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골의 꿈 1
시미즈 아키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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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1 






 만화 <광골의 꿈>은 내가 가장 처음 접한 교고쿠도 시리즈 작품이다. 무려 7년이 지나 다시 읽었고 그 사이에 나도 제법 내공이 쌓였을 테니 전보다 수월하게 읽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허튼 기대였다. 중간까지는 무난하게 읽었지만 후반부에 교고쿠도가 등판하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장광설은 이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지만 그의 얘기를 쫓아가다 보면 작작해줬으면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교고쿠도의 등장 횟수가 적은 것이 오히려 독자를 배려한 작가의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 후반부에 등장해 추리를 주입하는 것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으나, 교고쿠도가 늘 말하듯 사건의 정체를 알고 나면 참 '바보'스러운 지라 최대한 추리 장면을 뒤로 빼는 것이리라 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사건을 과연 바보스럽다고 봐야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교고쿠도야 아예 사는 세계가 다른 천재적인 인물이니 그렇다 쳐도 독자 중에 작중에 제시된 단서만으로 사건의 진상은커녕 윤곽을 파악할 사람이 몇 있을까 싶다. 이미 시리즈 1편부터 공정한 추리소설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긴 했지만 <광골의 꿈>은 전편 <망량의 상자>보다 훨씬 심하다. <망량의 상자>는 관련이 있어 보였던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과 달리 <광골의 꿈>은 관련이 없어 보였던 사건이 사실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차이가 있는데, 사건의 성질이 어떻든 간에 참 복잡하게도 꼬아서 한 번에 독파하지 않으면 내용 파악에 애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가령 얘는 누구고 그 사건은 무엇이며 그건 또 무슨 개념이냐... 장르의 특성상 정보를 많이 다루는 추리소설은 원래 한 번에 독파하는 것이 감상함에 있어서 일종의 철칙이긴 하나 이 시리즈는 정도가 심하다. 분량도 길고 내용도 어려운데 한 번에 독파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버거운... 정말 난이도 높은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만화판 <광골의 꿈>을 원작 소설보다 높게 치는 데엔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까다로운 반전을 교묘한 작화로 그럴싸하게 소화한 것과 소설에서 묘사된 것보다 매력적으로 등장한 캐릭터들의 모습 덕분이 크다. 캐릭터 소설이란 정체성도 강한 시리즈이기에 캐릭터들의 매력이 직관적으로 와 닿는 만화 쪽이 더 몰입될 수밖에 없다. 1화에서의 이사마와 아케미의 묘한 성적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도 흥미로웠고 세키구치 못지않게 답답함을 유발하던 후루하타와 등장이 짧은 게 아쉬웠던 우타가와의 호탕한 모습, 비록 전편보다 등장 횟수나 활약은 적어졌지만 시리즈 레귤러 4인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캐미 등은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며줬다. 그리고 '악당'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의 답이 없는 수준의 사악함을 향한 이 작품의 비판 의식은 제법 유익하게 읽혔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향한 비판 의식은 1편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다룬 것이지만, 이 작품에선 무려 교고쿠도도 자신의 내공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겠음을 인정하는 상대가 나오는 터라 제법 절망적인 기분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시리즈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인간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악습을 끊어내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지 않나 싶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고 싶지만 몇 백 년에 걸쳐 맹신하는 치들을 보노라면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낙관적으로 들린다. 

 이야기의 흑막이라고 할 수 있을 종교인들의 정체며 그들의 맹신적인 믿음이 너무나 초현실적이라 그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밝혀내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명쾌하게 들리지 않고 혼란스러움만 가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막판에 살인사건의 인과도 적잖이 복잡해 정작 범인의 동기나 사건 수사를 방해한 인물의 심리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많은 정보가 주입돼 정리되지 않았는데, 마지막엔 뒤가 궁금하다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 읽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런데 후반부에 전개가 너무 빠른 것에 비해 주입되는 정보량이 많아서 일일이 이해할 때까지 곱씹기를 반복하는 것도 지겨워져 나도 모르게 될 대로 되라며 반쯤 정신줄 놓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원작 소설보다 괜찮게 읽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라 시리즈 다음 작품인 <철서의 우리>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원작 소설은 상중하 세 권으로 나뉘어졌는데 듣기로 시미즈 아키 작화의 만화는 5권으로 끝난다고 한다. 국내에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았는데 만약 출간된다면 사서 읽어볼 생각이다. 원작의 어려운 내용은 어려운 그대로 옮기되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그 작가의 재량은 정말 믿을 만하다. 그야말로 임자가 만화화를 맡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시리즈의 악명이 겁나는 독자라면 만화로 먼저 입문하는 것도 꽤 괜찮은 시도라고 단언하겠다. 

