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다시 찾은 진실
스티브 비덜프 지음, 박미낭 옮김 / 푸른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른이란 말을 좋아해” 1학년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선배가 한 말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인 그 선배는 그런 성격에도 (아니면 그런 성격 때문인지) 존재감이 있던 선배엿다.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 말이 그 선배에게 어떤 의미엿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이 선배에게 의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몰랐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지금 나는 어른인가?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이다. 이책은 그 질문의 의미를 말한다.



“나는 좋은 남자를 딱 두 단어로 요약한다. 좋은 남자란 척추와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척추는 확고하며 참을성이 있고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며, 때로 아주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에 자신의 안전이나 이익을 맨 나중에 놓는 그런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척추를 가진 남자라면 신뢰할 수 있는 남자이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를 떠올리면 된다. 그런 남자는 의지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이해하거나 가까이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남자, 즉 베트남 전쟁 이후의 시대에 당시 남자들이 갖게 된 것이 바로 심장이었다. 이전의 남자들에게도 심장은 물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절에야 남자에게도 심장이 잇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시대에 들어서서야 사적이거나 공적인 삶 속에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슬픔, 염려, 자비 등의 감정을 드러내는 남자들이 등장햇다. 그 새로운 남자는 말을 걸어도 되는 남자엿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새로운 남자에게는 척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종종 믿을 수 없고 약속을 잘 저버리고 나르시시즘이 심했다. ‘섬세한 신세대 남자’는 교통사고나 산불이 났을 때 혹은 힘든 결혼 생활 중에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엇다.” 신세대는 척추를 잃어버렷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저자는 어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소년의 심리에 대해 긍정적인 점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성급하며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이다. 그런 소년이 남자가 되려면 그에게서 자기중심성을 몰아낼 수 있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과거의 모든 공동체는 그런 사실을 알랐고 그런 부분을 공동체 전체가 합심해서 다루었다. 이 과정이 성인식이다. 성인식은 소년들에게 때로는 강제적으로 그러나 절대로 친절함을 잃지 않고 세상에는 스스로를 기브게 하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소년에서 남자로 바꾸고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즉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사는 남자로 개종시키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성인식은 더 이상 없다. 성인식에서 전수되던 교훈은 소년들 스스로 알아서, 자기 힘으로 세상과 부딫히며 배우도록 방치되었다.



“과거에는 올바른 도움과 지식이 결합된 다양하면서도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성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현재는 그것을 운에만 맡긴다. 아주 신중하게 계획된 과정 없이 삶의 경험이 성인식을 대신하게 한다면 그들은 너무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과거의 성인식도 거칠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파괴적인 현실과 마주친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 없이 그런 황폐한 현실을 뚫고 나가야 한다. 오늘날 정말로 생기있고 성숙한 사람들이 아주 드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면 성인식에서 가르치던 교훈은 무엇인가? 저자는 5가지를 말한다.



1. 당신은 죽을 것이다. 2. 삶은 힘들다. 3. 당신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4. 당신의 삶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5. 결과는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다.



간단히 말하자면 겸손이다. 이 우주에서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 주어진 작은 것조차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 그것을 아는가의 차이가 소년과 남자의 차이라 저자는 말한다.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 이웃, 혹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마주친다. 남자든 여자든 이들은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인격, 온기, 헌신, 그리고 이상 등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끈다. 그들은 생명으로 가득하고 세상을 편안하게 느낀다. 마치 우주의 흐름 중 일부 같다. 버락 오바마나 마틴 루터 킹간츤 이들에데고 이런 자질들이 있었다. 미얀마의 정치가 아웅 산 추지, 넬슨 만델라 등도 그런 사람이다. 물론 특별한 사람들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오직 주변의 친구와 동료들에게만 알려진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갑자기 부상했는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었는가?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순조로웠는가?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항상 성공적이엇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실제로 이와는 완전히 반대이다. 이들의 위대함은 거의 예외 없이 고통 속에서 탄생햇다. 어떤 일들은 삶이 산산조각 나버릴 만큼 힘들었지만 그들은 그 고통스러운 일에 무너지는 대신 그 일을 변화의 계기로 삼았다.” 그 고통은 그들에게 삶의 현실에서 치룬 성인식이었다. 그 고통은 그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쳤고 ‘나’를 넘어선 나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과거의 성인식에선 소년은 죽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고 말해졋다. 자기중심적인 소년은 죽고 더큰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이엇다. “성인식의 목적은 젊은 남자나 여자를 성인의 세계로 데리고 가는데 있다. 그리고 성인식의 과정은 언젠가 당신이 원로가 될 때까지 공동체가 힘을 합쳐 강력하며 평생 지속되는 네트웤으로 당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성인식은 당신을 사랑하고 가치 있게 여기며 평생 동안 지지해줄 성인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환영의식이다. 다섯 가지의 이 어려운 메시지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면 젊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서 어른의 세계로 건너뛰는 모험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 것이다! 이 얼마나 즐거운 메시지인가!”



