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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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의 낯선 환경을 견디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뒤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베버는 그런 위안을 자본주의 정신이란 말로 포장했지만 그런 위안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겐 결코 위안일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 식으로조차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 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성의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신사상운동은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성공학으로 변질된다: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돈도 성공도 멋진 애인도 내 마음에 달렸다는. 나중에 어떻게 변질되었든 신사상운동은 칼뱅주의가 정신에 가하는 고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칼뱅주의는 그들의 머리를 ‘정신적 공허함, 고립감, 냉담함이라는 강렬한 감정’으로 채웠다.

그들이 겪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압박감을 사르트르는 ‘우연(Contingency)’이란 말로 요약한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필연적 관계가 없으니 세상은 나에게 선의를 갖지 않으며 나에게 무관심하다.

사르트르의 ‘우연’이란 개념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권태란 개념에서 빌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눈다. 그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실존적 권태를 겪는다고 말한다. 이런 개인은 공허함을 느끼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청교도들이 겪었던 만성적 권태를 실존적 권태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은 분명 자신과 세계의 관계가 부서지는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사르트르가 말한 ‘우연’이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자살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나와 세계의 관계가 깨진 마당에 자살이 대수인가?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누이는 죽을 수 있다고 기뻐했지 자살을 하진 않았다. “권태와 자살의 상관관계는 실생활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저자는 실존적 권태란 개념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한 예로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젊어서 룰렛 게임을 자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났다. 자살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흔히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실존적 권태 때문이 아니라 병에 걸리거나 노쇠해졌기 때문에 죽는다. 그렇다면 엠마 보바리는 어떨까?”

보바리 부인의 탈선은 권태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19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순응적이고 관습에 얽매인 부르주아 계층의 만성적 권태에 대한 반발 속에서 주인공 엠마를 그려낸다. 이 소설에서는 관습 타파를 향한 개인적인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관습 깨기의 목적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다시금 기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녀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딸마저 유모에게 맡겼기 때문에 엄마로서도 역할이 없었다”. 엠마에게 관습 타파의 목적은 그런 무위도식으로부터의 도피였고 그녀가 깬 관습은 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따분한 삶 때문에 불륜관계를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치욕 때문이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과 관계된 어떤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글을 통해서다. 삶의 무의미함을 지적으로 깨닫는데는 죽음을 양산하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그런 깨달음이 고통스러운 우울증의 결과가 아닌 한, 그렇다.”

저자는 엠마가 겪었고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을 만성적 권태라 말한다. 그 권태는 논리로 짜여진 실존적 권태가 아닌 생리현상이 원인이라 저자는 본다.

“동물을 키워봤다면 따분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동물들은 따분함을 느끼면 더 많이 잔다. 또 깨고 나면 놀이를 하거나 산책을 하자고 주인을 조르고 괴롭힌다. 만약 주인이 놀아주거나 산택을 시켜주지 않으면 풀 죽은 채로 집안이나 정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낟. 그 모습은 시무룩하니 축 늘어져 맥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동물이 느끼는 권태는 당연히 실존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성격의 불안감이다.” 할 일이 없는 애완동물은 감금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감금 상태에서 그들이 느끼는 1차적 감정은 지금 상태에 대한 혐오이며 지금처럼은 좋지 않다는 불안감이다.

“감금 상태가 지속되면 동물은 우선 권태를 실질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관찰이 가능하다. 이후 좌절, 동요, 화 폭력 그리고 끝내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감금된 동물은 권태에서 광적 반응 (동요하고 화를 냄)으로 그리고 우울 반응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은 인간의 경우와 일치한다.

“권태는 분노에 찬 행동이나 광적인 행동은 물론 우울증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보다 권태는 감금, 고독감, 감각 상실이 지속되면서 시작되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 할 수있다. 권태는 다른 여러 정서들과 함께 찾아온다. 권태는 이들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권태는 분노와 우울함이 차례로 나타느는 과정에서 첫번째로 나타나는 정서라 할 수 있다. 권태는 앞으로 나타날 보다 해로운 상태를 조기에 알리는 경고 신호이다. 권태는 태풍 전의 고요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권태와 우울함의 차이는 권태는 밖을 향하지만 우울은 안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가 권태이고 그럴 수 없어 포기했을 때 우울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은 권태가 만성화되고 그것이 우울로 진행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우연이라 불렀고 하이데거가 실존적 권태라 불렀던 것은 정확히는 우울이 맞다고 저자는 본다.

