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로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언문학의 대가 프리모 레비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오늘 이야기할 레비의 유이한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7년 전에 샀지만, 지금까지 소재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에 다시 레비를 읽으면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용비어천가니 하는 기가 막힌 번역과 오탈자 때문에 제발 돌베개에서 이 책을 다시 번역해서 세상에 보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비 30주기를 맞아 돌베개에서 바람대로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같은 절멸수용소 생존자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엘리 위젤이 시오니스트로서 걷고 있는 길과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화해한 화학자이자 문학가였던 레비가 우울증 때문에 67세의 나이로 토리노에서 세상을 떠난지 3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홀로코스트를 다룬 문학이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홀로코스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강변을 늘어놓고 있다. 제대로 된 역사청산 작업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해가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 사회적 과제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무엇보다 작년에 오탈자 때문에 적잖은 짜증을 내면서 꾸역꾸역 읽어냈던 유대인 빨치산 유격대의 활약을 그린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재출간된 것을 열렬하게 환영한다. 예전에 쓴 리뷰를 읽어 보니, 너무 줄거리 파악에만 치중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을 내서 한 번 새로운 버전을 구해서 재독해 보는 것도 레비 30주기의 의미 있는 일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레비가 죽기 5년 전인 1982년에 발표된 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첫 번째 작품은 1978년 스트레가상에 빛나는 <몽키스패너>라고 한다. 이 책도 조만간 구해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혹자들은 나치 치하에서 왜 유대인들이 무력저항을 하지 않았느냐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레비는 그런 유대인들의 소극적 저항에 대한 반대급부에서 지인이 실제로 들은 유대인 빨치산의 무장저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던 전쟁 중에는 몰랐지만, 스탈린의 적군이 결국 나치를 패망시킨 뒤에는 유대인들이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필연적으로 경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아무리 나치가 연합군에게 패퇴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하지만, 파리해방전이나 전쟁 말기에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들이 보여준 실력을 보면 실제로 있었던 유대인 빨치산 활동이 과연 얼마나 전쟁의 대세에 영향을 미쳤을 지 회의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좋은 세상이다. 이제는 인터넷 억세스만 있다면 유투브 동영상을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문득 유투브로 프리모 레비의 동영상을 찾아 봤고, 1982년엔가 프리모 레비가 직접 출연한 <아우슈비츠로의 귀환(Back to Auschwitz)>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가 있었다. 조국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폴란드 땅인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로 가면서 그 시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레이터와 나누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자신은 화학자로 냄새로 주변환경을 분석할 수 있다고 했던가. 이탈리아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보리 냄새와 불타는 석탄 냄새를 잊을 수 없노라고 말했다. 나치 치하의 폴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던지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욕설에 가까운 말도 들었다고 한다. 고급 호텔에 편안하게 기차여행을 하던 현재와 달리 40년 전에는 가축들이나 싣는 그런 화차에 실려 라거(수용소)로 향했다. 포졸리 역에서 기차에 탄 그들은 아우슈비츠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며, 처음에는 보헤미아에 있는 아우스터리츠로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어떤 잔혹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 채, 점령군들이 가축 내몰듯 화차에 실어 보낸 것이다. 그는 아우슈비츠에 밤에 도착했다고 진술하는데, 끔찍한 5일 간의 여행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죽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긴 곧 죽을 존재들에게 그런 설명이 왜 필요했겠는가.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들은 식량이나 물을 준비하지 못했고, 아기(밤비노)는 먹을 것이 없어 젖이 떨어진 어머니에게 아침부터 밤까지 보채면서 울었단다. 그리고 함께 이송된 650명 중에 4/5가 바로 다음날 가스처형실에서 죽었다고 그는 증언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중이던 1944년 2월, 패색이 짙어가던 가운데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총동원 시스템에 돌입했던 독일 3제국은 만성적 노동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이에 유대인 라거의 공짜 노동력은 그들에게 소중한 자원이었다. 유대인 이송열차가 도착하면, 나치 의사들이 수감자들의 건강상태와 교육 정도를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필요한 인력 자원들을 분류해냈다. 파두아에서 온 레비의 친구는 이미 모든 희망을 포기한 듯, 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화학자였던 레비는 전문가들을 필요로 하는 이게파르벤 트러스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라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충분한 칼로리였는데, 수용소에서 공급하는 1,600~1,700칼로리로는 폴란드의 강추위와 고된 노동을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레비는 말한다. 수용소 음식이 역겨웠다는 다른 이들의 증언과는 달리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어쩌면 나라면 절대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죽음의 수용소를 다시 찾은 레비는 강철 멘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던가? 자살로 마감한 그의 삶을 되돌아 볼 때, 그지없이 허망해 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책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레비의 다큐멘터리로 이야기가 옮겨갔는지 모르겠다. 자 다음으로 이번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와 짝으로 출간된 <릴리트> 이야기를 넘어가 보자. 오늘 수중에 넣은 <릴리트>에는 모두 36편의 산문에 가까운 짧은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레비의 소설집 <릴리트>는 <가까운 과거>, <가까운 미래> 그리고 <현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1981년에 발표된 <Lilìt e altri racconti>를 바탕으로 해서 2부와 3부가 추가된 구성이다. 아마존 서지목록을 검색해 보니 영어판으로는 <Moments of Reprieve>라고 소개가 되었는데, 모두 15편의 짧은 소설이 담겨 있었다.

 

급한 마음에 처음의 세 꼭지를 읽었는데, 영문판에서는 <라포포트의 유언>으로 된 제목이 국내판에서는 <카파네우스>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거의 영문판 제목과 비슷한 것 같다. 제목을 대조해 보니 영문판 중에 11편이 <가까운 과거>에 담겨 있고, 나머지 4편은 제외된 것 같다.

 

다른 레비의 작품들이 긴 호흡으로 간다면, 선과 악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릴리트>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레비의 증언문학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아주 적합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고한 작가의 작품이라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렇던가. 내쳐 달려서 단박에 모두 읽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요즘 독서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레비의 책으로 빠져 나올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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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4-27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나이얼,이라는 영화를 보았어요. 홀로코스트를 완전 부정하는 사람과 그걸 증명하려는 측의 법정 싸움이 지난하게 이어지고 결국 승리는 하지만 부인하는 측은 또다른 주장을 끊임없이 펴는 것으로 맺더군요.

레삭매냐 2017-04-27 22:56   좋아요 0 | URL
세월호의 경우처럼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
하려는 세력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입니다.

영화 트레일러를 보았는데,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가져
오라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 장면은 위안부
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의 그것과
공명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영화 <디나이얼> 꼭 보겠습니다.

cyrus 2017-04-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돌베개! 절판된 책을 다시 펴낼 줄 알았어요. ^^

레삭매냐 2017-04-27 23:48   좋아요 0 | URL
거의 귀신 같은 예지력이셨습니다 !
드디어 다시 나왔네요.

전 우선 <릴리트>부터 사서 보고 있는데
기대만큼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