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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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은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로 큰 명성을 얻은 레마르크의 다섯 번째 소설이 『개선문』이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둔 파리의 개선문 근처 몽마르뜨의 값싼 호텔에서 살아가는 망명자들의 애환 어린 삶을 그린 소설이다.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겨 버린 자들, 이념에 의해 이국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자들, 어쩌면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 또는 과거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 등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라비크는 스페인사람으로 전쟁으로 인해 망명하여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살아가는 외과 의사이다. 그는 실력 있는 외과 의사이지만, 신분보장이 되지 않기에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의사가 아닌, 법 테두리 밖에서 프랑스 의사들의 수술을 대신 해주며 수고비를 받으며 살아간다. 미래를 향한 설계는 그에게 없다.

 

이런 라비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민자들의 삶을 그려내는 개선문을 읽으며, 한 가지 단어가 계속하여 생각난다. 바로 “망각”이란 단어다. 이 “망각”이란 단어로 소설 『개선문』을 바라본다.

 

라비크 뿐 아니라, 값싼 호텔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모두 망각된 존재들이다. 이미 그들은 고국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잊혀진 존재들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 땅에는 무대의 주변부로 내몰려 망각된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주변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의 통찰력이 아름답다. 오늘 우리는 너도나도 무대의 중앙만을 동경할 뿐,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주변인들에게는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지.

 

게다가 이들 망각된 존재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망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그 끔찍한 과거들, 그것을 잊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라비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라비크는 말한다. “지나간 일은 모두가 없는 거야.” 그래야 살 수 있다. 이 망각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망각이다.

 

라비크에게는 과거뿐 아니라, 사랑마저 망각된 단어다. 언제든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하는 망명자의 신세, 뜨내기 신세, 그렇기에 집도 없고 가족도 없어야 한다. 그러니 여성은 성의 대상일 뿐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어쩜, 의도적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잊고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운명의 사랑, 미친 사랑은 시작된다. 바로 조앙 마두라는 여인을 만난 것. 이 둘의 사랑은 어떤 결말을 낳게 될까?

 

사람이란 사랑이 없인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의도적으로 사랑을 밀어낸다 할지라도 결국 찾아오게 되는 사랑. 비록 그 결말이 아름답진 않지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들 아닐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의 사랑에 모든 열정을 다 쏟을 수 있음이 행복 아닐까 여겨진다.

 

라비크에게 있어 또 하나의 망각된 단어는 ‘행복’이다. 그의 삶은 대단히 염세적인 삶일 뿐이다. 하루하루는 그저 상처 난 일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상처 난 일상 가운데서 행복을 그려내기도 한다. 라비크의 친구 모로소포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삶의 사실이란 단순하고 평범한 거야. 다만 우리 상상력만이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지. 사실은 바지랑대일지라도 상상으로 꿈의 깃대가 될 수도 있거든.”

 

그렇다. 비록 상처투성이 일상일지라도, 그래서 바지랑대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상상력이 가미될 때, 삶은 꿈의 깃대를 세우기도 한다. 행복의 깃대를 말이다. 온통 찢겨지고 곪아터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 상상력이 가미될 때, 행복의 깃대는 세워진다.

 

이 상상력을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 해석해도 될까? 물론, 어떤 이들에게 이 상상력은 과거의 좋은 시절에 대한 회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꿈의 깃대는 현실 도피적 공간일 수 있겠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될 때, 상처투성이 일상을 꿈의 깃대로 세워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비록 눈물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죽어라고 노력해도 결코 일어설 수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에 상상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종국에는 그 상상이 꿈의 깃대를 현실의 삶 속에 세울 수 있다면 말이다.

 

모든 것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라비크라 할지라도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그의 복수의 대상인 하케란 자다. 모든 것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라비크조차도 결코 망각할 수 없으리만치 끔찍한 상처를 안겨준 하케. 라비크는 어쩌면 그를 향한 막연한 복수를 꿈꾸기에 살아가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 그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다. 하케를 파리에서 보게 된 것. 처음엔 그저 환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환상이었을까? 그리고 그를 향한 라비크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까? 또한 성공 뒤엔 무엇이 라비크의 인생 가운데 자리하게 될까?

 

결국 복수라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런 모든 인생의 파노라마 가운데도 여전히 개선문은 서 있다.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일까? 철저히 꿈과 희망을 망각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망명자들의 삶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선문』, 역시 고전의 힘을 느끼게 한다.

 

[ 문예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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