“신의 계획은 무엇일까? 신의 뜻에 어떻게 순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실존적 권태를 겪는 사람들과 같은 소극적이고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로 이 착잡한 질문들에 반응한다. 루터교인인 한 동료는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루터교인들은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그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는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하지만 그건 동시에 우리가 신을 대신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도 되지. 선을 행하는 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가끔은 막연히 선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무척 걱정괴도 불안해지지. 그럼에도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 책임이 있어. 아주 간단해. 그러나 쉽지는 않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무척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거야.’”

이런 불안감은 ‘실존적 권태’란 말로 잘 요약된다. 그러나 저자는 실존적 권태는 “좌절, 식상함, 우울, 혐오, 무관심, 무감각, 갇혀 있다는 느낌 들의 서로 연관된 장애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만성적 권태로 시작되는 일련의 감정 메커니즘의 총합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저자는 본다. 그 시작은 단순한 권태다.

권태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며 오래가지 않는 기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성적으로 권태를 자주 느끼는 사람은 근심과 우울증 내지는 약물,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 위험이 크다.” 우리에 갇힌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다.

그러면 “권태가 18세기 계몽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주장은 “권태가 소외감이나 사회적 무질서라는 개념과 직관적으로 연되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태, 소외감, 사회적 무질서는 모두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이 권태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는 것을, 권태가 생리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18세기 이전까지 권태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경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는 신탁 정치, 독재젗치, 전통적인 특권, 그리고 집산주의 전통의 맹목적인 고수에 도전이 가해졋다. 그러다보니 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감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권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졋다.” 그리고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인간의 행복할 권리가 부각되었으며 기독교가 쇠퇴하는 대신 세속화가 뚜렷해졌다. (이를 ‘서양 문명 한가운데서 커져가는 형이상학적 허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권리와 더불어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권태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가는 늘었지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소외감이 커졌고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낼 책임은 개인이 모두 져야 했다. 그리고 증상에 대한 진단이 권태라 설명되고 나면 권태는 “’무의미함의 흔적’이 된다. 그 안에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분노에 이어 떠올라 근심으로 치닫는 권태 안에서 인간은 당연히도 모든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실존적 권태는 허깨비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까? 실존적 권태라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잇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회의론자들은 실존적 권태를 각종 장애를 두루 나타내는 하나의 용어 내지는 그저 상대적으로 사소한 현상으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권태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대부분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권태를 느껴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권태는 대개 이로운 정서다. 하지만 만성적인 단계로 넘어가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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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기술 - 조직에서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13가지 전략
제프리 페퍼 지음, 이경남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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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말한다: 권력을 어떻게 잡고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군주의 재난은 사람을 믿는 데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에게 지배받게 된다. 신하는 군주와 골육의 친분을 맺고 잇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위세에 얽매어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하된 자는 군주의 마음을 엿보고 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데 군주는 그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교만하게 처신하니 이것이 세상에 군주를 협박하고 시해하는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한비자의 말이다. 한비자도 마키아벨리도 권력의 자리에선 아무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만하게 되면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이책 역시 같은 경고를 한다. “힘이 막강하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자신감이 지나쳐 주의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의 말을 잘 믿고 그들의 제안을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잘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면 그 자체가 화근이 될 수 있다.”

권력자들이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첨에 관해 많은 경고들이 있어온 이유이다. 그러나 아첨이 사라지지 않고 번창하는 이유는 그 자리에선 누구든 아첨에 취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책의 저자는 권력으로의 길은 우선 권력자와 가까워지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임명할 것인가? 권력자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은 우선 눈에 띄어야 하고 그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신임을 얻는 방법의 하나는 권력자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사와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사가 실수할 때 누가 그것을 지적했는지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한번 되짚어보라. 실제로 권력자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침’이다. 좋은 기분이 들면 자신의 영향력도 아울러 강화되기 때문에 아첨의 효과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누구나 아첨에는 흔들린다. 아첨은 칭찬의 일종으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선물에 특히 취약하다. 그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권력은 접근을 부르고 금기를 줄인다. 처음에는 힘 있는 사람도 사람도 자신이 누리는 특별대우가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와 그들이 장악한 자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은 희미해지고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되엇다고 생각하게 되낟. 권력은 과신과 위험한 상황, 다른 사람에 대한 무감각, 고정과념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권력자는 사람들을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힘있는 자리는 오만을 부르고 “지나친 자신감과 무감각은 권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알력과 불화로 문제가 생겼을 때 반대편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이나 조직의 목적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권좌에 앉아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면 권력자에 대한 반대자들이 동맹을 만들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자리를 넘보는 야심가들이 그의 눈을 가려 마침내 그를 쓰러트릴 것이다.