문제는 그런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남자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라진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다. 전 시대에 있었던 이웃이나 마을의 어른들, 삼촌들, 멘토들도 덩달아 그림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운동을 잘하거나 보이스카우트에 들거나 우자 특별한 교사를 만나지 않는 한 남자아이가 다른 성인 남자를 자세히 알 기회란 거의 없다. 바로 이 점이 자라나는 소년에게 거대한 진공 상태를 초래한다. 남자들이 ‘연극’을 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남자들의 내적 세계를 모르는 소년들로서는 자아 이미지를 형성할 때 tv,나 영화, 친구같이 외부에서 주어들은 빈약한 이미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신도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배운 이미지를 행동으로 옮긴다.”



선천적으로 친밀감을 키우는데 뛰어난 여자들은 다르다. 여자들끼리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여자들은 ‘자기들 위에 걸어 둘만한 수호전사를 갖게 되고 평생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



“소년들 각자가 가면에 의존해 최선을 다해 보지만 그 자아는 친구와의 우정, 여자들과의 관계, 자녀들을 기르는 일 등 삶의 개인적인 영역들 중 그 어느 공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라 아버지가 된 소년들은 당연히 자기 아버지처럼 될 수 밖에 없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책은 우리가 배웠어야 하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에 관해 말한다. 물론 말로 가르칠 수 잇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직업인으로서 남자가 되어 알아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방향은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평점 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완성 -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 보고서’ 그 두 번째 이야기
조지 베일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1950년대 초,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던 나의 할아버지 도널드 클리프턴 박사는 연구 도중 매우 김각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거의 모든 심리학 분야들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만을 다룬다는 사실이엇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연구하는 것이 그보다 중요하다고 믿던 할아버지는 지난 50년간 인간이 가진 긍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동료들과 함께 수백만 번의 인터뷰를 실행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할아버지가 40여년 째 연구를 진행오던 1990년대에 새롭게 떠오른 심리학 분야가 바로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연구하는 긍정심리학이다.” (도널드 클리프턴, 톰 래스)

긍정심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도널드 클리프턴의 이론은 ‘물통과 국자 이론’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물통을 가지고 있다. 그 물통은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지속적으로 채워지거나 비워진다. 물통이 가득 차 있을 대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비어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국자를 가지고 있다. 그 국자로 타인의 물통을 채워줄 때 즉 긍정적인 감정을 이끈 ㄴ말이나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물통도 채워진다. 그러나 국자로 타인의 물통에서 물을 퍼낸다면 즉 긍정적인 감정을 줄어들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우리의 물통에서도 물이 빠져나가게 된다.” (도널드 클리프턴, 톰 래스)

긍정심리학의 논리는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물통에 담긴 물의 정체는 세월과 함께 바뀌어갔다. 초창기 긍정심리학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이다. 위에서 인용한 물통과 국자 이론을 소개한 책에서도 첫번째 사례로 드는 것이 칭찬의 효과를 보여주는 피그말리온 효과였다.

이후 긍정심리학의 논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미국식 성공학의 학술 버전에 불과하게 되었다.원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긍정심리학에서 ‘긍정’의 기초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실험적으로 증명된 가설이다. 그러나 칭찬을 아무리 해도 백치가 전교 수석이 되고 하버드에 들어갈 수 없고 아무리 나는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무장해봐야 청소부가 대기업 CEO의 역할을 해낼 수는 없다.  

 이책은 긍정의 개념화가 잘못되었다는 반성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긍정의 기초를 새로 놓기 위해지난 10년동안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보통 뇌과학이라 알려진)의 성과를 원용한다.

