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24시간 살아보기 - 2000년 전 로마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생활 밀착형 문화사 고대 문명에서 24시간 살아보기
필립 마티작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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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로마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생활 밀착형 문화사

독특하고 신선한 로마사가 찾아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왕과 영웅들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정도 전 14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어느 여름 로마의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제빵사, 세탁부, 술집 여주인, 무역업을 하는 상인, 후견인의 눈치를 보는 상원의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니 무척 유쾌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여섯 번째 시간인 00:00~01:00 모두 잠든 밤을 책임지는 순찰대원을 시작으로
02:00~03:00 로마의 아침식사를 책임지는 제빵사,
06:00~07:00 길바닥 수업이 싫은 남학생,
10:00~11:00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선언하는 소녀,
17:00~18:00 마음의 평정을 잃은 요리사,
22:00~23:00 환호 속에 검을 뽐내는 검투사를 거쳐
마지막 자정 23:00~00:00 기꺼이 오락거리가 되어 주는 식객까지 하루 24시간 24명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로마인의 이야기가 합쳐져 로마라는 거대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진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고고학, 역사적 사실 등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만들어져 각각의 인물들이 사실감 있게 다가온다. 24명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개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재미있는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네로 황제가 일으켰다고 잘못 알려진 로마 대화재 같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 고대 로마 철학자, 역사가들이 남긴 저서에 담긴 글, 시들이 내용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있어서 현실감을 더해준다. 

로마에서 자정은 밤의 여섯 번째 시간이라고 불렸다. 이야기는 깊은 밤 치안유지와 화재예방에 힘쓰는 야간 순찰대원이 근무에서 시작된다.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상거래가 많이 이루어지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더욱 화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큰 재앙이었다고 한다. ‘방화범'은 로마인들에게 최악의 욕설이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로마법은 현재 서양과 그 영향을 받은 많은 나라들의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2000천 년 전 로마에는 이미 범죄, 상업 뿐 아니라 매춘업, 세탁업 등에 대해서도 법률과 세금이 정해져있고,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조사하는 법학자도 존재했다.

이 시대에 벌써 소방차나, 알람시계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해의 길이에 따라 시간을 조정하고, 물시계를 이용하여 원하는 시간에 소리를 나게 하는 ‘클렙시드라’라고 불리우는 알람시계가 관공서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이 주문하여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 로마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시대의 로마와 현재. 2000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공부 하기 싫어하고, 상원의원은 자신보다 더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후원자의 눈치를 보고, 연애에 빠진 소녀는 바람을 피운 남자친구에게 상처를 받으며, 술집에서는 즐거움과 소란스러움이 공존한다. 장이 서는 날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수레들로 인해 교통 정체가 일어나고, 학생들은 받아쓰기를 틀리면 체벌을 받는다. 상인, 세탁부, 요리사, 석공. 모두 자기 직업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읽는 내내 생생하게 그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평소 역사를 어려워했던 사람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인 듯 하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다룬 책이 로마 뿐만 아니라 나라 별, 시대별로 많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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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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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타인에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또한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외국어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 집’과 'My home' 같은 단어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공동체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 같은 국가 별 문화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언어를 자의가 아닌 이유로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자신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에게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로 친숙한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 은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잃고 문맹이 되어버린 작가가 프랑스어를 새로 배우고 다시 글을 쓰게되는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질병과도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읽기와 쓰기에 몰두하던 그녀는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모국 헝가리에서 썼던 시와 글들을 모두 두고 남편과 갓난 아이, 그리고 사전이 든 가방만을 들고 스위스로 망명을 하게되고, 프랑스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다.
학습이나 취미가 아닌 삶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또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언어의 상실과 탄생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의 글은 그래서인지 작고 가벼운 책의 크기에 비해 무척 무겁다.

