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발견 -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사이에서 제자리 찾기
이우광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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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SERI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관된 주제가 없다. 단지 일본이란 주제로 글들을 묶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책의 글들은 2000년대 일본, 정확히는 헤이세이 불황 이후의 일본을 정치, 경제, 사회로 나누어 이전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측면들이라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디테일에 더 주목하고 있고 그 자체로 완결된 글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이책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1장에선 일본의 신세대들의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데 할애되었다면 2장은 장기불황기를 거치며 떠오른 새로운 경영자를 살펴보면서 일본의 경영철학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보고 있고 뒤에선 좀더 전통적인 정치, 경제를 다룬다. 이것저것 다양한 내용을 한권으로 볼 수 잇다는 점이 이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하나의 리뷰로 그 내용들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여기선 이책의 경영전략에 관한 부분만 정리해본다.

“일본에서는 전통 게이샤들이 있는 유흥가를 하나마치라 한다.” 그러나 하나마치는 교토 밖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교토 하나마치의 오차야 시스템 때문이다. 오차야는 게이샤의 가무와 요리를 즐기는 좌석을 제공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교토의 “오차야에서는 게이샤나 요리사를 직접 거느리지 않고 전부 아웃소싱한다. 한국은 물론 도쿄나 오사카 등지의 요정이 게이샤와 요리사를 보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늘날 요정은 쇠퇴하는 반면 하나마치가 번창하는 것은 그만큼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갖춘 덕분이 아닌가 싶다. 요정이 수직통합 시스템이라면 하나마치는 수평분업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분업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분해(unbundling) 시스템이다. 오차야의 경영자인 오카상은 손님에 대한 접객 서비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게이샤와 요리 등 서비스의 모든 구성요소를 분해해 아웃소싱하고 이를 다시 조합하여 최고의 서비스를 창출한다. 따라서서 오카상이 얼마나 독창적인 감성으로 서비스를 코디네이트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달렸다. 게이샤가 소속된 오키야와 게이샤 그리고 요릿집은 오카상의 부름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기능을 향상한다. 요컨데 분해의 장점이 발휘되는 시스템이다.”

80년대 일본식 경영을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던 케이레쓰 시스템 역시 이러한 논리로 운영되었다. 케이레쓰 시스템의 특징은 “장기적, 안정적 지속적 거래”이다. “단발성 거래라 이익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기적 혹은 전체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래방식이다.” 이런 장기적, 안정적 거래는 신뢰를 전제로 하고 신뢰를 강화한다. “일본 기업들은 양자 간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뿐 아니라 다자간 네트웤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특징이다. 협력회사, 자회사, 모회사 등 거대한 기업 계열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기술이나 정보가 유출되지 않는다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기술이나 신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 바로 세계적 부품, 소재기업을 키워내는 배경이다.”

이런 시스템의 특징은 ‘제조현장을 통합하는 조직능력’이다. “여기서 통합이란 의미는 제조현장에서의 팀워크, 정보공유, 업무호흡, 미세한 조정, 까다로운 고객에 대한 대응, 장인 정신과 같이 정량화하기 어려운 요소들을 말한다. 일본 기업들은 조립 메이커, 부품업체. 소재업체간의 긴밀한 협력으로 통합을 이루어내는 조직 능력이 다른 나라의 기업보다 탁월하다. 일어에 스리아와세란 말이 있다. ‘서로 부딪치며 세밀하게 맞추어나간다’는 의미인데 표준화되거나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세밀한 니즈나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일본이 강점을 갖는 부품, 소재, 장비는 대부분 이러한 통합형 제품이다.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제품이 대부분 그렇다.”

일본기업의 통합력은 스리아와세를 필요로 하는 장기적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물론 거래 기업간의 관계를 고정시킴으로써 비용이 발생할 수도 잇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계열 구매를 시장 구매로 돌린 것도 비용절감을 위해서다.” 실제 일본기업들이 80년대부터 동남아, 중국으로 생산거점을 옮기고 아웃소싱을 확대한 것은 비용절감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품, 소재 등 스리아와세가 필요한 제품에 자신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기업들은 스리아와세가 가능한 일본내에선 수직통합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범용부품에선 수평분업을 추구해 최적의 비용구조를 만들려 햇다.

그러나 통합력이란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일본이 따라잡힌 이유를 ‘이노베이션 딜레마’라 말한다. “D램을 예로 들어보자. 1980년대 D램의 주요 용도는 전화교환기나 대형 컴퓨터였다. 그래서 일본기업들은 고도의 기술로 고장이 잘 나지 않는 D램을 만들어 반도체 대국이 되었다. 이때 일본에는 고성능, 고품질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 문화가 정착된다. 발주 업체에서도 보통 25년 정도를 보증하는 품질과 신뢰성을 요구했다. 문제는 D램의 수요가 전화교환기에서 PC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는 고품질보다 저가의 반도체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고품질 반도체를 만들려는 일본기업들의 기업문화는 변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D 램의 제조원가가 비싸져 경쟁력을 잃었다. 이런 현상은 D램뿐 아니라 액정이나 시스템LSI 등 전자산업의 여러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다.” 클레이튼이 지적한대로 스리아와세에 능한 일본기업은 기존고객의 니즈에 너무나 충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수요에 맞출 수 없었다. 스리아와세는 고품질, 고성능에 유리하다. 그러다보면 “고객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고성능, 고품질 제품을 만들고 그 때문에 가격이 비싸져 고객들이 외면한다.” 물론 그런 시스템이 더 유리한 시장이 있다. 소위 명품 시장이다. 명품은 “기능 이상의 고가격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는 성립된다. 그런데 일본 기업들은 고품질 제품을 만들줄은 알아도 고가격으로 사주는 시장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제품에 맞는 고객을 창출하거나 아니면 고객이 요구하는 가격의 제품을 만들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실제 일본기업들은 그 논리를 따라 고급시장에 치중했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일본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위기로 수출시장이 타격을 받으면서 일본은 위기의 진앙인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수출의존도가 일본보다 훨씬 높은 한국이나 중국 또는 독일보다도 일본이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은 수출에서 차지하는 부가가치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비교적 값이 싼 원재료를 수입해 높은 기술력으로 가공, 부가가치를 훨씬 높인 제품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수출 감소로 인한 타격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일본의 소재, 부품, 장치 업체들의 경쟁력이 다른나라보다 높은 탓에 타격이 더욱 컸다.” 그리고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신흥국 시장보다 미국이나 EU 같은 고급 시장에 주력한 것도 큰 타격을 입은 이유 중 하나다. 물건을 싸게 만드는 데 별로 자신이 없는 일본기업들은 높은 기술력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고급시장에 수출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선진국 시장이 증발”해버렸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일본기업들의 전략이 크게 바뀌고 있다. 선진국 시장보다 신흥국 시장을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볼륨존’을 중시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신훙국의 중산층 시장을 노리라는 이야기다. 이 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이미 유명해졋다. 혼다는 베트남 시장용 이륜차를 개발해 중국 제품을 몰아냈고 스즈키 자동차는 인도 시장에서 50%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잇다. 일본기업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흥국 시장용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잇다는 방증이다. 더욱이 ‘저가제품생산’이야말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잇으니 기술적으로 앞선 일본기업들이 그런 제품을 생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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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리더십 - 공유하고 소통하고 개방하라
쉘린 리 지음, 정지훈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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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간 소셜미디어에 대한 서적이 쏟아졌었다. 그 내용은 둘 중 하나이다: 소셜미디어가 어떻게 사회를 바꿀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시장을 바꿀 것인가.