두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면 그동안 심리학에서 무시되어온 감정의 메커니즘을 튼튼한 생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분노, 두려움, 짜증과 같은 스트레스성의 부정적 감정이 왜 진화했으며 어떤 메커니즘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밝혔듯이 사랑, 기쁨, 관용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어떻게 진화했고 어떤 메커니즘인지를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은 분명한 논리로 설명한다.

이책의 저자는 긍정심리학의 ‘긍정’을 두 분야에서 설명해낸 긍정적 감정으로 재해석한다. 저자가 열거하는 그 감정들은 이렇다: 사랑, 희망, 기쁨, 용서, 연민, 믿음(또는 신뢰). 저자가 이 6가지 감정을 다루는 이유는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행복’에 결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저자는 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이전 저서인 ‘행복의 조건’에서 말한다. 같은 고통이라도 누가 더 성숙한가에 따라 행복한가 불행한가 차이를 만들며 그 성숙함이란 6가지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라고 저자는 이책에서 말한다.

저자가 6가지 감정을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감정들이 사회적인 다시 말해 도덕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행복의 조건’에서 보여준 것은 도덕적인 능력 또는 사회적인 능력이 높을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책에서 저자는 그 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려 한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감정들로 재정의하고 그 감정들이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즉 우리의 생존에 어떻게 그 감정들이 유용했는지 다시 말해 그 감정들이 사회적 능력으로서 왜 선택되었는지 그 감정들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유용성이 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책은 ‘행복의 조건’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그 의의가 제대로 이해된다. 그 책을 읽은 사람에겐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과 같은 수준의 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책은 이전 저서와 같이 탄탄한 실제 연구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책은 어디까지나 시론에 불과하다. 저자가 의지하는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이 저자의 전공이 아니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책이 하려는 시도가 현재로선 지나치게 대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긍정적 감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그리고 저자가 의지하는 두 분야의 성과가 쏟아져 나온지도 10년이 조금 넘는다.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 이책은 기초를 놓으려는 대담한 시도를 한다.

이책의 논의는 무난하다. 아직 튼튼하지 않은 기초에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없고 저자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이책의 논의는 무미건조해진다.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긍정적 감정에 대한 종합이 어떤 수준으로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책의 의의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시계 -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매혹적인 심리 실험
엘렌 랭어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것은 한가지 실험 때문이었다. 여러 심리학 책에 등장하는 이 실험은 통제권 또는 선택에 관한 실험이었다. 요양원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집단은 “스스로 결정을 더 많이 내리도록 장려”했다. 보통 요양원의 규칙이나 통제에 따라 결정되던 사항들인 언제 방문객을 만날 것인가, 어떤 영화를 언제 볼 것인지를 요양원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다든가, 화분에 심을 종류를 스스로 결정하고 어디에 놓을지도 스스로 결정하고 돌보는 것도 스스로 하는 것 등 사소한 것들을 노인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통제집단은 원래 요양원에서 하던 대로 놔두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1년 6개월이 지난 뒤, 우리는 실험 전과 후에 실시한 다양한 검사를 바탕으로 첫번째 집다느이 구성원들이 더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민첩한 것을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더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민첩한 것을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모두 연로하고 허약한 노인들이었기 때문에 우히는 실험 이후 그들이 훨씬 더 건강해졌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다.” 여기까지는 원래 실험의 의도대로 였다. 요양원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실험이었고 개선방향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그 이상이엇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인 생활을 한 노인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았던 대조군의 절반에도 못 미칠만큼 낮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이책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한 저자의 오랜 탐구결과이다. 요양원 실험의 후속 연구로 저자는 1979년, 이책의 원제이기도 한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counterclockwise study)’란 실험을 한다.

이 실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1959년의 세상을 재창조하여 피험자들에게 20년 더 젊은 나이로 살도록 요구”했다. 저자가 이 실험에서 알고 싶었던 것은 “마음을 20년 전으로 되돌려 놓으면 그 변화가 몸에도 반영될까?”였다.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의 노인들을 모집해 59년처럼 꾸며진 환경에서 1주일 동안 지내게 햇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는 일주일이 채 다 지나기 전에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렷다. 실제로 실험 이틀째가 되자 다들 음식을 나르고 식사 후 뒷정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험 전 인터뷰를 위해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왔을 때 차로 데려다 준 친지에게 극단적으로 의존하던 그들이 은둔처에 도착한 순간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경험을 한 두 집단 모두 청력과 기억력이 향상되었고 체중이 평균 1,5킬로그램 늘어났으며 악력도 현저히 향상되었다. 수많은 측정 결과에서 참가자들은 ‘더 젊어졌다.’”