 예전엔 곧 죽어도 원작 먼저 접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교고쿠도' 시리즈는 만화로 먼저 접하고 만화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 저장한 채 원작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래야 원작 시리즈의 맛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확률이 크다. 원작 먼저 읽었다간 형이상학적인 대화만으로 기본 100페이지 채우는 전개에 질리거나 이 다음 장면이 재밌으리란 확신이 들기에 다소 호불호가 갈릴 테니 어지간하면 만화로 먼저 접하는 걸 추천한다. 

구원이란 하는 쪽이 아닌 받는 쪽의 문제일지도 몰라. 인간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구원받는다면 그 또한 신의 뜻이겠지. - 4권 제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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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혈맥 4
야스히코 요시카즈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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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를 찾아간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만화는 흥미로웠던 도입부와 지루한 중반부를 거쳐 역대급 용두사미의 전개를 내며 결말을 짓는다. 중반부가 지루하긴 해도 내게 일본 근대사가 생소해서 그런 거지, 원체 다사다난했던 시대인 터라 나름대로 공부하는 맛으로 읽어나갔는데 결말에서, 그것도 최종화에서 그런 식으로 결말을 짓는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캡틴 아메리카식 전개도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거기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다수의 독자들의 추측대로 일본에서 역사물은 원하는 대로 이야길 풀어내고 끝맺기가 무척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일본의 정서가 역사를 직시하는 것을 민감하게 여기는데 본작에선 천황에 대해 다소 '무례하게' 묘사하기까지 하니 작가가 생명의 위협 같은 걸 느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으로서 퍽 재밌게 읽혔던 건데. 주인공이 못미덥고 철부지 같은 면이 있어 답답함을 유발하지만 그런 인물이 뭔가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것 같아 기대됐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이 일본인 만화가가 어떻게 그릴 것인지 궁금해 크고 무거운 책을 독파했던 것인데... 


 전쟁 중에 역사를 탐구한다니, 이 무슨 팔자 좋은 소리인가 싶지만, 당시 일본은 조선을 순조롭게 병합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의 조상은 같다는 내선일체라는 주장을 해댔고 그 근거를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찾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듣기엔 조상이 같다고 순조롭게 병합에 응할 나라가 어딨겠느냐고 비웃고 싶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곧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러한 성향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대동소이하지 않았나 싶다. 정작 주인공을 비롯해 주인공의 은사, 작중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내선일체를 지지하고 그를 위해 얼마간의 역사적 증거를 조작하는 짓을 거부하지만. 식민지라는 치욕적인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에선 자주 간과되는 사실인데, 그 당시 일본인들 모두가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식민지 합병에 적극 동조한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과 처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조한 척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같다. 

 러일 전쟁에서 이기고 조선도 순조롭게 집어삼킬 듯하지만, 거대한 역사적 움직임엔 당하는 입장 못지않게 피해를 가하려는 입장도 상당한 각오가 동반된다. 이래나 저래나 큰 혼란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고, 상대적으로 일본 본토는 평화로운 편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곧 벌어질 예정인 역사적 대사건의 발발에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작품은 제법 잘 그려냈다고 본다. 대체로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 아기자기하고 코믹한 장면은 분위기를 환기시켜줬고 그 덕분에 진행이 좀 느린 것 같아도 후반부에 주요 인물이 하나의 무대에 모이자 반가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주인공 아즈미 혼자 냉동 인간이 돼 현재로 넘어오게 되는 결말 때문에 나는 지금도 황당함이 가시질 않는다. 