인터넷이 그러했듯이 소셜미디어도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바뀐 세상에서 시장도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바뀐 시장에선 생존논리도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논의는 거의 마케팅에 국한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논의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젠 상식이 되었고 다들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식의 결론은 대충 이렇게 정리된다(더 자세한 논의는 클라라 샤이의 ‘페이스북 시대’이 추천할만 하다).

영업의 경우 영업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페이스북이나 링크드인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상대방의 인맥을 먼저 확인하고 추천을 받아 영업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로 달라진 점이다. 이전의 영업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소셜미디어는 영업을 더 쉽게 해주는 도구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회사 자체를 영업한다고 할 수 있는 채용에서도 소셜미디어는 더 편리한 도구가 되어 준다.

그러나 마케팅은 영업과 채용과 달리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잇다. 가령 광고의 경우 사용자들의 공개 프로필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전의 인터넷 광고보다 더 정밀한 타겟팅이 가능해졌으며 입소문 마케팅도 현실적인 대안이 되었다.

마케팅도구로서 소셜미디어는 앞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은 대충 위와 같이 정리된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이고 앞으로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소셜미디어는 기업 밖만 바꾼 것이 아니라 기업 안도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일터전쟁’의 저자들은 인사관리자의 입장에서 소셜미디어를 바라본다. 조직관리 측면에서 앞으로 주류가 될 밀레니엄 세대와 그 후 세대들의 입맛에 맞게 일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직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천성이 되어버린 소셜미디어의 논리에 맞게 조직을 다시 짜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방어적인 혁신이 아니다. “마케팅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고객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으로 재창조된 것처럼 인사부서도 이 시점을 제때 활용해 혁신과 변화를 도입할 수 있다.” (진 마이스터, 캐리 윌리어드) 그렇게 일터를 바꾸는 것은 동시에 인력부족에 대응하고 조직을 고도화되어가는 지식경제에 적응하고 효율성을 높이며 경쟁력을 갖추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구체적으로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웤 기술에 맞춰 조직구조와 워크플로우를 재편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셜 미디어를 조직구조 안으로 가지고 온다는 것은 정보의 흐름이 유연해지면서 사내의 자원활용이 극대화되고 생산성이 증대된다는 말이며 유연한 조직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리더십은 그런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이책의 주제이다.

소셜미디어는 우선 통제력의 상실로 다가온다. “소셜 테크놀로지는 사람들(고객)에게 힘을 실어주었을 뿐 아니라 직원들에게 새로운 협업 방법을 제공했고 그들의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전에는 전화나 이메일처럼 개인적으로 처리될 수 있었던 문제들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예전에도 사람들이 여러분의 회사나 조직 운영방식에 대해 뒤에서 떠드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얼마전까지는 이런 뒷이야기는 그렇게 큰 공개적 파급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일에 대한 불만이 있다면 아마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불평을 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불평의 영향이 고작해야 가까운 지인들 정도에서 그쳣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회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glassdoor.com에 방문하면 된다.”

통제란 정보의 통제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는 정보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통제를 포기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언제는 당신이 고객, 직원, 협력사를 통제하고 잇었는가?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러분은 고객이 여러분의 제품을 사도록 강제할 수 없다. 여러분은 직원들이 회사의 특정 계획에 대해 지지하도록 만들 수 없는데 그들은 앞에 나서서 강한 반대는 하지 않지만 협조하지 않는 방식으로는 행동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여러분은 통제하고 있지 않으며 이제껏 통제한 적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바로 욕구다. 개방하기 위해서는 통제의 욕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소셜미디어의 충격에 적응하고 살아남으려면 “통제를 포기하는 리더의 능력 바로 열린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통제를 포기하면 다른 통제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책의 제목의 이유이다.

사실 새로울 것은 없다. 경영학에서 수도 없이 말해져온 권한이양, 위임, 열린조직, 분산형 의사결정 등의 논의와 별 다를 것은 없다. 단지 그 환경이 달라졌고 그 필요성이 더 현실적이 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empowerment의 방향이 직원뿐 아니라 고객과 협력사와 같은 외부환경까지 확대된 상황이 다른 점이다. “기술은 이러한 종류의 공유를 조직 외부로 확장햇고 새로운 채널을 통한 업데이트와 고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졋다. 고객과 파트너는 더 많은 세부 내용을 더 자주 듣고 싶어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요구되는 리더형을 저자는 오픈 리더라 한다. “오픈 리더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어떻게 모든 직원들과 목표를 공유하고 조직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소통을 하느냐다. 오바마 캠페인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음으로써 성공햇다. 같은 목표가 만들어진 뒤에는 핵심 가치들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참여했고 이러한 광범위한 참여가 오바마를 당선시켰다. 시스코의 CEO 존 챔버스도 이런 종류의 문제를 매일 직면해야 햇다. 비록 CEO일지라도 6만50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통제해 하나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회사의 전략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전략 프로세스를 만든다. 그 핵심은 명확한 단어와 가치 그리고 목표를 정한 뒤 이를 통해 전략적인 토론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전략의 핵심은 협업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시스코의 분산 의사결정구조를 현실화햇다. “목표를 공유하려면 신뢰가 필요합니다. 신뢰는 행동을 필요로 하지요 그렇다면 기술은 무엇을 할까요. 바로 행동을 외부에 노출합니다.”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단지 다른 것이라면 기술용어들 뿐이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웹 2.0 등등. 이책의 내용은 새롭지 않다. 새롭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나왔을 때 인터넷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듯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처럼 호들갑들이엇다. 그러나 결론은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기술을 쓰는 사람이 같다면 그 기술은 지금의 확장일 뿐이다. 경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모여 움직이는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 도구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책은 조직에 기술이 무엇을 더했는가를 말할 뿐이다.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그 기술을 제대로 이용할 마인드셋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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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3 - 인도로 가는 길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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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에게 불교가 어필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도올에게 던진 질문이다.

