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4
켄 폴릿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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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묘하게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다.

지난번엔 일본이었다면, 이번엔 런던이다. 

됭케르크에서 참혹한 패배를 겪고, 병사들은 거의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거되어 유럽의 중서부는 독일 천하였다. 

영국은 그야말로 국가 전체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모든 철강소와 공장들은 군수물품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됭케르크에 버리고 온 것들을 충당해야 했다. 군수품이 부족했다. 미국의 참여가 절실했다. 영국의 모든 외교력이 동원됐다.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중동의 민족들에게 조약을 남발했다.

영국의 금융, 경제시장은 사실상 정지되고, 모든 생산활동은 군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파이프 공장에서는 지금까지 만들어낸 파이프들을 이용해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짧은시간동안 급조한 것 치고 고장률이 적어서 꽤 오랫동안 쓰였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의 스파이들. 

지금은 탐 크루즈 덕분에 잘 알려진 MI+n 이 이 시기에 활약햤다.

영국군사정보총국 MI5. 탐 크루즈가 활약한 MI'6' 는 대외정보활동을 했고, MI'5' 는 국내방첩활동이 주 임무다.

당시 MI5는 영국내에서 활동 중인 독일 스파이들을 이미 모두 꿰고 있었다. 이들을 이용해 역정보를 흘리는, 소위 '이중스파이' 작전이 이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MI5의 그물망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독일의 특급 스파이가 있었다. MI5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오직 두가지. 그가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사실 하나와, 암호명 '바늘' 뿐이었다.

그는 실제로 바늘처럼 포위의 그물망을 잘도 피해나갔다. 


이야기는 세 방향으로 진행된다.

먼저 독일 스파이 암호명 "니들"; 페이브스. 페이브스를 통해 당대 평범한 영국인들의 생활상과 그 안에 숨어든 스파이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때도 정보국에서 활약했던 MI5 소속의 중세사학자 고들리먼과 경찰 출신의 파트너 블로그스. 고령의 고들리먼은 머리, 젊은 블로그스가 손과 발처럼 움직인다. 고들리먼과 블로그스는 나이 차이는 꽤 나지만, 얼마전 아내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치열한 추격 속에서도 이 두 콤비가 보여주는 파트너쉽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세번째로 신혼여행에서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전도유망한 장교였던 데이비드와 그의 아내 루시의 이야기가 다소 생뚱맞게 들어가 있다. (물론, 장르문학을 많이 접한 독자들은 이들의 역할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과연 이 세 방향으로 달려가는 기차들이, 어떤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가 이 작품의 궁극적인 포인트고, 그 포인트까지 가는 과정은 쫓고 쫓기는 서스펜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첩보 장르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필사적으로 수집했을 사료들과 타고난 스토리 텔러로서의 센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첩보물은 많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다.

'제임스 본드'의 원작인 로저 무어의 '007' 시리즈는 물론이고, 비록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초기를 장식한 것이 하드보일드한 형사들과 냉전시대를 누빈 스파이들이 펼치는 스릴과 서스펜스였다.

이 작품엔 형사물로서의 탐문, 추적과 스파이들간의 치열한 정보전이 모두 녹아있다.

반면, 장르물로서의 한계 역시 명확하다.

이런 플롯의 작품은 만화, 영화, 드라마까지 확장한다면, 대충 생각해도 여러개가 떠오를 정도다.

켄 폴릿은 클리셰가 주는 진부함과 전형성을 정면돌파한다. 오로지 필력과 탁월한 연출, 구성으로 지루함을 이겨내고, 진부함 속에서도 빛나는 '재미' 를 선사한다. 

특히 데이비드와 페이브스, 루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클라이맥스는 그야말로 백미였다. 

비밀, 불륜, 액션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그야말로 '섹시하게' 엔딩으로 달음박친다. 



무엇보다, 켄 폴릿이라는 작가의 팬으로써 비교적 초기작인 이 작품 안에서 후속작들의 원형이 되는 듯한 인물과 소재들이 보여서 재밌었다.

고들리먼과 페이브스가 성당에서 만나 건축에 대한 지식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대지의 기둥]이 떠올랐고, 데이비드와 루시 부부의 모습에서는 '근대 3부작' 의 3부 [영원의 끝] 에서의 레베카 부부가 떠올랐다. 그리고, 회상 장면에서 등장하는 고들리먼의 아내는 역시 근대 3부작의 2부 [세계의 겨울] 에서 폭탄이 떨어진 런던 시내에서 앰뷸런스를 운전하던 데이지가 보였고. 


전쟁은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그러한 절박함이 혁신적인 사고를 이끌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보를 이뤄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사고를 할 수 없도록 몰아친다. 식민국과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붙여, 쏟아지는 총탄 앞으로 뛰어들게 만들고, 폭탄실은 비행기째로 전함에 들이받게 만든다. 비상식적인 명령을 반복하면서, 명령에 불복종하면 아군이라도 가차없이 청년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다. 집단적 광기. 그것은 민족과 국가, 애족과 애국, 숭고와 희생이라는 단어로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 되풀이되도 좋은 이야기가 있다.

아니, 그렇게 영원히 되풀이 되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 안에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우리는 언제나 불의한 폭력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실이고, 전쟁이란 그런 불의한 폭력의 집합체라는 점이다.



 







ps.  읽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점.

일단,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요 소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해 영국과 미국이 준비했던 수많은 기만 작전들 중 하나인 "남 포티튜드 작전" 이다.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막강했지만, 동부전선의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치르고 있는 터라 병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상륙작전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작전이다. 단단한 해안진지가 구축되면 상대보다 다섯배가 많은 군세로도 상륙하기 쉽지 않다. 독일은 영미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알아냈다. 유력한 장소는 칼레와 노르망디였으나, 이 두 장소를 두고 히틀러와 휘하 장군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전쟁 초기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나, 당시의 히틀러는 군수뇌부로부터 점점 신용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대립에 영국과 미국이 수행한 수많은 기만작전이 유효했다.

라디오를 통해 일관된 거짓 정보들을 흘렸고, 조작된 암호를 독일의 감청망에 퍼뜨렸다. 뿐만 아니었다. 독일의 항공사진을 대비해 헐리우드 특수효과 팀을 섭외하여 영국 켄트주에 대규모 진지를 구축하고, 탱크와 전차 모형들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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