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사람 - 다시 쓰는 경제위기의 역사
애미티 슐래스, 위선주 / 리더스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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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낸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루즈벨트는 혁명을 막아낸 것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고 말한다.

1차대전 이전의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세계화가 진행되었었다. 철도와 증기선, 전신, 전화로 세계가 연결되면서 교통과 통신의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졌고 빨라졌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면서 지난 한세대동안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그 시절의 세계화도 상상할 수 없었던 부를 낳았고 세계는 번영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화가 그렇듯이 그 시절의 세계화 역시 양극화라는 문제를 키웠고 우리가 느끼고 있듯이 사회의 대다수가 ‘잊혀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에서 사민당과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국가 모델을 실험하는 체제내 개혁이 있었고 1차대전 후에는 소련이 성립되고 헝가리를 비롯한 중유럽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에선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다.

광란의 20년대로 불리게 된 1920년대의 번영은 그러한 계급갈등을 잊혀지게 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다시 계급갈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가 뉴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계급갈등이 혁명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루즈벨트가 생각한 뉴딜은 계급투쟁을 막기 위한 양보가 아니라 바로 계급투쟁이었다고 말한다.

대공황 이전에 대다수이면서 발언권이 없었던 노동자와 농민이 잊혀진 사람이었다면 루즈벨트가 집권한 1930년대에 잊혀진 사람은 자본가였고 부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는 돈이 많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식으로 부자들을 공격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뉴딜은 구호에 불과했다. 뉴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애매모호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상식은 뉴딜을 케인즈주의의 실행이었다고 알고 잇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르즈벨트는 적자재정을 혐오하는 사람이엇다. 적자재정은 정부의 책임과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불황이 장기화된다는 것은 케인즈가 말하지 않아도 당시 이해되고잇던 논리엿다. 루즈벨트의 전임자인 후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디서 수요를 만들 것인가? 소비자의 주머니를 채우면 된다. 월급을 많이 주면 된다고 생각한 후버는 불황인데도 기업들이 노동자에게 임금을 인상해주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불황에 월급을 많이 주면 회사의 이익이 줄어든다. 그리고 경쟁을 할 수 없게 되고 가격을 내릴 수도 없게 된다. 소비자는 높은 가격을 지불하게 되면서 소비는 늘지 않는다. 간단한 논리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논리에 따라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다. 그러나 후버와 루즈벨트는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는 루즈벨트의 뉴딜의 본질은 유효수요을 늘린다는 케인즈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루즈벨트가 하려고 했던 것은 정부와 민간부문이 경쟁하는 것이었고 민간부문을 정부가 대신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루즈벨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은 당시 소련에서 실험되고 잇었던 집산주의 모델, 정부가 생산을 계획, 통제하는 모델이었다. 루즈벨트의 브레인들은 20년대에 소련시찰단에 참가했던 좌파지식인들이었고 그 브레인들과 루즈벨트의 생각은 비슷했다고 저자는 암시한다.

그 예로 저자는 불황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경기회복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전력산업(유틸리티)과 루즈벨트의 전쟁을 예로 든다. 널리 알려진 TVA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댐은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했다. TVA는 민간전력회사와 경쟁관계에 뛰어들었고 결국 민간업체를 공격해 그들을 흡수한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반시장적인 규제가 쏟아져 나왔다. 가령 이책에 소개된 가금류 시장에 대한 규제를 예로 들면 디플레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가격경쟁을 제한하면서 중소상인들이 경쟁력을 잃어 파산하도록 몰아갔고 임금을 인상하도록 압박하면서 고용을 줄이도록 몰아갔다.

결국 그러한 반시장적인 정책은 기업의 활동을 제약하면서 불황을 장기화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세수가 줄 수 밖에 없었다. 부족한 세수를 늘리기 위해 세율이 올라가 회사 수익의 3/4을 가져갔다. 기업의 이익은 리스크에 대한 보상이다. 그런데 실패하면 손해는 자기 몫이고 성공하면 자기 몫은 1/4 밖에 안된다면 누가 의욕이 나겠는가?

