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으로서, 그 형태를 벗어난 가족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차별한다.
가족 내 성차별적 위계구조와 자녀를 소유물로 대하는 부모라는 권력이 아동학대를 낳는다. 인권은 가장 가깝고 작은 곳에서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아이에 대한 '체벌'을 이야기할 때, '학대는 안 되지만, 체벌은 어느 정도 필요할 수 있다'는 견해는 아직도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나도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육환경에서 자라나서, 체벌받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늘 끔찍히 싫었지만, 남의 가정에서 교육 목적으로 적절한(?) 체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체벌부터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체벌과 학대의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해서 실제로 체벌의 강도가 점점 더해지면서 학대가 된다는 것이다. 체벌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학대에 대해서도 민감성이 떨어지는 등 둘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교육목적이라는 말도, 성인에 대한 폭력과 아이에 대한 폭력을 달리 보아야 할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이를 별개의 인격체로 보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체벌은 반사회성이나 공격성을 기르고 폭력을 내면화하고 공포를 기를 뿐 기대하는 바와 같은 교정효과는 없다고 한다. 체벌로 반성을 이끌어낸다기보다는 모욕감을 주고 체벌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시킬 뿐이다. 어릴 때 맞아서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맞았음에도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을 짓'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할 때 종종 쓰이는 파렴치한 그 말이 왜 아이에게는 쉽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결국 나도, 체벌받는 건 끔찍하게 싫었으면서도 남의 가정에서 체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간섭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은 아이를 그 가정과 양육자에 종속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동 인권이 중요하게 된 역사는 서구에서도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1923년 세이브더칠드런의 아동권리선언에서부터 신체, 비신체적 처벌을 모두 금지하는 1989년 UN 아동권리협약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여러 차례 아동의 권리를 선언하고 확인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아동의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꼬마 니콜라에서도 아이들이 말썽을 부렸다는 이유로 뺨을 맞는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1979년에 이르러서야 스웨덴에서 최초로 (가정 내) 체벌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였다고 한다. 생각보다 늦지만 우리보다는 낫다.
우리나라는 아동복지법에서 아동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민법에서는 여전히 친권자가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결국 체벌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하지만 글쓴이가 쓴 것처럼, 체벌은 쉽게 학대로 이어지고 실제 효과도 거의 없는 점, 아동도 개별 인격체라는 점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친권'을 앞세워 아이에 대한 개입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나, 부모의 '친권'은 권리가 아니라 자녀의 보호를 위한 '의무'로 보아야 한다. 아동은 공공의 보호가 필요한 가족 내 약자이다. 친권이 아이의 인권을 침해할 때에는 국가가 개입해서 '아동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영아유기/입양의 상당수는 혼외로 태어나는 아이들(미혼부모의 아이들)에게 일어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한 사회적 차별, 생계문제, 직접 키울 때보다 입양 보낼 때 지원금이 더 높다는 것, 출산이나 양육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 등의 문제들이 양육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정 형태나 인종, 국적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혜택과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후관리가 허술한 입양절차도 보완이 필요하고, 민간입양기관과 지자체에서 담당하는 분야가 중복되어 제도가 일관되게 운용되지 않는 것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본다. 이 책에서는 실상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자녀를 소유물로 보는 심리와, 가족이 복지와 양육부담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상황, 즉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급속한 근대화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가족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하는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결국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저해한다. 그리고 가족주의의 확산은 다른 집단에 대한 신뢰 약화와 배타적 경향을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스웨덴의 경우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가 기본 접근방식이라고 한다.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은 강조하되 이를 위한 환경, 제도를 사회에서 만드는 것으로 오히려 사회적 신뢰가 높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이라는 정서에 기대기보다는,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확대가족'의 시선(내 아이처럼, 내 가족처럼) 말고, 개인의 개별성, 인권 존중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돌봄, 약자보호에 대한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