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리, 잠든 교실을 깨워라
리처드 위트마이어 지음, 임현경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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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메이저리그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MLB.com(메이저리그 공식 웹사이트)을 들락거린다. 30개의 팀이 어느 주, 어느 도시에 있는지 구글 검색을 해서 캡처해 둘 정도다. 팀의 주축선수가 누구인지 매년 관중 동원 순위는 어떻게 되는지도 주요 관심사다.

[Washington Nationals]라는 팀이 있다. 200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연고 이전을 하면서 팀명도 바꾸게 된다. 그 때 ‘팀이름이 내셔널스가 뭐야~ 수도를 연고로 두고 있다고 그런가? 참 팀이름 촌스럽네~’생각했다. 내셔널스는 전신인 엑스포스가 그랬던 것처럼 늘 하위권을 맴도는 팀이었다. 수도를 연고로 하고 있는데 여전히 팀의 성적이 부진하고 관중 동원이 잘 되지 않는 것이 궁금했다. 우연히 내셔널스 경기를 중계해주는 캐스터의 입에서 “워싱턴에는 흑인 수가 월등히 많죠~!”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는 사람, 권력, 돈, 힘이 모두 모이는 곳인데 그래서 오죽하면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는 말도 있는데, 전 세계의 중심·전 세계의 주인인 미국의 수도에 백인보다 흑인이 훨씬 많다니. 이상했다.

 

이 책 「미셸 리, 잠든 교실을 깨워라」를 읽으며 워싱턴D.C.와 미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물론, 마음에 두고 있던 궁금증도 해소됐다.

 

워싱턴 D.C.가 미국의 수도이고 미국 입법·행정·사법부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산업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인구 구성의 70%이상이 흑인이고 빈부의 격차와 학력의 격차가 주변 대도시권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 그리고 다른 도시들처럼 주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연방정부에 의한 지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싱턴 D.C.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97퍼센트가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72)

 

가장 심각한 것이 교육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사람이 바로 미셸 리 교육감이다. 몇 해 전 한국에서는 ‘한국계 교육감 미셸 리’라 해서 앞 다투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교육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에 있어서 그녀의 생각과 내 평소 생각이 일치했다.

나는 한국의 공교육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교사의 정년 보장’이라고 생각한다. ‘철밥통’이라는 직업인식이 깨지지 않는 이상 공교육 문제의 해결은 요원한 일이라고 본다. 50·60의 나이인 교사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사들의 구태의연하고 반복되는 교수방식과 내용이다. 긴장감이 없으니 가르치는 것도 아이들 상담하는 것도 대충대충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사가 더 많을 거라 희망을 가져보지만 아이들에게 직접 듣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더 심각하다.

 

“교육제도를 떠받들고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기둥은 바로 고정 급여, 종신 재직권, 근속 연수입니다. 하지만 교수 능력, 성적에 대한 책임, 실력의 토대 위에 교육제도를 바로 세우지 않는 이상 성공할 수 없습니다.” (p.106)

 

“웨인가튼을 비롯한 미국 교원노조 지도부가 보기에 미셸 리는 도심 지역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면 실력 없는 교사들을 쓸어 없애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기회주의적인 교육 개혁가들의 우두머리였다.” (p.173)

 

미셸 리가 진단하는 워싱턴D.C. 교육제도의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미국의 수도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 요소인 읽기와 숫자 셈에 있어서도 미 전국 최하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학생’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교육시스템’이라고 진단했다.

나는 미국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는 학교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상의 미국 학생들과 교사들은 격의 없는 대화와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 뭔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교실의 모습 등이었다. 수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모든 수단과 방법과 힘을 동원해 아이를 미국에 유학 보내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낯선 진단이었다.