권력은 마약과 같아 권력을 쥔 사람을 취하게 하고 그의 눈을 가리며 머리를 마비시켜 제 무덤을파게 한다. 권력은 언제나 그래왔기에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는 동과 서, 고와 금이 다르지 않다. 어차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책이 그리는 권력자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저자는 그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지만 그건 실제 힘있는 엘리트들 대다수의 진실이기도 하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분석하면 우리가 보통 정서적으로 안정됐다고하는 개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통의 특징이 나타난다. 슈퍼클래스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공통적으로 정신병리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종종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은 일종의 노이로제 때문에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정신병리학적 특징을 이용해 성공을 거머줜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심한 스트레스와 높은 수익을 안겨주는 업무로 인해 뇌에서 만들어지는 엔도르핀에 중독된다. 한 국가나 기업, 군대, 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일종의 극한 운동이며 날마다 중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에 직면하다보면 매일 엔도르핀이 생기고 점점 더 엔도르핀에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인이 하던 일을 그만두면 종종 우울증에 빠지는데 그러한 우울증은 금단현상처럼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 금단현상이다.

워싱턴 정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성공할 수 잇는 특징’은 사실 ‘미국 대통령에게서 보고 싶지 않은 특징’이라는 통념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들여 아주 집중해야 한다. 즉 맹목적으로 야심을 가져야 한다. 평범한 존재로서의 모습은 버려야 한다. 부모와 배우자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평생동안 끈질기게 선거운동을 벌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통치에 필요한 지식보다는 정략을 우선시해야 하며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비열하고 정치적인 동기를 띤 마녀사냥을 벌리고 그보다 더한 일도 척척할 수 있을 각오로 대통령 자리를 원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에게서는 확실히 자아도취적인 모습이 나타나며 강박관념과 대중으로부터 얻는 피드백에 중독된 모습 또한 나타난다. 그들은 성공에만 눈이 먼 특이하고 불완전한 개인들이다.

슈퍼클래스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꼭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아주 지독히 슈퍼클래스가 되길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나도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미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로스코프)

그러나 권력은 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지위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앤디 그로브 식으로 말하면) '미친' 놈이다. 'Only the paranoids suvive' 어느 분야든 정상에 남는 자는 그 목표에 미쳐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충분한 사람만 정상에 오른다. 맑스의 신조처럼 “남이 뭐라 건 네 갈길을 가라.” 그런 각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함'과는 거리가 멀다.

“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대니얼 네틀)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권력자들의 모습 역시 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권력을 잡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권력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려거든 정말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권력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권력을 잡고 유지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권력을 얻고자 한다면 개인적인 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구너력과 지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취미도 즐기고 친구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개인적인 관계를 이어가기는 어렵다. 특히 여성은 더욱더 그렇다.

유명 신발 회사에서 매우 활동적이고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는 41세의 한 여성 중간관리자는 2009년 현재 그 회사의 고위직 여성 100명 중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햇다. 고위직 여성 중에는 그녀처럼 독신이 많았고 결혼한 사람도 대부분 아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진정한 의미의 개인 생활은 없다고 말했다.

대형 정유회사의 중국 직영점을 운영하는 한 여성 중간관리자는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잇지만 남편이 일을 하지 않는다. 힐러리 클린턴처럼 성공한 남편을 가진 강하고 성공한 여성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커플은 어디까지나 예외에 불과하다. 나는 많은 전문직 여성들의 입에서 나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집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재능있느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하나의 직업에 집중하면 그만큼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