간결한 문장 속에 담긴 책 속 그녀의 이야기는 항상 현재형이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P9)

'시작‘
네 살의 그녀는 ‘읽는다’라는 전쟁을 이제 막 시작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P112-113)

그리고 문맹이 된 그녀는 새로운 언어와 함께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 망명길 속에서도 그녀는 사전과 함께였고, 이제 또 다른 사전과 사랑에 빠졌다. 조국을 잃고, 언어를 잃었지만, 공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소리에 운율을 맞추어 그녀는 이제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와 함께 사전을 손에 들고 언어를 배워나간다. 소설과, 희곡들. 그녀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태어난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작가들처럼 글을 쓰진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의 고통에 무릎 꿇지 않고, 사랑하는 언어의 상실을 이겨낸 그녀의 글은 간결하지만 큰 울림으로 내 마음속을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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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ffee Dictionary - 커피에 대한 모든 것 The Dictionary
맥스웰 콜로나-대시우드 지음, 김유라 옮김, (사)한국커피협회 감수 / BOOKERS(북커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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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커피는 나의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 중에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핸드드립, 캡슐, 더치커피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시면서도, 막상 원두의 차이점이나 산미, 산지 등 커피에 대해 깊게 들어가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그런 나에게 온 책 'COFFEE DICTIONARY'
제목 그대로 A (Acidity 산미)부터 D (Decaf 디카페인), U (Umami 감칠맛)을 거쳐 Z (Zambia 잠비아)까지 말 그대로 사전처럼 역사, 산지, 도구 등 커피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커피사전이다.

평소 커피에 대한 다른 책들처럼 시대 흐름별이 아닌 사전처럼 A~Z까지 각각의 해당되는 단어들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고,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 관련 단어에 대한 페이지 안내, 저자가 직접 그린 아름답고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컬러풀한 일러스트들이 어우러져 책의 재미를 더한다.

 

 

사전의 단어의 선별도 흥미롭다. 커피에 대한 사전이 있다면 당연히 수록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결점두(Defects), 싱글 오리진(Single origin), 커핑(Cupping) 같은 단어들부터 과테말라(Guatemala) 등 다양한 산지들은 물론이고, 기후 변화(Climate change), 감각 과학(Sensory science), 경종학(Agronomy) 같은 커피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들과 칼디(Kaldi),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런던 로이즈(Lloyd's London) 등 역사에 관련된 단어도 종종 보인다.

반갑게도 한국(South Korea)이라는 항목도 존재한다.
‘싱글 오리진’이란 한 가지 원두만으로 추출된 커피가 아니라 한 국가에서 생산된 커피라는 점, 커피 산지에 따라 카페인의 함량이 틀리다는 점 등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주 들어본 적 있지만 막상 설명을 하려면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다양한 개념들이나 평소 잘 알지 못했던 커피에 대한 소소하고 재미난 지식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커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부터 커피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 맥스웰 콜로나-대시우드는 영국바리스타챔피언십에 세 차례나 우승한 바리스타이다. 초상화나 일러스트를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저자가 어느 날 작은 카페에서 만난 한 잔의 커피가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고,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책 속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커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통해, 그리고 책 속에서 나오는 커피에 대한 다양한 사실들을 통해 ‘커피’가 단순한 기호 식품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느껴졌다.

9세기 경 우연한 발견을 통해 수도사들의 수행의 도구로, 다양한 시대를 거쳐 커피 하우스라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다양한 사회의 발전을 함께 걸어 온 커피가 이제는 우리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하고 있는 커피의 현재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대형프렌차이즈 카페에서 다양한 로스터리카페로, 산지, 추출방법 등 여러 가지 새로운 방식들의 개발로 변화해 가는 커피가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들을 보여줄 지 기대가 크다. 
일단 지금 당장 맛있는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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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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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
여행 초기의 뜨거웠던 피는 식고 마침내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얼어붙는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기로 했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그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
여행의 중반, 갑자기 나는 회생했다.
또다시 인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졌다.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되찾았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체온이다. ’
 