물론, 책을 통해서 미국은 각 주와 도시마다 교육수준이나 환경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흔히들 이해하고 있고 예상하고 있으며 기대하고 있는 장밋빛 학교의 모습이 100% 진실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약 4년 동안 워싱턴 D.C. 교사들 중 대략 절반이(해고,사임,퇴직 등으로)자리를 떠났고, 교장 중 3분의 1이 해고당해 워싱턴 D.C.를 떠났다.” (p.300)

 

미셸 리는 과감히 철퇴를 가했다. 시의원과 강력한 힘을 가진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낸다. 학생 수도 없이 교육예산만 깎아먹는 학교를 폐교하고 무능한 교사들의 자리를 없애버렸다.

 

잠깐 머무르다 떠나는 교육감들은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변화를 일구어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p.36)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학교가 변했다. 도저히 수업환경 조성이 되지 않았던 공립초등학교의 분위기가 바뀌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교사들의 수업으로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시장, 시의원, 교육청 직원,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좋아할 일이었다. 하지만 확연한 반대를 이겨낸 정책들은 예상치 못했던 지속적이고 졸렬할 정치적 공세에 탱크같이 밀어 붙이던 그녀도 질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미셸 리의 논리도 인종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워싱턴 D.C. 유권자들에게는 소용없었다.” (p.251)

“왜 가장 먼저 ‘자신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냐’는 것이 아마 시의원들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p.255)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한국에는 미셸 리 같은 교육감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진보적 교육감이 몇 명 등장하기는 했지만 무상급식 같은 당연한 논리조차도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빨갱이라 공격받는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교육문제 관련 책이 출간되고 수많은 해결책이 난무하지만 ‘교사 정년제 폐지나 무능 교사 해지’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제 살 깎아 먹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공론화와 진단·해결 방안이 없는 이상 쏟아지는 정책들은 ‘모래위에 쌓는 성’일 뿐이다.

또한 정치적 분위기에 가장 먼저 휘둘리는 것이 교육 정책인 한국에서 정치권 눈치 안보고 정말 아이들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나올 리 만무하다.

 

미셸 리가 한국에서 교육감을 했다면 절대로 워싱턴D.C.에서 했던 것처럼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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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 옮김 / 창비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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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국의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할 한국인들이 오히려 가장 모르고 있다.

정전협정 후 휴전 중인 양 국가 간 이질감과 자신들만의 반공·반자본체제에 대한 신봉과 국민과 인민에 대한 선전으로 인해 주입된 한국전쟁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의 경우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한국과 북한이 아닌 한국과 다른 나라의 전쟁으로 알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이건 대단한 착각이자 실수이다. 역사를 반추하지 않는 나라와 체제는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의 기원」과「분단전후의 현대사」를 쓴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더불어 한국전쟁에 있어 쌍두마차인 일본의 와다 하루끼 교수의 역작이다.

커밍스 교수의 두 책을 읽으며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한국전쟁에 대한 구조적이고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와다 하루끼 교수는 머리말에서도 언급한바 커밍스 교수가 미처 접근할 수 없었고 다소 도외시 한 소련·중공·재일 공산당 쪽의 자료들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해 커밍스 교수의 주장을 보완하고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한국전쟁을,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북한의 계획된 선제공격으로 개시된 ‘내전’이 ‘국제전’ 즉 ‘중미전쟁’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인식을 갖고 있다”

“특히 와다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공산 측에서는 중국혁명, 즉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연장으로서 한국전쟁을 개시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p.416)

 

“북한 측 선제 무력공격으로 한국전쟁이 개시되었으나, 유엔군 참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북한과 남한이 모두 한차례씩 무력통일 시도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p.417)

 

때로는 내 문제를 지켜보는 제3자가 내리는 진단이 더욱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또는 두 사람의 당사자의 갈등 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 제3자가 될 때도 많다.

객관적이고 이해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인인 커밍스 교수와 일본인인 와다 교수의 한국전쟁에 대한 분석이 더욱 도움이 되고 사실에 가깝다고 인식해야 한다.