당연히 투자가 줄었다. 자본의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즈벨트는 더 황당한 조치를 내놓는다. 기업의 내부유보금에 대해 78%의 세금을 거두어 세수를 늘리기로 한 것이다. 기업이 가지고 있는 돈을 빼앗으면 직원 월급은 어떻게 줄것이며 투자는 어떻게 하는가? 당연히 기업활동은 위축되엇고 고용은 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20년대의 번영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루즈벨트가 부자들에 대해 벌인 내전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구한 것은 나라 밖의 전쟁인 2차대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라 밖에 전쟁을 하면서 나라 안에서 전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10년가까이 불황을 장기화하면서 뉴딜에 대한 지지는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로서도 자신의 전쟁을 끝낼 때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상이 이책의 논지를 요약해본 것이다. 사실 저자의 논지는 엉뚱한 것은 아니다. 케인즈주의가 정당성을 상실한 70년대부터 뉴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저자의 논지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뉴딜은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한 것이 아니라 대공황을 더 장기화하고 악화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뉴딜의 반시장적인 개입주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책은 그러한 주장을 이어받고 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책의 가치는 왜 그런 반시장적인 개입주의가 나오게 되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에 있다. 저자는 20년대 미국에서 별종으로 취급되며 소외되었던 좌파지식인들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루즈벨트의 브레인트러스트로 들어가 어떻게 정책을 생각했고 어떻게 정책을 내놓았는가를 추적한다.

그들은 소련이란 선례를 따라 하려 했다고 이책은 말한다. 집단농장과 같은 실험을 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소련에서 공산주의 실험 자체가 그렇듯이 선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좌충우돌할 수 밖에 없었고 몽상가들의 어설픈 장난에 불과하게 된 과정과 결과들은 이책은 보여준다.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뉴딜 역시 어설픈 이상에서 시작했기에 현실과 충돌해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고 이책의 저자는 말하는 것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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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심리학 -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
하지현 지음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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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그리 큰 기대를 하고 본 것은 아니다. 목차를 보니 왜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같은 간접적 매체가 유행하는가로 시작해 폭탄주를 왜 마시게 되나 왜 광신도가 이렇게 많으냐? 스타벅스 커피가 왜 유행하는가 그러면서 커피믹스는 여전히 왜 잘 팔리나 왜 조폭을 싫어하면서 느와르에는 열광하는가 같은 누구나 궁금해하면서 한번쯤 썰을 풀어봤을 주제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책의 저자는 그런 심심풀이 잡담의 소재들에 현직 정신과의사로서 나름 설득력있는 설명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왜 와인이 유행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 예전처럼 먹고 죽자는 식의 폭음문화가 유지되기에는 삶이 팍팍해졌다는 것이다. 언제 떨려나갈지 모를 직장에서 단합을 위해 몸을 버려가며 희생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면서 술을 같이 마신다는 의미는 가질 수 있는 술을 찾다보니 와인이 뜨게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정착되면서 남자들의 장난감이 되어 와인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취미의 영역이 된 것이다.

상식적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설명이다. 대단한 이론이 전제된 것도 아니다. 나도 할법한 설명이다. 이런 생각들이 들 것이다. 물론 그렇다. 이책은 그런 소소한 현상들에 대해 상식적인 설명들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볍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런 쉬운 설명에는 저자의 정신과의사로서의 경력이 녹아있기에 쉽고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간간히 쉽게 상식적인 설명만으로 부족할 때 심리학 이론들이 쉽게 요약되어 제시되기도 한다. 물론 이책은 그리 깊이가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잡담에 활용해볼 수 있을 만한 소소한 주제들로 그리고 주변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면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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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 예찬 -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담백한' 중국 문화와 사상의 매혹 산책자 에쎄 시리즈 5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최애리 옮김 / 산책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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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이야’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다. 그 뜻은 맛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책은 바로 그 맛이 없는 것이 맛의 으뜸이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해왔고 말한다.

우리는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단맛 짠맛 쓴맛 신맛 떫은 맛을 오미라 한다. 그 맛들을 조합한 것이 우리가 먹는 음식들의 맛이다. 그러나 그 5가지 맛은 물론 그 맛들을 섞어 아무리 맛있는 것을 만들어도 밥처럼 삼시 세끼를 일생동안 먹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기에 ‘밥맛’이 으뜸이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괘변처럼 들리는가?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밥과 함께 먹는 반찬을 반찬만 먹는다고 생각해보라. 한끼 배부르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온갖 맛이 있는 반찬들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맛이 없는 밥과 함께 먹기 때문이다. 모든 맛은 밥의 맛없음 때문에 즐길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이책이 말하는 맛이 없음(無味)는 중국인들이 써온 말로 하면 淡이다. 담담하다고 말할 때 그 담이다. 그리고 담을 맛으로 말하면 물의 맛이다. 소리로 말하면 고요함이며 감정으로 말하면 평온함이다.