유럽에서 기독교는 멸종 직전이다. 서구에서 기독교의 생명력은 그나마 미국에서 살아남았지만 “미국에서도 상류층이나 지식인이나 지도층보다는 흑인이나 소외된 보수세력의 지지기반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같은 샤머니즘적 성향이 강렬한 제3세계나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수용한 신생국가에서 오히려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개화된 상류층의 트레이드 마크가 기독교일 수는 있어도 불교이기는 어렵다. 그런데 미국사회에서는 오히려 하층부의 사람들은 햄버거나 스테이크를 잔뜩 먹고 뚱뚱하며 기독교의 영성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개명한 상층부의 사람들은 비만형의 인간들이 별로 없고 채식주의자들이 많으며 불교도라는 트레이드 마크를 달고 일본 스시집에를 잘 간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 달라이 라마가 나타나면 잔디밭을 “메우는 업숙한 수만의 군중은 75%가 대학원 졸업생들이라고 한다. 현재 미국 불교도의 60%가 박사며 의사며 변호사며 회사고위간부 등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달라이 라마는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사회의 인텔리겐챠들은 더 이상 기독교로부터 새로운 문명의 젖줄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이 찾아오게 마련이고 여유로운 정상적 생활의 루틴을 가진 사람일수록 새로운 정신문화를 갈망한다.” 사람은 어쨌든 의미를 찾는 동물이고 그 의미를 영성이라 한다. 더 이상 기독교는 그 영성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과학의 보편화이다.

현대인의 종교는 과학이라 말해진다. 그러나 과학은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의미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책 다른 부분에서 언급되는 중국의 상황이 과학으로 인한 의미의 공허와 유사한 예이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진정한 문제를 문화와 도덕이라 말한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총체적 위기상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은 맑스주의에 대한 완벽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에 불타있었습니다. 더 이상 유교적, 불교적, 도교적 가치가 새로운 사회건설에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 50여년동안 계급투쟁만을 가르쳤고 전통적 가치의 타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증오’였습니다. 전통적 仁의 가치, 서로의 인간성을 존중할 줄 알며 약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마음씨, 온유와 사랑, 양보와 희생, 이런 것들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고 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홍위병과 같은 어린애들 장난의 파괴적 광대짓을 보면 얼마나 그 가치전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의 공산주의의 모든 실험, 무계급사회의 건설은 하나의 춘몽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여실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목표 그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면 그 이데올로기의 정당성 그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은 갑자기 모든 가치관을 잃어버렷다. 문제는 “아시아에서 자유라는 가치의 최대의 의미는 저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어떻게 살려나가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창조적 혼돈이라 생각합니다. 중국은 여태까지 그러한 창조적 혼돈이 허용되지 않는 50여년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정신적 공백을 메꿀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정신적 공백 때문에 범죄, 마약,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관료들의 부패, 도덕적 해이, 이러한 문화의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구의 문제는 과학혁명의 충격으로 기독교가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을 정당화해주는 종교가 무력화되면서 중국처럼 정신적 공백이 생긴 것이다. 과학은 도덕을 정당화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근세과학은 인류에게 무신론과 상식에 대한 무한한 신념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초월적인 창조주에로의 복속을 거부하게 되었다. 기독교로부터 불교에로의 세계사적 전환은 바로 이러한 과학의 보편화란 정신적 토양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싯달타의 정신혁명은 2500년후에나 세계 기독교가 성취해놓은 과학문명의 새로운 정신적 토대를 계기로 겨우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과 호환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에게는 무신론의 종교가 필요하다. 무신론 자체가 과학이라는 인과세계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영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에 21세기 인류사의 정신적 패러다임 쉬프트가 불교를 통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That’s right” 달라이 라마의 말이다. “불교는 신이 없이도 인간에게 무한한 영성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엄연한 종교입니다.”

불교의 교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緣起이다.

“시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연기론에서는 인정이 안됩니까?”
“인정될 수 없습니다.”
“연기는 과학입니까?”
“그렇습니다. 불교는 과학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과학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심리학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심리학이라 말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답변은 단호하고 간결하다.

“과학적 진리도 상대적 진리일 뿐입니다. 성하께서는 절대적 진리가 잇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적 진리는 없습니다. 물론 불경에 보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이 따위 말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인 한 절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불교에는 기독교처럼 절대진리를 선포하는 교리가 없다. “마치 절대적 진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공포감이나 중압감의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기독교 일신론 사유가 지어낸 서구적 발상의 일대오류라 생각합니다.” 연기론을 확장한 空은 이러한 사유를 절대를 실체로 만든 유아론이라 말한다.

불교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기에 지혜와 지식은 같이 가야만 한다. “저는 감정과 본능에 치우친 신앙심과 자비심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역설해왔습니다. 궁극적으로 감정과 이성은 인간에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의식쳬게의 소산이며 영적 수행에 지성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비낟. 그리고 물론 지혜와 지식은 이분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증가시키지 않는 지식은 결코 지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을 한다. “지식이 곧 지혜라는 신념은 나의 체험적 소산이며 그러한 생각에는 동요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현상적 일원론입니까?”
“물론입니다. 모든 일원론은 현상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서양철학의 한계는 현상 그 자체를 무시하고 들어간다는데 있습니다. 이것또한 기독교와 관련된 사유체계가 파생시킨 뿌리 깊은 오류이지요. 우리가 살고 잇는 현상은 허깨비 같은 것이며 가치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뿌리깊은 경시가 모든 오류를 파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일원론은 현상적 일원론밖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不二입니다.”

명쾌하다.

“불교를 심리학이라 하셨는데 그 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화입니다.”

여기서부터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논쟁이 시작된다. 마음의 평화는 열반을 쉽게 말해준 것이다. 문제는 윤회이다.

“”열반이 마음의 상태라 하신다면 우리가 열반적정의 마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번뇌도 곧 보리가 되는 것이르므로 윤회도 사라져 버릴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의 상태에 이르든지 그 마음의 상태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윤회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해탈이라 구분한다. 그러면서 “윤회는 사실입니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장시간에 걸쳐 불교교리사에 등장하는 윤회에 대한 복잡한 논쟁이 둘 사이에 재연된다.

도올의 마지막 질문은 깨달음에 관한 것이다. “성하 당신은 정말 깨달으셨습니까? 정말 깨달으셨다면 그것을 저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모두 궁금해할 질문이다.