 

와다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북한의 선제공격은 소련측의 자료 조사만으로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이들 자료에서 인민군 말단부대가 6월17일에 명령을 받아 전투배치에 임하고 23일가지 전투준비를 완료하여 25일에 진공을 개시한 것이 확인된다.” (p.25)

 

 

하지만 한국의 반공세력이 50년이 넘게 매달려 온 ‘북한의 선제공격’, 이 선전 플래카드는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과 북조선의 내부 상황과 냉전의 첨단이었던 그 시기 소련과 미국의 극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방위 인식, 그리고 국공내전을 힘겹게 마친 헤비급 선수 중국의 등장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한다.

이들의 숨 막히는 눈치싸움이 좁은 한반도에서 쾅~! 하고 부딪혀 버린 것이다.

애초에 미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에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냉전의 두 당사자는 치열한 대립 중에서도 서로를 밑바닥까지 파괴시킬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자체는 둘 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미국의 방침은 아시아의 대립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며, 미국은 정전하여 재침략 방지책을 취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하기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p.219)

 

“소련 공군 비행사는 중국 공군 비행복을 입고, 기체에는 북한 마크를 붙였다. 스딸린은 소련군이 참전하고 있음을 숨기도록 엄격하게 조건을 단 것이다. 10월 19일 중국군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넜다.” (p.199)

 

하지만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유엔군이 참전한 큰 전쟁이 되어 버렸다.

남한에서는 반공의 기틀을 만든 이승만 대통령의 집착적이고 주도면밀한 미국을 향한 SOS가 있었고 북조선에서는 공산당 내부에서도 박헌영, 허가이 등 소련출신들과의 권력다툼에서 이겨내고 당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김일성의 끊임없는 중국을 향한 SOS가 빌미였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정전회담도 워싱턴과 베이징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p.346)

“한국전쟁은 남북한·소련·미국·일본·중국이 관련된 ‘동북아시아 전쟁’이었다.” (p.7)

 

그래서 당연히 한국전쟁은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인식해야 하고 그 틀 안에서 분석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배워오고 들어온 한국전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학교교육을 받은 나와 그 이전 세대에게는 ‘6.25전쟁’으로 더 많이 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이라는 단어의 상징성을 없애버린다. 주체와 대상, 주체와 주체, 대상과 대상간의 긴밀한 관계 설정과 도출되는 필연적 요인과 결과는 희석되고 ‘6월 25일에 빨갱이 북한 놈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공산국가가 될 뻔!! 했지만 구세주요 구원자인 미국의 참전을 통해 요순을 연상케 하는 평화롭게 살기 좋은 한국이 되었다.’라는 식의 극도로 편협하고 편집증적인 인식만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개인의 실수는 아니다.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국가가 집단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그것의 유지를 위해 국민과 구성원을 선동하는 일은 국가라는 집단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자 내전은 중미전쟁이 되었다. 유엔군 이름으로 미군이 출동한 후에는 한국군은 이미 유엔군 사령관인 미국 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는 북한군이 중국군 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p.199)

 

전쟁의 전·후 상황과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 김정일 사망이후 북은 더욱 중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그늘아래 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50년 넘게 중단하고 있을 뿐 평화협상 내지는 전쟁종식에 대한 기본 약속하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태를 해소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조인한 미국·중국·북한, 그리고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은 남한, 이 4개국이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p.349)

“남북한·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동아시아 공동의 집’이란 원대한 구상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p.416)

 

한국전쟁은 한국과 북한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동북아시아 전쟁’이었다. 그리고 정전협정과 휴전상태를 넘어선 ‘평화조약의 체결’이 반드시 필요하다.

와다 교수는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의 집’이란 구상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주장하고 설득했지만 듣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사실 반공과 북한은 한국에서 주도권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것을 가장 효율적이고 쉽게 지켜내고 오래오래 계속 해먹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 상태가 최대한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추정해 본다. 감히.