 작가의 다른 대하 역사물인 <무지갯빛 트로츠키>와 <왕도의 개>도 용두사미라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작품처럼 심하지는 않다고 한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건데... 어쨌든 용두사미라고 하니 망설여진다. 일단 책들의 무게와 분량이 어마어마하고 가격도 부담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게다가 역사물이잖은가. 실제로 이 작품을 읽을 때도 4~50% 정도는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들은 채 문맥으로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냉동 인간이란 설정이 들어가야 했다면 차라리 아즈미가 2016년 병동에서 깨어나는 걸로 이 만화는 시작돼야 했다고 생각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딱 그런 설정이잖은가. 이렇게 아무 복선도 전조도 없이 시간대를 바꿔버리는 짓은 긴 이야기를 쫓아온 독자를 우롱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설령 극우한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해도 쉽게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냉동 인간 설정 자체는 그 나름대로 여운을 남기긴 하지만 이게 최선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품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묘사하는 방식이 사뭇 신선한 데가 있어 그것만으로 눈길이 갔기에 한국인으로서 거슬렸던 전개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데... 고작 이런 결말을 보기 위해 그 긴 이야기를 쫓아갔다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진실에도 알고 싶은 진실이 있고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진실도 있어요.

결정하는 것은 결국 거대한 힘이죠. - 4권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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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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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전편 이후로 14년만에 출간된 이 후속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전편 이상으로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금방 출간됐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일본 독자들처럼 10년 넘게 기다린 결과물이 이거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 같다. 사실상 시리즈에 대한 애정과 캐릭터들의 캐미, 찰진 대화에 의존하며 읽었지 순수하게 흡입력이 넘치는 이야기라 완독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나 논점을 알기 힘든 이야기던지 두 번의 시도만에 완독할 수 있었다. 처음엔 내가 이해를 못해서 재미가 없는 건가 싶었지만 두 번째 읽으니 설령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파악을 마쳤다 해도 변함없이 재미없을 이야기란 결론이 나왔다. 

 전편에 비해서 재미가 없다는 것도, 기대가 커서 실망이 컸다는 얘기도 아니다. 책 뒤에 소개된 '소설의 진정한 재미, 그것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썼다'는 작가의 말이 무색하게 소설의 진정한 재미를 논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서사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다. 행방이 묘연한 의뢰인을 쫓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스러운 도입부였고 사와자키가 탐문을 하는 이상한 집념, 니시고리를 비롯해 경찰에게 유난히 비협조적인 태도, 이번에도 어김없이 개입되는 세이와카이 등 이미 전편에서 다룰 대로 다룬 서사이고 이번이라고 흥미롭게 비틀지도 않는다.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인 사와자키의 모습도 작위적으로 비쳐졌고 - 전화 안내원은 덤이다 - 작품 말미에 녹아든 3.11 대지진에 대한 언급이나 감상도 다소 구태의연해 14년의 집필 기간치고 여러모로 애매한 깊이감을 지닌 작품으로 다가왔다. 하도 오래 고치고 쓰고를 반복했으니 시의성이 떨어지는 건 이해하겠지만, 가이즈란 캐릭터의 골때리는 면모와 은행 강도 장면 저도를 제외하면 의뢰인의 행방이나 의뢰의 동기 등 전편과 비교하나 객관적으로 보나 하드보일드적인 서사로 풀어내기에 보잘것없어서 내가 애당초 이 시리즈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도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다. 


 데뷔작은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두세 장에 한 줄씩은 메모를 하고 싶을 정도로 문장력도 뛰어났고 복잡하지만 냉소적이고 분위기 넘치는 플롯과 사건 묘사는 이 작가를 가히 '아시아의 챈들러'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는데 싶을 정도의 '품질'을 자랑했다. 매번 이만한 품질의 작품을 선보이니 도가 지나쳤다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과작 작가임에도 독자들이 이해해준 것인데... 2부 들어서 작풍만이 아니라 품질도 저하돼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차라리 작품을 빨리 쓰던가, 아니면 20년, 아니 30년이 넘어도 좋으니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완성도의 작품을 쓰던가, 어느 한쪽을 잘 골랐으면 좋겠다. 

