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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 옮김 / 창비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전쟁은 한국의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할 한국인들이 오히려 가장 모르고 있다.
정전협정 후 휴전 중인 양 국가 간 이질감과 자신들만의 반공·반자본체제에 대한 신봉과 국민과 인민에 대한 선전으로 인해 주입된 한국전쟁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의 경우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한국과 북한이 아닌 한국과 다른 나라의 전쟁으로 알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이건 대단한 착각이자 실수이다. 역사를 반추하지 않는 나라와 체제는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의 기원」과「분단전후의 현대사」를 쓴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더불어 한국전쟁에 있어 쌍두마차인 일본의 와다 하루끼 교수의 역작이다.
커밍스 교수의 두 책을 읽으며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한국전쟁에 대한 구조적이고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와다 하루끼 교수는 머리말에서도 언급한바 커밍스 교수가 미처 접근할 수 없었고 다소 도외시 한 소련·중공·재일 공산당 쪽의 자료들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해 커밍스 교수의 주장을 보완하고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한국전쟁을,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북한의 계획된 선제공격으로 개시된 ‘내전’이 ‘국제전’ 즉 ‘중미전쟁’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인식을 갖고 있다”
“특히 와다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공산 측에서는 중국혁명, 즉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연장으로서 한국전쟁을 개시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p.416)
“북한 측 선제 무력공격으로 한국전쟁이 개시되었으나, 유엔군 참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북한과 남한이 모두 한차례씩 무력통일 시도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p.417)
때로는 내 문제를 지켜보는 제3자가 내리는 진단이 더욱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또는 두 사람의 당사자의 갈등 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 제3자가 될 때도 많다.
객관적이고 이해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인인 커밍스 교수와 일본인인 와다 교수의 한국전쟁에 대한 분석이 더욱 도움이 되고 사실에 가깝다고 인식해야 한다.
와다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북한의 선제공격은 소련측의 자료 조사만으로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이들 자료에서 인민군 말단부대가 6월17일에 명령을 받아 전투배치에 임하고 23일가지 전투준비를 완료하여 25일에 진공을 개시한 것이 확인된다.” (p.25)
하지만 한국의 반공세력이 50년이 넘게 매달려 온 ‘북한의 선제공격’, 이 선전 플래카드는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과 북조선의 내부 상황과 냉전의 첨단이었던 그 시기 소련과 미국의 극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방위 인식, 그리고 국공내전을 힘겹게 마친 헤비급 선수 중국의 등장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한다.
이들의 숨 막히는 눈치싸움이 좁은 한반도에서 쾅~! 하고 부딪혀 버린 것이다.
애초에 미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에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냉전의 두 당사자는 치열한 대립 중에서도 서로를 밑바닥까지 파괴시킬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자체는 둘 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미국의 방침은 아시아의 대립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며, 미국은 정전하여 재침략 방지책을 취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하기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p.219)
“소련 공군 비행사는 중국 공군 비행복을 입고, 기체에는 북한 마크를 붙였다. 스딸린은 소련군이 참전하고 있음을 숨기도록 엄격하게 조건을 단 것이다. 10월 19일 중국군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넜다.” (p.199)
하지만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유엔군이 참전한 큰 전쟁이 되어 버렸다.