“지금 내 몸은 예순하고도 일곱해가 된 몸입니다. 그런데 나의 정신, 나의 생각은 항상 맑고 깨끗합니다. 저는 자라나면서 어느 순간엔가 空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갑자기 세계가 넓어지더군요. 뭔가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조금 알듯햇습니다. 그러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공이라는 진리는 내가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물 전제를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비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을 물으신다면 이 공과 자비를 통해 무엇인가 조금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통찰을 얻었다는 것, 그런 것으 말씀드릴 수 있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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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침체의 교훈 - 재정 정책 VS 금융 정책
리처드 C. 쿠 지음, 김석중 옮김 / 더난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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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Japan bashing, Japan nothing, Japan passing. 지난 한세대 동안의 미국 일본학을 요약한 말이다.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보였던 80년대는 ‘Japan as No.1’과 함께 시작되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미국은 헤게모니의 침식을 경험하고 있었고 지금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를 하는 것처럼 일본을 찬양하는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그러나 90년대 헤이세이 불황과 함께 잃어버린 10년은 분위기를 바꿔버린다. 그렇게 잘나가던 일본이 어이없게 무력한 모습을 보였고 그것도 너무도 오랫동안 비틀거렸다. 미국의 분위기는 일본은 아무것도 아냐(Japan nothing)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런 관심마저 시들었을 때 일본에 대해선 무관심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Japan passing).

일본에 대한 무관심으로 분위기가 바뀌기 전 그렇게 잘 나가던 나라가 왜 이렇게 무기력하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잇었다. 물론 일본이 무기력한 직접적인 이유는 거품 붕괴 이후 헤이세이 불황이었다. 문제는 그 불황이 왜 이다지도 오래 가냐였다.

설명은 많앗다. 정관재계의 Iron triangle로 대변되는 일본 정치경제의 폐쇄성이 문제라는 논의부터 규제를 남발하는 국가개입이 말썽이라는 논의 일본 성장모델이 시대에 적응을 못했다는 논의 등 수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말이 많으면 말의 질도 올라가기 마련이라 그러한 논의의 정점을 장식한 것이 Two Japan 이론이다.

헤이세이 불황은 분명 거시경제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불황이 이다지도 오래가는 이유는 거시적인 문제로 돌리기엔 석연치가 않았고 일본경제의 미시적 기초가 잘못되었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Two Japan 이론은 일본경제가 겉보기보다 취약하다는 논의로 시작한다. 건강한 경제라면, 경쟁력있는 경제라면 생산성이 높고 생산성이 높으면 이윤율이 높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 독일과 비교했을 때 일본의 특징은 저생산성과 저이윤율이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은 아시아 금융위기 직전에 아시아의 기적은 생산성 증가가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투입을 늘리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Two Japan 이론은 크루그먼과는 다른 설명을 한다. 일본경제의 저생산성과 저이윤율은 평균의 문제라는 것이다. 고도의 경쟁력을 갖춘 수출부문과 평균을 갉아먹는 비참하게 경쟁력 없는 내수부문의 두개의 일본이 있다는 말이다. 일본의 높은 물가는 생산성이 낮은 내수부문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은 수출부문의 경쟁력을 갉아먹으며 수출부문이 벌어들이는 이윤을 내수부문으로 이전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 이상 이런 시스템으론 버틸 수 없게되었다는 것이 Two Japan 이론의 요지이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Richard Katz의 ‘Japan the System that Soured’와 마이클 포터의 ‘Can Japan Compete?’를 보라)

저자는 Two Japan 이론에 동의한다. “오늘날 일본은 대기업, 특히 해외로 진출한 기업들의 경우 선전하고 있는 반면에 소규모 사업체나 가계는 겨우 생존하는데 그치는 상황이다. 지역에 따른 불균형도 발생햇다. 대기업이 집중되어 잇는 도쿄나 나고야 같은 도시 지역은 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잇는 반면, 소규모 사업체가 대세를 이루는 지역경제는 무릎을 꿇기 직전이다. 이런 불균형의 뿌리에는 세계화,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인도의 부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론적으로 중국과 인도의 부상이 모든 선진 경제에 유사한 효과를 나타내야 하지만 일본이 특히 큰 타격을 입은 것같다. 그 이유는 일본은 이번이 추격을 당한 첫번째 경험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스템은 이러한 도전에 대응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잇지 않은 상태엿다.”

그에 비해 다른 선진경제는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그런 충격을 겪어보았다. 바로 일본의 부상이 던진 충격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현재 1970년대 미국과 동일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다수의 제조업 관련 일자리는 이미 중국으로 이전됐고 일본은 1994년 이해 지속적으로 중국에 대해 무역적자 상태를 겪고 있다. 일본은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잇는 대기업과 이러한 기업들이 기반을 둔 도시지역은 지속적으로 유리한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잇지만 이들의 성공이 더 이상 지방에 위치한 소규모 사업체들에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대신 이윤이 중국과 다른 해외생산기지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세계화의 충격은 헤이세이 불황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일본이 세계화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잇는가는 심각한 도전이지만 헤이세이 불황은 두개의 일본 모두에게 무차별한 충격을 주었고 그 불황의 이유 역시 세계화의 충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헤이세이 불황이 장기화된 이유는 아주 간단한 숫자게임 때문이었다. 말한다. 장부상의 숫자말이다.

“기업의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면 기술적으로는 파산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진행된 것은 보통 의미의 파산이 아니었다. 일본기업들의 제품 개발과 마케팅, 그리고 기술이라는 핵심 역량은 양호했고 기업들은 매해 이익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품이 터지면서 자산가격이 폭락햇고 결과적으로 장부상의 자산도 폭락했다는 것이다. “대차대조표의 거대한 구멍 탓에 이들 기업은 대부분 순자산이 마이너스 상태엿다.” 분명 돈을 벌고 잇는데도 장부상으로는 갑자기 자산보다 부채가 많아진 파산 상태가 된 것이다.

이럴 때 기업들은 장부상의 숫자를 맞추어 기술적 파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회사 회부 사람들이 대차대조표상의 문제를 발견하면 그들의 신용등급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므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언론매체에서 그 회사가 엄밀히 말해 지급불능 상태에 있다는 보도가 나가면 문제의 기업은 다음 날 당장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은행은 여신의 물꼬를 막을 테고 공급업체들은 어음이나 외상 구매를 거절하고 현금결제를 요구할 것이다. 이로써 기업의 생존은 위험에 빠진다. 그러므로 기업에게는 채무를 조용히 갚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이때부터 기업은 경제학 교과서가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이 되어 버린다. 교과서는 기업의 행위는 이윤극대화를 대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술적 파산 상태에 몰린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이윤이 아니라 부채를 갚는 것이 된다.

일본기업들은 건강한 현금흐름을 이용해 부채를 갚아나갔다. 개별 기업으로는 합리적이고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그렇게 행동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헤이세이 거품이 터졌을 때 주식과 부동산, “두 부류의 자산에서 발생한 국부 손실만 1500조 엔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다. 이것은 일본의 개인 금융 자산 전체와 동일한 액수다. 이 수치는 3년간의 일본 국내총생산에 상당하는 액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하락한 자산 가격이 3년간의 GDP를 소멸시켜버린 것이다. 이것은 경제 전체에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발휘햇다.”