 일단 후속작이 나오면 읽긴 할 텐데, 이 작품의 마무리가 영 어정쩡해서 후속작에서 잘 이어나갈지 약간의 궁금증이 일기 때문이다. 그 안에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부터 읽어야겠다. 뭐랄까, 흐릿해진 눈을 그 작품으로 정화시켜야겠다. 

묻지도 않은 말에는 대답할 수 없지. 물어봤다 해도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엔 대답하지 않아. 그다지 자랑은 아니지만 탐정도 그런 점에서는 경찰과 같아서 말이지. - 3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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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루즈 1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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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9  






 전에 <O 이야기>의 서평을 둘러보다가 어떤 사람이 그 작품과 <샤토 루즈>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다. 짧게 언급했지만 적잖이 관심이 가 어렵사리 찾아 읽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통해 간신히 구한 이 작품은 잊히다 못해 없어지기 일보 직전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줬다. 아내와 섹스는커녕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않는 주인공이 프랑스의 비밀스런 '성性 학습소'인 샤토 루즈로 보내버린다는 이 엽기적이고 역겨운 이야기는 거의 절대다수의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마음에 쏙 드는 소설이었고 어렵사리 구해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야해서? 분명히 말이지만 야한 걸 기대하고 읽으면 오히려 실망할 확률이 높은 책이다. 물론 그런 부분을 기대하고 읽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허나 이 소설은 주인공이 거액을 들여 자기 아내를 납치해 사실상 성고문하는 것에 동참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에게 어처구니없이 복잡미묘한 심리를 갖는 것을 묘사하는 것에 주력하는 작품이다. 덕분에 기대보다 야하진 않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 감명? 이상한 표현이지만 결말까지 읽으니 감명이란 표현을 쓰는 게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오해할까봐 이 소설이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를 말하겠다. 이 소설은 아내에게 한 짓을 주인공 스스로 미화하기보단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고 말 그대로 아내와의 원만한 성생활을 위해서 라는 자기중심적인 이유를 솔직히 시인하고 있고, 그토록 자기중심적인 주인공이 끝에 가선 원하는 것은 그 무엇도 얻지 못하고 좌절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의 결점을 극복할 모종의 실마릴 얻는 듯하며 결말이 난다. 물론 이 결말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연출이나 문체 덕분인지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난 이렇게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부정당한다고 해도 자신이 생각한 바를 솔직히 말하는 주인공들이 마음에 든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이딴 식으로 살지 말아야지 생각하다가도, 혹시 나에게도 이런 일면이 있지 않은지 반성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물조차 일련의 사건을 겪고 변하거나 변하게 되리라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여운을 안겨주는 법이다. 이것이 내가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가득한 소설 못지않게 결점으로 범벅인 등장인물이 나오는 소설도 즐겨 읽는 이유다. 


 <O 이야기>와 비교하자면, 그 작품에 대해서 내가 예술로 시작해 외설로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샤토 루즈>는 설정의 유사성은 있지만 다행히도 이 작품은 외설로 시작해 예술로 끝난다. 예술로 끝이 난다는 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며 외설로 시작한다는 건 역시나 그놈의 설정 때문이겠다. 하지만 이조차도 <O 이야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일단 주인공의 아내가 70일 동안 갇혀 있던 샤토 루즈는 강도 높게 그녀의 성감을 개조시키려 했고 기어코 성공했지만 그 일거수일투족이 다 다뤄지지도 않았고 그보다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건 아내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리다. 자신에게 그토록 도도하게 굴었던 아내가 성적 접촉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에 경악하고 점점 성감이 발달해감에 따라 괘씸함을 느끼고 일취월장하는 그녀의 모습에 '과연 아내가 돌아와도 내가 만족시킬 수 있을까' 불안함을 느끼는 속마음 등이 아주 솔직하게 다뤄진다. 

 당사자끼리 해결할 부부의 성생활 문제를 주인공이 타인, 그것도 정체도 잘 모르는 집단에 맡겨놓고 혼자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런 아내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면서 자위하는 등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찌질함의 정점을 보여줘 은근히 흥미로움과 안쓰러움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샤토 루즈>라는 작품의 묘미였다. 반면 <O 이야기>는 성노예로 전락하는 여성 O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며 독자는 그녀가 '사랑'이라는 만능 단어로 철저히 이용당하는 것을 앎에도 당사자는 의심하긴커녕 오히려 남자들 입맛대로 성노예로서의 본분을 철저히 내제화하는 과정을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드는 일종의 무력감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그 모든 성적 능욕 과정이 여성의 입장에서 그려져서 처음엔 흥미롭다가도 갈수록 노골적이고 이해불가해져 외설스러움이 극에 달하는 작품이다. 


