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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평점 :
온다 리쿠의 작품을 펼칠 때는 언제나 마음이 편하다.
그녀는 사람들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긍정이 묻어나고, 작품 안에는 그 어떤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마저 단어로 감싸안는다. 문장으로 포옹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일본 미스테리 문학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다.
살인도, 납치도 없이 순수하게 '미스테리' 만으로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에는 허망한 허무주의도, 죽음에 대한 자기파괴적인 동경도 없다.
삶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혜, 충실한 즐거움.
'인간의 상상력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는 명제에 충실한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는 상상력으로 인한 오해와 거짓말, 추측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이 온통 미스테리와 수수깨끼 투성이인 이유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모든 미스테리와 수수깨끼가 풀리는 이유 역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온다 리쿠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이다.
물론 그녀가 장르소설 작가인 것은 확실하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범인, 형사처럼 쫓는자와 쫓기는 자가 만들어진다. 비밀을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는 자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명백한 장르적 장치들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여타 미스테리 스릴러들과 전혀 다르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는 "대화" 와 "추억(기억)" 그리고 "성장" 이다.
일정한 수의 인물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는 설정 역시 장르적 장치이지만, 등장인물들이 모여있는 공간 안에서는 어떠한 살인도,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오손도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화제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얽혀 있는 질기고도 진득한 과거의 기억에 관한 내용으로 수렴된다. 이 과정 안에 심리적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등장하고, 비밀을 갖고 있는 자와 그것을 파헤치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여 힌트를 찾아내듯이, 서로가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고, 대화 안에 일종의 함정들을 만들고, 때로는 과거의 단초를 찾아 비밀들을 끄집어낸다.
'그때,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그 때 나의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나?'
마치 나비효과처럼, 내가 과거에 했던 사소한 선택이 현재의 그를 엄청나게 바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등줄기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 내가 했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선택.
온다 리쿠가 일본 팬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어의 전령사" 라고 불리우는 이유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읽으면 여지없이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당시에 했던 선택들과, 내게 미쳤던 여러 결과들.
그것들을 생각하면, 금새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고, 곧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에 젖는다.
그래서 그녀는 노스탤지어의 전령사인 것이다. 국내에선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고 번역되지만, 그 명칭만큼은 일본식이 좋다.
[꿀벌과 천둥]은 온다 리쿠의 이러한 특징들이 모두 녹아있는 작품이지만, 한가지, '무서운 상상력' 은 빠져있다.
이 작품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라는 피아노 경연대회(?)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미스테리의 여왕이, 미스테리를 버렸다. 그 사실만으로 깜짝 놀랐더랬다.
판타지나 미스테리 잡지가 아니라, 음악 잡지에 기고되었던 소설이 묶여 나왔더랬다.
신박한 음주 이야기나 여행 이야기가 에세이로 묶여 나온 적은 있었지만, 소설은 언제나 미스테리와 판타지의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는데. 음악소설이라니.
이야기는 이미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미에코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짧지만, 수상자가 일약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성장하면서 함께 명성을 얻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 에 참여할 경연자들을 뽑는 오디션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의 오디션은 모스크바, 파리, 밀라노, 뉴욕 그리고 일본 요시가에에서 열리고 있었고, 서류 심사를 통과한 연주자들이 각지에서 펼쳐지는 오디션을 거쳐야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파리 심사를 맡은 미에코와 오랜 동료들은 그 자리에서 깜짝 놀랄만한 재능을 만나게 된다.
"엄청난 재능을 목격한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p.37
각지에서 오디션을 통과한 피아니스트들이 일본 요시가에로 모여들어 국제 콩쿠르의 예심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주목하는 인물은 총 네명.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천재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난 뒤 연주에 대한 흥미를 잃고 무대를 무단으로 이탈하고 수년 째 평범한 학창생활을 해나가던 소녀 에이덴 아야.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프로 솔로 연주자로서 시니어 무대에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피아노를 너무 사랑했지만, 생업으로 삼지 못하고 악기점 매니저로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음악의 신이 내려보낸 것과 같은 천재소년 가자마 진.
이 네명의 인물이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에서 수많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서로의 음악을 겨룬다.
온다 리쿠의 소설답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 얽혀 풍성한 드라마를 펼쳐내는데, 그들의 이야기도 정말 너무 재미있지만, 작품 전반에 펼쳐지는 장대한 음악과 연주에 대한 묘사가 정말이지 '끝내준다'!!!
다시 말하지만,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상력" 으로 인한 사건을 겪고, "상상력" 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690여 페이지가 넘는 볼륨 안에 수많은 피아노 곡과 연주가 묘사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음악과 연주는 모두 '텍스트' 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
이번 작품에서도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큰 무기로 삼았다.
바로 우리들. 독자들의 상상력이다.
음악과 연주에 관한 수많은 묘사들 중 진부하거나 중복되는 표현이 거의 없다.
음악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오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장문과 단문, 은유와 직유, 비교와 비유. 그야말로 수사법의 백과사전이다.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이다.