간단히 말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38년 동안 미국영화협회를 이끌었던 잭 발렌티도 마찬가지엿다. 그는 평생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야망을 추구한 세월이 ‘우울한 행로’였다고 탄식하면서 80대에 들어섰어도 여전히 바쁜 스케줄에 쫓기듯 움직이며 자식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런 길을 가려면 즐겨야 한다. "억만장자들의 기본적인 특징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부의 추구를 즐긴다는 것이다. 상을 받는 것보다 이겼다는 만족감 그 자체가 그들을 보통의 슈퍼리치의 대열로 이끈 원동력이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사는 모습이 소박하다. 샘 월튼과 워렌 버핏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력으로 사치스러운 토지를 사들이는 것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로스 페로와 필 얀슈츠는 그리 비싸지 않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족했으며 해마다 최신 모델을 찾지도 않는다. 다른 슈퍼리치들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물질적 욕망을 쫓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햇다." (마틴 프리드슨)

당신은 미칠 수 있는가? 즐길 수 있는가? 간절히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책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이책의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2천년도 더 전에 쓰여진 한비자에도 500년도 전 마키아벨리도 말한 내용들이 반복될 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유행한 ‘권력의 법칙’도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책의 가치는 현실감에 잇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는 어딘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들린다. 그 독자가 이미 권력을 쥔 왕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비현실감은 ‘권력의 법칙’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법칙은 수많은 일화들을 모아 놓은 편집이다. 책상머리 편집서란 말인데 물론 흔한 자기계발서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러나 그책의 문제는 비현실감에 있다. 아둥바둥 하루를 넘기기 위해 발버둥 치는 보통사람들에겐 별로 와닿지 않는 거창한 일화들이란 점에서 한비자나 마키아벨리와 별 다를 것이 없다. 더군다나 권력의 법칙은 57법칙이란 영어원제가 말하듯 나열식이다. 내용들을 모아서 생각하면 어떤 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잘한 테크닉을 그러모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그러나 이책은 그렇지 않다. 이책은 우선 직장에서 어떻게 권력의 길에 오를 수 잇는가를 설명한다. 어떻게 권력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권력을 쥐려면 첫출발을 어떤 부서에서 시작해야 하며 직장 내에서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네트웤의 게이트 키퍼가 되는 방법,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구축하는 방법 그리고 적대자들과 어떻게 파워게임을 하는가에 대한 방법 그리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 등 이책의 내용이다. 물론 이런 디테일은 위에서 말한 책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책의 장점은 직장이란 환경을 무대로 한다는 현실감이며 권력의 길을 시작부터 끝까지 서술하는 체계에 있다.

그러면 이책은 ‘미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인가? 저자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전작인 ‘권력의 경영’에서 자세히 다루듯 사내정치는 조직의 생리이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파워게임은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필수이다.

물론 사내정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얼마전 구글에 매수된 모토롤라는 사내정치 때문에 몰락했다. “정치적 술수가 만연한 직장에서는 직업만족도나 직원들의 사기나 조직 참여도가 떨어지고 이직 희망도 높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그러므로 권력으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해 들이는 당신의 노력이 당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것인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파트너나 동업자가 있다면 그들도 역시 마찬가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이 어떤 쓸모가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언제든 당신을 내쫏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시만 걱정하라. 그렇게 하기 위해 할 수 잇는 조치만 취하면 된다. 언제 왜 쫓겨나는지도 모르고 혼자 힘으로 직장에서 진로를 헤쳐가야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잇는 수단은 다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대응일 것이다. 그 수단에는 권력과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기술과 개념을 습득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책은 그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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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 무엇이 우리를 최고의 자리로 이끄는가
이시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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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품격 또는 기품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기품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품격은 쉽게 말해 자기 존중감, 자기긍정감이다.” 저자의 정의이다. 정확하다. 그러나 이 한줄의 정의로 그 뜻이 잡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품격이란 말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보면 아는 그런 말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품격 또는 기품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누구나 기품이 있는 사람을 알아본다.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보면 아는 그런 말은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보다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관계를 맺을 때
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는 않았는지, 문제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핑계 만들기에 급급할 때
 자기 자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 동료들을 못살게 굴거나 놀리고 별명을 부를 때
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끼어들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을 때
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관찰할 때
 다른 사람의 업무성과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자신의 생각을 생산적으로 정교화하지는 못할 때
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현 상황의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출 때
 동료의 성공을 시기하며 못마땅해하고 심지어 훔치려 할 때
 혼잣말을 할 때도 분노를 폭발하거나 고함을 지를 때
                                                                                               (브루스 툴간)

직장에서 흔히 보는 꼴불견이다. 이런 사람을 기품이 있다 품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기품의 본질은 여유이기 때문이다. 기품은 강자의 여유이다. 세상 무엇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는 자신감이다. 기품은 귀족을 말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귀족은 여유를 타고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역인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주어진 사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어서 아무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기품은 제2의 천성이다.