남한에서는 반공의 기틀을 만든 이승만 대통령의 집착적이고 주도면밀한 미국을 향한 SOS가 있었고 북조선에서는 공산당 내부에서도 박헌영, 허가이 등 소련출신들과의 권력다툼에서 이겨내고 당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김일성의 끊임없는 중국을 향한 SOS가 빌미였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정전회담도 워싱턴과 베이징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p.346)
“한국전쟁은 남북한·소련·미국·일본·중국이 관련된 ‘동북아시아 전쟁’이었다.” (p.7)
그래서 당연히 한국전쟁은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인식해야 하고 그 틀 안에서 분석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배워오고 들어온 한국전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학교교육을 받은 나와 그 이전 세대에게는 ‘6.25전쟁’으로 더 많이 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이라는 단어의 상징성을 없애버린다. 주체와 대상, 주체와 주체, 대상과 대상간의 긴밀한 관계 설정과 도출되는 필연적 요인과 결과는 희석되고 ‘6월 25일에 빨갱이 북한 놈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공산국가가 될 뻔!! 했지만 구세주요 구원자인 미국의 참전을 통해 요순을 연상케 하는 평화롭게 살기 좋은 한국이 되었다.’라는 식의 극도로 편협하고 편집증적인 인식만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개인의 실수는 아니다.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국가가 집단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그것의 유지를 위해 국민과 구성원을 선동하는 일은 국가라는 집단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자 내전은 중미전쟁이 되었다. 유엔군 이름으로 미군이 출동한 후에는 한국군은 이미 유엔군 사령관인 미국 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는 북한군이 중국군 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p.199)
전쟁의 전·후 상황과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 김정일 사망이후 북은 더욱 중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그늘아래 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50년 넘게 중단하고 있을 뿐 평화협상 내지는 전쟁종식에 대한 기본 약속하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태를 해소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조인한 미국·중국·북한, 그리고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은 남한, 이 4개국이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p.349)
“남북한·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동아시아 공동의 집’이란 원대한 구상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p.416)
한국전쟁은 한국과 북한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동북아시아 전쟁’이었다. 그리고 정전협정과 휴전상태를 넘어선 ‘평화조약의 체결’이 반드시 필요하다.
와다 교수는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의 집’이란 구상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주장하고 설득했지만 듣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사실 반공과 북한은 한국에서 주도권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것을 가장 효율적이고 쉽게 지켜내고 오래오래 계속 해먹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 상태가 최대한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추정해 본다. 감히.
“그는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져야 이 지역의 평화를 위한 일본의 노력이 가능해짐을 역설해왔다... 특히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사죄와 배상 의무를 다하여 북일수교를 실현함으로써 한민족 전체와 일본의 진정한 화해가 실현되는 것이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시급한 과제임을 말해왔다.” (p.417)
와다 교수는 또한 일본 내에서도 늘 주변 국가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실질적인 배상을 주장해 왔다. 그래서 일본 학계와 정치계에서도 미움을 많이 받는 학자라고 알고 있다.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학자적 양심과 행동은 사실 수십 년 전 고 김대중 대통령 납치사건에 대한 지속적이고 열성적인 구명운동에서 잘 드러났다. 국적을 넘어선 양심과 상식에 대한 행동은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 생각한다.
냉전의 가장 날카로웠던 시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후의 현대사를 완전히 새롭게 쓰게 된 결정적 이유이다. 일본의 재건과 중국의 국제무대 등장,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실질적 세계지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 또한 각자의 모양으로 59년을 지내왔다. 허리가 반으로 잘려진 채 불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필요대로 한국전쟁은 왜곡되고 덧칠해지고 비틀어지며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국민과 인민에게 주입했다.
이제 정말 지겹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이 책 「한국전쟁」이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로 채택된다면 어린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최소한 지금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현대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와다 교수의 오랜 주장인 평화조약 체결과 동아시아 공동의 집은 지금의 꽉 막힌 한국과 북한 문제를 풀어내는 중요한 단초이다.
추신
“그러면 미국은 북한의 공격을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중국으로부터 부대의 도착, 소련으로부터 무기의 도착은 미군의 첩보조직에 확실히 포착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p.149)
“이승만은 27일 새벽에 서울을 탈출하였다. 향했던 곳은 부산에서 가까운 해군기지 진해였다. 대구까지 왔을 때, 이승만은 너무 멀리 달아났다고 반성하고 대전으로 되돌아갔을 정도였다.” (p.158)
“애치슨은 무쵸에게 이승만에게 다음 몇 가지를 ‘주입할 것(hammer)’을 요청하였다. (1) 한국은 38도선 이북에 대한 권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다... (6)단기적으로는 한국의 부흥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동적 성명’이나 ‘도발적 행동’으로 미국인의 반감을 사지 말라.” (p.222)
“정전회담이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53년 4월부터 이대통령은 정전 반대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했다.” (p.293)
“결국 워싱턴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는 쿠데타 자체에 대하여는 원칙적으로 문제를 느끼지 않았지만, 실행할 결단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서 상호방위조약을 꺼낼 수밖에 없다.” (p.302)
모르는 것이 많으면 편협해 진다. 편집증적인 행동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