 

“그는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져야 이 지역의 평화를 위한 일본의 노력이 가능해짐을 역설해왔다... 특히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사죄와 배상 의무를 다하여 북일수교를 실현함으로써 한민족 전체와 일본의 진정한 화해가 실현되는 것이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시급한 과제임을 말해왔다.” (p.417)

 

와다 교수는 또한 일본 내에서도 늘 주변 국가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실질적인 배상을 주장해 왔다. 그래서 일본 학계와 정치계에서도 미움을 많이 받는 학자라고 알고 있다.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학자적 양심과 행동은 사실 수십 년 전 고 김대중 대통령 납치사건에 대한 지속적이고 열성적인 구명운동에서 잘 드러났다. 국적을 넘어선 양심과 상식에 대한 행동은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 생각한다.

 

냉전의 가장 날카로웠던 시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후의 현대사를 완전히 새롭게 쓰게 된 결정적 이유이다. 일본의 재건과 중국의 국제무대 등장,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실질적 세계지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 또한 각자의 모양으로 59년을 지내왔다. 허리가 반으로 잘려진 채 불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필요대로 한국전쟁은 왜곡되고 덧칠해지고 비틀어지며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국민과 인민에게 주입했다.

이제 정말 지겹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이 책 「한국전쟁」이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로 채택된다면 어린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최소한 지금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현대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와다 교수의 오랜 주장인 평화조약 체결과 동아시아 공동의 집은 지금의 꽉 막힌 한국과 북한 문제를 풀어내는 중요한 단초이다.

 

 

 

추신

“그러면 미국은 북한의 공격을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중국으로부터 부대의 도착, 소련으로부터 무기의 도착은 미군의 첩보조직에 확실히 포착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p.149)

“이승만은 27일 새벽에 서울을 탈출하였다. 향했던 곳은 부산에서 가까운 해군기지 진해였다. 대구까지 왔을 때, 이승만은 너무 멀리 달아났다고 반성하고 대전으로 되돌아갔을 정도였다.” (p.158)

“애치슨은 무쵸에게 이승만에게 다음 몇 가지를 ‘주입할 것(hammer)’을 요청하였다. (1) 한국은 38도선 이북에 대한 권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다... (6)단기적으로는 한국의 부흥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동적 성명’이나 ‘도발적 행동’으로 미국인의 반감을 사지 말라.” (p.222)

“정전회담이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53년 4월부터 이대통령은 정전 반대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했다.” (p.293)

 

“결국 워싱턴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는 쿠데타 자체에 대하여는 원칙적으로 문제를 느끼지 않았지만, 실행할 결단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서 상호방위조약을 꺼낼 수밖에 없다.” (p.302)

 

모르는 것이 많으면 편협해 진다. 편집증적인 행동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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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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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가며 뒤통수를 후려 쳐줄 ‘선배’와 ‘스승’이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적어도 대학시절때까지는 그런 ‘선배’와 ‘스승’이 있었다. 책에서도 있었고 과에서도 동아리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있었다.

그런데 삼십 줄을 넘어선 지금 그런 ‘선배’와 ‘스승’이 없다. 마냥 내가 읽고 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쓰고, 또 이것을 무한반복하며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문익환 목사, 리영희 교수, 노무현 대통령

이 세 분은 내가 인생의 멘토요,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다.

문익환 목사님이야 내가 철들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리영희 교수님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두 분의 부재에서 오는 슬픔보다 그 부재 이후 내가 겪을 혼란함과 외로움에서 오는 슬픔이 더욱 컸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더 이상 선생은 없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밤을 새우던 그 새벽녘이 얼마나 서글프고 절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이제는 ‘애새끼’에서 ‘꼰대’로의 진입이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반증인 줄도 모르겠다.