자산은 사라지고 빚만 남은 “민간 부분은 모두 채무를 상환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경제 전반이 구성의 오류를 경험하게 된다. 구성의 오류란 어떤 사람(기업)에게는 적절한 행동이 모든 사람(기업)에게 적용될 때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한다는 의ㅁ다. 일본경제는 지난 15년 동안 이러한 오류로 고통을 겪었다.”

구성의 오류는 역승수효과를 통해 작동한다. 1000엔을 번 가계가 900엔을 소비하고 100엔을 저축한다고 하자. 900엔은 누군가의 소득이 되어 경제의 수요가 된다. 저축된 100엔은 대출되어 역시 수요가 된다. 그러나 100엔을 대출할 누군가가 없을 때가 문제다. 기업들은 장부상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더 이상 부채를 늘리는데는 관심이 없다. 대출수요가 사라진 것이다. 대출수요가 없는 상태에선 아무리 금리를 낮춰도 수요는 살아나지 않는다. 제로금리에서도 수요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100엔은 그냥 은행에 남아 놀게 되고 총수요는 그 100엔만큼 줄어든다. 그렇다면 1000엔에서 900엔만 유효수요가 되고 경제는 수축해 소득은 900엔으로 줄어든다. 여기서 10%를 저축한다면 또 과정은 반복되어 총수요는 801엔, 729엔으로 감소한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 상태로 놓아두면 이러한 경제수축과정은 민간부문이 더 이상 돈을 저축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된다.”

디플레이션은 안 그래도 낮아진 자산가격을 또 낮추어 기업의 장부에 난 구멍이 더 커진다. 기업이 갚아야 할 자산과 부채의 차이는 더 벌어져 기업의 채무상환압력은 더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경제는 매년 가계의 저축과 기업의 순부채상환액의 합계에 상당하는 수요을 잃게 된다. 계속되는 총수요의 하락세는 경제를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으로 밀어넣는다.”

헤이세이 불황의 메커니즘은 이런 디플레이션이엇으며 1929년 미국의 대공황도 마찬가지였다고 즉 두 불황 모두 대차대조표 침체(balance sheet recession)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공황과 헤이세이 불황이 같은 종류의 침체엿다고 생각하지 못햇다. 왜 그랫을까? 일본의 침체가 덜 심각햇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침체와 미국의 대공황의 차이는 GDP의 20%에 이르는 기업 수요의 감소와 1500조엔의 국부손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GDP(명목, 실질 모두)가 거품이 최고조일 때의 수준을 유지했다는 데 잇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이 대공황 때 경험한 것과 같은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으로 경제를 몰아넣어야 마땅한데도 일본의 GDP는 최고점에 남아잇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답은 정부의 차입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업이 빌려가지 않는 저축을 정부가 적자재정으로 흡수해 총수요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유형의 경기 부양책으로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GDP는 고점 대비 1/2이나 1/3 수준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것도 낙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말이다. 미국의 경우 대공황 기간 자산가격 하락으로 자산가치가 1929년 한해의 GNP만큼 추락해 GNP가 46%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보다 더 심각해지기 쉬운 상황이엇다.정부의 조치가 대참사 시나리오가 실현되는 것을 막았다. 1500조엔의 국부손실과 GDP의 20%에 상당하는 기업수요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거품경제 정점 이상의 수준으로 GDP가 유지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재정부약책을 시행함으로써 정부는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이 심각하게 하락하는 것을 막는데 성공햇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재정부양책은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경제정책 중 하나라고 주장할만하다.”

대출수요가 사라진 대차대조표 침체에선 통화정책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직 재정정책만이 유효하다. 실제로 일본은 헤이세이 불황 내내 제로금리엿지만 자금수요는 없었다.

유동성 함정의 실제는 대출수요의 소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금 공급자가 채권보다 현금을 선호해서 유동성 함정이 일어나는게 아니란 말이다.

통화정책은 무용지물이고 재정정책만 유효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이 같은 침체기에 시기상조의 재정건전화만큼 위험한 조치는 없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1937년 미국, 1997년 일본에서 일어난 회복세의 역전은 모두 때이른 재정건전화 때문이엇고 결국 경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세입을 무너트려 오히려 적자를 더 키웠을 뿐이며 불황의 기간을 배가시켰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세수는 늘어나는 대신 감소햇고 재정적자는 급격하게 증가햇다. 이 조치들은 1999회계연도에 적자를 15조엔 줄이기는커녕 38조엔으로 늘렸다. 이것은 대차대조표 침체 기간에 정부가 재정건전화를 추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그러나 대단히 서글픈 사례다. 이로 인해 일본경제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같은 소규모로 2001년 고이즈미 내각에서 반복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차대조표 침체는 일본이나 대공황기 미국에서만 찾을 수 잇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닷컴버블이 터졌을 때 미국과 독일에서도 대차대조표 침체가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더 최근의 예가 주택거품이 터진 미국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차대조표 침체는 기업들의 채무상환이 끝나야만 끝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21세기 들어 일본의 경기가 살아난 것은 “기업들이 마침내 채무를 상환하는 움직임을 중지하고 10여년만에 다시 돈을 빌기기 시작햇기 때문이다. 기업의 순부채 상환액은 2004년 줄어들기 시작했고 2005년 말에는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업이 마침내 그들의 대차대조표에서 거품의 잔해를 모두 걷어낸 것이다. 기업들은 다시 자금을 차입하기 시작햇는데 이는 15년간의 침체기 이후 역사적인 전환점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부채 때문에 혼줄이 난 사람들은 부채에 대한 반감, ‘부채거부 신드롬’을 갖는게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반감 때문에 닷컴버블 이후 미국의 금리가 낮을 수 밖에 없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2000년 IT 거품이 붕괴된 후 미국기업들은 대차대조표를 깨끗하게 정리한 후에도 차입을 거부햇다. 2004년 그린스펀은 기업이 경기순환 사이클상 마땅히 예상되는 것만큼 대출을 받지 않는 이윻에 대한 궁금증을 공공연히 드러냇다. 기업의 차입기피는 장기금리를 낮은 수준에 머무르게 했고 2003년부터는 종종 명목경제성장률보다 낮게 유지시켰다. 이러한 낮은 장기금리는 미국의 주택거품을 2년 더 연장시켰고 지금 세계 금융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잇는 서브프라임 사태의 씨앗을 뿌렸다.”