책 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 책은 그 어떤 여행기와도 닮지 않아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리아, 인도, 티베트, 버마(미얀마), 중국, 홍콩, 한국을 거쳐 일본 고야산까지 400여 일간의 작가의 여정에서 도시의 모습이 아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보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만나기 힘든 사창가, 시장, 슬럼가의 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느껴진다. 책을 읽는 내내 글을 읽고, 사진을 보고, 그리고 강렬하게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스탄불의 바다 바람 냄새가 느껴지고 음식들의 냄새가 생생하고. 시장의 비릿한 생선냄새와 길에서 나는 썩어가는 냄새가 느껴진다. 썩어가는 도시의 냄새까지도 작가는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방랑의 사전적 의미는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이다. 책을 읽고 나면 왜 제목이 동양여행이 아닌 동양방랑인지 알 수 있다. 그의 발걸음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다. 정해진 일정도, 목적도 없다. 우연히 보게 된 음란서적 표지에서 본 여성을 찾기 위해 터키 안탈리아에서 앙카라로 무작정 찾아가고, 흑해가 정말 검은 물인지 궁금해서 무작정 배를 타고 떠난다. 갑자기 속세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티베트의 산속 깊은 사원으로 들어간다. 작가의 발걸음은 동양의 어느 곳을 항상 방랑하고 있었다.
 
방랑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엄청난 에너지로 음식을 먹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가 먹는 코윤 바쉬(통째로 구운 산양의 머리를 반으로 자른 요리)의 사진 만큼이나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티베트 라디크 산사에서 자신의 한계를 만나고 40대가 되어 산사에서 도망치는 승려와 40년 동안 산사에서 달아난 승려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노승을 만난다. 산사에서 내려 오는 날 작가가 찍은 사진의 노승의 표정에 한참을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우연히 음란 서적의 표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찾아 나선 트렌스젠더 매춘부 하산 타스데미르. 공무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남자는 어느 날 성전환수술을 하고 가수, 매춘부로 살아가다 팔려가고 스스로 지중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버마에서 만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자신들의 나라를 찾아온 이방을 위해 땀을 흘리며 해님의 그늘을 만들어준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상하이에서 만난 게의 참극은 어딘지 쓸쓸하고 잔혹하며, 동생과 함께 성공한 삶을 꿈꾸며 중국에서 돼지 방광을 몸에 묶고 바다를 헤엄쳐 홍콩으로 온 유광은 14년이 지나도 마약 운반을 도우며 방 한 칸에서 살고 있지만 왠지 나에게 그는 웃고 있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작가에게 판소리로 기억되는 한국. 1981년의 도시의 풍경은 나에게 너무나도 낮설다. 이미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청량리의 예전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작가가 여행을 했던 1980~1981년에서 어느덧 4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모습들이 현재와 많이 다르지만 그 속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생생한 묘사와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웬지 익숙한 시선의 사진들은, 어떨 때는 거북할 정도 솔직하고 감정적이다. 초점이 흐린 사진들은 외롭고, 슬프고, 강렬하다.
 
그는 1여 년 동안의 여행에서 만난 각 나라의 사람들을 표정으로 기억한다. 터키의 사람들은 심각하고 검소한 표정으로,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은 분노의 표정으로, 불교국인 버마(미얀마), 태국은 조용한 미소로, 중국 사람들의 표정은 포커페이스, 그리고 한국은 유교적 미소로 말이다. 40여 년 전 이 여행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서양 물질문명의 추종자가 된 일본을 안타까워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발광하게 될 것이라 염려한다. 하지만 예전에 각각 다양한 다른 표정을 가졌던 나라들 역시 이제는 그가 말한 일본의 모습과 많이 닮아져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다.
 
여행의 마지막 고야산에서 정리하는 동양과 일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여행서라기 보다 철학서에 가깝다.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세계를 광물적 세계와 식물적 세계, 이슬람과 힌두, 불교의 세계로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종교와 지리적 요인, 환경이 그 나라의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나에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의 모습은 결국 그 나라의 문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보고, 느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자아에 대해 생각해본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있는 그대로 볼 것. 선악과 미추가 뒤섞인 곳에 세계가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볼 작정이다. (P48)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
여행 초기의 뜨거웠던 피는 식고 마침내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얼어붙는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기로 했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그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
여행의 중반, 갑자기 나는 회생했다.
또다시 인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졌다.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되찾았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체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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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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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래빗네 집에는 아기 토끼가 넷 있었는데,
이름은 플롭시(토깽이), 몹시(아기), 코튼테일(솜 꼬리)과 피터였다.
그들은 엄마 토끼와 커다란 전나무 뿌리 밑 모래 두둑 안에서 살았다. (P8)
 

