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본서는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세 사람,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에 대한 글이다. 그들의 어린 시절, 가족, 그리고 성문제, 소명과 인격, 가르침, 죽음,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에 대한 것들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조금 산만한 느낌이 없진 않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들까지 열거함으로 오히려 핵심을 흐리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본서는 본인에게 특별히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끌게 하였다. 솔직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함이 사실이다. 막연하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에 소크라테스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당시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는 정도.

 

그런 나에게 본서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에 붙들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소크라테스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산파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산파’로 살아감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확신했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영혼의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다름 아닌 무지로 봤다. 그래서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알아야 하냐? 신에 대해서?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봤던 것. 이 일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평생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이 질문들을 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함으로 그들이 내면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성적 지식만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 지식과 함께, 이성을 넘어서는 지식, 즉 믿음, 직관 등을 붙잡았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시시때때로 신과의 접신(?)을 행하였으며, 내면의 목소리, 다이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았다.

 

또한 자신이 붙잡았던 인간의 삶, 즉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선을 위한 삶, 정의를 붙잡는 삶을 답으로 제시하였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비록 잘못된 판결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도망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붙잡았던 정의를 자신이 뒤집는 것이 되기에, 자신의 말이 행동에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모습이 참 멋지게 다가왔다. 소크라테스뿐이겠는가?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신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사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책의 뒷부분의 몇 단원만 읽어도 될 듯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 사람이 추구하였던 내면의 자유는 결국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무지, 예수는 원죄(사실 저자는 원죄라고 말하지만, 원죄라는 개념은 후기의 개념이고 그냥 죄라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 붓다는 갈애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고, 자유함을 누릴 때, 그 자유를 가지고 옳고 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또한 해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진리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가? 저자는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정의이며, 예수에게는 사랑, 붓다에게는 자비라고 봤다. 사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노예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인생에 있어 붙들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아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 믿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적 삶이다.

 

솔직히, 붓다가 갈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욕과 좌선을 붙잡고, 이것을 통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갈애,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너무 인간적이지 못해 공감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믿었던 그것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기에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하는 것보다 그 앎을 실천에 옮기는 실천적 삶이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음 글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중략)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p.371)

 

그렇다. 앎도 중요하지만, 실천적 삶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공부함이 실천적 삶으로 이어지게 되길 소망한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가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묘사할 때는 흐트러짐 하나 없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초인 같다. 반대로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신이자 인간인 신비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복음서에서 그를 묘사할 때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슬픔, 기쁨, 낙심, 격정, 연민,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간 말이다. 종종 눈물도 보인다.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120

소크라테스는 이성에 기반을 두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인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성주의자는 아니었다.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독단주의는 아니었다. pp.246-7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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