대차대조표 침체를 겪은 후 금리가 다시 오르는데는 부채를 갚느라 고생한 사람들이 퇴직하거나 죽을 때까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단기 금리가 거품 이전의 1920년대 수준인 평균 4.1%를 회복하는데 1959년까지 30년이 걸렷다.” 낮은 금리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 나타난 세수와 가계저축 회복이 민간부문의 대출수요증가를 초과해 경제에 브레이크로 작동하지 않을지 우려해야 한다. 최근의 낮은 장기금리와 약한 국내수요는 이러한 상황이 이미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거품의 전과 후로 나누어보면 하나의 사이클을 읽을 수 잇다고 본다. 거품붕괴후 빚의 무서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부채거부 신드롬에 헤어나지 못한다. 한세대 정도 후 그 사람들이 퇴장하고 신드롬이 사라지면 다시 차입에 적극적이 되고 자금수요가 살아난다. 이때부터 통화정책이 효과가 있게 되고 정부의 자금수요는 자금수요가 없었던 거품 이후와 달리 민간부문의 차입과 경쟁을 하게 되면서 민간의 투자를 밀어내는 구축효과가 나타난다. 다시 작은 정부가 유행하고 통화정책이 재정정책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민간부문의 활기와 자신감은 지나쳐 거품이 만들어진다. 이런 사이클이 한바퀴를 도는데 60년이 걸린다고 저자는 보고 두 국면으로 나눠 음양 사이클이라 부른다.

“양국면에서는 민간부문의 대차대조표가 튼튼하고 기업들은 이윤극대롸흘 목표로 한다. 이러한 경제상황에서는 정부가 작고 개입을 적게 할수록 경제에 좋다. 또한 기업들이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가져 자금에 대한 강한 욕구를 보이기 때문에 통화정책이 고도의 효력을 발휘한다. 반면 재정정책의 경우 민간투자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극대화에 근거를 둔 문헌상의 모든 경제이론은 암묵적으로 경제가 양 국면에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음 국면에서는 이런 상황이 역전된다. 이 국면에서는 자산가격이 하락해 대차대조표에 손상을 입게되고 따라서 부채를 최소화하여 재정적 건강을 향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많은 기업들이 동시에 부채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므로 구성의 오류가 발생하고 경제는 불황이라고 부르는 수축균형상태로 향한다.

이 국면에서는 재정정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이국면에서는 민간부문이 투자할 돈을 빌리는 대신 부채를 갚기 때문에 구축현상이 발생할 위험이 없다.”

저자는 서브프라임 사태는 음국면에서 자금수요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소규모 거품이엇다고 말한다. “자금을 전통적인 기업 차입자에게 맡길 수 없는 자금 관리자들이 다른 곳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투자 기회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2004년에서 2006년에 걸쳐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차입자들에게 자금이 막대하게 흘러들어가고 현재까지도 석유 같은 원자재에 자금이 유입되고 잇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의 d이다. 소규모 거품으로 인한 문제는 기업 차입자들이 자금조달 활동을 재개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지금이 사이클에서 음인지 양인지를 구분하지 않으면 재앙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금은 음국면에 들어섰는데 통화주의와 같은 양국면 정책을 밀어붙이면 대공황 초기와 같은 재앙이 일어난다. 일본의 장기침체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진 것도 그런 혼선때문이엇다고 저자는 본다. 그리고 50-60년대 케인즈주의자들이 저지른 실수는 양국면에 음의 정책을 썼기 때문이라 말한다. “초래된 결과는 참담했다. 자원배분은 왜곡됐고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으며 금리는 상승했고 성장은 정체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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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 지금 미국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 52
김광기 지음 / 동아시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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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 인근의 이스트포인트. 실직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신청서를 배부하는 날이엇다. 35도가 넘는 더위에도 3만명이 넘는 시민이 북새통을 이뤘다. 혹시라도 앞으로 나올 공간을 위해 단지 신청서만 배부하는데도 소동이 벌어졋다. 이날 62명이 부상했고 20명은 입원했다. “이날 신청서를 얻으려 모인 사람은 시 인구의 2/3가 넘는다. 신청서를 거머쥔 한 시민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입주 당첨권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났거나 곧 쫓겨날 처지가 대부분이다.” 금융위기가 불거지고 미국의 노숙자는 30% 늘었다. 미국인 200명 가운데 1명이 노숙자이다.

미국은 중산층의 나라였다. 인구의 60% 이상이 중산층이엇고 “중산층이 두껍기에 너도 나도 기회만 닿으면 미국에서 살고 싶어아는 아메리칸 드림을 양산햇다. 그러나 그 명성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지난 한세대 동안 미국의 중산층은 녹아내렷다. “2009년 미국인의 61% ‘항상, 또는 늘’ 하루벌어 하루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실직하면 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임대주택 신청서가 유일한 희망이 된 이유이다. 하루하루 연명하며 “사는 이들이 2007년 43$%, 2008년 49%였는데 2009년에는 더욱 상승했다.” 미국인 대다수가 “벼랑 끝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직포기자는 제외하는 공식실업률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업자를 모두 포함하는 U-6 실업률은 2009년 16.2%, 2010년 16.7였다. 게다가 “새직장을 얻었다 해도 절반 정도는 최저임금을 받는 단순 노동직임”에 불과하다. “40%가 넘는 미국인이 지금 최저임금을 받는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한다.” 실업률이 높을 때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경력이 없는 청년들이다. “청년실업률은 53.4%로 2차대전 이래 최악이다.”

“워싱턴총영사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영어강사 취업을 위해 한국비자를 신청한 사람은 380명으로 이 가운데 68명이 미국의 100대 대학 안에 포함되는 명문대 출신이엇다. 하버드대와 뉴욕대, 듀크대, 등 일류대학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예전엔 아무리 번듯한 직장을 준다고 해도 한국행은 그들에겐 한 치도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현재 미국의 처절한 경기 침체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실업률과 직결된다.”

그러다 보니 “2009년에 미국인 8명 가운데 1명이 먹을 것을 위해 정부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으며 그중 600만명이 수입이 없어 푸드 스탬프만으로 연명하고 있다.”

미국인에게 식량이란 고기이다. 최소한 미국에선 “먹을거리 그것도 육류 값이 무척 싸서 아무 지장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잇엇다.” 그러나 이젠 먹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먹지 않을 수는 없으니(고기를 먹지 않을 수는 없으니) “대신 스팸 소비가 늘었다. 스팸 제조회사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다. 그나마 유사육류인 스팸으로라도 고기맛을 보는 사람은 다행이다. 그마저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은? 그래서 지금 미국인들은 닭을 키운다.

여기저기서 닭을 키우는 바람에 닭들이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 참을 수 없는 소음을 자아내고 닭들이 싸우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자 한 가구당 한마리만 키우는 조례가 발동된 곳도 있다. 2009년 9월 LA 시의회가 통과시킨 조례이다.

그런데 이런 추세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있다. 가정에서 닭을 치는 것이 반드시 비용절감만은 아니다. 비용을 생각하면 병아리 사육은 그렇게 큰 경제적 이득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미국인은 지금 다른 것은 몰라도 총과 닭 그리고 씨앗을 사려고 안달이다. 그것들은 미국인들이 유사시에 의지할 최상의 방책이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느끼는 심리적, 물질적 위기는 도를 넘어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닭을 키우는 것은 생존을 위한 자립심의 발로라는 상징적 의미이다. 여기서 자립심이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는 생존능력을 말한다. 닭을 키우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의 그물망이 해체되고 타인의 도움을 유기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최후의 전략이다.