 <샤토 루즈>에서 성노예로서의 처지를 내제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의 아내다. 작중에서 샤토 루즈가 어떤 공간인지 단편적으로만 묘사됐고, 아내의 시점은 마지막에 주인공한테 남긴 편지에서만 드러날 뿐이라 실제로 그녀가 O와 비교했을 때 정확히 어떤 상태일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샤토 루즈가 <O 이야기> 속 루아시보다 묘사상으로 더 괜찮아 보인다 하더라도 똑같이 대책없이 성에 탐닉하는 장소임엔 큰 차이가 없고 자신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이번엔 자기 의사로 샤토 루즈로 가게 되는 아내의 모습은 섬뜩하며 안쓰럽다. 

 그녀는 남편에게 '만약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당신이 날 샤토 루즈로 보낸 것이 아닐까 싶은데, 지금에 와선 고맙다고 생각한다'고 편지에 썼다. 이 말인즉슨 그녀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변화에 혐오감을 느끼는 단계도 이미 넘어섰다는 얘기다. 그래서 자기 발로 샤토 루즈로 떠난 것이리라. 하지만 성욕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구다. 반면 우리의 육체는 늙고 매력도 점점 떨어진다. 그리고 성욕은 한 번 맛을 들이면 꼭 상대가 있어야 해소가 가능한 욕구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샤토 루즈의, 아니 성욕의 노예로 전락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이야 성욕의 노예로서 여러 남자들한테 예쁨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예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까? 육체는 점점 늙는데? 샤토 루즈가 그녀로 하여금 어떤 확신을 품게 해줬기에 해방된 지 반년이 지났음에도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성욕을 해소해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은 극히 휘발적이라 그녀의 지나친 변화가 제3자 입장에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아내에게 몹쓸 짓을 내고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주인공의 못난 모습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가 샤토 루즈가 보내준 아내의 영상을 보고 도리어 샤토 루즈에게 질투를 느끼고 그들의 저의에 의심하는 것이었다. 샤토 루즈가 여성의 몸에 행하는 압도적인 기술들에 질투를 느끼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을 비웃으려고 영상을 보낸다고 의심하는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주인공은 자신의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자각함에도 그 의심을 쉬이 떨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영상도 본인이 보내달라 부탁한 것임에도 말이다. 자신이 한 짓이 워낙에 미친 짓이고 어지간히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고서 저지를 수 없는 짓인 걸 알기에 그 찌질하다 못해 어두운 심정을 중언부언 끝도 없이 쏟아낸다.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주인공한테 영상을 보낸 샤토 루즈 입장을 해석해보자면, 자신들의 노하우를 보고 배우라는 일종의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지 않았을까 싶다. '느끼지 못하는 여성은 없다, 다만 느끼게 해주는 남성이 적을 뿐이다' 라고 단언할 만큼 여성의 성감은 향상되고 개조될 수 있음을 자신하는 그들이기에 그토록 성실하게 영상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글쎄, 사람마다 성욕이 제각각이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은 없다'는 말은 약간 의심스럽게 들리지만... 아무튼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을 생각하면 딱히 도를 넘은 행동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성감 자극에만 집중했던 그들이 대단히 가학적인 존재로 비춰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주인공의 심정은 자격지심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만약 주인공이 자격지심을 덜 느끼고 영상의 기술을 습득하려 노력했다면 아내가 샤토 루즈로 다시 떠나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아내는 자신을 납치했던 곳으로 성노예가 되기 위해 떠나고, 남편은 아내를 잃고 아내에게 자신의 단점, 예를 들면 자기중심적이고 찌질하고 인간적으로 정을 줄 수 없는 성격 등을 지적당한다. 아무리 사랑 없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체면을 위한 부부 관계였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이별은 다소 안타깝게 느껴졌다. 애당초 샤토 루즈 같은 정체불명의 조직은 끼어들 필요 없이 둘만이서 해결하거나 끝장을 낼 수 있던 관계 아니었나. 납치에 관해선 전적으로 남편의 잘못이라 할 수 있지만 납치 전에 부부로서 대화를 피했던 아내에게도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갈등을 솔직한 대화로 풀 생각 없이 동을 돌린 두 남녀의 모습은 너무나 미숙하게 보였다. 