이 실험 결과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를 울타리에 가두는 것은 신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신체적인 한계를 믿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요양원 실험과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에서 달라진 것은 피험자들인 노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한 우리의 기대였다. 요양원에선 돌보아야 할 무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피험자를 재정의했었고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에서는 노인들이 더 젊었던 20년전으로 돌아가도록 강제되었고 그 당시에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되었다. 은둔처에 도착해 가방을 자기 방으로 가져가는 것도 스스로 해야 했으며 걷는 것부터 세수부터 설거지, 청소, 옷 입는 것 등도 스스로 해야 했다.

물론 생물학적 노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인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물리적인 근거를 가진 것일까? 우리가 그리고 그 생물학적 노화 자체도 우리의 기대에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우리는 훨씬 어린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사는 반면,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결과는 소녀경에 나오는 회춘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시계’의 영향을 크게 받아 특정한 행동이나 태도에 어울리는 ‘올바른 나이’가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또는 생물학적 시계를 배우자의 나이에 맞추면서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자는 ‘더 늙게’ 되어 예상보다 일찍 죽는 반면 나이 든 쪽은 ‘더 젊어’지고 예상보다 오래사는 것이라 추론했다.”

저자는 자신의 실험들과 연구들을 통해 인간의 노화는 생물학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우리가 노화에 대해 가지는 사고방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 아닐까 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여행 가방을 옮길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중 일부는 절말로 한 번에 한 걸음씩 옮겼지만 결국 모두 다른 이의 도움없이 자기 짐을 방까지 가져갔다.”

실제 노화에서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우리의 의식이 결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나 될까? 저자는 노화란 이런 것이다 노인은 마땅히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젊음과 늙음, 건강함과 건강하지 못함과 같은 구분은 사회적인 구성물일 뿐 그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구성물일 뿐인 늙음과 ㄱ건강함에 대한 고정관념은 상식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의학의 권위를 입고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입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책은 우리에게 늙음이란 이런 것이다 노인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고정관념들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다.

“요양원에서 지내 보지 않는 한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떤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모든 일이 내가 정하지 않은 스케줄에 따라 나를 위해 이루어진다. 식사는 물론 언제 샤워를 할지 어디는 갈 수 있고 어디는 갈 수 없는지 모두 나의 권한 밖이다. 요양원에서 노인 호나자들과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서글퍼지고 말앗다.”

저자가 선택에 대한 실험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요양원이 운영된 것은 무력하고 무능한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노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를 제거했을 때 노인들은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고 무능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그들의 행복도 수명도 늘어났다.

“처음 은둔처에 들어온 실험 참가자들이 처음에 자기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나같이 그 같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모두들 자신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쉽게 소화된다고 알고 잇는 음식만 먹엇고 미뢰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여 음식을 선택할 때도 모험은 삼갔다.” 그들에게 늙음이란 결국 자신들이 받아들인 한계가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 은둔처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인 한계를 간단하게 극복햇다. 저자는 그 한계를 그은 고정관념을 깨버리라고 말한다. 무엇이 가능한지 모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따라 미리 선을 긋지 말고 현실에 부딪히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자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고정관념은 의학이란 권위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의학이란 자체가 너무도 쉽게 변하는 지식의 집합일 뿐이며 의학 자체가 과학이 모두 그렇듯이 무엇 무엇은 이러 이러할 때 이럴 확률’이 높다는 추정일 뿐이지 절대진리가 아니다. 왜 그런 흔들리는 권위에 기대 고정관념에 자신을 맡기는가?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짓의 심리학 - 속마음을 읽는 신체언어 해독의 기술
토니야 레이맨 지음, 강혜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요 근래 바디 랭귀지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고 몇권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이책의 제목을 보면 아 이책도 그런 책의 하나이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짐작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이책의 원제는 ‘The Yes Factor’이다. 어떻게 하면 예스란 말을 끌어낼 것인가, 다시 말해 설득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면 왜 ‘몸짓’이란 제목이 붙었는가? 트렌드에 끼어보려고? 그런 것같다. 그러나 꼭 그 제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책의 상당부분은 몸짓에 대해 말해진다.