 

“꼰대는 애새끼들이 계속 애새끼로 남아 있어야 꼰대로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애새끼들도 마찬가지다. 꼰대가 계속 꼰대로 남아 있어야 자신이 성장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르치는 데 관심이 없고 배우는 데 냉소적인 사회에 경험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경험은 죽었다.” (p.106)

 

더 이상 배우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안 되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이고 오늘 하루 밥벌이에 기를 쓰고 어쩌든지 밥벌이에 꼭 붙어있으려는 현실적 구차함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사회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던, 적어도 나를 보호해주리라고 여겼던 사회는 오히려 나를 배제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한다. 법은 사회의 규범이나 기준이 아니라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자원이 되어버렸다.” (p.19)

 

책을 읽고 투표를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결국은 단 하나도 바꿀 수 없는 견고한 여리고성 같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

그래서 인생의 ‘선배’와 ‘스승’조차 없고, 누구하나 손 내밀어주는 사람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회나 국가조차도 내 편이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누구와 편을 먹어야 하나.

 

이 책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는 제목만으로 코끝이 찌릿하다. 대학시절 내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 준 그 형의 말처럼. 혼돈의 20대를 열정으로 채워준 문 목사님, 리 교수님, 노 대통령의 말과 글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정말이다.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다’라는 하나의 문장이 그대로 가슴에 새겨진다.

“어떻게 해라”, “이렇게 해라”, “너의 무엇무엇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라”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니가 잘못 산 게 아니야’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무시무시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윌 헌팅(맷 데이먼)에게 상담가이자 스승인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가 얘기한다.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열 번을 반복하며 제자의 곪아버린 상처를 만진다. 그리고 그 상처를 함께 치유한다.

 

맞다. 우리가 잘못 한 게 아니다. 잘못 산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공감은 삶을 견뎌나가는 가장 큰 힘이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더 이상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허무함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너도 나도 같이 상처받았다’라는 공감이다.” (p.125)

 

더 이상 ‘선배’와 ‘스승’이 없을 것이라는 비관을 거둬버려야겠다. 내가 누군가의 ‘선배·스승’은 아니라도 ‘친구’는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말미에 소개하는 ‘두더지가 되자’라는 격려와 독려에 힘을 보태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료와 아지트다. 언제든 내 삶을 응원해주는 동료와 함께 모여 신나게 욕이건 공부건 세상 이야기건 할 수 있는 아지트만 있다면 우리는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질문을 품게 만드는 시대를 견디며 언젠가 도래할 ‘사막이 두더지 세상이 될 날’을 기다릴 수 있다.” (p.274)

 

최소한 내게는 아지트에 모여 신나게 욕하고 떠들며 웃어젖힐 수 있는 친구가 두 명이나 있다.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모르고 있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철옹성 같았던 아랍문화권의 나라들의 혁명과 세계의 대장노릇을 하던 월스트리트에 대한 시위들도 결국 ‘두서너 마리의 두더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책은 소개한다.

 

맞다. 그놈들로 충분하다. 이미.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의 절실한 ‘선배’와 ‘스승’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만 하고 있지 않고 준비하고 연습하고 훈련하며 때를 기다린다.

 

언젠가 그 혹은 그녀에게 해 줄

It's not your fault가

내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한 마디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지트를 공고히 하고 동료를 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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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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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consilience, 統攝,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과 의생학(擬生學 : 자연모사와 생체모방)이라는 단어를 이 책 「통섭의 식탁」을 읽으며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책을 쓴 최재천 교수도 저명한 생물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인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연구를 하는 통섭학자요. 의생학자인지 몰랐다.

 

사실 한국의 교육체계 자체가 불완전하고 굉장히 폐쇄적이며 피교육자 중심이 아닌 교육자와 학부모 중심이기 때문에 ‘어떤 학교를 다녔다’라고 말하지 ‘어떤 학문을 공부했다’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모든 교육체계가 입시 위주이기 때문에 단계별로 구성된 교과과정을 따라가지 못하면 열등한 학생이 되어버린다. 그나마 인문계와 실업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심각한 수준을 아니겠지만 현실 교육세계의 실업계는 완전히 죽어 버렸다.