 이 소설에 뒷장에 '진정한 남녀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란 문구가 있는데 처음엔 이게 뭔 소리인가 했다. 이건 그냥 엽기적인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결말에 이르니 적절한 문구라는 생각이 든다. 섹스나 샤토 루즈는 단지 평행선을 달리는 부부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소재였을 뿐, 관계 개선이나 관계를 끝내는 것 모두 샤토 루즈라는 타인의 손을 빌려 해결하려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은 반면교사로 삼기에 딱이었다. 이런 식으로 살지 말아야지. 꼭 부부 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직장에서도 솔직한 심정을 어필하며 깨지든 바라지 않는 사태로 번지든 할 수 있는 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야지. 그래야 최소한 주인공처럼 어처구니없는 자기 연민에 빠진 채 후회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주인공이 아내가 편지에서나마 바랐듯 자신의 결점을 깨닫고 자신이 바라는 괜찮은 여자와 재혼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샤토 루즈로 간 아내, 아니 쓰키코도 - 내 기억이 맞다면 아내의 이름은 나왔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드러난 적이 없다. 주인공의 모습이 곧 세상 대부분의 남성을 대변하기도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된 연출인 걸까? - 자신이 택한 길인 만큼 자신이 바랐던 것처럼 주체적인 성생활을 그 안에서 잘 이뤄가길 바란다. 아주 열린 결말이다 보니 가능성이 적더라도 그들에게 행복한 삶을 염원해주게 된다. 열린 결말을 접하면 대체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면 작가가 평범한 결말을 거부하며 파격적인 연출로 끝을 내서 나라도 무난하더라도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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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9.7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와 아무 이유 없이 재채기를 하는 아이의 우정 이야기. 서로의 결점은 둘을 외톨이로 만들기도, 그래서 서로를 각별한 친구 사이로 만들기도, 긴 시간이 흘러 성인으로 자란 뒤에도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남과 다른 자신의 개성을 결점으로 여기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훗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대목에선 감탄했다.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엿볼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사귀었던 친구와 다시 만나도 바로 알아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생김새도 많이 바뀌었고 성격이나 가치관도 예전 그대로일 확률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바뀌면 바뀐 모습대로 나름대로 재밌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면 속으로 실망해버리곤 한다. 물론 평생에 걸쳐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선 무서운 사람이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에선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뜻밖의 이별로 서로를 그리워한 두 친구가 성인이 되어 한눈에 알아본 뒤 예전처럼 허물없는 친구가 되는 이야기에 작가는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내겐 저렇게 알아보는 것만으로 반색할 만한 친구가 있을까? 


 시게마츠 기요시의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작품에선 '평생에 기억될 친구는 단 한 명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등장인물들일 텐데, 나는 어떨까? 지금 친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친구라면 대답하기 조금 애매하다. 어렸을 적 친구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그립긴커녕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설령 알아봐도 어색할 뿐일 터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친구'였'다면 그렇게 거북할 리 없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고 한들 엄청 반갑진 않을 듯하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내가 다소 삭막한 인생을 살아온 감이 없진 않은 것 같다. 뭐, 지금이라면 경우는 다르지만 예전엔 친구 소중한 줄 잘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달까? 

 가볍고 따뜻한 작품을 읽었는데 나는 왜 자꾸 무거운 이야길 꺼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작중 인물들이 부러워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게도 그립고 헤어짐이 아쉬웠던 친구가 있었더라면...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지만 반대로 그런 감성을 느낄 여력이 없는 삶도 꼭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별 이상한 걸 다 부러워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품 이야기가 워낙 따뜻하고 흐뭇한 나머지 내가 느끼는 부러움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봤던 것 같다. 어쨌든,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하다니, 짧지만 강렬해서 괜히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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