저자는 바디 랭귀지 전문가이다. 그러나 저자가 바디 랭귀지에 밝기 때문에 이책의 상당 지면이 바디 랭귀지에 할당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커뮤니케이션에서 말로 전해지는 의미는 극히 일부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의미는 언어 이외의 수단으로 전해진다. 이런 사실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라는 명칭으로 세가지 설득수잔을 이야기했다. 에토는 말하는 사람의 성품과 신뢰성으로 호소하는 설득방식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을 믿음직하게 보이게 하는 자질들이 강조된다. 두번째 설득 방식인 파토스는 듣는 사람의 감정에 역점을 두는 방식이다. 로고스는 특정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사실에 역점을 두는 설득방식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육받은 것은 로고스, 말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누가 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누가 누구에게라는 문제는 언어 이외의 수단으로 전달되는 의미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가의 식탁 세트를 주문한 나의 동료는 목소리 톤을 통해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를 효과저긍로 활용했다. 애초에 판매원은 6주 뒤에 가구가 도착할 것이라고 했지만 가구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친구가 전화를 해서 묻자 판매원은 말했다. ‘아, 20주 정도 걸릴 겁니다.” 무슨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어조엿다. 동료는 상대의 어조를 통해 그가 뭊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들었던 말하고는 다르네요. 남편이 화가 많이 났어요. 주문을 취소해야 할 것같네요.” (누구에게나 핑계 삼을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자 판매원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로장아야지요.” 남성 특유의 지배적인 말투, 조직의 우두머리처럼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엿다. ‘이런 일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사과의 의미로 탁자 보호용 덮개를 드리겠습니다.” 친구는 판매원이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며 우월한 위치에서 은혜르,ㄹ 베푸는 그런 역할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상대의 그런 특성을 활용하기로 했다. 식탁 세트를 90일 동안 기다리느니 보호용 덮개를 포기하고 말갰다는 말을 수화기 저편의 남자가 믿을까? 친구는 속으로 자문해보았다. 아무래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싶었고 친구는 생각 끝에 난처해진 여자 역할을 하기로 했다.

“남편은 계약을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좋죠? 도와주세요.” (누군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흡족해하는 경향이 있다.)
‘좋습니다. 그럼 400달러를 깍아드리지요.”
“죄송해요. 400달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500달러?”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환불받지 않으면 남편은 폭발하고 말거에요. 도와주세요. 벌써 10주나 기다렸는걸요.”
“600달러?”
“남편이…”
“더 이상은 깍아드릴 수 없습니다. 집에 필요한 다른 가구는 없으세요?”
“글쎄요. 소파가 아쉽긴 하죠.”

결국 친구는 식탁 세트 600달러 할인에 새 소파까지 받았다. 왜일까? 남자의 목소리를 파악하고 기준을 정한 다음, 여기에 협상 스타일을 맞췄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다른 성격이엇다면 예를 들어 온순하게 사과하는 태도로 나왔다면 친구는 고압적인 자세로 나갔을 것이다. 핵심을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이봐요 찰리. 400달러를 깎아주겠다는 건데 나한테는 공평하다는 생각이 안 드네요.”

그러나 해당 판매원이 상황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보스기질’이ㅏ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접근법은 효과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알고 친구는 남자가 원하는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진짜 문제가 있다고 말했고 ‘유능한’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좀 긴 인용이었다. 그러나 이책의 성격이 어떤지 파악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이책은 아리스텔레스가 말한 에토스와 파토스를 다룬다. 다시 말해 어떻게 내 말을 믿을만하게 들을만하게 만드는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다룬다.

물론 이책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많고 많은 커뮤니케이션 스킬 관련 서적이면 다 그것을 다룬다. 그러나 이책과 다른 책들이 다른 점은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의 큐를 읽어내는 동시에 내가 내보내는 큐를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 큐의 의미를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다룬다는 점이다.

