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혈맥 4
야스히코 요시카즈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9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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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를 찾아간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만화는 흥미로웠던 도입부와 지루한 중반부를 거쳐 역대급 용두사미의 전개를 내며 결말을 짓는다. 중반부가 지루하긴 해도 내게 일본 근대사가 생소해서 그런 거지, 원체 다사다난했던 시대인 터라 나름대로 공부하는 맛으로 읽어나갔는데 결말에서, 그것도 최종화에서 그런 식으로 결말을 짓는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캡틴 아메리카식 전개도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거기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다수의 독자들의 추측대로 일본에서 역사물은 원하는 대로 이야길 풀어내고 끝맺기가 무척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일본의 정서가 역사를 직시하는 것을 민감하게 여기는데 본작에선 천황에 대해 다소 '무례하게' 묘사하기까지 하니 작가가 생명의 위협 같은 걸 느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으로서 퍽 재밌게 읽혔던 건데. 주인공이 못미덥고 철부지 같은 면이 있어 답답함을 유발하지만 그런 인물이 뭔가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것 같아 기대됐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이 일본인 만화가가 어떻게 그릴 것인지 궁금해 크고 무거운 책을 독파했던 것인데... 


 전쟁 중에 역사를 탐구한다니, 이 무슨 팔자 좋은 소리인가 싶지만, 당시 일본은 조선을 순조롭게 병합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의 조상은 같다는 내선일체라는 주장을 해댔고 그 근거를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찾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듣기엔 조상이 같다고 순조롭게 병합에 응할 나라가 어딨겠느냐고 비웃고 싶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곧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러한 성향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대동소이하지 않았나 싶다. 정작 주인공을 비롯해 주인공의 은사, 작중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내선일체를 지지하고 그를 위해 얼마간의 역사적 증거를 조작하는 짓을 거부하지만. 식민지라는 치욕적인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에선 자주 간과되는 사실인데, 그 당시 일본인들 모두가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식민지 합병에 적극 동조한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과 처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조한 척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같다. 

 러일 전쟁에서 이기고 조선도 순조롭게 집어삼킬 듯하지만, 거대한 역사적 움직임엔 당하는 입장 못지않게 피해를 가하려는 입장도 상당한 각오가 동반된다. 이래나 저래나 큰 혼란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고, 상대적으로 일본 본토는 평화로운 편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곧 벌어질 예정인 역사적 대사건의 발발에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작품은 제법 잘 그려냈다고 본다. 대체로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 아기자기하고 코믹한 장면은 분위기를 환기시켜줬고 그 덕분에 진행이 좀 느린 것 같아도 후반부에 주요 인물이 하나의 무대에 모이자 반가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주인공 아즈미 혼자 냉동 인간이 돼 현재로 넘어오게 되는 결말 때문에 나는 지금도 황당함이 가시질 않는다. 


 작가의 다른 대하 역사물인 <무지갯빛 트로츠키>와 <왕도의 개>도 용두사미라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작품처럼 심하지는 않다고 한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건데... 어쨌든 용두사미라고 하니 망설여진다. 일단 책들의 무게와 분량이 어마어마하고 가격도 부담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게다가 역사물이잖은가. 실제로 이 작품을 읽을 때도 4~50% 정도는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들은 채 문맥으로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냉동 인간이란 설정이 들어가야 했다면 차라리 아즈미가 2016년 병동에서 깨어나는 걸로 이 만화는 시작돼야 했다고 생각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딱 그런 설정이잖은가. 이렇게 아무 복선도 전조도 없이 시간대를 바꿔버리는 짓은 긴 이야기를 쫓아온 독자를 우롱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설령 극우한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해도 쉽게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냉동 인간 설정 자체는 그 나름대로 여운을 남기긴 하지만 이게 최선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품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묘사하는 방식이 사뭇 신선한 데가 있어 그것만으로 눈길이 갔기에 한국인으로서 거슬렸던 전개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데... 고작 이런 결말을 보기 위해 그 긴 이야기를 쫓아갔다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진실에도 알고 싶은 진실이 있고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진실도 있어요.

결정하는 것은 결국 거대한 힘이죠. - 4권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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