“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애정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평생 동안 그를 특징지은 것은 하나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나이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다.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면, 자연히 자신감에 뒷받침된 균형감각을 얻게 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성도 어느새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

카이사르는 모욕을 당해도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분노나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 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똑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 는가.”(시오노 나나미)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했던 술라와 정적을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카이사르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점에서는 양극단이었다. 후세 역사가 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잡혔던 이야기는 그 귀족정신의 본질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해적에게 붙잡혔을 때 카이사르는 타고난 천성대로 해적을 마음껏 무시했고 이런 점은 오히려 해적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며 공포에 빠진 포로는 익숙했지만 카이사르처럼 해적을 자신의 바쁜 일정을 잠시 방해하는 훼방꾼 이상으로 보지 않는 포로는 처음이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몸값이 겨우 20달란트(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모욕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값을 50달란트(은화 30만냥)까지 올리기도 햇다. 카이사르는 동료 한 명과 노예 두명만 남기고 나머지 일행에게 몸값을 가져오게 햇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지내는 40여일 동안 해적과 어울려 식사를 했고 그들의 체력훈련에 동참하기도 했다. 시를 지어 들려주었다가 해적들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천박하고 난폭한 야만인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햇다.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도 했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노예를 시켜 해적들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또 자신이 풀려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모두 책형에 처해 죽이고 말겠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기도 햇다. 해적들은 이 대담한 젊은이를 무척 좋아햇고 몸값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떠들석하게 웃고 손을 흔들며 해적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배와 의용군을 징발해 해적들에게 돌아와 모두 체포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필립 프리먼)

그러면 더 이상 귀족이 없는 세상에서 기품은 어떤 의미인가? 기품은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얼마 전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91세 인어 할머니, 김화순 씨. 구부정한 허리, O자형 다리에 겨우 제 몸 가누기도 힘든 할머니다. 하지만 잠수복을 입고 뱃전에 서면 그 당당한 카리스마가 바다를 압도한다. 풍덩-. 홍합을 찾아 유연한 몸짓으로 헤엄쳐 내려간다. 누가 그를 91세 해녀라 할까. 이윽고 그물 가득 채워 배에 오른 늙은 해녀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오늘은 바다가 고바서…’ 바다가 잠잠해서 많이 땃단다. 속에서 우러나오는게 품격이라면 그리고 참 아름다움 속에서 피어오르는 내적 미가 품격이라면 저 늙은 해녀의 품격과 웃음을 누가 당하랴.”

문제는 그런 품격은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꾸밀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명품족을 지켜보노라면 아는 짓이 도대체 격이 없다. 큰 재산에도 베풀기는커녕, 오로지 내 것, 그리고 더 크고 화려한 것만 찾을 줄 알지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모른다. 자기에게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걸 명품이라고 걸치고 다닌다. 졸부라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옹졸한 부자, 가짜 부자다.”

자신감이란 말이 어울릴 지위에 올라도 부를 쌓아도 명예를 얻어도 기품을 얻을 수 잇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기품은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저자는 7가지 덕목을 ‘나열’한다: 절제, 포용, 배려, 정직, 신의, 배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보면 아는 ‘기품’이란 말을 분석해보면 그런 덕목을 보았을 때 말하는 것이니. 그러나 기품은 그 덕목들로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기품이란 말을 할 때는 그 덕목들의 합 이상의 무엇을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품이란 말을 쓸 이유가 없다.

“한국의 시위는 격렬하다. 길을 막는 건 예사고 유혈충돌, 방화, 투석,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회사 기물을 파괴, 불도 지른다. 구호부터 살벌하다. ‘결사쟁취’. 강한 의지를 보여줘야겠다는 의도이긴 하지만 합리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목숨까지 걸다니…’
외국인 투자자가 발길을 돌리며 한 소리다. 그리곤 끝내 공장문을 닫게 된다.”

“1992년 LA에서 일어난 한국교포 상점 약탈 방화사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왜 한국인 상점만 당했을까? 그 옆에 중국, 일본 상점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만 피해를 입었을까?

