 [트로이] 의 이미지는 단지 배경에 머무를 뿐,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스는 이내 완벽히 사라졌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오디세우스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생생했기 때문이다. 


비록 완역판이 아니더라도, 호메로스의 원작을 접해본 이는 많을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호기롭게 두꺼운 [일리아드]를 펴들었다가 한달 넘게 붙들며 간신히 마지막장을 덮은 뒤, [오디세이아] 는 수년째 책장에서 먼지만 먹고 있다. 원작은 고대 그리스의 율시로 운율이 맞을텐데, 희랍어의 그 뉘앙스를 현대 한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터다. 게다가 인물보다 사건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지고, 당시의 스타일 상 섬세한 심리묘사나 화려한 배경묘사가 있을 리 없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런 점들을 십분 활용하여 원전이 남긴 여백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묘사를 채워넣고,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원전을 벤치마킹한 아름다운 운율의 문장들이 펼쳐진다. 비록, 그 역시 번역체이기에 작가의 의도를 100% 이해할 순 없겠지만, 역자는 확실히 이해했고, 그것을 한글로 옮기기 위해 엄청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특히 마지막, 33 챕터는 마치 한편의 단편처럼 꽉 짜여진 서사시를 보여주는데, 절벽까지 치솟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감정의 파고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간의 동성애가 지금보다 더 관대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료는 차고 넘친다.  

신화와 고전 속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를 동성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이고, 이 작품 역시 그를 따르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의해 철저히 삭제되고 무시되었던 고대 신화와 고전 속 동성애 코드들은 대중들의 인식변화 속에서 활발하게 되살아나는 중이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식수준은 단지 포르노의 한 카테고리 정도에 머무르는 듯 하지만, 인간과 유인원 외 다종다양한 동물들의 동성애가 관찰, 보고되면서 동성애에 붙어있는 '이반'이라는 딱지를 뗄 날이 머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걸 다 떠나, 무엇보다, 이 설정이 신화속에서 아킬레우스가 분노했던 이유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서사와 소재 자체는 대단히 진부하다. 하기사, 신화와 고전이야말로 이런 이야기들의 모태인 셈이니. 수원水源의 물 맛이 새로울 리 없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과, 그 관계를 용납할 수 없는 어머니,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의 시선과 '예언' 에 사로잡혀 있는 시한부의 운명.

버림받은 아들과, 자애로운 스승님까지. 

이런 진부한 소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캐릭터와 호흡, 그리고 문장력일터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고전을 가장 진보적으로 재해석한 작가는 SF작가인 댄 시먼스일 것이다. 그는[일리움]과 [올림포스]를 통해 화성에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재현했다. 초미래 과학과 화성, 그리고 그리스 신들. 그야말로 상상초월의 조합이었다.  

매들린 밀러는 그처럼 파격적인 재해석은 아니다. 오히려 정통적인 시각으로 고전에 다가섰다. 화려한 액션과 시각적인 묘사들은 현대적이지만, 절절한 사랑과 인물들의 성격, 갈등은 고전적이다.

무엇보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나 헥토르가 아니라, 철저히 주변인물인 파트로클로스를 중심 화자의 자리에 앉힌 것이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진부함에 맞선 매들린 밀러의 정공법은, 내가 보기엔 결코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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