이런 위기감은 기분 나쁜 징조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에서 쫓겨났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수 있으며 호주머니와 은행에 모아둔 돈도 없다. 이럴 때 나를 도와주고 지원해줄 국가도 빈털터리다. 내가 믿고 의지할 이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비상식량부터 챙기자.”

“경제적인 실패는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미국만이 가진 그리고 미국인만이 소유한 소중한 무엇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유학시절 주유소에서 겪은 일이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아무리 지갑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한 필자는 주유소 직원에게 시계와 운전면허증을 건네주며 사정햇다. 그리고 곧 가지고 오마했다. 그랬더니 주유소 직원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면 시계와 면허증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지불하면 되고 이런 것은 필요없단다. 단골 주유소도 아니라 안면도 없었다. 그런데 필자를 믿어준 것이다.

그랫던 미국이다. 정직, 정의, 공평성을 바탕으로 신용이 미덕이 되는 신뢰사회가 미국의 자랑이엇고 힘이엇다.”

저자는 미국의 위기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본다. “진정한 위기는 바로 신뢰 증발의 위기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대규모 사회에서 남을 믿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이든 사회가 돌아가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사회적 신뢰를 두가지로 구분한다. 먼저 중국, 일본, 한국 사회의 신뢰는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맺어지는 신뢰다. 그러한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집단 구성원들끼리 지닌 신뢰다.” 그예로 저자는 한국 대학들의 자기대학 출신 교수(여기선 학부가 중요하다) 비율이 높은 것을 든다. 자기 대학 출신을 뽑는 것은 밥그릇 싸움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큰 이유를 신뢰의 문제라 본다. “자기 대학 출신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당파싸움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지연, 학연으로 뭉쳐 밥그릇 싸움을 한 당파싸움이나 교수자리의 밥그릇 싸움이나 다를 것은 없다. “아담 셀리그만은” 이런 신뢰를 “확신(confidence)”라 말하며 저자가 미국 주유소에서 경험한 신뢰를 “신뢰(trust)라고 부르며 명확히 구분하다.”

확신의 전형적인 예는 일본의 ‘이에(家)’이다. 나카네 지에는 '우리'란 말의 의미는 두가지 원리에 의해 말들어진다고 말한다: 자격(attribute)와 場(frame).

자격은 혈연, 지연, 학연, 직업, 계급, 계층 등과 같은 개인이 가진 속성을 말하며 場은 공간적 테두리를 집단을 만드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두가지 원리 모두 어느 사회에나 보편적이다. 그러나 두 기준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두 기준이 어느 정도로 섞이는가에 따라 사회를 구분할 수 있다고 나카네 지에는 말한다.

자격과 장의 두 기준으로 사회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보면 인도와 일본이 양극단에 있고 다른 사회들은 그 중간에 있다고 나카네 지에는 말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자격을 기준으로 한 집단구성의 전형적인 예이다.

"인도의 농촌에서는 친정집에 가서 장기간 머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시로 형제가 방문을 하고 원조를 받기도 하며, 고부간의 싸움을 옆집에 들릴 정도로 크게 하여 그것을 듣고 같은 카스트에 있는 옆집의 시어머니나 며느리가 응원을 오기도 한다. 다른 마을에서 시집 온 며느리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은 일본의 여성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독한 것이어서 부러울 정도였다.. 이것은 며느리라는 같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기능이 발휘되어 '이에'라는 테두리와 교착하면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아이들 싸움에 부모가 나선다'는 식으로 완전히 반대의 경향이 존재한다." (나카네 지에)

일본에선 며느리나 카스트같은 자격은 시집을 오면 사라진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경제적 공동체가 되면 일본에선 '우리'의 한 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릴사위제도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며느리는 고달프다. "일본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문제는 '이에' 안에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학대받는 며느리는 자시의 친형제, 친척 내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원조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집을 갔으면 이전에 속했던 '이에'에선 탈퇴하고 다른 '이에'에 속하게 된 것이므로 다른 '이에'일 뿐인 친정사람들은 도와줄 이유도 없고 도와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주유소에서 경험한 신뢰는 확신과는 다르다. 이 신뢰는 ‘우리’란 말이 붙을 수 없는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낯선 이들끼리 일단 믿어주고 시작하는 신뢰를 말한다. 따라서 이 신뢰는 아슬아슬한 신뢰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신뢰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과거 전통사회에서 보이던 끈끈한 집단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사 그런 것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만 서로 위하면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넓어졌고 복잡해졋기 때문이다.

서양의 사회학자들은 동양사회를 저신뢰 사회, 즉 신뢰할 수 없는 사회로 규정했었다 맞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 우리 사회가 이렇지 앟은가. 얼마나 연줄을 좋아하면 연줄의 대명사인 대학 간판을 따려고 젊은 시절을 그토록 허비하고 잇지 않은가.”

저자는 미국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뢰엿다고 말한다. “필자가 걱정하는 바가 이것이다. 미국인들 사이의 믿음은 후자의 신뢰엿다. 학연, 혈연, 지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지는 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많은 인종과 민족을 바탕으로 하는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신뢰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피부색, 말, 밥 먹는 문화도 각양각색이다. 아무런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곳에 과연 사회가 남아날까?”

학계에 더 널리 쓰이는 말로 하자면 저자는 사회적 자본의 고갈을 언급한 것이다. 미국의 사회적 자본이 바닥났다는 지적은 퍼트넘의 ‘Bowling Alone’이란 책으로 대중화되엇다. “사회적 자본을 가진 네트웤의 특성은 그 속의 사람들이 반복적인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자본은 접촉의 스포츠와 같다. 하회적 자본을 가진 네트웤의 전형적인 예로서 주민모임, 자선단체, 종교단체, 스포츠팀, 사교클럽, 시민단체,동호인 모임, 볼링 리그 등이 있다. 회사와 직장 역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의 원천이다.” (에릭 바인하커)

사회적 자본의 예로 많이 인용되는 퍼트넘의 이탈리아 남부 연구를 보자.퍼트넘은 남부 이탈리아의 푸글리아 지역 관공서 방문 경험을 이렇게 기술했다: “침침한 대기실에 몇몇 나태한 공무원들이 서성대고 있다. 그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출근하지 않지만 민원인의 요구에 대응하지도 않는다. 자주 가는 민원인들은 건너편 사무실에 놓인 텅 빈 책상만 보게 된다. 이러한 지방 공무원을 일하도록 만들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개탄한 시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그들은 편지에 회신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퍼트넘은 북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의 관청을 이렇게 소개했다: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자방관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현대식 첨단 기업을 방문하는 것과 같았다. 활달하고 예의바른 안내원이 방문자들을 사무실로 안내하였고 공무원들은 전산화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지역의 문제나 정책에 대해 잘 설명했다. 많은 분야에서 입법을 선도한 에밀리아 정부는 약속을 실천에 옮겼으며 정부정책의 효과는 수십개에 달하는 어린이 보육센터, 산업단지 공연장, 직업훈련원 등으로 설명된다.”