오죽하면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서도 다시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다반사지 않나.

그래서 최재천 교수도 고등학교 시절 원래 하고 싶었던 인문계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과계열로 진학해 ‘과학자로 살면서도 끊임없이 인문학을 기웃거릴 수 있는’ (p.11) 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개념, 하나의 잣대가 아닌 전체를 아우르는 ‘통섭’의 개념을 소개하고 그 소개의 방법으로 식탁에 만찬을 차린 것처럼 최재천 교수를 있게 한 수 많은 양서를 내놓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학위 공부를 하며 만났던 수많은 과학자들과의 조우와 함께 한 연구 등에 대한 사례와 책 소개가 많았다.

 

“우리가 ‘현명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자만을 버리고 ‘공생 인간인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us’로 거듭나야 한다고 호소했다.” (p.84)

 

나만 잘나고 내가 공부한 하나의 분야에서만 특출나게 성과를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 세계에서 과연 하나의 분야만 가지고 이 어지럽고 급변하는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옆의 사람과 함께 하는 ‘공생’의 형태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통섭’일 것이다.

‘식탁’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포용, 합일, 공통 따위의 이미지가 바로 ‘통섭’인 것이다.

 

“내가 전공하는 동물행동학은 한마디로 동물들이 서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엿듣는 연구이다.” (p.128)

 

나는 수학을 중학교 2학년 때 포기했다. 과학 과목 중에서도 물리, 화학은 저 멀리 아프리카의 오지 부족의 언어를 읽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껏 읽은 책도 줄곧 사회학과 인문학 위주이다. 생각하는 것도 대화를 나누는 분야도 죄다 그런 쪽이었다.

처음 최재천 교수의 식탁이 마냥 반갑거나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리던 개미와 벌의 집단행동 양식과 까마귀와 침팬지의 특정행동 방식이 인간집단이 아무리 애를 써서 기술을 개발하고 첨단을 달려도 해결하지 못하는 궁극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맛보는 음식들이지만 미각보다는 지각으로 배를 채우고 식욕 충족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생물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수준의 환경 파괴가 계속된다면 2030년경에는 현존하는 동식물의 2퍼센트가 절멸하거나 조기 절멸의 위험에 처할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이번 세기의 말에 이르면 현존하는 동식물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p.219)

 

사회과학자들이 진단하는 미래의 그것과 생물학자들이 진단하는 미래의 그것은 얼마나 다른가. 너무 재미있다.

언제부턴가 잘 보이지 않는 개미와 벌의 모습이 어느새 성큼 다가온 절망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반찬만 줄곧 집어 먹으면 어머니께 반드시 잔소리를 듣는다. “골고루 먹어야지. 왜 편식을 하고 그래!!” 어머니 기분이 안 좋으시면 등도 한 대 후려치실지 모른다.

고로 한 가지만 골라 읽는 내 독서 습관도 돌아봐야 한다.

계속 이러다간 한순간에 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난 독서였다.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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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남성의 재탄생 - 21세기 남성들에 관한 인류학적 스케치
폴 아케르만 지음, 이정순.변정수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연예인 하면 이 둘이 아닐까 싶다.

등장만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쏙 빼놓을 수 있는 남자 둘이다.

 

10여 년 전 만해도 장동건과 같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뭔가 부담스럽지만 잘생기고 조각 같은 미남형이 인기가 많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장동건이 하는 대사 자체도 남성의 마초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중기와 승기같은 뽀얗고 보조개도 있으며 뭔가 보호해주고 싶으면서도 의지하고 싶은, 책에 서도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메트로섹슈얼을 넘어선 공감과 다정함이 공존하는 캐릭터가 존재한다.