그러면 왜 淡이 중요한가? 맛이 없는 상태가 우리 혀가 느끼는 온갖 맛이 태어나는 잠재태이며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들의 잠재태이며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의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상태 이전의 그 잠재태의 상태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어차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물의 맛이 담이라 하지만 그것도 엄격히 말하면 어떤 맛이고 엄밀하게는 담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담을 사람으로 말하면 군자이다. 논어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어떤 기능에 한정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도공이라든가 역관이라든가 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도제식으로 그것만 배워야 했다. 그러나 군자가 되고자 하는 사대부들은 실제 관료의 업무에는 쓸데가 없는 경전이나 읽으면서 교양을 쌓은 사람일 뿐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만인을 다스릴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모든 맛으로 바뀔 수 있는 무미 즉 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그릇을 만들고 말을 통역하거나 사람을 고치는 전문가와 같이 한정된 그릇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어떤 일에든 그 일에 맞는 그릇으로 바뀔 수 있는 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의 기본적인 능력 즉 중용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중용의 이미지로 많이 드는 것이 時中이란 말이다. 활을 쏘아 맞춘다는 말인 시중은 타이밍이란 말로 가장 잘 번역된다. 활을 쏘아 맞출려면(中) 때(時)를 맞춰야 한다. 활이란 그냥 과녁을 향해 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위를 당기는 감각을 알아야 하고 바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딱 맞을 때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는 바로 때를 볼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맞출 줄 아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 군자라는 것이다.

이책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았던 성격은 평범한 사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성격에 고정되지 않은 물과 같은 사람이 이상이엇던 것은 어떤 맛으로도 변할 수 있는 잠재태로서 무미를 이상으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그리고 그런 물과 같이 어떤 그릇에도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군자이며 남의 위에 설 수 있는 리더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다. 중국에서 살아보지 못한,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프랑스 사람이 어떻게 지구 반대편의 나라의 전통에 정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이렇게 쉽게 글로 써낼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오히려 한자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쓴 책보다 더 명쾌하면서 더 쉽게 쓰여져 있다. 물론 이책은 프랑스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기에 더더욱 알기 쉽고 명쾌하게 쓰여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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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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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유대교 전통의 3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관한 권위자로 유명하다. 특히 이슬람에 관한 저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저자가 신이 없는 종교인 불교에 대해 쓴 이책은 특이할 수 밖에 없다.

팔리어 경전들이 스리랑카에서 세계로 알려진 후 초기불교 특히 붓다 생전에 관한 연구는 전기를 맞았다. 대승불교에 의해 왜곡되고 사변화된 불교보다는 붓다 생전의 소박하기 때문에 힘이 있는 원래의 진면목에 다가가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많은 저서들이 나왔다. 이책도 팔리어 경전을 근거로 쓰여진 책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책은 특이하다.

붓다의 생애에 관해 쓰여진 이런 류의 책은 불교 교단의 승려나 전문 불교학자가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종교학자 그것도 일신교 전통에 익숙한 저자가 쓴 이책은 불교 내부의 사람이 쓴 책들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다른 접근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불교 내부인이 쓴 책들은 붓다의 다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도 전통을 대척점에 놓고 그 전통의 맹점에서 붓다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불교 외부인이 쓴 이책은 붓다의 같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책은 붓다가 활동한 시기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기원전 6세기는 붓다와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유대교를 혁신한 예언자들이 나온 시기이다. 이 시대를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로 불렀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대이다.

왜 축의 시대가 서로 교류가 없는 문명권에서 동시에 나왔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당시 축의 시대에 들어갔던 문명의 공통점은 전환기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 전환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우리와 같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확실성의 시대.

공자의 중국도 붓다의 인도도 소크라테스의 그리스도 예레미아의 유대도 문명의 기초를 이루던 가치관들이 현실과 맞지 않게 되면서 불신당하던 시대였다.

인도의 경우를 보면 농업을 기초로 한 부족공동체에 적합했던 베다전통과 그 공동체의 질서에 근거한 카스트 제도가 무너지고 있었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등장하면서 과거 정착 농업공동체에 적합하던 종교 세계관은 현실과 맞지 않았고 카스트 제도에는 속할 수 없는 상인과 사업가, 은행가와 같은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그리고 부족공동체에 기반한 공화제도 현실과 맞지 않게 되어 더 넓은 영역에 질서를 세우는데 적합한 왕정 그리고 왕정에 기반한 제국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과거의 가치관은  도시의 특징인 이기심과 야망, 탐욕, 경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욕망이 확대된 정복전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苦의 팔리어 둑카는 원래 괴로움이기도 하지만 원래 뭔가 어긋났다는 뜻이 더 강하다고 저자는 지적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느낀 것은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이엇다고 지적한다.

그런 전환기를 살던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당시 수 많은 현자들이 인도 문명의 중심이던 갠지스 강 유역을 돌아다녔다. 붓다 역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붓다가 구하려 했던 새로운 비전은 당시 축의 시대를 살던 다른 현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다르다면 붓다는 그 해답을 본질적으로 깊게 들어간 것이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는 낡아버린 주 문화의 본질을 재해석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제시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유대교의 예언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축의 시대의 현자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전통을 재해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통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재해석해 원리를 추출하고 그 원리를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질로 생각해낸 것이다. 공자의 仁이 그러한 예이다. 즉 전통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본질을 건져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한 것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었고 이후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붓다에 대해 불교 내부인들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잇다. 저자는 붓다 역시 그러했다고 말한다.