위의 사례에서 그 큐는 말 이외에 그 말이 실리는 톤이었다. 전화상의 대화에서도 언어 이외에 읽어낼 수 잇는 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책의 대부분은 목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아닌 얼굴을 맞대고 상대의 몸짓을 읽을 수 잇는 보통의 대면접촉 상황을 가정한다. 상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것은 긍정인가 부정인가, 턱을 치켜든 것은 무슨 의미인가 호흡이 빨라진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잇는가? 아니면 긴장하고 있는가? 등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영의 도시 환상문학전집 7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책의 플롯은 ‘토털 리콜’과 비슷하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새로운 기억 위에 쌓은 정체성, 또는 인격을 포기하고 기억을 잃기 전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물론 이책의 내용은 토털 리콜과는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플롯의 기본구조가 만드는 긴장감은 상당히 닮아있다. 아마 토털 리콜이 이 작품의 플롯 구조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헤인 시리즈 3부에 해당하는 이책의 배경은 연맹이 무너진 후 멸망한 지구에서의 이야기이다. 연맹이 무너진 후 지구에는 오직 하나의 도시만 남아 과거 문명의 잔해를 기억한다. 그리고 지구는 그 도시의 지배를 받고 그 도시의 지배자, 싱의 지배를 받는다.

그 도시를 제외한 지구의 나머지는 숲 속에 흩어져 가족단위로 자급자족을 하는 사람들, 고대 유목민 사회로 퇴보한 사람들, 남은 것은 과거의 잔해뿐이다.

“사람들은 도서실을 통해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전기 관련 기술 한 가지를 알 수 잇었다. 그래서 사내아이들은 방에서 방으로 서로에게로 연락할 작은 원격장치를 즐겨 만들었다. 그러나 텔레비전도 전화도, 라디오도, 개척지 너머로 소식을 전하거나 받을 수 있는 전신도 없었다. 그러ㅓ니까 원거리 통신수단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집에 방문하여 거래할 일이 있으면 걸었고 먼 길일 때는 말을 탔다.’


“우리의 적이 누구지?”
“싱이지요”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모든 세계의 연맹’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선택권과 자유를 빼앗았으며 모든 사람의 일과 기록을 파괴하고 종의 진화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폭군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잘 살아가게 내버려 두고 있지.”
“우린 숨어삽니다. 놈들이 내버려 두도록ㄷ 따로 떨어져 살고요. 우리가 대규모의 기계를 만들려 한다면 우리가 뭔가 큰일을 하려고 모이거나 마을이나 국가를 만든다면 싱이 침투해서 일을 망치고 우리를 흩어놓을 겁니다.”
“우린 싱에게서 숨어살지, 또한 예전의 우리로부터 숨어 살아. 알겠나, 팔크? 우린 따로 떨어진 집에서 잘 살고 있네, 아주 잘 살고 있지. 하지만 우리는 공포에 지배당하네 한때는 배를 타고 별 사이를 날아다녔는데 우린 집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에도 가지 못해. 얼마 안되는 지식을 품고 그걸로 아무것도 안 하지. 하지만 한때 우린 그 지식을 써서 밤과 혼돈을 가로지르는 태피스트리 같은 삶의 패턴을 자아냈어. 삶의 기회를 확장했지. 사람다운 일을 했던 거야.”

싱이라 불리는 도시의 지배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싱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사실 인간입니다. 당신의 조상, 웨렐(2권의 행성) 첫 거류지의 자콥 아가트와 마찬가지로 지구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테라(지구) 인이죠.

머나먼 별들로부터 모든 세계의 연맹을 공격하러 온 적은 없었습니다. 연맹은 혁명과 내전, 내부의 부패와 군국주의, 폭정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모든 행성에 반란, 폭동, 찬탈이 벌어졌고 ‘최초의 세계’로부터 돌아온 보복은 많은 행성을 불태워 검은 모래로 만들어버렸지요. 더 이상 위험한 미래를 향해 나거는 광속선은 없었습니다. 오직 미사일 우주선이며 세계의 파괴자인 FTL기만 움직였습니다.

절망에 빠진 일부 지구인은 새로운 무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이름과 언어, 그들이 온 머나먼 고향 세계에 대한 애매모호한 이야기들을 지어낸 다음 지구 전역에 자기네 군대와 충성파 주둔지 양쪽에 적이 왔다는 소문을 퍼트렸지요. 내전은 모두 그 적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어디에나 침투해서 연맹을 무너트리고 지구를 조종해 온 적이 이제 힘을 갖고 전쟁을 멈추려 한다고,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악한 외계의 힘으로 이루어냈다고, 텔레파시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힘으로 그랬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악역을 맡아 싱이라 불리며 그 거짓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에스 토지의 우리들은 태초에 창조주가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했노라는 자그마한 신화를 이야기하지요.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으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자 존재했다고, 그러니 보십시오. 신의 거짓말을 신의 진실로 만들기 위해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하게 아닙니까…

인류의 평화가 거짓에 의해 윺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거짓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적이 와서 지구를 지배한다고 주장했기에 우리는 그 적이라고 자칭하고 통치했습니다. 엄청난 거짓말을 했기에 지금 우리는 엄청난 법칙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장대하고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의 이야기가 진실일까?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기에는 에스 토치는 뭔가 이상하다. 도시 밖의 사람들이 ‘거짓의 도시’라 부르는 그 도시는 뭔가 이상하다.