한국 교포들은 빈민촌에 슈퍼마켓을 열어 번 돈으로 벤츠를 타고 백인 동네에 산다.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길거리 농구를 하는 이웃 아이들에게 콜라 한병 주는 법이 없다. 유행이 지나 창고에 쌓인 신발 한 켤레 준 적이 없다. 거기가 내 삶의 터전인데 이웃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햇다. 그 난리 통에도 평소 인정을 베풀었던 한인 상점은 아이들이 ‘이 집은 우리 친구야’라며 안전하게 지켜주엇다고 한다.”

저자가 절제, 배려란 덕목을 설명하면서 든 예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은 그런 덕목 들 하나 하나를 몸에 배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하는 말은 위에서 직장의 꼴불견을 나열한 것 이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기품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기품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이책의 한계이다.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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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씽커블 Unsinkable - 역경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
소니아 리코티 지음, 윤경미 옮김 / 빅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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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의 주제는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Unsinkable, '가라앉지 않을'이란 말은 회복탄력성(resilience)란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책의 저자도 한몫하는 미국 성공학파의 주장과 달리 사는 건 힘든 일이다. 언제나자잘한 스트레스로 넘치고 어려움으로 넘친다. 그리고 가끔은 위기를 만나기도 한다.

소위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하며 '생각대로지'라는 카피처럼 세상이 된다고 설교하던 저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번 금융위기로 저자도 피해를 보았다. 남편의 사업이 망해 남편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이혼해야 했고 집도 잃었다. 저자는 죽음까지도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동기이다.

저자만 그때 위기를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잘 견디고 어떤 사람은 무너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보통 회복탄력성이라 한다.

원래 물리학 용어인 회복탄력성이란 말은 공이 바닥을 차고 튀어오르는 것처럼 스트레스나 어려움, 또는 위기를 만나도 빠르게 중심을 잡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여유이다.

같은 어려움을 겪어도 더 쉽게 털어버리니 여유 또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당연히 남보다 삶을 쉽게 헤쳐나가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어느 정도는 타고난다. 성격이 스트레스에 민감한 신경성인 사람은 스트레스에 더 취약하고 회복탄력성이 높지 않다.

그러나 대개 탄력성이란 타고나기 보다는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얼마전에 나온 ‘튀어오르는 공처럼’은 광범위한 심리학 조사에 근거해 회복탄력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이다. 이책이 연구대상으로 한 사람들은 고위직 임원이나 고위관료들이다.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보잘 것없었다. 어린 시절의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극복 과정에서 얻은 능력이 탄력성이다.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낙관적이다. 그책이 대상으로 하는 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본특징이다. 성공학에서 말하는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신감은 근거없는 자만심이 아니며 대책없는 낙천주의가 아니다. 그들의 자신감과 낙관주의는 그들이 현실을 이겨내면서 얻은 전리품이다.

그런 극복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자부심은 언제나 근거가 있다. 그냥 ‘생각대로지’란 주문을 외운다고 자부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기최면은 현실의 무게 앞에선 너무나 연약하다. 현실에 근거가 있는 자부심만이 진짜 자신감이 된다.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현실은 안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안정된 현실에서 그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다. 자신의 현실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고 느낀다면 오기와 뚝심은 남을지 몰라도 자신감이 있을 수 없다. 미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에 그들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자신만만하고 밝은 성격인 사람은 일에 솔선수범하며 책임감을 느끼고 실수를 하더라도 고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은 잘못이나 실수쯤은 웃어넘길 수 있고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으며 현실을 똑바로 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런 사람은 위기가 닥쳐도 극복할 에너지가 높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회복탄력성이 높지 않으니 그냥 주저앉아야 하는가? 이책의 주제이다.

문제는 그런 책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책 중에서 이책만의 가치가 있는가?

사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제목에 ‘우울’이란 말이 들어간 책들과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도 그렇다.

