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라디오
이토 세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어느덧 5년이 가까워지는 후쿠시마 대지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맞게 된 수많은 이들. 이들의 죽음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 그들은 그렇다면 이 세상과는 영원히 단절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이 이 소설 안에 담겨 있다.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다룬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내용은 빠뜨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죽은 자가 상상력으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을 한다는 설정이 참신하다. DJ 아크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만 그 다음날 후쿠시마 대지진이 일어남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삼나무 꼭대기에 걸리게 된다. 삼나무 꼭대기에서 눈을 뜬 그는 그 때부터 상상력으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을 전송하게 된다. 물론, 이것 역시 상상력으로.

 

그런데 이 방송을 수많은 사람들이 듣게 된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죽은 자들이다. 이 방송은 죽은 자들만이 들을 수 있다. 그렇다. DJ 아크 역시 죽은 자다. 그는 이 방송을 통해, 갑자기 영문 모를 죽음에 처한 수많은 혼백들을 위로한다. 죽은 자와 죽은 자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 아니라, 그는 이 방송을 통해,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연락을 해 주길 원한다. 하지만, 아내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아크는 아내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연락이 없음이 곧 기쁜 소식임을 깨닫게 된다. 그건 바로 아내는 살아있다는 증거니 말이다.

 

한편 작가 S씨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길 원한다. 그리고 실제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자들도 발견한다. 과연 S는 죽은 자와의 소통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갑자기 당하는 죽음,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질문한다. 혹여 그 뒤편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무나도 잔인한 신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DJ 아크를 통해, 그 신에게 분노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저주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그놈을 저주해 주고 싶습니다. 상대는 신인가요? 신이라고 해도 저는 네 멋대로 굴지 마, 하고 목을 잡고 코나 입에서 점액이 나올 정도로 흔들어 줄 겁니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고 울면서 비명을 지르도록 신을 높이 쳐들어 누구의 눈에서도 존경심이 사라질 정도로 손발을 파닥거리는 그놈을 숨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 괴롭히며 무릎으로 배를 차면서 산꼭대기로 올라갈 겁니다. 그곳에서 마을을 보여주며 너한테 무슨 권한이 있어서 이런 짓을 했냐고 따질 겁니다.”(106-7쪽)

 

그렇다. 우리는 이처럼 죽음 앞에 분노할 수 있다. 누가 그 분노가 잘못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섣불리 신의 뜻을 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무책임한 접근은 지양해야만 한다. 또는 그 안에 어떤 교육적 의도가 있다는 생각도 누가 이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엄청난 불행에 대한 우리 모두의 공감이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슬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노력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우린 직접 그 슬픔과 재앙을 겪은 자들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리 귀를 기울인다 해도 물에 빠져서 가슴을 쥐어뜯다 바닷물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사람의 괴로움은 절대로, 절대로 살아 있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고집이고, 설령 뭔가가 들린다고 해도 살아갈 희망을 잃은 순간의 진짜 두려운, 슬픔을 우린 절대로 알 수 없어요.”(83쪽)

 

물론, 이 말은 죽은 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에 대한 반론으로 자원봉사자 나오 군이 한 말이다. 하지만, 이 안에 우린 어떤 노력을 할지라도 당사자들의 슬픔, 두려움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죽음은 온전히 직접 체험한 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말하고 있다. 실제 이 소설에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설정임을 잊어선 안 된다. 비록 우리가 죽은 자들의 소리, 그 두려움, 그 절박함, 그 애절함, 그 슬픔을 들을 수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그 비명, 그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함을 작가는 말한다. 상상을 동원하여.

 

또한 작가는 이런 귀 기울임과 함께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그 슬픔을 잊음을 꾸짖는다. 우린 어떤가? 작년 봄, 전국을 뒤흔들었던 슬픔, 세월호 사건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미 그 슬픔은 우리에서 온전히 씻겨 나간 것은 아닌가? 여전히 그 슬픔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유가족들의 슬픔은 외면한 채 말이다. 특히, 이런 망각에 매스컴이 앞장서고 있음을 작가는 고발한다.

 

“텔레비전에서도 라디오에서도 신문에서도 거리에서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멀리하며 그걸 맹렬한 속도로 잊으려 하고 있고, 그 방법이 사회를 전진시키는 유일한 길처럼 되어 있잖아.”(138쪽)

 

물론, 우린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그 슬픔의 사건을 잊어선 안 된다. 오히려 그 슬픔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소설의 줄거리 안에서 DJ 아크는 점차 자신의 에피소드와 타인들의 에피소드 간의 간극이 뭉개지기 시작한다. 아크 자신의 기억이 뭉개지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작가가 의도한 구원의 한 줄기로 이해했다. 타인의 아픈 기억이 나의 것이 되는 것. 이것이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슬픔에서 건져 올릴 구원의 방법이기도 하다. 망각이 아닌, 오히려 그들의 슬픔의 사건이 내 것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소통이 아닐까?

 

죽은 자와 죽은 자의 소통, 산자와 죽은 자의 소통, 남겨진 자와 산 자의 소통은 결국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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