문장들이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그래선지, 오히려 음악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감동을 준다.(정작 음악을 찾아 들으면 졸립....쿨럭.)
독자들의 머릿속을 열고, 상상의 피아노를 연주한다.
텍스트가 움직이는대로 머리속에 빛이 팡팡 터지며, 들어본 적 없는, 들을 수 없는 음악들이 연주된다.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책 전체를 옮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지금 막 넘기면서 눈에 띄는 구절을 몇구절만 옮겨보겠다.
"베토벤의 곡이 가진 독특한 벡터가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화살처럼 홀을 향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p.37
"객석 전체가 하나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달아오르고 있다. 무대 위의 청년은 그 열기에 지거나 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객의 추파를 받아들이며 그에 응하고 있다. (...)
한 음, 한 음이 깊고 풍부하다.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벨벳으로 감싼 것 같다. 그런데 간결하면서도 조금 냉소적인 바로크읭 ㅜㄹ림이 뚜렷이 드러난다.
음, 장식음이 아름답네. 아야는 혀를 내둘렀다." p.188
"뭐야, 이 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는 거지?
마치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리는 듯한....(...)
조율만으로 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리 없다. 이 아이 전에 나온 참가자도 같은 피아노로 연주했다.
어째서 이런, 하늘에서 소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멀리서, 또 가까이서, 마치 피아노가 혼자 노래하는 것처럼 주선율이 차례로 떠올라 여러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을 스테레오 사운드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렇다. 소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입체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p218-219
"모차르트 본연의 시원스러운 지고한 멜로디. 진흙 속에서 순백의 꽃망울을 틔운 탐스러운 연꽃처럼, 아무런 주저도 의심도 없다.
쏟아지는 빛을 당연하게 두 손 가득 받아들일 뿐이다.
이 아이, 앉았을 때부터 계속 웃고 있다.
아카시는 눈치채고 있었다. 건반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기보다 피아노가 소년을 연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그가 피아노를 부르면 피아노가 기거이 그에게 화답하는 듯한."
p. 220
"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음악을 드넓은 곳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요?
소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가만히 선생님에게 속삭였다.
언젠가 반드시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음악을 데리고 나가겠어요."
p.310
결국 이 작품은 '기프트'; 재능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이야기이다.
아니, 재능을 받은 자들 중에서, 좀 더 좋은 행운을 만난 자들의 이야기랄까.
안타깝게도, 예술적 재능은 사람마다 크나큰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루브르 미술관 문턱에서 좌절하며 돌아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옛날 사람들의 기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 책에는 정확한 타이밍에,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찾아내, 그것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심사위원, 경연에 참여한 피아니스트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피아노 조율사는 물론 주인공들의 가족, 친구들까지 대충 보아 넘길 사람들이 없다. 한명한명이 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하지만, 상냥하고 다정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콩쿠르". 인생과 자존심을 건 경연인 것이다.
인물들은 상냥할지언정, 평가는 날카롭고 매정하다. 연주가 끝날 때 마다 연주는 냉철하게 평가되고, 반응은 그 즉시 나타난다.
그렇기에 음악에 대한 묘사를 읽는 즐거움도 상당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카자마 진, 마사루, 아야, 아카시 중 누가 우승하게 될지, 그 결과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네명의 뜨거운 각축전이 [꿀벌과 천둥]의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 요소인 것이다.
온다 리쿠는 무척 노련하게 독자들과 밀당하며 이 네 명의 대결을 무척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끈끈하게 이어진 인물들의 드라마만큼 승부의 결과에 대한 긴장감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인물들에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승부가 심장 쫄깃하게 펼쳐진다.
그와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카르텔에 새로운 세대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젊은 세대를 착취하고 기만하기에 바쁜 기성세대에게 날리는 통렬한 일침이고, 위대한 재능을 눈 앞에 두고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어른들을 향한 일갈이다.
"말 그대로 그는 '기프트' 이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시험받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자 여러분이다.
그를 '체험' 하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달콤한 은총이 아니다.
그는 극약이다.
(...)
그를 진정한 '기프트' 로 삶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 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있다."
p.41
클래식.
이 얼마나 고루한 단어일까.
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너무나 중요한 그 일부이다.
수백년 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준 단어인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축복은 누구나 많은 클래식들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일터다.
물론, 직접 가서 듣는 것 보다는 떨어지고,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장비들과 싸구려 스피커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클래식은 불과 200여년 전만 해도 선택받은 소수의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으나, 아무나 다다를 수 없는 경지.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나 알아볼 수 없는 능력.
누구나 꿀 수 있으나,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꿈.
누구나 받았지만, 아무나 일깨울 수 없는 재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들의 이야기.
[꿀벌과 천둥]
참 좋았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연주곡들의 선집 음반이 발매되었다.
http://music.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5686825
노다메 칸타빌레 앨범도 여러장 있는 걸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귀로 즐기는 것보다 온다 리쿠의 텍스트만으로 즐기는 것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음악 듣고 온다 리쿠의 텍스트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궁...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