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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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즐겨보는 SBS의 웃찾사의 <기묘한 이야기>란 코너가 있다. 세 명의 개그맨들이 나와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들을 개그 코드로 풀어내면서, 늘상 ‘이렇게 세상엔 풀리지 않는 일들이 많아요’라며 마무리 짓는다. 이웃나라 일본에도 이렇게 기묘한 이야기, 괴담이 오래전부터 유행이었나 보다. 괴담동아리가 있어, 돌아가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비채에서 출간된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도 읽어 보아서 그런지 뒤늦게 알게 된 미야베 미유키(이하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 미스터리 <미야베 월드 2막> 시리즈에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드디어 <피리술사>로 에도 시대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기존에 출간된 책들이 많아서 그런지 읽기도 전에 수집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수많은 미미 여사의 책 중에서 읽은 책이라곤 달랑 <화차> 하나였는데, 미미 여사가 시대물을 또 다룰 줄은 미처 몰랐다. <항설백물어>의 교고쿠 나쓰히코 작가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단박에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아마 비슷한 소재를 다루니 서로 교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기묘하게도 가장 늦게 출간된 책으로 에도 시대의 막을 열었다. 소설의 변조 괴담 매니아/청자로 등장하는 에도의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오치카 아가씨는 정혼자가 변사를 당하면서 그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 에도 숙부 댁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물론 전작인 <흑백>과 <안주>를 읽었다면 더 깊이 이해를 할 수 있으련만. 아직까진 부족하다. 그렇게 영혼이 부서진 오치카를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그냥 그런 항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변조 괴담 컬렉터라고나 할까. 일단 미미 여사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괴담의 화자(話者)들이 이야기 하는 데 있어 부담을 가지지 않기 위해 여성 청자를 배치했다. 게다가 그 여성 청자는 에도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색이다. 뭐 정도라면 그 어떤 이도 숨기고 싶은 비밀도 술술 풀어내지 않을까 싶은데, 오치카 아가씬 마음도 예뻐서 화자를 배려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괴담에 단련이 되면서 상대방이 부담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질문으로 초반 리드를 잡는다.

 

다음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 중의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17세기 에도 시대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기술이다. 하오리니 기모노 같은 일반적인 복식은 물론이고, 사무라이 계급 그리고 소설의 중심이 되는 상인들의 복식에도 상세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지위나 신분을 통한 심리상태와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에도 시대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절기에 따른 관습이나 일본 전국을 아우르는 이야기답게 각 고장의 다양한 면모를 앉은 자리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이런 부분들은 미미 여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피리술사>는 모두 여섯 편의 길고 짧은 변조 괴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도의 꽃이라는 오치카 못지않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결혼을 앞두고 정혼자의 마음이 바뀌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흑백의 방에 와서 나누는 얘기는 여느 카페에서 흘려듣는 연애고민상담을 떠올리게 한다. 다마토리 거울연못이라는 곳에 가서 연인들이 가서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보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설이 있는데, 화자 오몬 아가씨의 할머니가 도전했다가 그대로 되었다고 했던가. 워밍업이 생각보다 부담 없고 간단해서 좋았다. 흑백의 방에서는 굳이 실명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괴담에 관련된 지명도 말할 필요가 없다.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주위에서 진지하게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가지고 있는 고민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청자인 오치카 역시 힐링의 여정 중에 있긴 하지만.

 

연작소설답게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풍경과 그에 따른 미시마야의 쥐 울음소리 흉내내기 같은 행사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상인들의 이야기답게 상가(商街) 고유의 풍습 그리고 끔찍하긴 하지만 떼강도가 들이닥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이야기도 접할 수가 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미시마야도 하마터면 떼강도의 공격을 받을 뻔했다고 하지 않았다고 하던가.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우는 아기> 이야기가 가장 이번 시리즈에서 슬프면서도 기묘하지 않았나 싶다. 겉으로 볼 수 있는 미래의 악행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는 아기의 운명은 고달프지 않을까. 말 못하는 아기의 의사소통방식이 고작 울음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럴 것 같다.

 

40년 전 천재지변으로 온 식구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모두 잃은 중년남자의 한 맺힌 고백도 절절하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평생의 짐이 된 이야기를 오치카 아가씨 앞에서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내의 풍모가 에도 시대 풍습을 담은 우키요에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소설의 백미는 표제작은 <피리술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로 번의 재정을 담당하는 산골마을에서 벌어진 변조 괴담을 들려주기 위해 어느 풋내기 무사가 미시마야의 오치카 아가씨를 찾아온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무가에서 장남보다 여자 아이가 더 중시되었다는 무사 이치로타의 기묘한 고백담은 식인괴수 마구루의 등장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는 무사의 성장이야기가 배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무사는 오치카에게 자신이 극복해야 할 괴담과 어머니가 알려준 비밀을 들려줌으로서 비로소 의젓한 한 명의 무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미신으로 치부될 법한 괴담 이야기가 우주여행이 가능하게 된 21세기에도 여전히 통용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오치카 아가씨와 같이 듣는 청자의 입장이 된 독자는 마지막 <절기 얼굴> 일화에서 그녀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뚜렷한 선과 악의 구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정작 선과 악의 경계 구별은 모호하기만 하다는 것을 말이다.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상인’의 존재야말로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타인의 몸을 빌어 비명횡사해서 저승으로 간 이들의 넋을 진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예의 상인을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죄과를 뉘우치고 스스럼없이 절기 얼굴의 운명을 받아들인 하루이치 삼촌 역시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았던가. 오치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황마다 대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상인을 통해 죽은 약혼자 요시스케 씨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하고.

 

미시마야 시리즈로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의 두 번째 막을 열어 젖힌 느낌은 최고다. 사실 처음에 책의 두께를 보고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재밌는 소설은 확실히 분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야기 중매꾼에 해당하는 두꺼비 도안 노인과 요즘 신문에 해당하는 에도시대 가와라반 덕분에 미시마야에 이야기를 오치카에서 들려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물론 미미 여사는 좀 더 새롭고 기괴한 이야기를 창작하느라 수고가 되겠지만. 네 번째 미시마야 시리즈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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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북스피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마포 김사장님의 미미 여사 관련 글을 읽고 있어요. 갑자기 미미 여사 작품들 정주행 독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국내에 소개된 책이 너무 많아서 독서를 시작한다면 몇 년 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5-02-10 09:46   좋아요 0 | URL
오오 얼굴책에 마포 김사장님의 글이 종종
올라오는군요.
전 이번에 <피리술사>로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물
에 푹 빠지게 되었답니다.
말씀 대로 미미여사의 책이 엄청 많아서 다 읽
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습니다.

댄스는 맨홀 2015-02-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과 안주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피리술사가 이어지는 이야기였네요. 읽어봐야 겠어요.

레삭매냐 2015-02-11 22:35   좋아요 0 | URL
미시마야 시리즈 <흑백>으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안주>도 사서 쟁여 두었구요. 이번 설날은
미미 여사와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