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급자족한다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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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드명은 프란츠 카프카. 프리랜서 작가로 스토리텔링으로 돈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한다. 유명인이나 재벌들의 자서전 대필은 물론이고, 영화비평 광고문구 제작, 사보만들기 그리고 정치성향은 진보지만 우파 댓글알바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다가 결국 CIA요원으로까지 발탁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 쫌 황당하다. 최소한 CIA 요원으로 활동하려면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와 비범한 재능은 기본이 아닐까 싶지만, 오한기 작가는 그런 것 따위쯤은 카프카 아저씨의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가볍게 제압해 버리신다. 게다가 CIA가 적으로 규정하고 때려잡고 소탕하기 위해 자금과 요원 그리고 시간까지 소모해 가며 타겟으로 삼은 집단은 바로 자급자족단(SSM:Self Sufficiency Members)이라고 한다. 대량생산에 끊임없이 소비하는 존재(아마도 노동자들)가 있어야 굴러갈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3.0 시대에 자급자족단이야말로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최고의 사악한 무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소설이 구사하는 핍진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면 나처럼 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카프카는 확실히 위기의 남자다. 그놈의 텃밭 소송으로 가산을 탕진하게 생긴 남자는 글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조차 시원치 않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아내 해인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일진대 그녀마저 회사를 그만 두고 지독한 미니멀리즘에 빠져 점점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미래로 훨훨 날아가 버리려는 아내를 지키기 위한 보통남자의 고군분투기 정도로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편하고 재밌을 것이다. 자꾸 따지기 시작하면 어쩌면 속이 부대끼실 지도 모른다.

 

카프카를 스카웃하고 훈련시킨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미아 모닝스타라는 전설적 요원이다. 보다 체계적인 훈련 과정이 아닌 미아가 발표한 저서를 통해 스파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착착 카프카 요원, 흥미롭다. 그 와중에 천재해커 비비양도 등장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볼셰비키(볼키) 그리고 카프카의 전임자이자 알고 보니 베스트셀러 작가기도 한 헤밍웨이 요원이 등장하기도 한다. 고철에서 만든 수제권총 막스 브로트의 총구에서 불이 뿜고, 롯데월드타워에서 재벌 총수 인질극이 벌어지는 등 다양한 사건 사고가 무시로 발생한다. 이거 뭐 스케일에서는 탐 크루즈 형님이 등장하시는 <미션 임파서블> 뺨치는데. 헛된 공상이겠지만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영화화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티베트의 어느 오아시스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자급자족단의 일상과 인도양 섬에서 한 마리에 1달러 하는 랍스터를 배터지게 먹는 장면은 제발 꼭 넣어 주시길.

 

아쉽게도 재밌게 잘 나가던 내러티브는 종언을 100쪽 정도 남겨 두고 주인공 카프카의 지독한 해인에 대한 사랑 신파 덕분인지 어쩐지 바람 빠진 타이어마냥 피시시 주저앉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아쉬웠다. 차라리 모두가 비극으로 치닫는 엔딩은 어땠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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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7-1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만 보면 외국작가의 작품같은데 국내 작가가 지으셨네요.그나저나 랍스터가 1달러라면 저역시 배터지게 먹고 싶습니당^^

레삭매냐 2018-07-19 11:26   좋아요 0 | URL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부담 없이 읽으신다면 재밌습니다.

랍스터 한 마리에 1달러, 당장 달려 가고
싶습니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잔향이 다만...

2018-07-19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7-19 16:11   좋아요 1 | URL
작가 분의 내러티브 설정이 아주 참신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7-19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드명이 프란츠 카프카라면 멋지네요^^:) 지나가는 말입니다만, 누구의 코드명 ‘길라임‘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이제는 큰 의미없지만 생각나 적어봅니다^^:)

레삭매냐 2018-07-19 17:11   좋아요 1 | URL
으응 코드명 길라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빵 터져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