붓다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는 보통 緣起라 요약된다. 요즘 말로 하면 인과법칙이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실체는 없다는 무아론이고 실체가 없으니 영원한 것이 없게 되므로 무상론이 파생된다.

그러나 이런 교리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저자는 불교의 핵심은 깨달음의 핵심은 그것을 요가 달리 말해서 명상의 상태에서 직접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금욕 수행을 하기 전 붓다는 요가계열의 두 스승에게서 배웠고 요가 전통의 궁극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요가전통은 우파니샤드 전통에 기초하고 있었고 내가 곧 브라만이다 즉 내가 곧 우주라는 것을 깨달으면 열반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힌두교는 아직도 그런 전통을 따른다.

저자는 팔리어 경전을 통해 요가 전통에서 붓다가 無를 경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가 보았고 요가전통에서 본 무는 뒤에 空이라 말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러한 무의 경험을 저자는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 신을 직접 체험한다고 했을 때 말하는 경험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명상을 풀면 다시 욕망에 사로잡히고 고에 물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붓다는 고행을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붓다는 무아 즉 나라는 인격이 망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의 근본은 자비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삐긋하고 잇다. 물론 저자는 연기에 대해서도 말한다. 연기론의 논리적 결론이 무아론이니 꼭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무아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하고 있다. 나라는 인격이 망상이라는 것은 무아론의 내용이 맞지만 거기서 我는 '나'라는 말이라기 보다 실체를 말한다.

그리고 자비심을 핵심이라 하지만 자비심을 그런 수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 저자가 처음이다.

물론 자비심을 강조하면 왜 붓다가 교단을 만들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있고 그의 전도에 바친 45년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자비심이 깨달음의 근본이라 말하는 책은 이책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책의 저자가 불교 내부인이 아니라는데서 나오는 가치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붓다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서 해석하고 당시 인도사람들의 마음을 설명하면서 붓다가 어떤 시대를 살았기에 그가 그런 수행을 했고 그의 가르침에 왜 인도인들이 열광했으며 어떻게 붓다를 받아들였는가를 잘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책의 가치는 붓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느끼게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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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머니 - 땅, 먹을거리, 세상을 살리는 자본
우디 타쉬 지음,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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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발 밑의 흙보다 하늘 위의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이책에 인용된 다빈치의 말이며 이책의 주제를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이다.

수많은 문명이 일어나고 사라졌다. 그중의 상당수는 그런 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사라진 문명들이다.

사모아 섬의 거석문명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중남미의 마야와 남미의 잉카 문명 이전에 있었던 많은 문명들이 그렇게 피었다 사라졌다.

그 문명들이 왜 멸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농업기반의 붕괴 즉 자연의 재생력을 넘어서면서 멸망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책은 현대문명이 그런 멸망을 향해가고 있다고 본다. 바로 아무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발 밑의 흙 속에서 무너져 간다는 것이다.

지금 수준의 수십억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농업혁명 때문이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농약, 제초제, 화학비료를 화학산업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인류는 멸망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방대하게 뿌려지는 화학성분들이 흙속의 미생물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흙 한줌에 있는 수조마리의 미생물은 식물이 자라기 위해 필요로 하는 양분과 생태계를 유지한다. 이런 미생물이 없이는 화학비료도 흡수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땅에서 최대의 수확을 얻을 생각만 하면서 유기화합물과 같은 땅속의 결정적인 성분이 재충전되지 않고 소모되기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의 토양학 수준으로는 미생물의 소멸과 유기화합물의 소모 이외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의 토양에 대한 이해는 극히 초보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농업이 시장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토양을 망가트리는 관행은 멈출 수가 없다. 시장의 논리에 따른 생산은 자본의 회전률을 높이는 것이다. 1년에 100원을 투자해 10원을 얻을 수 있는 것보다 1년에 10번 10원을 투자해 1원씩을 얻는 것이 더 낮다. 이윤은 더 작지만 회전율이 10배이기 때문에 총이윤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책에서 말하는 빠른 돈 즉 패스트머니의 논리이다.

저자는 패스트머니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땅을 혹사시켜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장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 돈의 속도를 떨어트리는 슬로머니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돈의 수익률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펀드를 조성해 지속가능한 농업을 확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몽상가의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저자가 그런 펀드의 모금을 자선기금을 모으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슬로푸드와 같은 사업을 하는 업체는 영리업체이기 때문에 세제혜택과 같은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 저자는 슬로푸드와 같은 운동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서 슬로머니를 이책에서 논의한다.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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