내용은 그렇다치고 그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깊게 다루어져 있는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이책을 보고 느낀 것은 급하게 썼다는 것이다. 저자의 전공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각대로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되는 상황을 저자 스스로 겪게 되었고 그 상황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책을 썼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 스스로 탐색하는 연구노트라고 할까?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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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의 발견 - 내 안에 잠재된 기질.성격.재능에 관한 비밀
제롬 케이건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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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농부였다면 당신은 당당하게 서서 죽기보다는 무릎을 꿇고라도 살아남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농경은 엘리트증을 만들어냈고 그들의 권력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렵채집인들은 멀리 떠날 수 있었지만 토지는 버리고 떠나기에는 너무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농부들은 권위에 굴복해야 했다. 옛 스타일의 독립적인 마인드, 즉 평등주의자들인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잘 통했던 성격들('결국 사람은 사람이다')은 씨가 말랐다.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사람들 역시 지배 엘리트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적응도에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강력한 국가가 있을 때 공격적인 개인이 갖는 이익은 더 작아지고 법과 질서는 자기 방어를 위한 전투적 태도를 덜 필요하게 만들었다. 북적이는 환경 그 자체만으로도 과거에 선호되었던 몇몇 성격 형질들이 냉대받게 되었을 것이다. 낯선 사람과 만날 일이 자주 있는 사회에서는 높은 공격성에 대한 선호가 떨어질 것이다. 너무 자주 사우면 반드시 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격성을 유발한 대립유전자들의 빈도가 변했을 것이다. 강하고 오래 존속한 국가들에서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이는 곧 개체군이 전체적으로 더 순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전자를 알고 있다. 그것은 DRD4(도파민 수용체 D4) 유전자의 7R(7-repeat) 대립유전자다. 이 대립유전자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와 관련이 있다.

세계 곳곳에서 차이는 있지만 상당한 수준의 다형성이 나타나는데 동아시아에서만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경우 7R 대립유전자들 자체는 매우 드물지만 7R 대립유전자에서 파생된 대입유전자들이 상당히 흔하다. 중국에서는 문화적 패턴 때문에 7R 대립유전자들을 갖는 사람들이 선택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그런 돌은 뽑혀나가 멀리 내던져졌을 것이다.

농경으로 생긴 강력한 정부들이 사람들을 더 '길들였다면', 농경의 경험이 가볍거나 없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오랫동안 농경문화를 경험한 집단의 구성원들보다 평균적으로 덜 복종적일 것이다." (그레고리 코크란, 헨리 하펜딩)

코카서스계와 몽골리안계의 유전자는 1/4이 차이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인종간의 기질을 다르게 만들고 문화를 다르게 만들었다고 가정해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실험에서 두 인종의 차이를 확인한다.

저자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아시아인과 코카서스인의 기질 편향 간의 차이를 암시하는 행동은 생후 몇 주 이내에 일찌감치 나타난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아시아계 신생아들은 같은 지역에 사는 코카서스계 신생아들에 비해 조용하고 얼굴에 이불 등이 덮이더라도 덜 바둥거리며 울더라도 금방 그쳤다." 그러나 "코카서스계 아기들은 중국인 아기보다 더 불안정하고 더 쉽게 흥분하는 것으로 보였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를 유전자상\의 차이로 해석한다. 저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기질에서 아시아계와 코카서스계는 체계적인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그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시아계와 코카서스계는 촉진자 부위에 위치한 유전자의 25%^가 다르다. 이런 대입유전자 가운데 하나가 뉴런 사이의 간극인 시냅스에서 세로토닌을 흡수하는 분자의 기초가 되는 구조적 유전자의 발현을 통제한다. 아시아계는 짧은 유전자라는 것, 즉 구조적 유전자가 발현되는 수위를 낮추는 대립유전자를 지닐 확률이 다른 인종보다 더 높다. 그 결과 세로토닌 운반자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세로토닌이 약간 더 오래 시냅스에 남는다." 그 결과 "시냅스에서 세로토닌이 과잉이 되는 동시에 인근 뉴런에 있는 세로토닌 수용체의 수가 줄어든다. 세로토닌은 웃고 미소 짓고 목소리를 내는 것 등 쾌감의 행동적 신호에 기여한다.

짧은 대립유전자의 존재는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짧은 대립유전자를 가진 원숭이에게 높은 지위의 수컷 원숭이 사진을 보여주면 경계심이 커진다. 인간 역시 화난 얼굴을 보면 더 크게 반응한다.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이 가하는 잠재적 위협의 신호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런 개인은 복종적이거나 집단 규범에 순응하는 편향을 갖는다."

이런 유전적 편향은 위에서 길게 인용한 역사적 변수(오랜 농경과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제국의 역사)에 의해 자연선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 자연선택의 결과는 위의 인용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인간을 길들인 결과로 볼 수 있고 그러한 결과는 '가축화'의 과정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 이책의 저자 역시 비슷하게 본다.