 

파란색 웃옷을 입은 토끼 ‘피터 래빗’을 어릴 시절 무척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소품으로, 그림으로 가끔씩 접하곤 했던 피터를 새로 출간된 빨간색 양장본 ‘피터 래빗 전집’으로 다시 만났다.

다시 읽은 책은 서문의 작가의 소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연과 동물, 문학을 사랑했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는 아픈 가정교사의 어린 아들을 위해 피터 래빗이라는 동화를 지어 주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식물학자라는 꿈을 저지당하고, 병으로 약혼자를 잃는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는 투쟁으로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간 작가의 생각이 이 아름다운 동화 27편 속에 녹아있었다.

피터 래빗 전집에는 말썽쟁이 피터 래빗를 시작으로 그 형제들인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사촌 벤자민, 고슴도치 티기윙클, 고양이 리비, 다람쥐 넛킨, 개구리 제레미 피셔 등 사랑스러운 많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성인이 되어 다시 본 동화는 어렸을 적 보았던 천진난만한 내용 이외에도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캐릭터들 속에 담겨있었다.

 

우연히 도시로 가게 된 시골 쥐 티미는 도시 쥐 조니를 만나 도시에서 생활하지만,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조니의 도움으로 시골로 돌아온 티미는 여름대청소를 피해 시골로 놀러온 조니에게 시골에서 함께 살자고 하지만 조니는 도시로 돌아간다.

'이 사람에게는 이곳이 맞고, 저 사람에게는 저곳이 맞다' (P575)

무척 공감가는 문구였다.

 

진저와 피클스가 운영하는 가게는 모든 손님에게 외상을 허용했다. 모든 손님들은 외상을 했고, 물건은 많이 팔렸지만 매상은 전혀 없어 피클스는 개 면허증을 사지 못하고, 경찰에게 단속될까 두려워한다. 결국 개와 고양이는 가게 문을 닫았고, 마을 동물들은 물건 가격을 모두 올린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삽화와는 달리 씁쓸한 현실적인 이야기다.

피터 래빗의 엄마는 아이들에게 맥그리거 씨의 텃밭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아버지가 그 집에 들어갔다가 맥그리거 부인의 파이가 되어 버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피터는 맥그리거 씨의 텃밭에 들어가 밭에 있는 채소들을 먹다 쫓기게 되고 웃옷을 잃어버린 채 간신히 도망쳐 집으로 돌아오고 엄마에게 혼이 난다. 

 

 

아름다운 동화 속에 순간순간 현실이 비집고 들어온다. 인간들이 자연에게 얼마나 위협적이 될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피터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위험 역시 아주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본 이야기는 많은 것이 다르게 보여서 새로웠다. 다시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피터 래빗과 그의 친구들은 사랑스럽다.
등장하는 동물들 모두 생생하다. 맥그리거 씨를 피해 도망치던 중 대문이 닫혀 울음을 터트리는 피터, 루신다와 제인이라는 인형들이 사는 집을 부셔버린지만 크리스마스 전날 인형들의 양말에 동전을 넣어놓고, 매일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새벽 인형의 집을 청소해주러 오는 생쥐 톰섬과 헝카멍카, 동물들의 옷을 다려서 나눠주는 고슴도치 티키윙클 아주머니, 오소리 토미 브록과 늑대 토드씨에서 잡아먹힐 뻔 한 아기 토끼들을 구출한 피터와 벤저민의 마음 따뜻한 이야기와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파스텔 톤의 섬세하고 따뜻한 삽화들은 나를 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뜻한 차를 마시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마지막 ‘래빗네 크리스마스 파티 이야기’를 끝으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 ‘피터 래빗 이야기’로 돌아간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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