퍼트넘은 두 관청의 차이를 그 지역의 사회적 자본의 차이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대규모 협력을 실행할 수 없는 낮은 신뢰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 사회는 극도로 원자화되어 있어 모든 협력적 노력이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인 가족에서만 이루어진다. 사촌 같은 친족과의 관계는 물론 때로는 성인이 된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도 신뢰와 협력을 찾아볼 수 없다. 공동체 차원의 협력적 노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밴필드는 이런 유형의 사회를 ‘무도덕한 가족주의’라고 부르고 그 기본 철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핵가족이 단기적으로 얻을 수 잇는 물질적 이익을 최대한 얻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거라고 생각하라.’ 이것은 악당의 철학이다. 사회가 사회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사회라고 부르는 것조차 사태를 오도할 수있다. 그것은 사실 원자화된 핵가족의 집합체다.” (피터 터친)

그에 비해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은 훤씬 많이 네트웍화되어 잇다. 합창단과 산악회, 문학 서클, 사냥 클럽 같은 시민들의 모임이 훨씬 촘촘하게 짜여잇다.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과 공적인 원인에 대한 헌신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시칠리아의 마치아와 자매 조직인 나폴리의 카모라는 늘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북부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없다. 마피아는 만연한 신뢰 부족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 생긴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부족한 곳에는 보호에 대한 수요가 많다. 마피아는 보호를 젝5ㅗㅇ해주는 개인 사업가이다. 메초조르노에서는 절대 기업을 할 수없다. 잠재적 파트너도 기회만 있으면 속이려 들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초에 그런 위험에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마피아에 의존해 계약을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마피아는 그런 역할을 했다.” (피터 터친)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에 사회적 자본이 풍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에서 “성공하는 기업은 일반적으로 가족이 소유하고 직원이 100명쯤 되고 밀라노나 볼로냐에 있다. 그런 기업들은 패션에서 정밀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틈새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국제시장에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규모의 이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북부에서도 중간규모의 집단에서만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 터친)

피터 터친은 그 원인을 로마제국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터 터친은 서로마제국은 사회적 자본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서 사회적 협력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회적 자본의 “블랙홀이 로마제국의 핵심지역에서 발생했다. 제국이 붕괴된 두에 이탈리아 북부에는 6세기의 랑고바르드족을 비롯해 몇 차예나 게르만족이 밀려들었다. 이 이주민들은 아사비야(피터 터친이 사회적 자본 대신 쓰는 이븐 할둔의 용어)가 높은 사회에서 왔고 따라서 이들의 유입은 제국 때 생긴 남북의 차이를 더욱 강화햇다.”

퍼트넘은 ‘Bowling Alone’에서 미국의 상황이 이탈리아 남부를 닮아간다고 우려한다. “’우리는 갈수록 가족과 친구, 이웃, 사회조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사회조직은 학부모회든, 교회든, 레크레이션 클럽이든, 정당이든, 볼링연맹이든 마찬가지다.’ 30년전에는 지금보다 두 배는 자주 친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햇다. ㅎ사회적 신ㄹ회도 감소하는 것같다. 분명히 워싱턴에 있는 정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계속 줄엇다. 1950년대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70%에서 80%였는데 1990년대는 30%에서 40%였다. 미국사람들은 45%가 신문을 거의 또는 전혀 믿지 않아 20년 전의 16^에서 크게 증가햇다. 퍼트넘이 하고자 하는 말은 개인이 갈수록 고립된다는 것이다. 차에서도 혼자 잇고 일도 혼자 하고 이혼하고 형광등 불빛 아래서 혼자 볼링을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어떤 사회에서나 위험이 임박했다는 신호다” (피터 터친)

퍼트넘과 후쿠야마는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들을 들고 있다. 피터 터친은 그 이유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불평등의 증가를 말한다.

퍼트넘과 후쿠야마는 미국의 사회적 자본이 고갈되기 시작한 시점을 1960년대로 말한다. 그리고 미국의 불평등 역시 “1960년대가 분기점이다. 그전에는 미국에서 불평등이 줄어들고 잇엇는데 그 뒤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몇십년동안은 일반 노동자의 봉급과 CEO의 보수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1970년부터 하위 20% 노동자의 봉급은 그대로여서 사실상 줄어들고 있다. 마태원리가 풀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물가상승률은 모든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사려면 큰돈이 들어가는 많은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집값과 교육비, 의료비는 훨씬 빠르게 증가했다.”

피터 터친은 제국의 붕괴를 사회적 자본(그의 용어로는 아사비야)의 고갈이 원인이라 말한다.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제국이 만들어지도록 했던 사회적 협력이 사회적 경쟁으로 바뀌면서 집단협력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자본이 고갈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피터 터친은 미국의 학벌사회화를 그 예로 든다. “교육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엘리트증 내부의 경쟁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때문이다. 미국에서는 20세기에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증가햇다. 20세기 말에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일자리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에 충분하지 않아 박사 학위를 따는 대학 졸업자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햇다. 박사 학위 값은 박사 학위를 마치는데 걸리는 햇수로 치면 더욱 빠르게 증가햇다. 1967년부터 1995년까지 박사학위를 마치는 데 드는 평균 시간이 자연과학은 6년에서 8.4년으로 사회과학은 7.7년에서 10.5년으로 인문학은 12년, 교육학에서는 무려 19.9년이다.

이런 흐름들은 위기가 오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며 엘리트층 내부의 경쟁이 심해지고 잇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인들이 익숙한 수준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갈수록 더 많은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피터 터친)

조선후기의 당쟁은 엘리트 내부의 경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 현상이 미국에서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앵커맨과 앵커우먼들의 학력을 보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 출신이 대다수이고 고졸, 중퇴자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능한 곳이 미국이엇다. 우리처럼 번듯한 학교 간판 하나만 가지면 실제 능력 없이도 행세하는 나라가 아니엇다.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자나 능력에 맞게 케이크를 적당히 나누어 가질 수 잇는 곳이 미국이엇다. 이런 풍토가 요즘 급격히 바뀌엇다. 나눠 먹을 케이크를 소수가독점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 소수는 죄다 동부의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돈다. 이런 와중에 나온 것이 학벌주의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또는 그런 곳으로 많이 보내는 명문고교에 보내기 위해 사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미국에서는 없던 풍경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인다는 것은 미국이 그만큼 달라졌음을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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