가축화된 동물은 야생의 사촌보다 유순하다. 그런 기질은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을 생산하는 두뇌 회로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실험에서 중국계 아기들은 코카서스계 아기들보다 불안을 덜 느꼈고 코카서스계보다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가축화된 동물과의 유사성은 외형적 차이에도 나타난다고 저자는 본다. 가축화된 동물은 야생으로 사는 친척보다 "겁을 덜 내고 덜 공격적이며 코 길이가 더 짧다. 평균적인 아시아인이 평균적인 코카서스인이나 아프리카인보다 더 평평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생물학적 시각에서 아시아인들이 더 길들여진 편향을 갖고 있다는 즉 타인과 더 온화한 관계를 맺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과 사회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아시아인들의 핵심가치가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론 집단 내의 차이는 집단 간의 차이보다 크다. 그러나 집단 평균의 차이가 개인간 차이보다 비교적 작더라도 그 차이는 기질적 편향의 체계적 차이로 나타나고 그러한 차이는 문화적 차이를 낳기에 충분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유럽의 문화가 개인주의적이고 동아시아의 문화가 집단주의적인 차이는 그런 기질적 편향으로 해석으로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D4 유전자의 차이는 세로토닌 뿐 아니라 도파민 수용체에도 영향을 주어 충동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4차례 반복되는 짧은 형태의 D4를 갖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7차례 반복되는 긴 변종을 보유한다. 긴 D4는 도파민에 덜 민감하고 결과적으로 뇌의 도파민 생산량에 장애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 뇌 속에 존재하는 도파민이 보통의 경우보다 좀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도파민 파티를 시작하려면 일반인보다 더 많은 화학물질을 긁어모아야 하고 따라서 이들은 여분의 자극적 활동을 요구한다.” 문제는 도파민에 항상 굶주린 뇌는 도파민 즉 자극의 과잉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럭저럭 만족하는 일을 금방 지루해한다. 다시 말해 방황하는 이들 영혼은 더 많은 도파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디든 자극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과속을 즐기는 운전자가 될 수도 있다. 안전을 위한 지침을 무시하거나 주먹을 치켜 올린 채 링안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돼야 ‘평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도파민은 순전히 기분전환용은 아니다. 도파민이 지나치면 흥분이 쉽사리 공포와 불안으로 바뀐다. 끊는 충동을 안겨주는 상황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공포만 안겨줄 가능성이 높다.” (닉 태슬러) (물론 코카서스계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인용문의 저자는1/4 정도로 추정한다)

D4 유전자의 차이는 문화의 온도를 결정했다고 이책의 저자는 생각한다. 그 차이의 좋은 예로 저자는 불교의 열반적정(涅槃寂靜)과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한다. 저자는 유럽의 철학자 가운데 그런 수동적이고 고요한 초연함을 찬미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욕망하거나 꾸짖는 일 없이 삶을 고요히 받아들이도록 권장하는 철학과 귀중한 목표를 얻기 위해 모든 장애를 적극적으로 넘어가기를 요구하는 철학 사이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온 학자들은 대개 문화와 생태 환경의 역할만 강조해 왔다.” 그러나 “나는 두 그룹의 게놈이 기질적 편향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런 각 이데올로기가 가진 차별적 매력에 작지만 진정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신체의 고도 흥분 상태 및 불안, 죄책감, 새로운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되는 신경화학을 지닌 사람은 더 고요하고 욕망에서 자유롭고 타인으로부터 초연해지라는 철학에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일 살아가는 평소의 감정 톤이 초연한 상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유럽인은 열반이라는 아시아적 관점을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볼 것이다.

이와 달리 전형적으로 낮은 수준의 흥분을 특징으로 하는 의식의 소윺자들에게는 만성적 불안, 죄책감, 좌절된 소망 등을 인간 조건의 결정 요인으로 보는 철학이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일 것이다. 이들은 강력하고 불쾌한 감정 때문에 방홰받는 삶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할지 모른다.

마약을 쓰는 중국인들은 아편을 선호하는데 그것은 기분을 이완시킨다. 이와 달리 코카서스계 사람들이 선호하는 마약은 코카인이나 암페타민인데 그것은 흥분을 증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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