 

“여자들에게 손찌검을 했던 남자는 당연히 끝장이 났고, 과도하게 여성화된 메트로섹슈얼 역시 금세 끝나 버렸다. (p.187)

 

“위버섹슈얼의 대표적인 사례인 조지 클루니를 보자.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하면서도, 머리 염색 따위에 자기 스타일을 의지하지 않는다.” (p.194)

 

이 책 「Mr. 남성의 재탄생」에서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고찰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과는 다소 맞지 않는 요소가 많이 있다. 하지만 1968년 혁명을 겪으며 일어난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변화가 몰고 온 남성성의 재발견과 재탄생에 대한 흥미로운 모색이라는 점에서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68혁명에 대해 기존의 모든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이며 꼰대스러웠던 행태와 구습을 일시에 타파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을 읽으며 우리가 꿈꾸고 우리에게 늘 설렘과 부러움, 동경의 대상인 서유럽조차 겉으로 보이는 자유, 민주, 평등, 선진국의 이미지와는 달리 비참함과 참담함이 가득한 비참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튼, 남성성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일부 동의한다. 그리고 분명히 예전의 권위적이고 여성을 지배하려는 공격적 성향의 남성성은 프랑스에서도 이 곳 한국에서도 많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메트로섹슈얼을 넘어 이제 위버섹슈얼로 가고 있는 프랑스 현실과 한국의 현실을 많이 다르다.

사실 송중기와 이승기가 위버섹슈얼의 이미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남성의 마초적 속성을 잃지 않고 그 마초적 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배려와 공감 다정함을 내재하고 있는 위버섹슈얼의 단계까지는 아직 멀었다.

 

메트로섹슈얼의 일종인 ‘꽃미남섹슈얼’ 정도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물론 프랑스의 경우처럼 한국에도 맞벌이를 하는 젊은 부부가 굉장히 많이 때문에 젊은 기혼 남성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가사·육아를 분담하고 남자가 ‘도와준다’라는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같이한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혔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같이 혁명을 겪으며 눈에 보이게 진전되고 변화된 남성의 재탄생과 재변화 과정자체가 모호하고 구분을 하기 어렵다. 지금 내가 속한 세대와 아버지가 속한 세대의 남성성은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국도 프랑스처럼 급격히 변화되고 바뀌기는 했지만 비교하고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얼마 전 60-70년대 남성의 상징이던 신성일씨가 자신의 책을 내며 아내 외에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는 헛소리를 해서 인터넷 상에서 집단 린치를 받았었다. 한국은 신성일씨처럼 아직도 전근대적 남성성을 가진 남성이 굉장히 많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당장 TV를 틀면 여성보다 더 예쁘고 뽀얀, 돈도 잘 벌고 다정하며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꽃미남들이 등장한다. ‘여성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면 너희들도 이렇게 해!!’ 강요받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사회는 이러한 의식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는 미완성된 혁명의 결과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p.75)

 

최소한 한국보다는 발전된 사회의식과 정치의식 문화의식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프랑스에서조차, 68혁명으로 국가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경험을 가진 그들조차 의식 변화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미완성된 사회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은 혁명의 경험이 없을뿐더러 변화의 속도는 프랑스보다 오히려 빠르기 때문에 패배한 듯하고 위치를 잃어버린 듯 한 한국의 남성성은 더욱 갈등이 내재되어 있고 불안하다고 봐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또 다른 완전히 다른 남성성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잘 생기고, 뽀얗고, 돈도 잘 벌고, 다정할 것 같고, 공감해 줄 것 같고, 의지하고 싶고, 집안일도 완벽하게 도와줄 것 같은 송중기와 이승기는 없다.

 

그 둘도 TV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송중기와 이승기가 될 수 없는 우리들 남성은 고달프기만 하다.

여성의 바람과 기대처럼 우리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많지만 도전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대단히 각박하고 답답하기 때문이다.

 

어서 한국에서도 이런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 리뷰는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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