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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골의 꿈 1
시미즈 아키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9.1
만화 <광골의 꿈>은 내가 가장 처음 접한 교고쿠도 시리즈 작품이다. 무려 7년이 지나 다시 읽었고 그 사이에 나도 제법 내공이 쌓였을 테니 전보다 수월하게 읽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허튼 기대였다. 중간까지는 무난하게 읽었지만 후반부에 교고쿠도가 등판하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장광설은 이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지만 그의 얘기를 쫓아가다 보면 작작해줬으면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교고쿠도의 등장 횟수가 적은 것이 오히려 독자를 배려한 작가의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무 후반부에 등장해 추리를 주입하는 것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으나, 교고쿠도가 늘 말하듯 사건의 정체를 알고 나면 참 '바보'스러운 지라 최대한 추리 장면을 뒤로 빼는 것이리라 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사건을 과연 바보스럽다고 봐야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교고쿠도야 아예 사는 세계가 다른 천재적인 인물이니 그렇다 쳐도 독자 중에 작중에 제시된 단서만으로 사건의 진상은커녕 윤곽을 파악할 사람이 몇 있을까 싶다. 이미 시리즈 1편부터 공정한 추리소설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긴 했지만 <광골의 꿈>은 전편 <망량의 상자>보다 훨씬 심하다. <망량의 상자>는 관련이 있어 보였던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과 달리 <광골의 꿈>은 관련이 없어 보였던 사건이 사실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차이가 있는데, 사건의 성질이 어떻든 간에 참 복잡하게도 꼬아서 한 번에 독파하지 않으면 내용 파악에 애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가령 얘는 누구고 그 사건은 무엇이며 그건 또 무슨 개념이냐... 장르의 특성상 정보를 많이 다루는 추리소설은 원래 한 번에 독파하는 것이 감상함에 있어서 일종의 철칙이긴 하나 이 시리즈는 정도가 심하다. 분량도 길고 내용도 어려운데 한 번에 독파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버거운... 정말 난이도 높은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만화판 <광골의 꿈>을 원작 소설보다 높게 치는 데엔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까다로운 반전을 교묘한 작화로 그럴싸하게 소화한 것과 소설에서 묘사된 것보다 매력적으로 등장한 캐릭터들의 모습 덕분이 크다. 캐릭터 소설이란 정체성도 강한 시리즈이기에 캐릭터들의 매력이 직관적으로 와 닿는 만화 쪽이 더 몰입될 수밖에 없다. 1화에서의 이사마와 아케미의 묘한 성적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도 흥미로웠고 세키구치 못지않게 답답함을 유발하던 후루하타와 등장이 짧은 게 아쉬웠던 우타가와의 호탕한 모습, 비록 전편보다 등장 횟수나 활약은 적어졌지만 시리즈 레귤러 4인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캐미 등은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며줬다. 그리고 '악당'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의 답이 없는 수준의 사악함을 향한 이 작품의 비판 의식은 제법 유익하게 읽혔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향한 비판 의식은 1편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다룬 것이지만, 이 작품에선 무려 교고쿠도도 자신의 내공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겠음을 인정하는 상대가 나오는 터라 제법 절망적인 기분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시리즈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인간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악습을 끊어내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지 않나 싶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고 싶지만 몇 백 년에 걸쳐 맹신하는 치들을 보노라면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낙관적으로 들린다.
이야기의 흑막이라고 할 수 있을 종교인들의 정체며 그들의 맹신적인 믿음이 너무나 초현실적이라 그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밝혀내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명쾌하게 들리지 않고 혼란스러움만 가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막판에 살인사건의 인과도 적잖이 복잡해 정작 범인의 동기나 사건 수사를 방해한 인물의 심리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많은 정보가 주입돼 정리되지 않았는데, 마지막엔 뒤가 궁금하다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 읽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런데 후반부에 전개가 너무 빠른 것에 비해 주입되는 정보량이 많아서 일일이 이해할 때까지 곱씹기를 반복하는 것도 지겨워져 나도 모르게 될 대로 되라며 반쯤 정신줄 놓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원작 소설보다 괜찮게 읽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라 시리즈 다음 작품인 <철서의 우리>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원작 소설은 상중하 세 권으로 나뉘어졌는데 듣기로 시미즈 아키 작화의 만화는 5권으로 끝난다고 한다. 국내에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았는데 만약 출간된다면 사서 읽어볼 생각이다. 원작의 어려운 내용은 어려운 그대로 옮기되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그 작가의 재량은 정말 믿을 만하다. 그야말로 임자가 만화화를 맡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시리즈의 악명이 겁나는 독자라면 만화로 먼저 입문하는 것도 꽤 괜찮은 시도라고 단언하겠다.
예전엔 곧 죽어도 원작 먼저 접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교고쿠도' 시리즈는 만화로 먼저 접하고 만화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 저장한 채 원작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래야 원작 시리즈의 맛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확률이 크다. 원작 먼저 읽었다간 형이상학적인 대화만으로 기본 100페이지 채우는 전개에 질리거나 이 다음 장면이 재밌으리란 확신이 들기에 다소 호불호가 갈릴 테니 어지간하면 만화로 먼저 접하는 걸 추천한다.
구원이란 하는 쪽이 아닌 받는 쪽의 문제일지도 몰라. 인간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구원받는다면 그 또한 신의 뜻이겠지. - 4권 제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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