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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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지만, 차마 펼치지 못하는 그런 책들이 있다. 너무 읽고 싶지만, 한 편으로는 책이 전해줄 먹먹함 때문에 망설여지는 그런 책이 말이다. 권비영 작가의 신작 『몽화』 역시 그런 책 가운데 한 권이다. 읽고 싶은 마음에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만, 며칠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책. 몇 차례 책을 손에 쥐었다 내려놓길 반복하던 망설임 끝에 결국 책장을 펼쳐 들었다. 역시, 아프다. 먹먹하다. 괜스레 죄송스럽기도 하고, 분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이 책 『몽화』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1940, 세 소녀 이야기」란 제목이. 그러니, 이 책은 일제치하의 깊어져가던 암울함이 가득하다. 그 어둡던 시간 속에서 조심스레 꿈을 품어보고 간직하던 세 소녀의 모습을 소설은 보여준다. 그네들의 우정과 짓밟혀 깨어진 소녀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 각기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아래 신음하는 모습, 그 애잔한 젊음을 보여준다.

 

옥죄어 오는 운명의 마수 앞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녀들의 연약한 몸짓에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창작된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음을 알기에. 어쩌면 소설 속의 먹먹함과 눈물은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겠기에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소설은 일제치하 우리의 아픔을 망라하여 보여준다. 영실의 아버지와 칠복이를 통해서는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노예처럼 일해야만 했던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노동현장은 ‘빠가야로 조센징’이라 불리던 고단한 삶이며, 통곡의 세월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무덤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존재, 노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신세, 그 신음과 아픔을 소설은 보여준다.

 

뿐 인가. 세 친구 가운데 은화를 통해서는 성노예로 전락해 버린 슬픈 꽃송이들의 눈물, 그 한 맺힌 현장을 보여준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 아픔을 말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모른 척 하고, 덮어 버리고 싶어 하는 아픔을 말이다. 이렇게 성노예로 끌려간 우리네 할머니들의 아픔과 눈물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다. 자신들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전쟁의 광기 속에 내던져진 여인들. 전쟁에 미친 군인들의 군홧발에 몸과 영혼이 찢겨간 여인들. 그 미친 바람 앞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신음한 여인들의 아픔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작가는 또한 이런 아픔, 그 통곡의 세월, 신음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무풍지대를 살아가며 특권을 누린 자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바로 세 친구 가운데 정인과 그 가족이 그런 부류다. 일제의 앞잡이로서 동포의 희생과 눈물, 한숨을 먹고 오히려 자신들의 살을 찌운 이들. 남들과는 달리 부모의 인형이 되어 살아감을 힘겨워하는 정인의 배부른 고민의 모습. 해방 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도 여전히 무풍지대를 살아가는 그 아이러니함을 작가는 정인 가족의 모습을 통해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정인과 영실, 은화의 우정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작가는 친일의 모습을 모두 욕하지는 않는다. 정인의 부모처럼 친일을 통해 자신들의 성, 영지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영실의 이모 을순처럼 생존의 몸부림으로 일본 상인에게 빌붙어 살아간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그런 모습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힘겨운 삶의 밑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 그 고단함과 눈물은 우리에게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의 인물들은 영웅적 모습보다는 다소 밋밋한 모습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통곡의 시간, 힘겨운 세월을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며 통과한 인생이기에 이미 영웅의 모습이 아닐까? 게다가 그 아픔과 눈물은 결코 밋밋할 수 없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아프다. 먹먹하다. 그리고 그 먹먹함은 오늘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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