“엘로나에, 인간이 있을곳. 그러나 이 도시는 그에게 근심만 더해 주었다. 열 채가 넘는 이나 백명이 넘는 사람을 한꺼번에 본 적이 한 번도 없기는 하지만 군중 때문에 마음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팔크의 기를 꺾은 것은 도시의 현실이 아니라 그 비현실성이었다. 이 곳은 ‘인간의 장소’가 아니다. 에스 토치에는 역사의 흔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이전 시간이나 바깥 공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1000년이나 세계를 지배했는데도 말이다. 조브의 집에 있던 고대 텔레스크롤에 나오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위대한 인간의 시대를 되살려주는 기념물이 전혀 없었다. 배움의 흐름은 물론이고 상품의 흐름도 없었다. 이곳에서 쓰이는 돈은 싱이 인심 쓴 물건일 뿐, 그 돈에 진짜 활력을 부여할만한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다는 지배자들은 지구상에 이 도시 하나만을 유지했다. 지구ㅜ 자체가 한때 연맹을 형성했던 수많은 세계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이 도시도 홀로 떨어져 있었다. 에스 토치는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하며 뿌리없는 도시였다. 에스 토치의 광휘와 덧없는 불빛, 기계와 얼굴들, 넘쳐나는 이방인과 사치스러운 복잡성 모두가 갈라진 틈, 공허한 장소 위에 걸쳐서 있었다. 이곳은 ‘거짓의 장소’였다. 그러나 훌륭했다. 지구의 너른 황야에 떨어진 보석 세공품처럼 훌륭하고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했으며 이질적이엇다.”


진실은 싱은 외계인 침략자이고 그들은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능력으로 연맹을 무너트렸다는 것이었다. “팔크가 조브의 집에서 배운 옛 역사에서는 싱이 하이아데스 너머 어쩌면 수천 광년 떨어진 머나먼 은하계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보았다. 정녕 그렇다면 그렇게 광대한 시공을 많은 수가 건너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마음 거짓말 능력과 소유하거나 소유했던 다른 기술 혹은 능력으로 잠입하여 연맹을 무너트리기에는 충분한 숫자였겠지만 과연 그들이 분열시키고 정복한 모든 세계를 통치하기에도 충분했을가?” 그들은 소수였기에 오직 파괴와 거짓으로만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연맹을 무너트린 후 학살을 하지 않았다. “싱은 정말로 지각력 있는 존재를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를 살려두었고 아마 다른 승무원도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공들여 정체를 감춘 그들의 음식은 모두 식물성이었다.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부족간에 싸움을 붙였고 전쟁을 시작하되 살인은 인간이 하게 했다. 그리고 역사에 따르면 통치 초기에 그들은 대량 학살 대신 우생학과 재식민을 이용하여 제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법에 복종하지는도 모른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통치는 “관습과 책략과 두려움과 무기를 이용해서 강력한 부족이 일어나거나 그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지식이 모일 경우 재빨리 막아버림으로써 인간을 통제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배하지 않았다. 오직 파괴할 뿐이었다.”

파괴와 거짓의 통치.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놈들은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런 두려움을 생명 존중이라고 불렀다. 싱, 적, 거짓말쟁이들… 그들이 정말 거짓말을 한 걸까? 어쩌면 그건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거짓말이란 본질적으로 뿌리 깊고 고칠 길 없는 이해 부족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과 접촉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음의 거짓말을 크나큰 무기로 만들었고 그 무기를 이용하고 그로 인해 득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보낸 시간만큼의 가치가 있었던가? 먼 별에서 온 유배자인지 해적인지 제국 건설자인지는 몰라도 그들과는 마음이 전혀 통하지 않고 육체도 영원히 볼모인 인종을 지배하기로 결심하고 처음 여기로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로 이루어진 십이 세기의 세월, 환영의 세계에서 벙어리를 다스리는 외롭고 고독한 벙어리들. ‘망망하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