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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사장님 - 2020년 제26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ㅣ 일공일삼 30
이지음 지음, 국민지 그림 / 비룡소 / 2020년 7월
평점 :
고양이 집사라야만 쓸 수 있는 고양이의 특징과 습성이 디테일하게 들어있는 책이다. 나는 고양이를 안 키워봐서 잘 모르지만 작가가 고양이를 오래 키웠고, 묘생의 고달픔과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근데!! 이 심각한 주제를 엄청 황당하고 웃기게 말하는 책이라는 거. 능청스럽고 유들유들하고,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안정감있는, 뭐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느낌의 책이다.
주인공 지훈이가 강남 살다 망해서 이동네로 이사왔고, 고양이의 예명이 강남냥이고, 철지난 강남스타일 노래를 부르고, 요런 노골적 풍자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가 애매한 지훈이의 알바 스토리는 재밌었다.
강남의 좋은 아파트에 살던 지훈이네는 아빠 사업이 망해서 이동네 원룸으로 이사왔다. 아빠는 떳떳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노라는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갔고, 팔자좋고 예쁘던 엄마는 늦도록 일하는 생계인이 되어 있었고, 지훈이는 동생을 돌봐야 했다. 풍족한 생활에서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지훈이는 알바를 구한다. 그런 지훈이 앞에 나타난 일거리는 바로....
책의 제목인 '강남 사장님'의 시중을 들고 그의 유튜브 채널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지훈이는 '김 집사'가 된 것이고 동시에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된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어서 몰랐는데, 알고보니 사장님은 백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라나? 성공한 사장님은 지훈이네 집과는 비교도 안되는 좋은 집에 장 실장이라는 동업자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장 실장은 지훈이가 꽤 똘똘하게 일하는 걸 알아보고는 당분간 모습을 감춘다. 나중에 반전을 가지고 나타나기 전까진.....
그동안 '강남 사장님' 채널의 영상을 제작하고 업로드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사장님 노릇을 톡톡히 하며 집사를 부리는 모습, 고양이 나이로 환갑이 다 된 할배 고양이 주제에 카메라 앞에선 온갖 재롱과 귀여운 척을 다하는 모습, 길고양이 시절 과거를 회상하며 지훈이를 부러워하는 모습, 가끔 어록에 적어놓고 싶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모습.... 이 다양한 캐릭터가 한데 어울린 강남냥은 처음에 볼 땐 좀 떨떠름했었는데 볼수록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줄거리를 더 적기는 좀 그렇고, 어록 수록후보가 될 만한 말을 몇개 적어 보겠다.
"팔자 좋은 소리 하는구냥. 길고양이들은 가족이랑 같이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옹. 엄마가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일찍 돌아가시거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헤어지게 되거나, 아니면 새끼가 일찍 죽거나 하는 경우가 더 많다냥. 자네 나이가 열두 살인데 아직까지 가족이 다 살아 있다니, 고양이라면 그건 기적 같은 일이다냥." (47쪽)
"갖가지 고생을 겪어 보면 돈 고생이 그중에 젤 양반이란 걸 알게 될 거다냥. 하여간 길거리 생활을 안 해 본 사람들하곤 인생을 논할 수 없다냥. 애나 어른이나 체험없이 책만 들여다보니 인생이 뭔지 모른다냥." (51쪽)
"내가 이 나이까지 산 건 기적이다냥. 복권 당첨이나 마찬가지다옹. 살아 보니 고생값이란 게 있다냥. 고생 뒤엔 선물이 있다냥." (59쪽)
"그럼 지구 땅이 다 사람들 거라는데 어디다 똥을 싸냥? 그럼 고양이는 죽을 때까지 똥 안 싸고 배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 빵 터져 죽으란 말이다냥? 버린 것 좀 먹으면 동네 지저분해진다고 욕하고, 배고파서 울면 시끄럽다고 돌멩이 던지고, 똥싸면 똥싼다고 뭐라 하고 말이다냥. 지구 땅을 쓰레기 천국으로 만들고 밤낮없이 시끄러운 곳으로 만든 게 누군데 말이다냥." (69쪽)
"잘못한 걸 일일이 기억하고 그러면 사람만도 못하단 소리 듣는다냥. 사람은 받은대로 돌려주지만 우리 고양이는 그런 쩨쩨한 계산은 안 한다냥. 잘못한 걸 까먹어 주는 게 사랑이다냥." (124쪽)
이 외에도 많다. 이 책에서 강남냥이 끝까지 사장님 신분을 유지했으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았을 터. 사장님은 폭망했고 지훈이는 알바비를 떼어먹혔지만, 서로 진심으로 원하던 걸 한가지씩은 얻게 됐다. 그게 사장님이 말하던 '고생값'이라는 건가? 마지막에 사장님은 트레이드마크이던 드레스를 벗고 후드티를 입고 있다. 그리고 명칭도 '할배'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어느새 할배가 말없이 다가와 내 발에 꼬리동무를 했다." (135쪽)
이거 명문장이다. 꼬리동무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아래 국민지 그림작가의 그림이 그 장면을 이해시켜 준다. 그동안의 우여곡절, 앞으로 남은 우여곡절도 다 품어줄만한 그림이다. 이 책의 엉뚱함도 황당함도 웃김도 이 마지막 문장에서 따뜻함으로 다 모아져 마무리된다.
아이들에게 소개할 만하고, 소개해서 욕 안먹을 (소위 안전빵인) 재미나고도 찡한 책 한 권이 또 나왔구나.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